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I)
(김성수 목사)
(요 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 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선한 목자와 양의 비유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이 10장은 9장과 긴밀한 연결이 되어 있는 장입니다. 아니 9장의 연속으로 봐야 옳습니다. 간단하게 이 부분으로 이어지는 문맥을 훑어봄으로 해서 오늘 본문의 이해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을 배경으로 한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영생은 이 땅의 떡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설명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디베랴 바다로 몰아넣으시고는 약속의 땅은 자신들의 노력과 열심을 의지하여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저주의 물 위를 걸으시는 유일하신 분,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들어가는 곳임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6장이 끝나고 7장으로 넘어와서 초막절을 배경으로 하여 유대인들의 율법준수와 절기지킴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기대를 생수와 빛을 소재로 하여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제단에 물을 붓고 커다란 촛불을 밝히는 예식을 행한다고 했지요? 주님은 그들의 종교행위에 등장하는 물과 빛을 예로 들어서 자신이 바로 율법과 성전 제사의 원형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주님은 7장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즉 내가 물이니 엉뚱하게 제단에다 물 갖다 붓는 수고 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자신들이 목숨 걸고 지키고 있는 율법을 무시하고 은혜를 이야기하는 예수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참 생수이신 주님의 정체와 그 생수가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하게 되는지를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을 합니다. 그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민수기 5장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에피소드라 했지요? 간음한 여인의 죄를 밝히기 위해 물을 티끌과 섞어 여인에게 마시우게 하는 민수기 5장의 그 이야기는 바로 생수이신 주님이 저주받은 티끌과 연합이 되어 자신이 티끌이 되시고 그들에게 생명의 물을 주는 십자가 복음이 그 속에 힌트 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러나 택한 자들만이 그 티끌 섞인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티끌 섞인 물을 먹고 육신이 붓고 떨어져 나가 버리는 간음한 여인처럼 예수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생수이신 주님이 죄로 인해 저주 속에 던져진 흙과 이겨져서 죄인들에게 제시가 됩니다. 역시 은혜지요? 그런데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는 죄인들은 그 은혜의 복음을 피해 다 도망가 버립니다. 그러나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오갈 곳이 없는 사형수인 간음한 여인은 그 은혜의 생수를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8장 초두에 삽입이 되어 있는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율법과 은혜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전개되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오직 은혜로만 너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하시는데 유대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들이대며 인간 측에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고 선언하십니다. 그 선언은 자신들의 종교 행위로 빛을 밝히려 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주님의 일갈이었습니다. 그러자 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주님을 죽이려 했고 주님은 그들을 피해 숨어서 성전을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9장으로 넘어와서 주님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죄인들의 대표로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던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하여 하나님의 구원은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자신의 구원에 대해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 어떤 노력이나 시도를 해본 적이 전혀 없는 한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과 선택에 의해, 오직 은혜로만 눈을 뜨게 되는 구원의 서정이 9장 전체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얻은 소경을 찾아가 힐문하고는 그를 출교시켜 버립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강화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9장의 눈뜬 소경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과, 율법을 들어 그를 출교시키면서까지 자신들의 정당함과 기득권을 옹호하려 했던 바리새인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을 등장인물로 하여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 상황을 설명해 주시는 부분인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설정하신 드라마의 등장인물과 무대세트를 정리해 보면 양과 목자, 그리고 문지기와 절도와 강도, 그리고 양의 우리와 양의 문 등이 있습니다. 그 등장인물과 무대 세트가 어떤 것을 비유하고 있는지부터 확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양의 우리부터 볼까요?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은 목축을 하는 지역에 사나운 들짐승들이 출몰하였기 때문에 동네마다 공동 양 우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양 우리는 마을 공동 소유로 삼았다고 합니다. 높이가 10에서 12피트 정도가 되었다고 하니 3미터가 넘는 꽤 높은 우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양의 우리를 지어놓고 한 면으로 양이 들어가고 나가는 문을 만들었는데 그 양의 문에서는 목자나 문지기가 스스로 문이 되어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양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항상 목자나 문지기를 밟고 나가야 하는 형국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안의 양은 목자나 문지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밖으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공동 양 우리에는 온 마을의 양들을 다 넣어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집 저 집의 양들이 서로 섞여서 밤을 지새우다가 아침에 목자가 와서 자기 양들을 부르면 그 목자의 양들이 정확하게 목자를 따라 나간다고 합니다. 