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III)
(김성수 목사)
(요 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은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목자는 양을 우리에서 불러내시는 분이라 했는데 그 부르심은 어떤 부르심을 말하는 것인가? 먼저 부르심 하면 우리가 예전에 공부한 일반적인 부르심과 효과적인 부르심이 떠 오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일반적인 부르심, 그러니까 보편적인 부르심과 효과적인 부르심, 즉 유효한 부르심의 두 종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적용이 됩니다. 예를 들어 전철역에서 어떤 이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고 있을 때 그 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은 일반적 부르심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들은 척 만척하고 지나가는데 유독 어떤 사람이 똑같은 말을 듣고 나서 인생의 허무함과 죄의 추악함과 인간의 불가능함과 구원자의 필요를 절감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나섰다면 그는 효과적인 부르심을 입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마 22:14)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일반적 부르심) 택함을 입은 자(효과적 부르심)는 적으니라"
따라서 우리 성도는 모두 효과적 부르심에 반응하여 양의 우리 밖으로 나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효과적인 부르심은 그 부르심의 대상들의 내용과 본질, 그리고 그 대상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를 정하여 부르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리 아신(택하신)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미 그 부르신 자의 내용과 본질 뿐 아니라 미래, 과거, 현재를 모두 부르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랑이신 하나님이 신부인 교회를 부르시는 부르심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신랑이신 하나님이 신부인 교회를 부르시는 것의 모형으로 성경에 최초의 인간 아담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사건이 창세기2장에 나옵니다. 그 부분을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 10장으로, 또 로마서 8장 29절로 연결시켜 보면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창 2:19-20,23)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아담이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각 생물들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갈비뼈로 만든 배우자를 여자 ‘이솨’라 부릅니다. 그 ‘이솨’라는 단어는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남자 ‘이쉬’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여자는 자신에게서 나왔으므로 그 존재의 내용과 본질, 그리고 그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탄생이 되었는지를 아담이 완전하게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존재를 ‘나에게서 비롯된 자’라는 의미로 ‘이쉬’라는 단어에 점 하나만 보태서 ‘이솨’라 부른 것입니다. 나에게서 나왔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신랑인 아담이 신부인 하와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은 나중에 신약에서 신랑이신 예수께서 자기의 살과 피로 만들어 내신 영원한 신부 교회를 부르시는 것을 미리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교회 청년들이 결혼식을 할 때마다 제가 주례사로 반복해서 설명해 드렸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미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다 기억나시지요? 신랑과 신부의 이야기는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이야기라는 것.
마찬가지로 흙으로 지어진 짐승들의 특징과 내용과 본질 또한 아담이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성경이 고지하고자 그가 그 짐승들의 이름을 부른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아담의 다스림의 대상이었거든요. 따라서 아담은 그들의 내용과 본질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신부인 하와가 흙이나 다른 재료로 만들어지지 않고 아담의 신체의 일부로 지어졌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신부로서의 교회를 당신 자신의 성품과 인격과 능력과 권세를 부어서 신은 아니지만 신적존재로 만드셔서 당신의 일부가 되게 하실 것임을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살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고 당신의 피를 마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구원에 관한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실제로 예수님과 연합이 되어 함께한 후사(공동 상속자)가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바로 그러한 웅숭깊은 내용을 모두 함의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목자가 양을 부르는 사건은 목자가 양의 모든 내용과 본질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 양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목자가 통제하고 쥐고 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그 목자의 내용과 본질이 양에게 전가되어 한 본질로 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의 내용과 본질을 그대로 받은 부르심을 입은 신부들은 자기들의 삶이 아닌 신랑이신 예수의 삶을 추구하게 되고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성경은 성도를 가리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반복하여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롬 1:7)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유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딤후 1:9)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렇게 우리 성도는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주섬주섬 목자를 향해 은혜의 문을 통과하여 선한 목자 앞에 그의 양으로 서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런 공로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존재케 된 것이며, 오직 목자의 지팡이 아래에서 은혜로 생존하고 있는 자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그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는 열린 귀를 가진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들이 이 세상의 힘을 쌓아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고, 인간에게도 선을 행할 능력이 있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의 행위를 보태야 한다는 바리새인들의 유대주의가 지금까지도 기독교를 흔들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바로 거기서 불러내셨다고 하는데 여전히 그 안에서 자신은 목자의 부르심에 응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추측 컨데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분명한 것입니다.
제가 진짜 신랑의 부르심을 입은 신부들과 부르심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가짜들의 차이점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목자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고 양의 우리에서 뛰쳐나온 진짜 목자의 양들은 이제 다른 양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첫 번째로 목자 되신 주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에 응한 양들의 특징은 자신을 부르신 목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롬 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보세요.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참 양들은 자기를 부르신 목자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목자를 향한 사랑이 격발이 되는지 볼까요?
