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진리의 허리띠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2. 9.

 

 

진리의 허리띠

 

(김성수 목사)

 

 

(엡 6:13-14)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우리는 지난주에 에베소서 전반에 대한 review를 했습니다.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볼까요?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물의 재통일‘‘애나케팔라이오’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1장과 2장에 각각 묵시 속에 완성되어 있는 교회와 이 땅의 역사적 현실 가운데 있는 교회를 보여주지요. 다른 말로 이미 거룩해진 교회와 거룩해져 가고 있는 교회를 나누어서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이미 묵시의 세계인 하늘에 완성이 되어 있고, 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이 바로 교회의 구원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주어졌음을 사도는 강조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렇게 교회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복의 수혜자로서 뿐 아니라 복의 전달자로서의 부름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순복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바로 거기에 사단의 공격이 가해지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 사단의 공격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전신 갑주를 입는 것이라는 내용이 에베소서 전체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단의 공격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 표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우리가 마귀와 싸워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의 거룩한 성장을 위해 한시적으로 이 세상의 권세를 잡도록 허락된 자들이기 때문에 저는 이 영적 전쟁을 ’마귀와의 전쟁‘이라는 관점보다 ‘하나님께로의 항복‘의 측면으로 바라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전신 갑주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의 첫 번째 것이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왜 허리띠가 가장 먼저 나오는가? 오늘날 우리의 옷차림에서는 사실 허리띠의 중요성이 별로 부각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옷은 옷의 형태나 재질 같은 것들이 허리띠의 필요성을 그다지 중요하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대 시대에는 달랐습니다. 당시처럼 치렁치렁한 옷을 즐겨 입었던 때에 옷차림을 단정하게 마무리 짓는 것은 허리띠였습니다. 고대시대 사람들은 쉴 때나 잠잘 때 이외에는 늘 허리띠를 매야 했습니다. 허리띠를 매지 않으면 사지가 자꾸 옷에 걸려서 행동에 제약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자기 치마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을 가끔 보지요?

 

명절 때 한복을 입으신 어머니들이 일을 하시기 위해 그 걸리적거리는 한복 치마를 어떻게 단 도리를 하십니까? 치마를 허리춤으로 걷어 올리고 끈으로 꽉 묶으시지요? 그게 고대 시대의 허리띠입니다. 그러니까 군사가 전쟁에 출전하기 위해 무장을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허리띠를 묶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허리띠를 매지 않고는 그 위에 다른 갑옷을 입을 수도 업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먹으라고 하실 때도 제일 처음 요구하신 것이 ‘허리에 띠를 띠고’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가나안까지 행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행 12:8) “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 대”(감옥에서 퍼져서 잠자고 있던 베드로에게 천사가 한 말)

 

보세요. 어떤 움직임이나 변화에는 항상 띠를 띠는 것이 먼저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영적 전쟁에 투입되는 사람들이 허리띠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우리 주님께서도 신자들에게 항상 허리에 띠를 띠고 기다리는 삶을 살라고 권고를 하고 가셨습니다.

 

(눅 12:35)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사도들도 성도들에게 똑같은 권고를 했습니다.

 

(벧전 1:13)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이렇게 허리띠는 전투의 전제조건이요 기본 조건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영적 전투에 임하기에 앞서 꼭 매어야 하는 그 허리띠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보시다시피 그 허리띠의 내용은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싸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이지요. ‘진리’로 허리가 묶여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나머지 무장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무장에서 제일 먼저 제시되고 있는 이 ‘진리’를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게 배우고 연구하고 간직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진리‘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구원과 승리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중에 공부할 부분인 17절의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과 중복되지 않는가? 오늘 본문의 ‘진리의 허리띠‘는 ’전체 진리,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 진리, 복음 진리‘를 말하는 것이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마귀의 유혹과 궤계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성경 말씀의 일부분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에 대해서는 우리 주님께서도 언급을 하신 바 있지요?

