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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IV) /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9. 15.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IV)

 

(김성수 목사)

 

 

(요 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유대주의라는 율법에서 빠져 나오게 되는 하나님의 양들을 향한 참 목자의 부르심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공부하셨던 것처럼 성도들의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우발적이며 즉흥적인 부르심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양들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열심을 근거로 부르시는 부르심도 아닙니다. 목자의 부르심은 창세전에 미리 아신 자들을 향한 부르심이며, 미리 정하시고 미리 택하신 자들을 향한 부르심이며, 종국에는 당신의 자녀로 완성시키시고야 마시는 부르심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성경의 예정 교리는 성경이해의 핵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 부분을 확실하게 이해를 하시고 넘어 가셔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8장 28절 이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롬 8:28-30)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에 여러 가지 단계들이 나오는데 우리는 지난주까지 미리 아심과 미리 택하심, 그리고 부르심에 관한 부분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 그 나머지를 마저 공부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오늘날 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 전체를 관통하며 수많은 오해와 오류를 낳게 했던 세대주의나 알매니언 주의의 교리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반복해서 설명하고 또 설명해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주까지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를 해 드리고 오늘 공부할 부분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러 주에 걸쳐서 하나님의 택하심과 정하심은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나 자격이나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한 창세전의 작정이며 예정임을 배웠습니다.

 

(롬 9:11)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딤후 1:9)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고전 2:6-7)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따라서 창세전에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방인들의 구원에 관한 부분이 없었다고 하는 세대주의나 인간들의 행위가 그들의 구원에 조건으로 작용한다고 하는 알매니언 주의는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미 창세전에 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이미 창세전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역사 속에서, 가시적 시점으로 볼 때 이 천 년 전에 죽으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영원 속에서의 구속사적 관점으로 볼 때 주님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죽으신 것이고 그 죽으심이 이 모든 역사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계 13:8)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여기서 ‘창세 이후로’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는 ‘쓰다’라는 단어 ‘그랍호’와 ‘죽임을 당한’이라고 번역이 된 ‘애습하그메누’ 둘 다에 걸리는 어구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면 ‘창세 때부터(창세전에) 이미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때부터 녹명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게 된다.’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모든 성도들의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이미 창세전에 계획되었고, 실행되었으며 그 십자가의 공로에 걸리는, 부르심을 입을 백성들 또한 창세전에 이미 예정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군더더기를 다 빼고 창세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택하심과 정하심, 즉 예정을 이렇게 명확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엡 1:4-5)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렇게 하나님은 계획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계획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전지전능한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대주의자들이나 알매니언 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우연으로 일을 하시는 분도 아니고, 임시적이며, 방편적이며, 즉흥적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갈 4:4)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보세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도 미리 정해 놓으셨고 그 분의 죽으심과 살아나심과 다시 오심까지도 다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게 ‘때’입니다. 그리고 그 ‘때’를 여러 선지자들에게 미리 알리시고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벧전 1:8-12)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9 이것은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인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0 예언자들이 이 구원을 추구하고 연구하였으며, 그들은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예언하였습니다. 11 그들은 누구에게, 그리고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12 예언자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일들은 이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이 일들은 천사들도 보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다니엘서 9장의 칠 십 이레의 부분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이 우주의 종말 때까지의 시간을 이미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을 배웠지요? 그렇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해 놓으시고 선지자들에게 그 계획을 미리 알리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만방에 알리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즉흥적이며 우발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세대주의는 엄밀히 말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철회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부르신 유대인들이 그 부르심을 거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원래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만 예수를 보내셨는데 그들이 예수를 거부하고 죽여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샘나게 하실 양으로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이 세대주의의 유치한 주장 아닙니까?

 

(롬 11:29)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약 1:17) "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 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성경은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후회도 없으신 분이라 이토록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후회도 잘하시고 당신의 계획에도 조변석개하시는 분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와 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미리 정하심(롬8:29)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정하다’라고 번역이 된 ‘프로 호리조’는 'horizon, 수평선‘이라는 단어의 어근입니다. 수평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 짓는 경계이지요? 그것처럼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은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속에 들어 있는 이들을 구별하여 한 울타리 속에 넣는 작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영적인 영역의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울타리 밖으로 양들을 끌어내어 우리 안의 양들과 목자의 양들을 분리하여 구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세전에 영원 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게 ’미리 정하심, 프로 호리조‘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구별하시고 그 주위에 수평선으로 둘러놓으신 것입니다. 언제요? 창세전에요. 그리고는 그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지금 부르심에 대한 내용을 공부하기 위해 중심 요절로 택한 로마서 8장 28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롬 8:28-30)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 순서를 잘 보세요. 먼저 미리 아심이 있고 그 다음에 미리 정하심이 나오며 그 다음에 부르심이 나오고 그 다음에 의롭다 하심, 칭의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영화입니다. 정확하게 부르심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둘씩 갈라집니다. 부르심의 왼쪽으로는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이 있고 부르심의 오른쪽으로는 의롭다하심과 영화롭게 하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도된 순서입니다. 사도는 그러한 순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에서 일어난 일과 그것이 역사 속에서 실제화 되어지는 것 사이에 부르심이라는 역사와 시간 속에서의 실제화의 시점을 놓아 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논리적인 순서입니다. 그러니까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 즉 칭의, 그리고 영화는 이 역사 속에서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이 실제화 되어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행 13:46-48)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들을 핍박했지만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이들은 다 믿더라고 하지요? 이렇게 미리 정해 놓으신(프로 호리조)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 이제 하나님을 믿겠습니다.’하고 하나님의 울타리 속으로 하나하나 들어오는 것을 ‘부르심’이라 하는 것입니다.