(요일 4:19)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우리가 아무 자격도 없고 구원을 받을만한 아무런 조건도 갖추지 못했을 때에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찬 복음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인식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능력과 사랑 앞에 납작 엎드려 그 분께 순종하게 되는 것이며 그 분의 그 사랑과 인내 앞에 자신의 사랑을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엡 3:14-19) "14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아는 만큼 우리 또한 그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되며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을 내어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효과적인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성경은 분명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이렇게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데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으며 그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지속적이며 역동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 자체에 창조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고 사랑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경험하게 될 때 그 사랑이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사랑에는 창조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참된 이해가 있고 그 이해에서 비롯된 진정한 사랑이 오가게 될 때 거기에서 새 창조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역동적이어야 하며 지속적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새 창조는 계속해서 역동적으로 일어나야 하니까요.
여러분에게도 지금은 다 지나간,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첫사랑이 있으시지요? 그때 그렇게 목을 매었던 그 사랑이 지금도 그렇게 가슴 아리게 느껴집니까? 수십 년이 지난 그 첫 사랑을 늘그막에 반추해보면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좋은 기억은 될지언정 그렇게 목숨 걸고 지켜내고자 하는 열망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진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지속성과 역동성이 필연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계속해서 주고 받아야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면서 ‘언젠가 나에게 한 번 부어진 일회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폄하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은혜로 우리에게 역동적으로 부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매일 매일 그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혹은 성경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배워가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눈에 보이는 행위를 억지로 하게 되면 그것은 그야말로 노동이 되는 것이지 사랑의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를 한답시고 열심히 구제를 했다고 해보자고요. 그는 그러한 구제의 행위를 하면서 자신의 지갑에서 나가는 돈과 자신의 시간이 아주 아까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도 않는 대상을 위해 억지로 사랑의 행위를 흉내 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배우고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한답시고 열심히 교리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하나님 나라를 더 깊이 체험하고 싶어서 성경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를 반드시 내어 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성경을 공부한 사람은 그 사람의 성경 지식으로 반드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성경지식은 아주 해박한데 그 사람만 만나면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것 같고 재수가 없는 그런 사람이 있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사랑의 행위는 사랑으로 표출이 되지 않고 교만으로 분출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죄의 칼날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지 않은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헌금은 교회에 득이 되기는커녕 항상 사고의 원인이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지금도 여러분에게 쏟아 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지속적이며 역동적인 사랑을 배우시고, 경험하셔야 하며, 수시로 확인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의무에서 억지로 나온 사랑은 오히려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뿐입니다.
하루는 어떤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에게 아름다운 꽃을 안기면서 ‘얼른 옷 갈아입어, 우리 저녁 식사하러 가자. 내가 이미 근사한 자리로 예약을 다 해 놓았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아내가 감격을 했겠지요. 그래서 아내가 들뜬 마음에 급히 옷을 갈아입으면서 ‘여보, 나 너무 감격했어, 그런데 오늘 왜 그래? 오늘 무슨 날이야?’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남편이 ‘당신이 나에게 쏟아 부어주는 사랑을 생각하면 매일이라도 이렇게 하고 싶지. 그런데 내가 능력이 없어서 가끔씩 밖에 당신을 즐겁게 해 주지 못해 미안해. 당신이 나를 위해 희생하고 손해 보는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냐’하면 그 아내는 거기서 그냥 쓰러지지요. 그런데 그 남편이 ‘이건 의무니까, 가끔씩 이렇게 해 줘야 내 생활이 편하지, 얼른 옷이나 입어’하면 그 아내가 어떤 기분이 들까요? 꽃으로 두들겨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 분의 사랑고백을 몇 군데만 볼까요?
(눅 3:21-22)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시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위에 성령이 임하는 사건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영적 세례 사건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시는 그 예수 안에는 예수 안에 연합되어 세례를 받은 우리 성도 전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 17:23)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어떠세요? 분명히 그렇지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신 그 같은 분량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모성애가 가득한 말씀도 하십니다.
(시 2:7)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에서 인용이 되는데요.
(히 1:5) "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의 첫 번째 시민으로 부활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그 분이 낳으신 아들로 불리운 것처럼 우리 성도 또한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여, 미리 아시고, 미리 택하시고, 미리 정하시고, 미리 부르시고, 산고 끝에 낳으신 참 아들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절감한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목자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 수직적 사랑을 맛본 자들은 수평적 사랑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요일 4:20-21)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 지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분이 사랑하라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수직적 사랑은 반드시 이웃을 향한 사랑, 수평적 사랑을 격발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신 것입니다.
(마 5:43-47)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에게 원수들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원수까지도 품어 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고난에 대처하는 모습이 자연인들과 사뭇 다릅니다. 욥기로 한 번 가보겠습니다.
(욥 1:11)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 하리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회의에서 당신의 백성 욥을 자랑하셨습니다. 욥이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지요.(욥1:8) 그랬더니 사단이 말하기를 ‘욥에게 고난을 줘 보세요. 그러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금방 욕을 하고 말겁니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자식들이 다 죽고 소유가 다 날아갔습니다. 그 때 욥의 반응이 어떤지 보세요.
