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II)
(김성수 목사)
(요 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지난주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요한복음 9장의 눈뜬 소경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과, 율법을 들어 그를 출교시키면서까지 자신들의 정당함과 기득권을 옹호하려 했던 바리새인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을 등장인물로 하여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 9장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자신의 구원에 대해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 어떤 노력이나 시도를 해본 적이 전혀 없는 한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과 선택에 의해, 오직 은혜로만 눈을 뜨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의 핵심 교리인 것입니다.
인간은 거기에다 그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이나 노력을 보탤 수 없는 무력하고 불가능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제사제도와 절기를 열심히 지키는 자신들만이 선민이라 자랑을 했고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가 충분히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율법을 들고 나와 은혜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9:41)’라는 일갈로 9장을 마치시고는 친절하게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를 10장에서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구원의 길은 소경의 길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지요.
다시 한 번 10장의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유대교 혹은 유대주의라는 양의 우리에 목자이신 주님의 양과 세상의 양들이 섞여서 살고 있습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유대주의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낼 수 있는 존재여서 본인들의 구원에 자신들의 힘과 세상 것들을 동원하여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의 지혜와 힘을 전제로 하는 모든 세상의 종교와 삶의 원리를 대표하는 것이니까요. 그 유대주의라는 거대한 세상에서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기는 있습니다. 죄인들이 그 세상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웬만한 노력과 열심과 업적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완벽한 율법 준수가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문이 하나있는데 성경은 그 문을 가리켜 은혜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실 수 있으며, 지켜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완전한 율법 준수로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지키면 살고 안 지키면 죽는다’가 유대교에 내려진 하나님의 언약(옛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세상에 내려진 하나님의 첫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으며, 그 안에 선한 것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롬3:10-12) 따라서 그 유대교에서 약속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위선과 외식 속에서 형식적인 율법 준수와 제사, 그리고 절기 준수 등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요구된 하나님의 명령을 모두 다 수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온전한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이 아닌 담을 타고 넘어 들어간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율법을 완전히 지켜내신 예수님만이 참 목자요 참 교사라는 것이지요.
주님은 진정한 구원은 양의 문이시며 참 목자이신 당신의 음성을 듣고 인간과 세상의 가능성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형식적 유대교에서 빠져나와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임을 희화화해서 교회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치 않으려하는 인본주의를 대표하며 상징하는 유대교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은 완전한 율법준수로 우리에게 의를 선물하신 양의 문 예수 그리스도를 밟고, 다른 말로 그분의 희생을 의지하여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8장에서는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 것’이라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어 하나님으로 끝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지금 읽어드린 로마서 8장 29절 30절에서 쓰인 동사가 모두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헬라어의 부정과거 시제는 과거의 어느 때에 이미 일어난 일이 계속해서 영향을 미칠 때에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완성이 되어 이 역사 속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알매니언 주의자들은 거기에서 쓰인 ‘미리 알다’라는 단어를 들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창세전에 미래를 내다보시고 누가 믿어 줄 것인지 누가 안 믿어 줄 것인지를 미리 아시고 그들을 택하신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고 했지요?
그것을 신학에서는 예지 예정설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의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능력에 있게 되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의 교리가 모두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선택과 능력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이 수시로 바뀌어야 하니까요. 그 교리에 따르면 지금 하나님의 머릿속에서 계획되어지고 작정되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역사와 역사의 종국은 인간들의 선택과 행위에 따라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역사는 그렇게 목적도 없이 표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이미 완성된 명쾌한 목적지를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리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알매니언 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요한복음은 다 찢어 버려야 합니다.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도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면 안 되지요? 그는 구원받은 죄인들을 대표하여 등장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그는 날 때부터 자기를 구원할 능력과 지혜를 소유한 멋진 사람으로 등장해야 옳지요. 그래서 제가 지난주에 알매니언 주의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그 ‘미리 알다’라는 단어를 설명하다가 시간이 없어서 다 마치지 못했는데요.
오늘은 그 ‘미리 알다’라는 단어에 관해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고 아울러 거기에 이어지는 부르심과 택하심과 의롭다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까지 모두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다음 주까지 설명을 해야 다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요한복음 10장을 아주 쉽게 이해를 하실 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성경에서 쓰이는 ‘알다’라는 단어가 언약의 언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안다고 하셨을 때 그 것은 언약 속에서 택하여 진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그 언약의 뿌리는 창세전에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피의 언약이라는 것도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 십자가라는 언약의 본체를 근거로 원시복음, 노아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 다윗의 언약 등이 모형과 그림자로 주어진 것이라 했습니다. 신약에는 ‘미리 알다’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그 중 두 번은 사람을 아는 것에 쓰여 졌고 다른 다섯 번의 경우에는 하나님 자신에 관해 쓰여 졌습니다. 몇 군데만 확인을 하고 가지요.
