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이른 시간에 향기님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다른 약속이 없으면 자기랑 데이트하자고~~^^
나야... 물론 별다른 약속이 없으니, 기쁘게 응했고...
갑작스런 연락에도 아무 부담없이 '그러마' 답해본 건 또 얼마만인지.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태라, 미리 약속을 할 수 없었으니까...
언제나, 그 날 당일에 가봐야지 여부를 말할 수 있었던 내가,
아무 때나 청해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답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길을 걷고 싶었다, 가을에...
사계절 어느 때고 상관이야 없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단풍이 곱게 들고 낙엽도 하나 둘 떨어지는,
호젓한 가을길을 걷고 싶었다. 혼자서라도...
그럴 수만 있다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걸으면 더 좋겠지만...^^
우연찮게도, 그저께 저녁에, 보던 책이 없어,
여기저기 책을 찾던 중에, 사진 봉투 하나를 발견했었다.
아마도, 예전에, 해외 편지 친구들한테 보내려고 몇 장씩
같은 것을 빼서 보내고 남은 것들 같았다.
다른 것들은, 찍은 장소가 어딘지 잘 모르겠는데,
엄마랑 여동생이랑 같이 찍은 사진을 보니...
거긴 수목원이었다.
대구에 수목원이 생긴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엄마가 가보고 싶다셔서 갑자기 나선 길이었다.
청보리가 광장 가운데 가득 피어있는 속에서 찍은 모습을 보니,
아마도 봄이었던 성싶다.
사진 속의 여동생이 베이지빛 임부복을 입고 있었다.
그때 뱃속의 아이가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으니,
열두 해만에 가보는 수목원인 모양이다.
그나마도 향기님이 혼자 살짝 가지 않고,
기꺼이 나를 불러주었길래 갈 수 있었지,
안그랬으면 나의 수목원행은 기약없이 미뤄졌을 거다.
불러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강산이 바뀌고도 남았을 시간 동안,
기본 틀은 그대로 있어도 여기저기 잘 가꾸려 애쓰고
노력한 흔적들이 가상하리만치 많이 보였다.
수목원 한가운데의 대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예쁘고 아기자기한 정원길들이 조성되어 있고,
그 정원 길들 옆으로 한 편은 나무를 바닥으로 깐 산책길이,
반대 편은 아무 것도 깔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흙길이 있다.
둘 다, 아니 넷 다, 아니 다섯 길 모두 다 좋았다.
계절마다 가서 한 길씩 걷고픈 욕심이 날 정도로...^^
진한 나무 냄새도, 끊임없이 재잘되는 새소리도...
이제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도...
내가 살아있어서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라 여기니
더 소중하고 더 애틋하고... 그리고 더없이 감사하고.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았음이,
새삼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난 이렇게 적극적인 애정표현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가족들한테도 오래된 친구한테도 이러지 않는데...
하긴 내가 그러면 다들 이상해진 줄 알고 어디 아프냐?고 하겠지.
더군다나 난 동성한테는 더 이런 표현이 어색하고 쑥스러운데 말이다.
그런데 향기님한테는 이런 표현이 참 자연스럽게 나오니,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경주에서는, 수학여행 온 소란스런 아이들 틈에서,
같이 찍어달라는 말을 할 대상이 마땅치 않았었다.
그래서 둘이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는데,
그걸 만회라도 하려는 듯 어젠 그런 부탁을 많이 했었다.
두 장 정도는 흔들려서 흐릿해진 탓에 삭제를 했다.
그래도 세 장씩이나... 이게 웬일인가 싶다.
어젠, 우리 사진작가<향기님^^>께서 어찌나 적극적이시던지...
"미지씨, 이리와서 서봐! 여기 너무 이쁘다, 거기 있어봐!"
아마 여기 올린 것의 대여섯 배는 더 찍었지 싶다.
안타깝게도 우리 작가께서 다소 불편하시다보니,
의도치않게 자꾸 흔들려 아깝지만 하는 수 없이...ㅜㅜ
정말 많이 걸었었다.
그 길들이 그나마 평지였길래 그렇게 오래, 많이 걸을 수 있었지,
오르막이나 내리막이었으면 우리 둘 다 반의 반도 못 걸었을 거다.
지그재그로, 나무 바닥 길도 걷고, 정원길도 이리저리 오가며 걷고
대로도 걷다가, 마지막엔 흙길까지 다 걸어보느라...
<새벽 네 시 조금 지나 일어났는데, 다리가 뻐근했다.^^>
목도 마르고 해서, 가다가 수목원에 단 하나 있는 매점에 들러
시원한 거라도 마시자... 했는데,
흙길의 끝이 바로 주차장으로 이어질지 누가 알았겠는가.
어쩐지 그 길이 한참 이어진다 싶더라니...
수목원 입구까지 오는 버스도 없고, 택시도 안 보이고 해서,
타고온 지하철역까지 무작정 가보자며 걷다가,
커피가게를 발견하고 찾아들어간 거였다.
앉아서 쉬고도 싶었고, 시원한 것도 마시고 싶었다.
레모네이드 큰 잔으로 주문해서 마시는 동안,
가까운 사물을 찍을 때 더 촛점이 잘 맞지 않는대서,
일부러 잘 나올 때까지 막 찍어보라고 했더니,
마지막 사진처럼, 눈을 감는 순간까지 찍었다는~~^^
내 폰이 훨씬 더 예민한 모양이었다.
향기님 폰으로는 흔들림이 훨씬 적었다.
아무튼, 유감없이 가을을 누리고 가슴에 담고 왔다.
단지 몇 시간 그 안에 있었을 뿐인데,
다시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속으로 발을 디디니,
마치 딴세상으로 공간 이동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묘한 기분이...
다른 세상으로 툭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닷새 후부터 국화 축제한다고,
수목원 곳곳에 온갖 모양과 색깔의 국화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아직 날짜가 일러 지금은 대부분 망울만 져있는 상태라,
굳이 그 모습을 담지는 않았다.
만개하면 장관일 게 분명하지만,
그땐 수목원이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고,
그 북적거림 속에 섞여 있고 싶지는 않다.
어제 피어있던 국화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향기도 실컷 음미했고, 모습도 몇 컷 담았고... 그럼 된거지. ㅎㅎ
우린 어제 세상 공부<경험>도 많이 했었다.
난 대구에 지하철이 첨 생겼을 때 친구따라 한 번 타본 이후로
지하철을 타보기는 처음이었다.
고소공포증이나 폐쇄공포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데,
익숙한 것<지상에 다니는 교통 수단들>을 벗어나면 불안한 게,
나의 심각한 증상이라면 증상이겠거니 싶다.
지하철 타는 것도 배우고, 내려서 환승하는 것도 배웠다.
나이 먹었어도 모르는 건 배우고 경험해봐야 아는 거니까...^^
아무튼, 더 바라는 것 없이 만족했고, 감사했다.
오래도록 기억될만큼 가을이랑 참 잘 놀았던 날이었다~~^^
이 자릴 빌어서, 다시 한 번 향기님한테 감사를~~
데이트 신청해줘서 고마워,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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