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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누가 과연 높은 자인가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2. 12.

 

 

누가 과연 높은 자인가

 

(김성수 목사)

 

 

(창 47:7~10,29-31) “7 요셉은 자기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와서, 바로를 만나게 하였다.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고 나니, 8 바로가 야곱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9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10 야곱이 다시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물러났다. 29 이스라엘은 죽을 날을 앞두고,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놓고 일렀다. "네가 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할 생각이 있으면, 너의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고, 네가 인애와 성심으로 나의 뜻을 받들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여라.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아라. 30 내가 눈을 감고,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나를 이집트에서 옮겨서, 조상들께서 누우신 그 곳에 나를 묻어다오." 요셉이 대답하였다.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31 야곱이 다짐하였다. "그러면 이제 나에게 맹세하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맡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저는 지난 한 주간 참 좋은 책을 만났습니다. 현재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계신 데이빗 웰스 교수님이 쓴 ‘No place for the truth'라는 책입니다. 그분은 자타가 공인하는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대변자이십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그 분을 존경하기로 했습니다. 그 책이 얼마나 흥미가 있었으면 어제 토요일에 있었던 콘서트 준비를 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그런 상태에서 틈틈이 그 책을 모두 읽었습니다. 마치 그 분의 책은 우리 서머나 교회의 지향점이 옳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가고 있다는 것을 변증해 주고 확인해 주는 그런 책처럼 보였습니다. 데이빗 웰스 교수는 오늘날의 교회를 신학이 사라지고 교리가 실종된, 새가 파먹어 버린 우렁이껍질 같은 것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진리라는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질만 남은 신기루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신학이 실종이 되고 교리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자 교회 중심의 신앙은 부흥집회 운동에 밀려났고, 합리적 믿음은 간증으로 대체되었고, 건강하고 진지한 신학적 고백은 경험을 앞세우는 논리 앞에 처절하게 밀려났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기독교는 진리를 팔아 기복과 신비와 프로그램을 사 버린 멍청이들의 집단이 되어 버렸다. 결국 현대 교회는 불행하게도 현대 문화의 감성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맞바꾼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회중들의 감성과 선호도를 중시하게 되면서 신학과 교리를 버렸고 성경조차 버렸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경은 그저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을 해 버렸고,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이 곧 선이라는, 다른 말로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이상한 논리가 교회의 교리를 잠식하여, 교회가 진리를 선포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커지고 팽창하고 부하게 되는 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되어 하나님도 외면하는 껍데기 같은 교회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데이빗 웰스 교수는 오늘날 교회라는 집단이 회중의 감성자극에 천착하여 그리스도의 진리를 쓰레기처럼 내 팽개쳐 버렸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그러한 류의 교회들을 ‘대중의 선호도에 따라 이리저리 춤을 추는 광대 집단’이라 합니다. 그 분은 교회가 그렇게 회중이 듣기 좋은 말을 해야 하고, 회중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려 하다 보니 교회 강단의 언어도 모두다 심리학적 언어로 교체가 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위로해 주는 ‘웃음치료, 내적치유’등의 심리학적 기법을 목회의 기술로 당당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알량한 심리학적 ‘목회의 기술’로는 회중들을 영혼의 안식에 도달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회적이며 일시적인 진통제와 같은 위로와 격려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예배당에서 밀어내고야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배당에서 진리를 말하지 않는데도 대중들이 설교자의 화술에 감동을 하여 눈물을 흘리며, ‘나 은혜 받았다’고 하는 고백을 서슴지 않고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하지 않고 설교자의 화술과 기술에 감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교회에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오히려 생경하여 거부감이 들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대중들의 인기에 따라 설교자들의 설교가 정해지는 그런 현상들이 교회를 더욱 더 절망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을 했습니다. 데이빗 웰스 교수는 그렇게 복음과 진리에 의해서가 아닌 심리학적 기술에 의한 위로가 선포되어 질 때 교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세 가지로 지적을 했습니다.