 

(요 8:30-32)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17:17-19)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만이 성도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맨 처음 내용이 ‘진리’의 허리띠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진리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을 합니다. 베드로는 ‘진리의 허리띠를 매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벧전 1:13)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여기처럼 ‘마음의 허리를 동여매라‘라고도 표현을 하고 ’믿음을 굳게 하라‘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벧전 5:8-9)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믿음이 뭡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지식을 믿음이라고 하지요? 다른 말로 ‘진리에 대한 신뢰와 지식’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허리띠를 매라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확실한 지식을 가지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 다른 말로 ‘진리에 대한 확고한 지식’, 다른 말로 ‘확고한 믿음’이 왜 이렇게 서두에서 강조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이마고 데이’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안에 들어 있는 대표적인 본성이 ‘지성과 애성’입니다.(여기에 대한 논증은 다음으로 미루겠다. 지금은 그냥 들어 두라) 그 중에 ‘지성’은 라틴어로 ‘라치오’와 ‘인뗄리겐지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라치오’라는 것은 ‘이성의 추론적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찾아가는 이성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뗄리겐지아’는 ‘오성’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그 단어를 ‘총명’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성‘이라는 것은 ’지적인 능력‘과 ’지식자체‘를 합해서 ’지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이 땅의 모든 원인과 결과를 완벽하게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 또한 풍성하게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성‘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자체‘를 ’애성‘이라고 합니다. 이 ‘애성’의 부분에서는 우리가 구별해 두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에는 ‘까리따스’와 ‘꾸삐띠다스’가 있습니다. ‘까리따스’는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인간 쪽에서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꾸삐띠다스‘라는 것은 ’유격적 자기 사랑‘을 말합니다.

 

조금 쉬운 말로 바꾸면 ’까리따스’는 ‘아모르 데이’ 즉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근거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고 ‘꾸삐띠다스’는 ‘아모르 쓰스’‘이기적인 자기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타락해 버린 모든 인간들은 ’까리따스‘를 잃어버렸고 온통 ’꾸삐띠다스‘에 흠뻑 젖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떠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그 ’꾸삐띠다스‘를 깨버리고 ’까리따스‘를 발휘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인 ’까리따스‘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들어있는 ’애성‘의 사랑은 바로 ’까리따스‘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랑’ 인간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 ‘까리따스’에 충만히 젖어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에게서 ‘까리따스’가 반응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타락을 하고 우리에게 부어진 그 하나님의 형상의 대표적인 요소인 ‘지성과 애성’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지성과 애성’으로 구분해서 부르고 있지만 이 ‘지성과 애성‘의 뿌리는 원래 하나입니다. 그 둘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구약에 보면 ‘야훼 경외 사상’이라는 것이 있지요? 그 ‘야훼 경외 사상’의 핵심이 바로 ‘지성과 애성‘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다아트’와 ‘헤세드’입니다. ‘다아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고 ‘헤세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 ‘다아트’와 ‘헤세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을 책망하실 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그들이 지식을 버렸기에 나도 그들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이 왜 하나님의 분노를 격발시킬까요? ’이 놈들이 감히 나를 몰라?‘ 이런 분노는 아닐 거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 ’다아트’가 없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 ‘헤세드’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보였던 사랑은 형식적이며 의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지성과 애성‘은 한 뿌리에서 나오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상실해 버린 ’다아트‘와 ’헤세드‘(지성과 애성)의 회복이라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것은 ‘사랑과 진리’‘참 지성과 참 애성‘이신 ,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신의 안, 그러니까 ‘사랑과 진리’ ‘참 지성과 참 애성’속으로 집어 넣으셔서 ‘다아트’와 ‘헤세드’를 회복시켜 내는 것입니다.

 

(요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그 안에 ‘은혜(카리스)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은혜(카리스)’는 ‘사랑’‘까리따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은 참 지성과 참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지성과 애성’을 회복한 사람들이 되었고 이 시간 속에서 그 ‘참 지성과 애성’을 키워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참 지식과(참 진리에 관한 지식)사랑’을 추구해야 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고, 또 마땅히 그 ‘지식과 사랑’을 발휘해야 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살후 2:10)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여기서도 성도는 ‘진리의 사랑’을 받은 자로 묘사가 되고 있지요? 여기서 ‘진리’‘알레떼이아스’는 ‘동격 소유격’으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진리 곧 사랑’이라고 번역을 해도 무방하지요. ‘진리 곧 사랑을 받은 자’가 바로 구원함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벧전 1:22)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진리를 순종하게 되면,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라는 명제가 이 구절 속에 숨어 있지요?