 

(갈 1:15-16)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미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함과 정함을 받았고 다메섹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은 미리 아심, 즉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 그리고 미리 정하심이 역사와 시간 속에서 실제화 되는 첫 시점(始點)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역사와 시간 속에서 의롭게 되어져 가는 것이고 영화롭게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칭의와 영화로 넘어 왔습니다.

 

(롬 5: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갈 2:16)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롬 3:21-22)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렇게 의롭다함은 항상 믿음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의롭다하심은 우리에게 믿음이 들어올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믿음이 들어오는 시점은 언제입니까? 바로 부르심을 입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의롭다하심, 칭의는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란 우리의 몸까지 완전히 구속이 되어 이제 더 이상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존재로 새롭게 창조가 되는 그 지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이 의롭다하심과 영화롭게 하심을 과거시제로 표현을 했을까요? 아직 우리는 의롭게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냥 의롭다 칭해진 것일 뿐입니다. 그게 칭의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의 지점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이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우리의 의와 영화를 이야기할까요? 계획과 작정 속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절대 자신의 일을 실패하거나 중도에 포기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성경이 예변적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의롭게 되었다, 영화롭게 되었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0절의 ‘칭의’와 ‘영화’ 사이에 ‘성화’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하시고 그들을 성화시키시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해야 구원의 서정이 이가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는 굳이 ‘성화’를 그 사이에 집어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28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확신에 찬 선포를 했습니다. 그 말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최종 목적지인 ‘선’의 지점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필요한 과정이 바로 ‘성화’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성화는 ‘칭의’와 ‘영화’ 사이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기에 사도가 굳이 ‘칭의’와 ‘영화’ 사이에 ‘성화’를 넣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순간 성화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부르심을 입은 그 순간부터 영화의 지점까지의 모든 시간이 다 성화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성화는 칭의에 함축되어 있다’라고 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화에 관한 정의입니다. 여러분, 많은 이들이 성화를 내가 얼마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으로 변했는가로 측정을 하곤 합니다. 성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화는 우리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옛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굳이 성화의 분량을 잰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중심적 자아에서 벗어났는가를 그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지 그 사람이 얼마나 멋지게 변했는가로 판단 기준을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주 훌륭한 삶을 살면서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달라, 나는 선천적으로 온유하고, 사랑이 많고, 섬기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그런 파렴치한 죄인들의 범주로 매도당하고 싶지 않아, 앞으로도 이렇게 훌륭한 삶을 잘 살아내어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아야지’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극악한 죄인인 것입니다. 성화는 그러한 겉모습의 변화가 아니라 내가 ‘나’라는 존재를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옆 십자가에 달려 막판 뒤집기로 구원을 얻은 그 강도처럼 ‘내가 지금까지는 나의 힘과 세상의 것들을 행복과 만족의 조건으로 삼아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왔는데 그간의 많은 경험들과 배움 들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이 세상의 힘을 쌓아서, 혹은 나의 명성과 인기로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에게 온전히 순종할 때에 비로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을 알았다. 이제부터 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아야지’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들이 성화의 과정 속에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고후 3:18)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잘 보세요. 우리의 목표지점은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형상’이라고 번역이 된 ‘에이콘’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겉모양만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헬라어 ‘에이콘’은 내적인 일치를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에게 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고후 4:4)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이니라"

 