 

첫째로, 교회 강단에서 올바른 신학과 교리에 근거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사라지고 심리학적 기교에 의한 위로의 말이 선포가 되는 것으로 하여, 복음의 정체성의 신경이 절단이 되는 현상을 가져 오게 된다고 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되는 모든 중추 신경계를 날카로운 메스로 다 잘라버리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뿐 더러 어떤 게 맞는 것이고 어떤 게 틀린 것인지 조차 분간을 못하게 되어 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강단에서 회중들의 비위를 맞추는 세상적인 위로와 격려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하여 뿌려지게 되면, 회중들은 생각하는 의욕과 능력을 잃게 된다고 합니다. 그냥 자신의 감정에 이끌리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경이 성경으로 설교되어지지 않는 교회는 신학이, 즉 말씀이 감당해야 할 일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홀로 살아 운동력이 있어 듣는 이들의 영혼과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는 능력이 있는 것인데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지지 않고 심리학적 기술과 기교가 강단을 점령하게 되면, 말씀이 감당할 일을 엉뚱한 것이 대신하게 되어 말씀의 능력을 오히려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그러한 지적과 함께 개혁주의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일갈을 합니다. ‘말씀이 일을 하게 하라’ ‘너희들의 잔꾀와 돈과 조직과 프로그램으로 사람들 끌어 모아 놓고 성령의 역사라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무나 정확한 지적이지 않습니까? 제가 고든-콘웰 신학교에 다니는 제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참 통쾌한 소리를 들었는데 데이빗 웰스 교수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진리는 외면한 채 조직의 경영과 운영에 탁월한 재주를 보이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일련의 설교자들을 ‘고등 사기꾼’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현대인들의 게으름과 욕망을 잘 간파해서 ‘평안하다, 평안하다’하며 그들의 진짜 환부를 심상히 만져주고는 그게 마치 복의 실체인양 사람들의 목줄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고쳐져야 할 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스스로 우주의 중심이 되어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 살고자 하는 교만과 자기주장인데 설교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인간들의 교만과 자기주장을 부추겨 주고 있는 데 그게 어떻게 사기꾼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심리적, 경제적, 성적, 인종적 욕구를 성취하는 수단이 아닌 것입니다. 말씀은 오히려 우리 안에 여전히 오염의 형태로 남아있는 옛사람의 잔재를 도려내는 고통으로, 그러나 거룩한 고통으로 우리에게 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그 말씀이 홀로 살아서 그 말씀의 수혜자에게 작용하여 그의 환부를 도려내고 새 살을 돋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 말씀이 올바른 진의로 회중들에게 전달되어지기 위해서는 건전하고 건강한 신학과 교리라는 그릇에 잘 담겨져서 전달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담을 그릇인 교리와 신학이 교회에서 실종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1991년에 한국의 총신대학에서 전국에 있는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를 표본 조사해서 통계를 내었더니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말씀 그대로 전하는 설교자가 전체의 4%였답니다. 나머지 96%는 성경 말씀만을 읽어 놓고 전부 자기 이야기하기에 바쁘더라는 것이지요. 설교자들이 신학을 잃어버리고 교리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회중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심지어 한국 장로교 합동 측 어느 노회의 목사고시를 담당했던 선배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목사고시를 보러온 10명의 후보자 중에 개혁주의 기본 교리인 TULIP에 대해서 쓰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 심각한 거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답란에다가 ‘네덜란드의 국화’라고 썼더랍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배당에서 실종된 신학과 교리를 되찾아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진리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합니다. 데이빗 웰스 교수의 말처럼 돈과 조직과 프로그램에 의해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그러한 것을 내세워 사람들을 모으는 그런 친목계와 같은 교회는 새가 파먹은 우렁이 껍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인들이 원하는 목사는 말씀을 지루하게 연구하고 파서 가르치는 사람보다는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교회를 잘 운영하고 매끄럽게 돌릴 수 있는 그런 훌륭한 경영자 자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야곱의 삶을 보세요. 야곱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묻고 순종하는 자가 되는 데에 어떤 것이 기여를 할 수 있었나요? 누군가의 설득? 심리학적, 철학적 교육? 그가 모은 재산? 아니요.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낸 것은 하나님의 언약,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수시로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인생 전체를 이끌고 간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을 이끌어가게 될 때, 야곱의 소원이 야곱의 뜻대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은 이 땅에서 점점 나그네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야망과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방법이요 도구로 동원하는 이들이 아니라 야곱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끌림을 받으며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경험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늘날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자기의 욕망을 성취하고, 이 세상의 힘과 가치로 위로를 받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에 의해 난자를 당하며 이 땅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드러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자리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교회에 와서 어줍지 않은 세상 복에 대한 기대와 문제의 해결, 