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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거북이 날다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2. 12.

 

 

거북이 날다

 

(김성수 목사)

 

 

(창 46:1-7) “1 이스라엘이 식구를 거느리고, 그의 모든 재산을 챙겨서 길을 떠났다. 브엘세바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렸다. 2 밤에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야곱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님, 곧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4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내가 반드시 너를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다." 5 야곱 일행이 브엘세바를 떠날 차비를 하였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아이들과 아내들을, 바로가 야곱을 태워 오라고 보낸 수레에 태웠다. 6 야곱과 그의 모든 자손은, 집짐승과 가나안에서 모은 재산을 챙겨서, 이집트를 바라보며 길을 떠났다. 7 이렇게 야곱은 자기 자녀들과 손자들과 손녀들 곧 모든 자손들을 다 거느리고 이집트로 갔다.”

 

 

제가 참 좋아하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송강호와 최민식 그리고 최근에 추격자라는 영화로 스타의 반열에 오른 김윤석이라는 배우입니다. 그들은 삶을 여과 없이 연기로 승화해내는 출중한 재주가 있는 듯해서 좋습니다. 그중 김윤석이라는 배우를 아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 ‘거북이 달린다’라는 영화를 찍었다고 해서 그 영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제목이 참 재미있지요? 달리는 거북이, 상상이 가십니까? 그런데 그 달리는 거북이라는 소재는 저에게는 아주 친숙한 소재입니다. 아주 오래 전, 거의 20년 전 쯤에, 제가 연극에 푹 빠져 있을 무렵에 희곡을 한번 써 보겠다고 수 개월간 작업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희곡의 제목이 ‘거북이 날다’였습니다. 제가 그 때 그 희곡의 인사이트를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받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럼에도 저는 그 사실을 아주 오래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본문을 강해할 차례가 되었을 때 이 제목이 생각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저는 이번 경험을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저의 설교에 늘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저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 소름이 돋으실 거예요.

 

이번에 필라델피아 부흥사경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주일날 전할 설교 본문을 읽고 또 읽고 하는데 도저히 하나님께서 그 본문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본문이 어렵기도 해서 그냥 무작정 읽고 또 읽었습니다. 원어 성경으로도 읽어보고 영어 성경으로도 읽어보고 개역성경 표준 새 번역 성경 아무리 읽어도 그냥 아버지와 아들이 오랜만에 만나 해후를 하는 그저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제 옆에 앉은 중국 청년이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 자꾸 좌석 밑의 가방을 뒤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뭘 하는 걸까 하고 궁금해 하던 중에 저는 그 사람 가방 속에 뭔가 꿈틀 거리는 살아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거북이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거북이를 숨겨서 가지고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제 옆에 앉은 중국 청년이 손바닥만 한 거북이를 가방에 넣어가지고 비행기를 탔던 것입니다. 공항 보안 검색대가 아무리 철저해도 피해가는 사람은 다 피해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달리는 거북이가 아닌 하늘을 나는 거북이를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오늘 설교 본문과 제가 20년 전에 썼던 희곡의 내용이 오버랩 되면서 저는 무릎을 탁 치게 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해? 거북이 이야기 있잖아?’하시며 거북이를 보여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설교에 정말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간섭을 하신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지금부터 그 생생한 감동을 그대로 여러분께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거북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느림보입니다. 거북이 자신도 자신이 느리다는 것을 인정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느림보의 대명사는 거북이입니다. 거북이는 그냥 자기가 지어진 대로 열심히 한발 한발 움직이며 성실하게 살 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 진 걸 어떡해요. 그런데 세상은 온통 그를 향해 느려터진 느림보라는 평가를 서슴없이 내립니다. 그렇다고 그 거북이는 세상의 평가를 일축하듯 토끼의 흉내를 내며 깡충깡충 뛸 수도 없습니다. 거북이는 거북이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신의 섭리입니다. 신의 섭리를 거스릴 수 있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거북이가 토끼보다 빠른 자동차를 타거나 아니면 보다 확실하게 비행기에 업히면 거북이는 토끼를 이길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성도의 인생이 그렇게 비행기를 탄 거북이의 형국인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손에 잡히는 순간 거북이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힘과 지혜와 능력과 재주로 자신의 야망과 비전을 향해 달려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적지를 바꿔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끄시는 목적지로 하나님 안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심과 야망이 자꾸 그 반대쪽으로 가려 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보가 자꾸 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 하에서는 거북이와 같이 느릿느릿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편 73편이 바로 거기에 대한 불만스러운 토로였지요? 왜 세상은 토끼처럼 자기들의 힘과 풍요를 자랑하며 약삭빠르게 잘 사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자기는 왜 아침마다 징책이고 온 종일 재앙만 당하냐고 원망 섞인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토끼인 세상에 비해 형편없이 느려터진 거북이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복의 정체는 악인들의 형통과는 많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삶을 거북이처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느려터진 거북이걸음이 결국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거룩으로 인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시 119:67,71)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잘못된 행보를 그냥 보고 계시지 않고 가시로 막고 담으로 막으십니다. 그걸 우리는 고난으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고 세상이 우리를 볼 때에 거북이걸음으로 가는 느려터진 느림보로 평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복인 걸 누가 알겠습니까? 여러분,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던 흥부와 욕심 많고 부지런한 놀부의 이야기, 결국에는 착하고 가난하게 살던 흥부가 박 씨를 얻어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대표적인 권선징악의 이야기입니다. 어떠세요? 요즘 아이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흥부를 좇아 살고 싶어 할까요? 아마도 요즘 아이들에게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들려주면 흥부는 게으르고 능력도 없는 실패자라 할 것이고, 놀부야 말로 현명하고 약삭빠르며 재테크에 뛰어난, 난 사람으로 평가를 할 것입니다.