참 신통한 능력이지요? 양은 아주 연약한 동물입니다. 양들은 시력이 나빠서 자기 앞의 양들도 제대로 보지 못해 자주 길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죄인들을 각기 제 길로 다니며 길을 잃는 양에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사 53:6)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게다가 양은 공격무기도 없어서 파리 하나도 쫓지 못하고 파리가 콧구멍에 알을 낳아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연약한 짐승입니다. 그리고 양은 자기를 지켜주는 목자가 없으면 무서워서 눕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듬직한 목자가 곁에 있을 때만 푸른 초장에 눕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신비한 능력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청력입니다. 실제로 동물학자들이 실험을 해보았는데 남의 목소리 흉내를 훌륭하게 내는 사람에게 목자의 옷을 입히고 주인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내어 양들을 불러보았더니 양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더랍니다. 그만큼 양은 주인의 음성에 민감합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서 양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방황하는 연약하고 무력한 죄인이었던 성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양들을 부르는 목자의 정체도 알게 되었습니다. 목자는 누구지요? 당연히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목자는 이미 구약에서 반복하여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민 27:15-17) “15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가로되 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목자를 세워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일은 여호수아에게서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모세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우십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목자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바꾸면 예수가 된다는 것은 다 아시지요? 이 구절들과 오늘 본문 9절을 비교해 보세요.
(요 10:9)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양을 치는 목자는 궁극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지금 주인의 음성에 반응하여 양 우리 밖으로 나오는 주인의 양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른 양들과 섞여서 사는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혹자들은 그 양 우리가 천국이라고도 하고 교회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양 우리는 절도와 강도가 담을 넘어 들어갈 수 있는 양 우리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이나 하나님의 교회는 아닙니다. 그럼 어디일까요? 출교된 소경이 어디에 섞여서 살고 있었지요? 오늘날로 따지면 이 세상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을 9장과 연결되는 문맥 속에서 보기로 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소경이 들어가 있다가 나온 곳이 어디입니까? 소경이 바리새인들에게 출교를 당했습니다. 어디서 출교를 당한 것입니까? 유대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이 목자의 부름을 받아 나온 양 우리는 바로 유대교, 혹은 유대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율법을 말하는 것이요, 율법은 곧 죄악 된 세상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 속에 섞여 살던 양들이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알아듣고 그 우리에서 하나씩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구속사입니다. 9장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주님의 말을 알아듣고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가 주님의 명령대로 눈에 붙은 진흙을 씻어낸 사건을 기억해 보세요. 앞이 보이지도 않는 그가 어떻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목소리를 분별하여 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서 나와야 하는 주님의 양이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을 형상화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눈을 뜨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소경인가?’하면서 예수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 10:26-27)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이제 양 우리와 양, 그리고 목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졌지요? 그런데 우리가 조금 전에 본 본문 9절에는 그 양들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율법으로 상징되는 세상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살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번 나온 양은 다시 세상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홍해가 한번 닫히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완전한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갇혀서 꼼짝 달싹 못하게 죄에게 구속되어 있던 자들이 이제 자유자가 되어 자유로이 들며 나는 자들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부름을 받은 양들이 우리에 꼭 갇혀있는 다른 양들과는 달리 들며 나며 자유를 누리는 모습을 그려 놓은 것입니다.
성도들이 유대주의, 즉 율법에 갇혀 있을 때에는 그들이 다른 이방인들과의 높은 담을 절대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그들을 그곳에서 불러내셔서 이제 자유롭게 교통하는 하나님 안에서의 형제자매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유대주의에 속박되지 않고 들며 나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 3장에 보면 열 개의 문이 나오는데 그 중에 오직 양문에 대해서만 자물쇠와 빗장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이 요한복음 10장은 벌써 느헤미야서에서부터 예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의 우리를 나오는 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지요.