다 잘 될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위로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앞에서 지긋지긋한 자기의 죄를 폭로당하고,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당하면서, 이 불가능함을 모두 극복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몸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소망의 언약에 위로를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로는 아픔과 고통과 자괴와 면목 없음을 동반하는 위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점을 심도 있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왜 성경에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라 표기가 되었는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 어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야곱으로 대표되는 하나님 백성들의 열심이나 공로나 자격이나 조건, 혹은 그들이 축적한 이 세상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교훈이 담긴 어구라 했지요? 야곱이 나그네 인생길 130년에 아주 험악한 삶을 살며 평생을 모은 재산이 애굽의 풍요 앞에서 마치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되고, 아무런 공로나 자격도 없이, 그 풍요를 이룩해 놓은, 무죄한 자로 수난을 받은 예수님의 상징, 요셉의 은혜로 그곳에 거저 들어가게 되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구속사 속의 예수와 면목 없는 그의 백성들을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야곱의 애굽 입성 사건을 구속사적 측면에서, 다른 말로 영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가시적 현실 속으로 내려와서 그러한 구원의 영적인 성취가 이 가시적인 역사 속에서는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는지에 관해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 해서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본무가 과연 무엇인지 확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야곱의 식솔들 70명이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출애굽기 1장 5절에도 70명이고 신명기 10장 22절에도 야곱의 식구는 70명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 14절에 보면 애굽으로 들어간 야곱과 온 친족이 일흔 다섯 명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들어서 혹자들이 성경 무오 설에 흠집을 내곤 하는데, 그건 야곱의 아내와 네 명의 며느리를 포함하고 안 하고의 차이이지 절대 성경이 오류가 있어서 그런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실 몇 명이 애굽으로 들어갔느냐에 관한 그런 숫자놀이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진짜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야곱과 그의 식솔들이 애굽으로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에서 시작이 됩니다. 여러분이 잘 구별을 하셔야 할 것이,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과 상황들을 접하게 될 때 항상 하늘의 현실과 땅의 현실을 잘 구분하여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공부하신 것처럼 지금 야곱과 그의 식솔들이 애굽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의 품으로 안기는 것은 분명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완성이 된 하늘의 풍요 속으로 값없이 들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영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현실로 돌아와 바라볼 때에는 그 애굽의 현실은 성도가 탈출해야할 이 세상 힘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은 후자의 관점에서 야곱과 그의 식솔들의 애굽 행을 조명해 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항상 그러한 이중적 상징을 잘 구별하여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한 사건을 두고도 하늘의 영적 현실과 이 땅의 세상 적 현실의 두 가지 관점으로 그 사건을 바라 볼 수 있는 실력을 키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에피소드는 우리가 다른 본문을 공부하면서 이미 여러 차례 찾아서 읽었던 야곱의 바로 왕 축복 사건입니다. 도대체 양식을 꾸어서 생활을 해야 하는 거지꼴의 야곱이 무슨 배짱으로 애굽 왕 바로에게 축복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 비밀을 한 번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축복을 비는 자는 축복을 받는 자보다 높은 자라는 것이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히 7:7) “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그렇지요? 그런데 지금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지금 누구를 높은 자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다고 해서 바로의 재산이 늘어나겠습니까? 아니면 바로의 수명이 연장이 되겠습니까? 바로는 이미 모든 걸 가진, 이 세상 풍요의 절정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성경이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지금 성경은 야곱을 바로보다 높은 자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그런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행 26:29) 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버니게에게 한 말입니다. 사슬에 묶여 재판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처지에 있는 바울이 자신을 심문하고 있는 왕과 총독에게 ‘너희들이 나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축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볼 때 누가 높다는 것입니까? 왕이나 총독보다 자신이 가진 권세와 풍요가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이며 처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언약이 그를 이끌고 가는데 그의 세상 적 현실은 거지요, 갇힌 자요,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음으로 자신들의 탁월한 영적현실을 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 권세의 최고 상징인 왕들에게 축복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풍요를 믿음으로 보는 이들에게는 이 세상의 힘과 권세와 풍요가 배설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그 배설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왕들이 복을 받아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증거 구절이 빌립보서에 나옵니다.