 

누가 흥부의 삶을 살고 싶어 하겠습니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놀부가 아주 훌륭한 롤 모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도들을 향하여 흥부가 되라하고 토끼가 아닌 거북이가 되라 합니다. 너희들의 재주와 능력으로 거북이들을 제치고 일등이 되어 고지로 뛰어 올라가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토끼들을 칭송하고 그들의 삶의 궤적을 좇아 살려 애를 쓰고 있지만 우리 성도는 그 삶을 좇아 살면 안 된다고 성경은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토끼처럼 세상의 인기나, 세상의 힘, 자기 자랑에 목매어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원수라고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약 4:4)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 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 이니라”

 

저는 지금 열심히 살지 말라고 게으름을 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직업이요, 생업이라면 그 직업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잘 성취해야지요.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이기면 되고, 나만 유명한 사람 되면 되고, 나만 부자 되면 장땡이라는 그런 욕망의 화신 같은 삶을 성도가 답습을 하여 좇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거북이처럼 토끼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깨우지도 않고 살살 기어가서 기필코 승리의 깃발을 쟁취하고야 마는 그런 삶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우화에서는 토끼나 거북이나 다 나쁜 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는 자본주의와 성공주의, 물질주의가 낳은 아주 악한 동화인 것입니다. 우리는 거북이로 살되 토끼들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그런 거북이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 전형적인 토끼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기의 힘과 꾀를 사용하여 형의 축복을 도득하고, 단풍나무, 신풍나무를 사용하여 얼룩덜룩한 양과 염소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고, 얍복강 가에서는 자기에게 덜 소중한 것들을 앞장 세워 건너게 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자기의 꾀로 형의 노여움을 풀어 주기 위해 뇌물을 쓰기도 합니다. 전형적인 토끼의 삶입니다. 그러한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의 다리를 분질러 버립니다. 거북이를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왜 자꾸 네 다리로, 네 야망을 향해 달리려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이후로 평생 단 한 번도 달려 보지 못했습니다. 환도 뼈가 위골이 되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걸 하나님의 은혜라 합니다. 토끼로 잘 살던 사람의 다리를 분질러서 거북이로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만 의지하여 그 지팡이가 이끄는 목적지로만 따라가게 만들어 버리는 것을 성경이 ‘복’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도득한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는 야곱의 다리가 부러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아들 요셉을 만나러 가기 위해 한 달음에 애굽으로 떠나도 시원치 않았을 야곱이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야곱이 가나안의 끝 지점에서 한 박자 쉬는 것입니다. 그토록 힘들게 들어온 약속의 땅에서 섣불리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처럼 자기의 생각대로 내 달리지 않습니다. 이제 그렇게 야곱은 당연한 것도 하나님께 묻고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거북이입니다. 20년을 가슴으로 그리워했던 아들 요셉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을 모실 수레를 보내왔습니다. 제사고 뭐고 당장 그 아들 얼굴을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런데 야곱은 가나안 접경 지역인 브엘세바에 이르자 하나님께 신실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제가 애굽으로 가도 됩니까?’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저희 할머님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님 바로 밑의 동생이 어려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머님은 여전히 아들 셋이 남아 있는데도 먼저 간 그 삼촌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사셨습니다. 할머님이 말년에 중풍으로 몇 년을 누워 계시다 가셨는데 그 때 저만 보면 하시던 말씀이 ‘둘째가 보고 싶다, 그 아이는 아직도 내 가슴 속에서 살아 있어’였습니다. 마치 그 자식이 죽은 것이 자기의 부주의와 무관심 때문인 것처럼 평생을 미안해하며 그리워하며 사셨습니다. 성경에도 나오지요? 라헬이 아들이 없는 고로 라마에서 통곡을 했다고요. 그런데 그 어떤 위로도 다 거절하며 아들을 기다렸다 하지 않습니까?