(골 1:15)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이렇게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내적 진수와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일체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은 두 분의 뜻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전제 되어야 합니까?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완전히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삼위일체의 하나님에게 ‘순종’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만 우리의 제한된 이성의 이해의 범위에서 그 일체라는 개념을 설명해 드리기 위해 그런 단어를 쓸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형상, 에이콘’이라는 말은 자기가 부인된 완전한 받아들임이 전제되는 단어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도달해야 할 영화의 지점은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고 순종하는 자로 완성되는 지점이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한층 개선되고 발전된 행위를 내어놓아야 하는 지점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내적인 일치를 이루어 내어 하나로 포개어지는 그런 상태가 영화의 상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옛 자아가 죽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모든 순간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칭의와 성화와 영화는 필연적이며, 실패할 수 없는 것이며, 중도에 포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그러한 것을 가리켜 ‘견인’이라 부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구원이 절대 중도에 포기되지 않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견인에 관한 내용은 로마서 8장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전체는 바로 그러한 성도의 구원의 최종성과 확실성과 안정성에 관해 무려 서른아홉 절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는 장입니다. 그 8장의 맨 마지막 부분을 우리가 오늘 새벽에 공부를 했는데 그 부분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롬 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성경을 통해 확인한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성도는 많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성도들은 혹시 자기가 그러한 시련과 환난을 다 감당해 내지 못하고 실패하고 실족하게 되어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절대 그러한 고난 속에서 자폭할 수 없다’고요. 37절을 보시면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데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결단과 인내에 의해서가 아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우리가 이긴다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반드시 이기게 만드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죽이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기 때문이며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성도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1:8-9)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따라서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붙이는 역할을 할지언정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내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35절‘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의 의미가 이해가 가시지요? 마찬가지로 사망이나 생명, 천사들, 현재일, 장래일, 능력, 높은, 깊음, 다른 아무 피조물들도 절대로 우리의 구원에 걸림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롬 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대목에서 조금 이상한 것이 없으세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대적의 목록에 사망과 생명과 현재 일과 장래일, 그리고 높음, 깊음 등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사망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시지요? 우리 주님께서 사망을 이기셨으므로 우리는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고 사망을 이긴 자들이 되었기에 사망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망과 생명은 하나로 묶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시 44:22) "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지금 시편 기자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에 대한 애착입니다. 자신에게는 생명이 너무나 소중한데 하나님께서 종일 자기를 죽음에 내어 놓은 것처럼 힘이 들고 자신이 도살할 양처럼 여겨짐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명의 스러짐에 대한 불안함도 우리 성도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사망과 생명의 열쇠를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계 1:18)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 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놓으시면 살아서 충성이요 우리를 죽이신다 할지라도 충성스럽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망도 생명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천사와 권세 자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여기서 천사와 권세 자들은 악한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더 이상 참소 할 수 없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요?

 

(골 2:15)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여기서 ‘밝히 드러내시고’라고 번역이 된 부분은 ‘포로로 삼아 구경거리로 만드시고’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세력들은 우리를 참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미 구경거리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일은 무엇일까요? 현재일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현재에 우리가 당하는 좌절과 실망과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모두 지칭하는 것입니다.

 

(롬 8:34)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 계십니다. 어디에 계시지요? 우리 안에 계십니다. 무엇을 하시려고요?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게 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일 들은 모두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하에 일어나는 일들인 것입니다.

 

(히 13:5) "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벧전 1:5)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벧후 1:3)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성경은 그렇게 우리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신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도 표현을 합니다.

 

(히 1:3)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의 보좌는 그 분의 권세를 상징하는 단어라 했지요? 당신의 모든 계획을 완성하시고 자기의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의 예배를 받으시는 그러한 모습을 우리는 창세기 2장의 안식이라는 단어를 공부할 때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리를 찾아서 앉으시는 것을 우리가 ‘사바쓰, 안식’이라 한다고 했잖아요? 형체도 모양도 없으신 하나님이 어디에 앉으신다는 개념 자체가 엉뚱한 것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이 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표현은 우리 주님이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완성의 지점에서 안식을 하고 계시는 모양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그러한 안식의 자리에 앉으시는 구속사의 결론을 확실하게 정해 놓으시고 지금 그 자리를 향해 열심히 우리 안에서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일은 모두 합력하여 우리의 선에 기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히 10:12-14)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그렇지요? 그러면 장래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장래일이 적힌 책이 한 권 나오는데 그 어느 누구도 그 책의 인봉을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께서 그 책을 여시고 인봉을 떼십니다. 그러니까 장래일도 모두 주님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높음은 세상 권세 잡은 자의 기고만장함을 지칭하는 것이고 깊음은 지옥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땅 아래 곳까지 내려가셨던 분이십니다.(엡4:8-9)그러나 거기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높아지신 분이십니다.

 

(빌 2:8-9)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따라서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목자의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은 여러분은 안전한 것입니다. 아니 안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것에도 자폭하지 마시고 잘 견뎌 내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러한 성도의 견인의 교리와 모순이 되는 듯한 성경의 구절들을 찾아서 확실하게 그 의미를 규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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