 

(빌 3:7-9)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무엇이 진정한 가치인가를 알게 된 사람들은 이 세상의 힘과 권세를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왕의 권세와 그들이 갖고 있는 이 땅의 풍요 앞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하늘의 풍요를 자랑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오히려 나그네의 모습으로 세상의 풍요를 측은히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이중적이며 역설적인 실체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도라는 이들이 이 세상 힘의 유무에 일희일비 하며 그러한 세상의 힘을 약속해 주는 설교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진정한 영적 위로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오히려 그러한 이 세상의 풍요와 위로를 약속하는 자들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허황된 약속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으로 기뻐하겠다’고 하는 용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점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지요? 이 세상 모든 나라들이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에 유일하게 부족함 없는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애굽 총리의 아버지가 애굽에 들어가서 유언을 하기를 ‘절대 여기에서 자신을 장사지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환도 뼈 사이에 손을 넣어 맹세를 시킵니다. 야곱이 그 애굽의 풍요를 사활을 걸고 탈출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147년 험악한 나그네 인생길을 통과하고 난 후에야 자신이 그토록 좇아 헤매던 이 세상의 풍요가 배설물 같은 것임을 확실하게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언으로 그 애굽에서 빠져나가게 해 달라는 말을 남긴 것입니다. 야곱이 그의 인생 경험과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에게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자기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애굽의 풍요가 자신이 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빨리 벗어나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아들 요셉에게 자기가 죽으면 반드시 열조의 무덤인 막벨라 굴, 즉 하나님의 약속의 땅, 그리고 선조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함을 의미하는 그 곳에 장사지내라고 신신당부를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그 풍요의 절정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인 야곱은 어떻게 하면 그 곳에서 나와 선조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애굽의 풍요는 이 세상 풍요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절정의 풍요가 탈출하고 싶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을 축복받은 자의 삶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애굽의 총리로 이 세상 모든 풍요의 절정을 다 누리고 있었던 요셉은 어떠했습니까?

 

(창 50:24-25) “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역시 자기의 해골을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메고 올라가라고 시킵니다. 그 요셉의 해골을 누가 가나안으로 가지고 갑니까? 모세가 가지고 갑니다.

 

(출 13:19) “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이렇게 성도는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면서 결국에는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 모든 힘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에 동참하기만을 간절히 원하는 자로 성숙되어지고 완성되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의 힘과 권세를 밟고 올라서서 ‘너희도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축복을 하는, 진짜 권세를 가진 자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도 이 세상의 돈과 권력과 인기 앞에서 당당하게 여러분이 가지신 하늘의 복을 자랑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앞에서 한껏 주눅이 들어 그들의 힘과 풍요 속으로 합류하기를 갈망하고 계십니까? 우리도 야곱처럼 지금 나의 모습이 비하고나그네요, 이방인의 모습일지라도 이 세상의 힘과 풍요를 밟고 올라서서 진짜 풍요와 진짜 힘에로의 초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하늘 왕들의 나그네 연습이랄까요? 바로 그러한 성도의 이중적이며 역설적인 현실은 성경에 반복되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의 내용을 다 기억하시지요? 말이 나온 김에 다시 한 번 보고 가지요.

 

(창 27:29)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야곱은 형제들의 주가 되고 축복을 하는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야곱이 다른 사람들의 복의 중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저주가 비롯되기도 하고 복이 비롯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 본문에서 현실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세상 권세의 최고 자리라 할 수 있는 애굽 왕의 자리와 애굽의 모든 풍요가 사실은 야곱의 축복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는 그 모습은 이 세상 모든 권세와 풍요가 하나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의 성취를 위해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는 바로의‘주’로서의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사실 창세기 9장의 언약에서부터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창 9:23-26)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노아의 벌거벗음을 감추어주지 않은 함과 그의 아들이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는 장면입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이 왜 노아의 술 취함과 벌거벗음으로 끝이 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아시지요? 노아의 방주 사건은 벌거벗은 아담의 죄를 하나님께서 값없이 덮으시는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값없이 덮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 즉 믿음이 없어 십자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를 이해하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로 그 믿음 없는 자의 대표로 등장한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 셈의 노예가 될 것임이 노아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현실이 오늘 본문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셈의 후예 야곱이 함의 후예 애굽의 위에 서서 축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영적인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가시적 현실은 어떻습니까?