 

야곱은 어떠했겠습니까? 요셉이 누굽니까? 목숨처럼 사랑했던 라헬의 장남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채색 옷을 입혀 일찌감치 장자로 낙인을 찍어 두었던 그런 사랑스런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고 그 아들이 입었던 채색 옷이 아들의 피가 흥건히 묻어 있는 채로 자신의 손에 들려졌습니다. 그 마음이 어땠겠어요? 그런데 그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저 같으면 신 신는 것도 잊고 맨발로 달려갔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야곱이 거북이처럼 천천히 요셉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요셉보다 하나님이 더 큰 분으로 자리를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를 하나님나라 백성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자리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나님께 제사를 하며 물었습니다. ‘하나님, 애굽이라는 곳은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우리 아버지 이삭이 큰 시험에 들었던 곳인데 제가 애굽으로 내려가도 되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대답을 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당장이라도 달려가 아들을 품에 안고 그 아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데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는 사람, 이제 야곱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진정한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거북이입니다. 자기의 힘과 지혜와 상식과 감정을 의지하여 냅다 내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가장 빠른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희곡을 쓸 때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거북이 날다’라는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정말 토끼의 삶을 추구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삼자인 우리가 보기에 그의 삶은 거북이처럼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토끼의 삶을 추구하던 야곱에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삶, 거북이의 삶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 토끼의 추구와 꾀를 박살내시면서 끌고 가신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며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고백을 한 것을 보아도 그가 그의 인생을 통하여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왜 토끼가 되고 싶은 그의 삶이 그렇게 험악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거북이의 삶으로 점철이 되고 있는지 그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가 알아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지향점은 토끼가 되어 자신의 꿈과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를 탄 거북이처럼 비록 느리고 더뎌 보여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가 결국 하나님나라에 이르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먼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이 하나님이라는 비행기에 올라타게 되면 그 때부터 성도는 하나님이 데려 가시고자 하는 목적지로 꼼짝없이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우리 아이들과 SIX FLAG에 놀러 갔다가 롤러코스터를 두 번이나 연속으로 타고서 그 놀이공원 바닥에 모듬전 부친 이야기. 우리는 그렇게 일단 하나님이라는 비행기에 올라타게 되면 내리고 싶어도 절대 못 내립니다. 비행기에 올라탄 거북이는 중도에 뛰어 내릴 수도 없고 그 비행기가 가는 방향을 자의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마치 방주에 방향키와 운전대가 없었던 것과 방불한 것입니다. 방주가 이끄는 대로 둥둥 떠다니다가 내리라면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거북이들이 비행기를 타고 하나님의 목적지로 가고 있는 동안에 자기가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직선코스로 날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때때로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북이는 세상에 비해 약하고 느려터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럽고 민망하기만 합니다. 왜 나만 사랑해야 하고, 왜 나만 당해 주어야 하고, 왜 나만 용서해 주어야 하며, 왜 나의 야망만 꺾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는 지금 비행기를 타고 이 세상의 토끼들과는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로 하나님의 목적지로 날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북이로 살고 있는 듯 보이는 자기의 삶에 만족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매한 거북이들이 세상의 수많은 토끼들이 추구하고 성취해 내는 여러 가지 이 세상의 힘과 가치들을 그 하나님이라는 비행기 안에서도 열심히 추구해 보기도 합니다. 토끼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마치 야곱처럼. 그런데 그 때마다 하나님이 거북이들의 얍복강으로 찾아오셔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리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혼돈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뜻과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의해 하나님의 목적지로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이고 그게 바로 설교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이 거북이의 자리를 마다하고 토끼가 되어 뛰려 할 때마다 그들을 거북이의 자리로 끌어 내립니다. 토끼가 되어서 자기의 힘으로 자기가 원하는 소원과 야망과 비전을 성취하려 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거북이처럼 만들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내 뜻과 내 비전만이 내 인생의 목적이고 나의 성취의 대상이라 착각하며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의 삶에 직접 들어오셔서 그 길을 막아서시고 ‘stop and calm down'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삶을 보세요. 하나님은 급하게 가나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토끼 야곱을 얍복강 가에서 막아서시며 그를 절뚝거리는 거북이로 만들기도 하시고, 임기응변 권모술수로 재산을 불리려 하는 그의 앞에 라반이라는 더 치사한 사람을 세워 그의 야망을 막으시기도 하시고,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데려가시기도 하시고, 딸의 강간 사건, 자식들의 전쟁, 자식들 간의 분열, 요셉이라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기근, 등등 자신의 생각으로 냅다 뛰려는 야곱이라는 토끼의 삶에 끊임없는 장애물들을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거북이 같은 인생이 된 것입니다. 나그네 인생길 130년에 심히 험악한 거북이 인생이 된 것입니다. 토끼처럼 자기의 힘을 발휘하며 자기가 원하는 고지로 한 걸음에 내달아 보려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복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라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 비행기의 목적지는 완전한 자기부인이라는 목적지였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의 삶의 중심이며 우선순위의 영순위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야곱들의 목적지 또한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험악한 나그네 인생길 130년, 즉 거북이의 인생이, 그를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지내는 자로 만들어 내고야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인생은 겉으로 보기에는 130년이라는 지루한 거북이의 삶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130년이라는 짧은 비행시간을 통하여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라는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북이 날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실 이 땅에서 거북이처럼 보이고 있지만 하나님의 등에 업혀 창공을 훨훨 날고 있는 것입니다.