(욥 1:20-22)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 하니라"
반면에 욥의 아내는 어땠습니까? 분명 그의 아내는 욥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때에 곁에서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아무 일이 없이 평온할 때였지요. 거기에 갑자기 고난이 닥치자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욥 2:9-10) "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 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 치 아니 하니라"
욥과 그의 아내의 반응이 완전히 다르지요? 심지어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 목숨을 가져가셔도 하나님을 의뢰하겠다고 합니다.(13:15) 이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마 13:20-21)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이렇게 돌밭, 즉 가짜들은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곧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환난과 핍박도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으로 믿기에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선히 사용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이스라엘의 대적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치신 것을 기억하시지요? 사사기의 내용은 거의 다 그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역과 벌 떼 등으로 이스라엘을 쳐서 괴롭히신 적도 많습니다. 그러한 것은 모두 이스라엘을 정도로 이끄시기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며 배려였던 것입니다. 고린도서로 가보지요.
(고전 11:27-32)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 이니라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성찬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떡,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그의 피를 마심으로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은혜의 교리와 하나 됨과 평등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부자들이나 권세를 가진 자들이 교회에 와서도 거들먹거리며 가난한자들과 약한 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그들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음식과 포도주를 다 먹어버리는 그런 일이 초대교회에 자주 일어났다고 하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셨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치시고, 병을 주시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시기 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요.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가르치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32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를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게 징계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 119:67-70)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69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70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고난에 대처하는 모습이 다른 이들과 사뭇 다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로 성숙되더라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세 번째로 연결이 되었네요. 세 번째로 효과적인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 지키기를 즐거워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자로 성숙되어지기 위해 하나님께서 고난을 사용하신다면 그것까지도 감수하겠다는 것이 성도의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 14:21)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다는 것이고 그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고 그와 같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참된 소원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정말 사랑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곧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의 내용이니까요. 여러분, 성경에 십계명이 딱 두 군데 나옵니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열 가지 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항상 전제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것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20:2)입니다. 그 말은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내었으니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내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 지킴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주지시키시는 것입니다. ‘내가 한없는 사랑으로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내지 않았니? 너희가 정말 그것을 잊지 않고 있고 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면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게 잘 안되지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고 사랑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는 자꾸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그 때 필요한 게 뭔지 아세요? 그렇게 주님의 율례를 배우기 위해 우리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지식과 고난인 것입니다.
(시 119:71)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잘 기억해 보세요. 주님은 당신 자신이 문이라고 해놓고 스스로를 좁은 문이라 하셨습니다.
(마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라는 문은 은혜의 문이라고 하면서 왜 그 문을 좁고 협착한 문이라 할까요? 은혜의 문은 넉넉하고 풍성한 넓은 문이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 주님은 그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눅 13:24)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이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창세전에 택함을 받아 부르심을 입고 양의 문으로 나온 자들, 즉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의 현실의 삶 속에서 힘쓰고 애써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힘쓰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고니제스데’는 투기장이나 운동경기에서 전력투구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좁은 문인 양의 문을 나와 주님의 품에 안기기까지에는 고된 애씀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 힘쓰라는 단어가 현재형으로 쓰인 것은 부르심을 입은 성도의 현재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제 곧 그 문이 닫히면 우리는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간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오늘을 살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애씀을 통하여 주님의 율례를 배우고 하나님의 참된 양으로 양육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애를 쓰십시다. 여러분,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누림의 능력이 아니라 나눔이요, 섬김이요, 용서요, 희생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다운 자들로 지어져 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고난이 끌로, 혹은 정으로, 혹은 대패로, 혹은 망치로 다가와 우리를 다듬어 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찾아와 그들을 용서하는 자로, 섬기는 자로, 인내하는 자로,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가는 것이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요술램프의 지니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세상을 꺾을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참고 용서하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엉뚱한 기대를 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절망하고 원망하며 자폭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몇 년 전에 콜로라도 선교센터에서 두 명을 쏴 죽이고 뉴 라이프 교회로 향하던 매튜 머리라는 사람이 뉴 라이프 교회 안전 요원(security guard)에게 사살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일기의 일부가 공개 되었었는데 저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그의 일기의 일부가 이러합니다. ‘하나님 내가 당신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는데 왜 내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왜 나에게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왜 나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해 주지 않습니까? 난 당신을 혐오합니다.’ 그리고는 그 분을 참지 못하고 사람들을 둘이나 죽이고 교회로 가서 예배당에 있던 사람들을 쏴 죽이러 가다가 사살당한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 주시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복수를 한 것입니다. 마치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신애가 하나님을 조롱하면서 자신의 몸을 막 굴리는 그런 심리인 것이지요.
그리고 아울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의 손발을 움직여 열심히 걸어야 하는 긴 여정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왜 나를 변화시켜 주지 않느냐고 원망한다고 해서 우리가 변하지 않습니다. 애를 쓰셔야 합니다. 애를 쓰다가 자기에게 실망하고 절망하여 자기부인에 이르고 그렇게 자기가 부인될 때 자기 안에서 사시는 예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변화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성품인 섬김과 용서와 인내와 사랑과 희생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내 안에서 사시는 예수를 경험할 때마다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소망을 더욱 더 공고히 다져 주는 것입니다. 애를 쓰십시오. 다음 시간에는 그렇게 부르심을 입은 양들의 구원은 과연 지속적이며 변함없이 확실한 것인가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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