 

(시 105:23) “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영적인 현실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가시적 현실은 이스라엘, 즉 야곱이 함 땅, 애굽에서 종으로 나그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9장의 하나님의 언약과 시편 105편의 야곱의 현실은 완전히 반대잖아요? 그러나 그게 맞는 것입니다. 하늘의 왕 같은 제사장들이 이 세상에서 세상을 축복하는 자로 살아가는 모습은 이 세상에서 종이 되고 객이 되는 삶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인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선물 받은 소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그네, 갇힌 자, 굶주린 자, 등등의 모습 속에서 하늘의 왕의 삶을 믿음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때때로 이 세상에서 종이 되고 객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지금 바로를 축복하고 있는 야곱은 바로보다 높은 자가 맞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바로의 나라에 객이 되어, 심지어 그가 대표하고 있는 그의 후손들은 애굽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역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불쌍한 가시적 현실 속에서 이 세상의 권세와 풍요를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 세상의 힘들에게가 아닌 하나님의 크심과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자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거지가 이 세상 권세의 절정인 바로의 머리에 대고 그의 힘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그건 믿음이 있는 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백성들을 알거지로 만들어서 세상의 권세 앞에 세워 보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그 세상의 권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내가 참 험악한 나그네 인생길을 가고 있지만 너도 나처럼 되었으면 좋겠다’하고 하늘의 풍요를 자랑하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예배당에 와서 여러분의 감성을 위로받고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힘과 가치를 전제로 하는 이 세상 적, 복에 열광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하늘의 복, 영생을 여러분에게 약속하셨고 하늘의 풍요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그 보이지 않는 실체를 진짜 실체로 받아들이는 거룩한 작업을 해 나가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교회에 오셔서 ‘이 교회는 교인들을 위한 교양 프로그램이 없어, 교육 시설이 부족해, 주차장이 불편해, 밥이 맛이 없어’ 등등의 불만을 토로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말씀에 갈급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왔는데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엉뚱한 것으로 위로를 하려 할 때 ‘왜 목사가 성경을 안 가르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지?’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을 나그네로 살면서 하늘 왕의 권세로 세상을 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야곱이 바로 왕을 축복하는 그 한 구절에 ‘나그네 길’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자기 조상들의 인생도 나그네 길이었고 자신의 길도 나그네 길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야곱의 삶 전체를 돌아보세요. 야곱이 자신의 꿈과 야망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았습니까? 그런데 결국 그 모든 시도와 추구는 완전히 무산이 되고 결국 다른 존재가 성취해 놓은 하늘의 복락에 면목 없이 참여하는 것이 인생이더라는 것입니다. 그걸 안 야곱이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 칭한 것입니다. 야곱의 후손들인 믿음의 후손, 영적 이스라엘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볼까요?

 

(히 11:13-16)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 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하늘의 본향, 즉 진정한 우리의 목적지를 안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이 땅을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성도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벧전 1:1-2)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을 배우게 되는 사람들인데,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나그네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 ‘흩어진 나그네’라 부르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강남에서 유명한 과외 선생이었습니다. 제가 가르치던 아이들 중에 가수 최희준 선생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 누나가 저하고 초등학교 동창이라 어려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그런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공부보다는 음악을 훨씬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세 번씩 만나는 과외 공부 시간에 기타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록 그룹 들의 계보나 그들의 음반을 함께 듣기도 하고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사람들이 모두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 이야기도 많이 나누곤 했었습니다. 결국 그 친구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아닌 기타를 잘치고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를 외치는 한량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느 날 저에게 물었습니다. ‘형,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거예요?’ 그런데 딱히 간단하게 해 줄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를 크게 고민을 해 보지 않은 터였습니다. 그 때 아래층에서 최희준 선생께서 암으로 투병 중이셨던 아내에게 나지막이 노래를 불러주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로 하숙생이라는 노래였습니다. 그 가사가 이러합니다.

 

하숙생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둘이서 말없이 그 노래를 다 듣고 나서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잘 사는 인생은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하숙생처럼 살다가 천국에 가는 거야’ 얼떨결에 한 말이었지만 그게 정답입니다. 잘 사는 인생은 하늘 본향을 바라보며 나그네처럼 하숙생처럼 이 땅을 누리고 즐기면서 세상의 힘을 조롱하며 살다가 천국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와서 진통제나 마취제 맞고 가실 생각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내가 비록 지금은 나그네요, 이방인이요, 갇힌 자요, 작은 자로 살고 있지만, 난 하늘의 왕자다’라는 여러분의 영적 실체를 올바로 인식하는 그 참다운 고백과 소망으로 위로를 받은 진짜 성도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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