 

(출 19:4)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렇게 우리는 독수리 등에 업혀있는 느림보 거북이들입니다. 그러나 독수리 등에 업혀 있는 거북이입니다. 그걸 잊지 마세요. 그런데 그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거북이의 삶 속에서도 평안과 안식과 기쁨을 잃지 않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내시고야 마십니다. 전쟁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필라델피아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그 사실을 정말 뼈저리게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 수개월간 설교를 하면서 많이 괴로웠습니다. 사랑을 설교하면서 정작 제 마음 속에는 미움이 용솟음쳤고, 용서를 설교하면서 잔인한 복수를 꿈꾸었습니다. 하루 빨리 목사 짓 때려치우고 자유로운 신분으로, 제가 가진 인맥과 그들의 힘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동안 저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사람이 참는 데도 한계가 있는 것이라는 마귀의 속삭임에 자꾸 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참으로 적절한 시간에 LA 를 떠나게 하시고 전혀 다른 곳에 있는 또 다른 성도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일곱 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이미 제가 주일 설교로 다 했던 것들이었는데

 

설교 한 편 한 편이 제 가슴 속에 박히기 시작했습니다. 설교 하는 도중에 여러 번이나, 저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강대상 맞은 편 벽에 나타났습니다. 여전히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시며 저를 보고 웃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꾸 선명하게 제 가슴 속에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진 미움과 복수심이 겨우 백 데나리온에 불과하다는 것이 너무나 명료하게 깨달아지면서 저는 통곡을 했습니다. 설교를 하다가도 눈물을 짓고 설교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서도 두 시간씩곡을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울복수심이 겨우렇게 하나님은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 저를 위한 부흥회를 마련해 두셨던 것입니다. 아직도 사랑에 서툴고, 아직도 용서에 미숙한 저를 위한 부흥회. 하나님은 필라델피아에 저를 위한 은혜의 손길들도 미리 마련해 두셨수심이 겨우들을 보고 배우라는 하나님의 메시게 깨달아지면그 분들은 하나님의 편지로 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의 삶과 실천을 보면서 저는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몸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저녁 저는 미움과 복수심에서 완전히 회복이 되었고 주일날 이어지는 모든 설교와 일정에서 저는 불을 토하는 설교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동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집회가 끝나자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큰 교회를 가득 채운 모든 청중이 다 같이 일어나 마치 커튼콜을 하듯 저를 위해 우렁찬 기립박수를 쳐 주셨습니다. 그건 설교를 잘했다는 응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이끌려 또 다시 사랑과 용서의 자리로 한 단계 성숙을 한 자려를 칭찬하시는 하나님의 박수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그렇게 사랑과 용서와 섬김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히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마귀의 후손일 뿐입니다.

 