(출 33:7-9)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 막이라 이름 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 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 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 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 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 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하나님의 성막이 진 밖에 지어지고 하나님을 앙모하는 자들은 항상 진에서 나와 회 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 모세가 있습니다. 이 그림과 오늘 본문의 그림을 잘 비교해 보세요. 그대로 겹쳐지고 있지요? 그러니까 양 우리에서 목자가 양을 불러내는 것은 자기 양들을 구원해 내기 위한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러면 양 우리를 지키고 있는 문지기는 누구일까요? 문지기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목자가 오면 그 목자를 보증하고 양들에게 그 목자를 소개시켜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잘 데리고 가라고요. 신약에서 그런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요 1:31)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그러나 그 세례요한은 어떤 다른 분의 역할을 모형으로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의 역할을 보여준 사람이지요? 성령하나님입니다. 성령하나님은 구속사 안에서의 그 직책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임장을 보증하셨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양들에게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문지기는 성령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도요 강도는 누구이겠습니까? 여기서 절도라고 번역이 된 ‘클레프테스’는 자격도 없는 자가 어떤 일을 몰래 혹은 함부로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강도라고 번역이 된 ’레스테스‘는 폭력을 사용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절도와 강도는 자격도 없는 자가 자기가 자격 없음을 숨기고 어떤 일을 함부로 행하며 심지어 폭력까지 동원하여 자기의 일을 합리화 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절도와 강도처럼 자기들이 차지할 자리도 아니고 그러한 권리도 없으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들에게 정당하게 속하지도 않은 권위를 행사하며, 그들도 타당한 근거를 전혀 내세울 수없는 그런 복종과 순종을 불법적으로 요구하고 거기에 불응할 경우 폭력까지 동원하여 쫓아내고 한 이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9장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소경을 엉터리 교리와 신학으로 가르치려 하다가 듣지 않으니까 무력을 사용하여 유대교 밖으로 쫓아내버린(출교)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눅 11:52)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 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마 23:13)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게 바로 절도와 강도의 정체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숭앙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한 인본주의 적 가르침을 던지는 자들은 모두 절도요 강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양의 문은 누구입니까? 그 문은 양들이 유대교의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다른 말로 양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행 4:11-12)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입니다. 양들이 10피트가 넘는 담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양은 반드시 문을 통해 나와야 하는데 그들이 통과하여 목자의 품에 안겨야 하는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은혜’인 것이고요. 본문 9절을 보면 정확하게 나옵니다.
(요 10:9)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요 14:6)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배운 노아의 방주에 문이 몇 개 있었습니까? 하나지요? 출애굽 광야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던 하나님의 장막에는 문이 몇 개 있었나요?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여 그 분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는 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 하나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에서도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이라고 정확한 단서를 달아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이 방법이 되고 통로가 되셔서 우리 밖으로 나오시는 것이 맞지 않나요? 그리고 절도와 강도도 담을 넘어 굳이 유대교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요?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분명 양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서만 구원이 임합니다. 그러나 절도와 강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유대교와 유대주의에 들어갔었음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유대교는 원래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들에게는 진리가 될 수 있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하늘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을 하고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교에 율법은 온전히 지키는 분으로, 문을 통해 들어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도와 강도들인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도 없으면서,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율법과 절기와 제사를 완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고 우기며 유대교에 머물렀다는 말입니다. 그게 담을 넘어 들어간 절도와 강도의 정체인 것입니다. 그렇게 바리새인들은 은혜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끝까지 율법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과 은혜의 긴장 속에서 오늘 본문 속에 담긴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을 몇 가지만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양들은 어떻게 구별되어 존재하게 되는가 부터 보지요.