 

(요이 1:1-3)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은 사랑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서의 진리와 사랑은, 다른 말로 지성과 애성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고 반드시 성도의 삶 속에서 회복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그노시스 투 크리스투’가 단순히 지적 동의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헬라어 ‘그노시스’‘지식’이라는 단어 속에 ‘성행위를 하다’라는 뜻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니까 우리에게 요구되는 진리에 대한 지식은 단순히 지식의 습득차원이 아니라 부부관계처럼 ‘경험으로 깊이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지식이 바로 ‘하나님과 네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지요. 그러니까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성화’라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사랑이 시간 속에서 자라 가는 것’을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와 사랑은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 임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안다는 사람들 속에서 ‘사랑’‘까리따스’가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잘못된 ‘진리’로 허리띠를 매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이 올바른 진리를 찾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 진리를 알아감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해지지 못하도록 초대교회 때부터 혼란과 불확실성의 씨앗을 뿌려 왔습니다. 순결하고 순수한 복음 안에 잡티를 자꾸 뿌려서 엉터리 진리를 생산해 내었습니다. 사도들은 사단이 어떻게 교회에 들어와 진리를 훼방할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행 20:29-32)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보세요. 그 이리떼 같은 사단의 공격을 어떻게 피할 수 있다고 합니까? ‘은혜의 말씀’‘진리’밖에 없습니다. 사단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할례를 필수적인 과정으로 거치게 하고 또 다른 의식들도 지키도록 미혹하기도 하고,(율법주의) 또 초대교회 당시 전 세계의 철학 사조였던 헬라의 이원론을 근거로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부터 막 살아도 천국 갈 수 있다. 육이 저지르는 것이 영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얼토당토 한 왜곡된 진리를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두개 인들처럼 마지막 때에 부활이 없다는 교리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딤후 2:18-19) “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이렇게 부활이 없다고 진리를 왜곡해서 성도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한다는 사도의 권고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외침을 한 번 보십시오.

 

(갈 1:6-9)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러한 잘못된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 어디에 있었다고요?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렇게 끊임없이 교회가 믿는 진리를 왜곡해서 성도를 미혹해 왔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단자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할 때마다 우리 기독교에는 거기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처절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전투에서 나온 것들이 유명한 '신경'이나 '신조'들입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벨직 고백서 등등 많은 신조와 신경들이 사단의 진리 왜곡에 대해 맞서서 나왔던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에베소서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의 교리는 하나여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엡 4:13-15)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인 참 진리의 허리띠를 굳게 띠고 있는 것만이 엉터리 궤술과 간사한 유혹과 왜곡된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 안에서 참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다른 말로 ‘사랑이 수반되는 참된 진리’ 만이 엉터리 교리에 밀려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지요. 진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경 안에서 계시해 주신 하나님 자신이시며, 우주의 정상적인 질서이며 하나님이 내신 인간의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자꾸 그 진리를 왜곡해서 여러 개를 제시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따라서 그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열정과 노력이 없이는 절대 이 미혹의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유사 이래로 사단이 진리를 공격했던 많은 방법들 중에 사람들이 흔히 속기 쉬운, 그리고 오늘날도 많이 속고 있는 비 진리의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을 하나 예로 들어 드리겠습니다. 오늘 성경 공부는 이번 주일 설교까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늘 안 들으신 분들은 주일 설교도 충분히 이해하시기가 힘드실 거예요.

 