바로 그 내용이 오늘 본문에 멋지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네 아비의 하나님’이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왜 그런 표현을 썼을까요? 이왕이면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고 하나님께서도 ‘나는 너 야곱의 하나님이다’하시면 좋잖아요? 왜 아비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와야 하지요? 일단 첫 번째로 브엘세바는 이삭이 평생을 보낸 곳입니다. 그래서 그 이삭이 살던 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쓴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그 호칭에 반응하시며 ‘네 아비의 하나님’이라고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어구가 담고 있는 속 깊은 메시지는 그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도저히 불가능한 마른 막대기 같은 부모에게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출생한 약속의 후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삭은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 이삭의 출생은 모든 은혜의 후손, 즉 하나님의 교회의 탄생의 모형인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렇게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탄생하게 된다는 것을 미리 예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였던 것입니다. 그 이삭을 은혜로 출생시키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야곱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 이스라엘로 만들어 그 야곱의 노력과 능력과 지혜와 힘과는 전혀하는관한, 약속의 후손의 상징인 무죄한 요셉이 만들어 놓은 애굽의 부귀영화에 참여시키시는 그 그림이 바로 교회인 영적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구원의 모양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는 것임을 고지하시기 위해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쓰신 것입니다. ’야곱아, 교회야 구원이란 이삭의 탄생과 같이 너희들의 불가능함이 전제된 곳에서 나의 능력과 은혜가 임하여 완성이 되는 것이란다‘하는 하나님의 세심한 가르침이 그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어구에 배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참 풍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게 되는 구원의 의미를 명확히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점차로 이 세상의 가치와 힘들이 초개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자신이 상상 할 수도 없는, 세계 최강국 애굽의 주가 되어 있는 아들의 풍요 속으로 값없이 거저 들어가고 있는 야곱에게 그가 나그네 인생길 130년 동안 죽어라고 끌어 모은 것들이 마치 쓰레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창 45:20) “20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하라”

 

[표준새번역] “20 이집트 온 땅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땅이 그들의 것이 될 터이니, 가지고 있는 물건들은 미련 없이 버리고 오라고 하시오.”

 

요셉이 형들에게 한 말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쓰던 것들, 될 수 있으면 다 버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토끼처럼 자기의 힘과 꾀를 사용하여 평생을 모든 것들을 요셉이 한 방에 박살을 내는 것입니다. 진짜 좋은 것들이 있으니까 당신들이 그동안 모은 것들은 미련 없이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이 땅에서 토끼같이 뛰면서 추구하고 성취해 낸 이 세상의 힘과 가치들은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서 전혀 쓸모가 없는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토끼처럼 자기의 힘과 꾀를 사용하여 이 땅에서 유명한 자, 인기 있는 자 되려하지 말고 하늘의 풍요를 추구하며 이 세상의 불의한 재물로는 잘 나누고, 섬기고, 친구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주는 메시지 아니었습니까? 저는 필라델피아에서 정말 그렇게 살아내고 계신 분들을 만났습니다. 저희 교회 설교를 인터넷으로 듣고 계신 분들이었습니다. 참 자랑스럽지 않아요?