(행 18:9-11)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를 훼방 하고 괴롭혔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 중에는 이미 내가 택해 놓은 내 백성들이 많이 있으니까 잠잠하지 말고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양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세상에 심어 놓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아직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받지도 않은 상태인데 하나님은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양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셔서 양 우리인, 율법이 다스리는 이 세상 속에 섞어 넣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대언 자 들을 보내어 그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무런 계획이 없이 이 땅을 창조하셨을 리는 없겠지요? 무엇이든지 계획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실행이 있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애초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나라에 사는 백성들은 언제 정하셨을까요? 창세전입니다.(엡 1:4) 그래서 개혁신학은 종말이 창조와 구원을 앞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종말은 세상의 끝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목표지점입니다. 그 하나님의 목표지점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이 되어 있었던 것이고 그 계획 속에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당신의 백성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영원 속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원 속에서 전지전능하신 분에 의해 세워진 계획은 곧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종말이, 즉 계획이 창조를 앞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롬 8:29-30)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들을 하나님께서 언제 정하셨다고 합니까? 미리 정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미리 정함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라고 하지요? 알매니언 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들어서 예지 예정설을 주장하지만 여기서의 안다는 말은 언약 속에서의 앎을 말하는 것이라 했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만 알았나니’(암3:2)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앎은 단순히 지적인 앎이 아니라 언약 백성으로서의 앎이라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언약 속에서 택했으므로 나는 너희를 주인공으로 이 역사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따라서 그 하나님의 아심은 하나님의 언약, 즉 계획 속에서의 앎이므로 그 계획 속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라는 공식이 성립이 됩니다. 그렇지요?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택해진 것이니까요.
(호 11:1) “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잘 보시면 미리 아신 자들을 불러내셨다는 말과 사랑하여 불러내셨다는 말이 이렇게 어우러지지요? 따라서 그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미래에 누가 예수를 믿을 것이고 누가 예수를 안 믿을 것을 아셔서 예수를 믿을 자들을 미리 선택하셨다는 예지 예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 즉 작정 속에서 미리 사랑하시기로 선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정하시고 그들을 부르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 속에서의 앎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양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언약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간단하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크게 첫 언약, 즉 구약과 새 언약으로 구분을 합니다. 첫 언약은 간단히 표현하면 ‘율법을 지켜라 안 지키면 죽이고 지키면 복을 주겠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열심히 지켰고 제사를 목숨 걸고 지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첫 언약에 속한 제사나 율법으로는 절대 사람의 속까지 속죄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히 10:1-4)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 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것은 창세전에 하늘에서 있었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들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원시복음, 노아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 다윗의 언약 등등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언약은 전부 영원 속에서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언약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 원형의 언약을 근거로 하나님은 노아와 아브라함과 다윗과 모세 등의 당신의 백성들과 언약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언약이 무엇이기에 그 언약을 근거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그렇게 살아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되며, 영원한 왕국이 건설되고, 그 왕위가 끊어지지 않는 참된 왕이 출현하게 된다고 하는 것인가?
(히 9:15-22)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여기서 ‘유언’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디아데케’는 ‘언약, 약속’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를 15절에서는 ‘언약’이라고도 번역을 했고 ‘약속’이라고도 번역을 했지요? 그러니까 그 ‘유언’이라는 단어 대신에 ‘언약’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고 다시 읽어보세요. 창세전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약속은 그 약속의 당사자인 성자 예수가 죽어야만 효력이 발생하는 그런 언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당사자가 살아 있으면 그 언약은 무효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창세전에 죽기로 작정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벧전 1:18-20)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 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0절의 ‘알다’라는 단어는 언약 속에서의 앎을 가리키는 단어라 했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이미 창세전에 미리 준비가 되었던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님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과 약속하시기를 당신의 죽음으로 하나님 백성들을 구속하시기로 굳게 언약하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실체가 가시적이며 물리적으로 말세에 골고다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것을 아는 것을 복음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가능하고 추악하고 무력한 자들이었는데 그렇게 무력한 자들을 위해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성자 하나님의 피를 통해 구원을 하시겠다는 약속에 의해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요, 언약 안에서 우리의 참 목자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본문 바로 아래에 ‘양들이 나를 알고 내가 양들을 아는 것이 아버지가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10:14-15)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제 이 구절이 이해가 가시지요? 하나님이 예수를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아나요? 지식적으로는 아니지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언약 안에서 그 언약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를 언약 속에서 아시는 것처럼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세상 밖으로 빠져 나온 하나님의 양들은 언약 속에서 주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오직 은혜인, 우리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언약이 창세전에 영원 속에서 삼위 하나님 사이에 있었고 그것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이 목자를 안다, 성도가 예수님을 안다고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히 9:15) 시간이 많이 간 관계로 다음 주에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부르심’과 ‘부르심에 응한 자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등에 관해 계속해서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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