사단이 가장 많이 쓰는 수법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시대정신과 하나님의 진리를 그 때 그 때 잘 섞어서 전혀 다른 엉터리 진리를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떠한 사실을 분별하고 진위를 판별하는 데에는 납득과 수긍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인간이 어떤 사실을 납득하고 수긍하는 방법에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전통적이고 생래적인 것으로 우리가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객관적 논증‘입니다.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먼저 진리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방법이 어떻게 진리를 왜곡해 왔는지 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경험’은 다음 주에, 의의 흉배에서 다루어 드리겠습니다. 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원래 헬라 적인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헬라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헬레니즘하면 우리가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라는 ‘이원론’부터 떠올리게 되지만 원래 이 ‘이원론’보다 인류 정신사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헬레니즘 속에 들어있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반면에 헤브라이즘은 ‘내가 나의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조상들이 옳다고 한 것은 옳다’라고 인정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인류 문명의 양축이 바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지요. 헬라사람들은 하나의 사실을 판별할 때 인간이 갖고 있는 오감으로 체득해서만 판별하지 않고 객관적 논리성을 갖고 증명하려고 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성경책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여기 성경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런데 헬라 사람들은 객관적인 논리성을 갖고 논리적인 증명을 하는 것을 오감을 이용한 직접적인 감각과 대등하게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삼았습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헬라 사람들이 어떤 사실을 진짜 사실로 증명하려는 시도로 만들어낸 헬라 사람들의 방법론입니다. 그런데 이 과학이라는 것이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것이 이제는 성경보다 앞서서 진위를 판가름하는 심판자의 위치에 서고 말았습니다. 과학은 이제 어떠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내는 방법론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입증이 안 되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쉽게 예를 들어 드릴게요. LA 공항에 마약을 색출해 내는 어떤 마약 탐지견이 있습니다. 그 마약 탐지견은 지금까지 나온 모든 마약의 냄새를 다 맡아서 색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마약 탐지 은 모든 사람들의 신뢰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판단하기에 긴가 민가 하는 것들을 가져와서 그 탐지견의 코에 갖다 대면 어김없이 진위 여부를 가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LA시에서는 그 탐지견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로 하고 마약 사범에 대한 재판에도 그 탐지견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해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개가 맞다 그러면 유죄요, 아니다 그러면 무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종 마약이 생겼습니다. 그 마약은 지금까지 나온 어떤 마약보다 치명적인 해를 가져오는 그런 마약입니다. 그런데 이 탐지견은 새로 나온 마약까지 ‘마약’으로 밝혀 낼 실력은 없었습니다.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분.명 마약임에 틀림없는데 그 탐지견이 자꾸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 실력 밖의 것은 ‘모른다’라고 하면 되는데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야’하고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처벌받아야 할 마약 상들이 무죄 방면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마약 사범들은 그 마약 탐지견이 모르는 마약들을 생산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역시나 그 마약 탐지견은 계속해서 나오는 신종 마약들을 마약이 아닌 것으로 판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LA는 마약 천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인간들이 과학을 이용해서 성경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보려는 시도를 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그 과학이 입증해 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신 신학,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한 30년 전에 타계를 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불트만의 신학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성경의 비신화화를 주장하고 많은 이들의 동의를 이끌어낸 사람입니다. 비신화화라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지 않는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신적 권위와 가치를 부여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예수의 가르침을 잘 지키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 낸 좋은 의미의 fiction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을 비신화적이며 실존 론 적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신 신학의 발로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중세 시대는 기독교가 세상 정치권 위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법칙을 하나님의 특별 법칙과 종교라는 것으로 압제를 했던 시절입니다. 그 때 득세한 것이 바로 스콜라철학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믿고 있는 것들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보이기 위해 무진 애를 쓴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라는 사실에 헬라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논증이 합세를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입증이 된 기독교를 믿게 될 것이라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러한 접근 방법이 잘 먹혀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중세 때는 과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었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논증도 목적론 적인 접근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적론 적인 접근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실이 참이냐 아니냐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논증으로 판별해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실이 ‘참이다‘라는 목적을 이미 설정해 놓고 그 것이 참인 이유를 과학과 객관적인 논증을 사용해서 꿰어 맞춘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과학의 발전이 미미했을 때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과학이 급속히 발전을 했습니다. 질병은 사단의 시험이나 하나님의 징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병원균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며, 벼락은 하나님의 저주의 화살이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방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뉴우턴, 아인슈타인 같은 걸출한 과학자들이 만류인력의 법칙, 관성의 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 등을 쏟아 내었고 그 때부터 그 발전된 과학으로 다시 성경을 입증하기 시작한 것이 신 신학의 태동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한 과학적 이론을 성경에 가져다 대니까 이건 너무 어이없는 내용이 많은 것입니다.

 