 

여러분, 지금 야곱이 애굽의 왕도 부럽지 않은 풍요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추구했던 모든 것이 다 공으로 돌아가고 지금 야곱과 그의 식솔들은 굶어죽기 직전까지 와 있습니다. 이 세상의 힘은 결국 영원한 세계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평생을 죽어라고 달렸는데 결국 아사 직전의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게 토끼들의 삶의 결국입니다. 그러니까 눈을 돌려 이 세상의 풍요가 아닌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하늘의 풍요에 관심을 가지라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보세요. 그렇게 자기의 꿈과 비전과 야망이 무산이 된게 자시점에 어떤 무죄한 자가 수난을 받음으로 심을 가된, 자기의 공로와는 완전히 무관한 상상할 수도 없는 풍요가 눈앞에 펼쳐져게 자시점에 어떤 우리 성도자시바로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고한 요셉이 수난을 받고 성취해 낸 애굽의 풍요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야곱이 어부지리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무력함과 요가 아을 인정하고 모든 것 풍성한 참 풍요의 나라, 하나님 나라로 입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보는 그 야곱의 모습은 무죄한 예수가 십자가 수난을 통과하시고 심을해 내신 하나님 나라를 아무 공로 없는 우리가 거저 들어가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매한 백성들이 그 복된 비밀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들의 힘으로 날고뛰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때때로 환도 뼈를 쳐서 거북이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복입니다. 은혜입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성도는 하나님이라는 비행기를 타고 진정한 풍요의 땅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 안에서 성도라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비행기의 키를 쥐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자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그 비행기가 너무 느리게 가는 것 같다고 비행기 안에서 열심히 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비행기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외치며 그 비행기의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비행기의 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아래에서 뛰어가는 토끼들이 훨씬 빨라 보이거든요. 나는 그냥 느릿느릿 세상의 웃음거리인 거북이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는 일말의 요동도 없이 정해진 방향으로만 날아갑니다.

 

여러분, 어떤 게 복입니까? 만일 비행기에 탄 토끼가 되고 싶은 거북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비행기 기장이 그 비행기의 운전대를 거북이들에게 주면 어떻게 될까요? 만일 거북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기장이 비행기 문을 열어주면 어떻게 됩니까? 거북이들의 요구대로 비행기가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방향을 바꾸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모두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복이에요? 아니면 우리의 야망과 꿈이 묵살이 될지언정 하나님나라로 직항하는 것이 복입니까? 그래서 우리를 태우신 하나님이라는 비행기는 우리가 아무리 난리법석을 피워도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서만 열심히 달려가시는 것입니다. SIX FLAG의 롤러코스터처럼.

 

그래도 여러분의 소원과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 비행기의 기장이신 하나님을 원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이라는 비행기 안에서 토끼의 자만심과 토끼의 자기주장, 토끼의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이라는 비행기의 이끄심에 순종하며 다른 방향으로의 탈출 욕구를 죽여 가는 거북이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토끼들이 아무리 빨라 보여도 그들이 뜀박질의 결론은 사망입니다. 열심히 달려 죽음으로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빨리 가고 싶으세요.

 

성도의 목적지는 하나님 나라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자기부인의 완성지점에서 입성이 가능한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비행기가 우리를 꼼짝달싹 하리를 꼼도록 꽉 붙들고 우리를 그 목적지로 이끌고 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의 뜻과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야망을 기각 당하고 꼼짝달삭 못하고 모든 걸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하나님의 의중을 물으며 브엘세바에서 예배를 하는 야곱이 완성인 것입니다. 그걸 신학적 용어로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 빠른 것입니까? 지상의 토끼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달리는 거북이들입니까? 그게 확인 되신 분들이 왜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상황 속에서 그렇게 흔들리시지요?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사건들은 여러분을 올바른 목적지로 데려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의 손길인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의 인생이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해 보여도 절대 주눅 들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거북이는 거북이인데 나는 거북이들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외치세요. ‘거북이 날다’ ‘난 하나님이라는 독수리 등에 업혀있는 날으는 거북이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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