(행 2:23) “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었고 미리 아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언약하신대로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정하신’이라는 단어는 ‘뜻’과 ‘미리 아신’ 모두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정하신 미리 아심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서도 ‘미리 알다’라는 말이 언약의 언어로 쓰이고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다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아닌데 어느 날 미래를 내다 보다보니까 자기 아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는 말은 아닐 것 아닙니까? 굉장히 우습지요? 그런데 알매니언 주의자들은 그 ‘미리 아심’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본단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이요,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은 사도행전 4장에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행 4:27-28)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그리고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뜻대로 예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 성에 모이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미리 앎’입니다.
(롬 11:2-5)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음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와 엘리야의 칠천을 예로 듭니다. 그런데 5절을 보시면 그들이 모두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라 합니다. 교회가 바로 그렇게 은혜로 택하심을 입어 남은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은 창세전에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들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리 아심은 하나님의 은혜의 언어이지 인간의 공력이나 업적이나 노력이나 자격 등과 관계있는 언어가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서로 가보지요.
(벧전 1:2)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여기에도 보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모든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그렇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택하여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창세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에 따라 택함이 비롯되었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벧전 1:18-20)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 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우리 교회의 구속(값을 지불하고 풀어줌)은 금이나 은(그 안에는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이 포함된 것임)같은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값으로 지불이 되고 구속이 된 것인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창세전에 미리 약속되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 속에 들어 있지 않은, 하나님의 ‘미리 앎’ 속에서 제외된 자들이 마태복음 7장에 나옵니다.
(마 7:22-23)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아무리 엄청난 기적을 행하고 아무리 훌륭한 선지자 노릇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미리 알지 못하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있지 않은 자들은 모두 불법을 행하는 자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라는 개념은 ‘사랑’이라는 단어로도 혼용하여 쓸 수 있습니다.
(신 7:6-8)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의 자격과 조건을 보시고 택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을 사랑하심을 인하여 택하셨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구절들에서는 ‘택하심’이라는 단어와 ‘미리 아심’이라는 단어가 어우러져서 나왔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택하심’과 ‘사랑하심’이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렘 31:3) “3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도 인도하심과 사랑하심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택하심과 인도하심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 속에서 작정된 것이며 그 하나님의 언약과 작정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전에 에베소서 강해를 할 때에 그 미리 아심이라는 단어를 사랑이라는 단어로 바꾸어서 설명해 드리기도 한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당신의 백성들을 창조하여 당신이 누리시는 하늘의 풍요와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하게 무죄한 자로 지어졌으나 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까지 주어진 그런 엄청난 존재였기 때문에 타락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을 했을 때 왜 새로 up grade해서 만들지 않으셨는지 아세요? 인간은 피조물 중에 가장 완벽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로서 그보다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실 수 없을 만큼 완전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다른 인간을 안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애초에 죄를 안 짓는 존재로 만들면 되지 않았는가?
그러면 그건 로봇에 불과할 뿐이지요. 하나님은 인격과 이성과 진심을 가진 당신의 친구요 자녀들로 인간을 만드셨던 것이고 그들에게 당신을 경험케 하시고 계시하시기 위해 인간에게 타락의 가능성도 심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타락의 가능성을 심어놓으셨는가에 대해 많은 이론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의 불완전함까지 들먹이며 그 이유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와 우주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시며, 그 분의 사랑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지혜와 명철이 얼마나 웅숭깊고 넓은 것이며, 그 분의 가늠할 수 없는 크신 능력 등을 피조물들에게 알리시기 위해 인간의 타락을 작정하시고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구속사와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즉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사 43:7)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과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가 된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이 천지만물에 하나님의 신성이 나타나 있다고 한 것도 바로 그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천지만물은 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천지만물은 존재하는 것 자체에서부터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계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것들이 타락에서 비롯된 저주로부터 회복되는 과정을 만방에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와 섬김 등의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과 하나님 되심이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도덕적 피조물들이 자발적이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음으로 다시는 그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의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마귀가 교보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 우리 인간들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능력을 소유한 마귀를 등장시키셔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를 이기고 구원에 도달할 수 없음을, 다른 말로 구원에 있어서의 우리의 무능력함과 불가능함을 가르치시고 종국에 그 세력을 가볍게 결박하시고 불 못에 쳐 넣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 또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은혜의 치명적 필요성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마귀마저도 동원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성경의 일관성 있는 진술인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지요? 오늘도 시간이 많이 간 관계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자세하게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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