어떻게 동정녀에게서 아기가 태어나는가? 어떻게 죽은 사람이 부활하나? 어떻게 질량을 가진 사람이 물위를 걷나? 그건 다 예수의 가르침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그러한 신화들은 다 빼버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만 받아들이자’ 이게 신 신학인 것입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일각에서 성공을 했지요. 그래서 미국의 유수의 신학교에서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이 버젓이 가르쳐 지고 있고 그들이 졸업을 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는 사실성을 잃어버리고 점점 관념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도덕적 윤리적 관념들을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잡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관념론에 빠진 사람들은 지옥이라는 것도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도록 겁을 주기 위해 동원한 가상의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도둑질 하지 말라‘’살인 하지 말라‘ 그냥 이렇게 말로 하면 인간들이 들은 척도 안 하니까 지옥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동원해서 인간들에게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고 있다는 해석이지요. 오늘 날 가장 무서운 사단의 공격이 바로 이 것입니다. 기독교를 관념화 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화 된 기독교, 신 신학의 중심에는 예수가 아닌 ’나‘가 항상 주인공입니다. ’나‘의 착한 삶,’나‘의 깨끗한 행동,’나‘의 자랑스러운 행위 이렇게 모든 것의 중심에 ’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나‘의 깨끗함, ’나‘의 착한 삶,’나‘의 자랑스러운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하심, 하나님의 정결케 하심,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구원‘이 중심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착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에 착하기로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셔서 살인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서 거짓말 안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계속 세상 속에서 뒹굴면 무시무시한 지옥을 보낸다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이 문제는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관념이 아니라 실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 실재하셨고 지금도 우리 안에, 우주에 편만하게 실재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분이 ‘하라’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고 그 분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안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이 빠진 구제, 희생, 사랑, 헌신, 교제 이런 것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없고 관념으로만 떠도는 그러한 소위‘착한 일‘들에서는 오로지 ’나‘만이 부각되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생활 속에서 누가 부각되는 가를 잘 보세요. 이것이 진리를 분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행위와 열심 속에서 ‘나’가 부각되고 있고 ‘나’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고 있다면 그 것은 관념화된 기독교, 박제가 되어버린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행위 자체는 종교적인 모양을 띠고 있는데 내용은 오히려 주님께 지탄을 받고 있는 세 가지 예가 나옵니다.

 

(마 6:1-8,16-18)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 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뭐지요?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도의 마땅한 행위 중에도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행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부 뭡니까? ‘나’가 부각되는 행위들입니다. 관념화 된 기독교, 왜곡된 진리 속에서 엉터리로 distort되어 버린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가 배태한 더러운 찌꺼기들인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요 14:6)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그 어떤 아름다워 보이는 행위도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종교 행위도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지어지지 않는다면 다 울리는 꽹과리요 소리 나는 구리일 뿐입니다. 지금 안도의 한숨을 쉬는 분들 있지요? ‘아, 나는 적어도 내 자랑은 안 해, 난 어떤 일을 해도 늘 숨어서 일해, 그래서 난 참 괜찮은 사람이야’ 이건 더 악질입니다. 인간은 얼마나 교활한지 모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어떤 유명한 교회 목사님은 헌금 봉투에 이름을 못 쓰게 하신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누구 보라고 내는 것 아니니까 이름을 쓰지 말자고 합의를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 교회 교인이 목사님께 전화를 하셨답니다. ‘목사님 여기 이민 교회들 중에 헌금 봉투에 이름을 안 쓰는 교회를 도저히 찾을 수 없습니다. 너무 한심해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헌금 봉투에 이름을 쓰는 무식한 신자들이 있습니까?’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명으로 헌금하는 나는 하나님 앞에 선한 사람, 헌금 봉투에 이름 쓰는 사람은 무식하고 나쁜 사람‘이라는 자기 자랑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참 의로운 지적 같아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꾸삐띠다스‘가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무슨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습니까? 교활하고 교묘하게 자기의 자랑을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다니던 교회의 장로님들은 그야말로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장로님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 분들이 교인들에게 자기 PR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면 꼭 기도할 때 당시 이슈가 되는 정치 문제, 사회 문제들을 장황하게 들먹이면서 목소리 높여 간절하게 기도를 합니다. 그러한 기도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을 부각시켜 주지요. ‘나는 남들이 못 보는 이러한 일들까지 걱정하며 기도하고 있다. 너희들은 뭐하고 있니? 아직도 ’나에게 복을 주옵소서.‘ 이런 기도나 하고 있니? 한심하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꾸삐띠다스’가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가 다 잘못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한 숨은 의도가 그 기도 속에서 읽혀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말입니다. 그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립니다. 우리가 어떤 훌륭한 일을 하고도 거기서 ‘나’가 부각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면 그건 예수가 빠진 엉터리 진리로 허리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십자가와 보혈이라는 진리 앞에서 ‘나’가 죽고, 진리이신 예수가 드러나는 것이 진짜 진리로 허리띠를 매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참 진리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그로 말미암은 사랑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 하게 되는 것이고 그 때 마귀는 우리 앞에서 맥을 못 추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라는 명령이 외 맨 앞에 나와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나머지 내용은 다음 주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