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그리고 죄와 은혜
(김성수 목사)
(창 20:1‐18) "1 아브라함은 마므레에서 네겝 지역으로 옮겨 가서, 가데스와 수르 사이에서 살았다. 아브라함은 그랄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2 거기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사람들에게 자기 누이라 소개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서, 사라를 데려갔다. 3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이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 여자를 데려왔으니, 너는 곧 죽는다. 이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다." 4 아비멜렉은, 아직 그 여인에게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주님께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서 의로운 한 민족을 멸하시렵니까? 5 아브라함이 저에게, 이 여인은 자기 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이 여인도 아브라함을 오라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깨끗한 마음으로 떳떳하게 이 일을 하였습니다." 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는, 네가 깨끗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잘 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지켜서, 네가 나에게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 여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7 이제 그 여인을 남편에게로 돌려보내어라. 그의 남편은 예언자이므로, 너에게 탈이 나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할 것이고, 너는 살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너에게 속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다 죽을 줄 알아라." 8 ○다음날 아침에 아비멜렉은 일찍 일어나서, 신하들을 다 불렀다. 그들은 왕에게 일어난 일을 다 듣고서, 매우 두려워하였다. 9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들여서, 호통을 쳤다.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소? 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나와 내 나라가 이 크나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말이오? 당신은 나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거요." 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지른단 말이오?" 11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 곳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나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할 때에는,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2 그러나 사실을 말씀드리면, 나의 아내가 나의 누이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내는 나와는 어머니는 다르지만 아버지는 같은 이복 누이이기 때문입니다. 13 하나님이 나를, 아버지 집에서 떠나서 여러 나라로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부탁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사람들이 나를 두고서 묻거든, 그대는 나를 오라버니라고 하시오. 이것이 그대가 나에게 베풀 수 있는 은혜요' 하고 말한 바 있습니다." 14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양 떼와 소 떼와 남종과 여종을 선물로 주고, 아내 사라도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다. 15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나의 땅이 당신 앞에 있으니, 원하는 곳이 어디이든지, 가서, 거기에서 자리를 잡으시오." 16 그리고 사라에게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의 오라버니에게 은 천 세겔을 주었소. 이것은, 그대와 함께 있는 여러 사람에게서 그대가 받은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는 나의 성의의 표시요. 그대가 결백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오." 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이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태를 열어 주셨다. 18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려간 일로, 주님께서는 전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자의 태를 닫으셨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그 속에서의 롯의 처신에 대해 상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속되는 경고를 무시하고 무서운 심판의 불 속에서도 자기가 누리던 세상의 쾌락과 안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지체하며, 안목의 정욕의 마지막 보루인 소알을 놓지 못했던 롯의 불신앙은 결국 모압과 벤암미라는 하나님의 대적들을 출산하는 것으로 후대들에게 부끄러운 본보기가 되고 그렇게 부끄러운 모습으로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소돔의 심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시던 그 곳으로 아브라함을 이끄시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불길을 직접 목도케 하셨습니다.(창19:28) 아브라함은 그 곳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철저한 심판에 대한 확실한 교훈을 얻었을 것이며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손들을 주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을 전율 속에서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19장에서의 아브라함은 롯과 대조가 되어 훌륭한 언약의 백성으로 등장합니다. 심지어 소돔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을 막아서서 목숨을 걸고 중보의 기도까지 올리는 그런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 20장은 그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에 환호했던 우리를 또 다시 아연(啞然)케 합니다. 오늘 본문 속의 아브라함은 마치 ‘바보는 불에 데어 싸맨 손가락을 또 다시 불 속에 집어넣어 본다.’는 영국의 작가 키플링(Kipling)의 아포리즘 속의 바로 그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는 죄인들의 말로가 어떻게 처참하게 끝이 나는지를 금방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년이면 약속의 자손 이삭이 사라의 태를 통해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도 받아놓은 사람입니다. 그 말은 그 때 이미 사라의 배 속에 약속의 자손인 이삭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25년 전 애굽왕 바로에게 자기 아내를 팔았던 때와 똑같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넘깁니다.(아비멜렉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애굽의 왕을 바로라 부르듯이 그랄의 왕을 총칭하는 단어)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파는 아브라함에게는 명년에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해 약속의 자손을 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소중하게 여겼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기 아내 사라를 지켰을 것입니다. 사라가 없으면 그 약속은 지켜질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그저 자신의 안전과 안일만을 챙기고 있는 어리석은 소인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성경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실수를 통하여 성경의 독자인 교회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싶은 것일까요?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이 창세기 20장의 에피소드가 어떤 맥락을 타고 흐르고 있는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예식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그림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쪽에서의 그 어떠한 것도 근거하지 않은 하나님의 쪼개짐에 의해 완성된다는 은혜 언약의 밑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6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스마엘이라는 인간 쪽에서의 산물(産物)을 하나님 앞에 제시했고 하나님은 13년간 침묵하심으로 그들의 행위를 나무라셨습니다. 그리고 17장에서 하나님의 할례 언약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엘샤다이 코람데오’라는 말씀을 통해 ‘내 백성아 너희는 전능한 내 앞에서 너희를 부인하고 나에게 항복하고 순종하라, 그게 너희가 온전케 되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은혜 언약의 핵심 내용을 전제하신 후에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식속들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할례는 쪼개짐이라는 뜻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17장의 할례 언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쪼개짐에 의해 완성이 될 것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심과 동시에 그 하나님의 쪼개짐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들의 몸에 새겨진 흔적처럼 전가 될 것임을 주지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언약의 자손의 탄생에 관한 인간 쪽에서의 근거를 기각시키시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언약의 자손을 탄생케 하실 수 있음을 반복하여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러한 할례 언약을 받아 들고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비웃었습니다.
(창 17:15-17) "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여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18장으로 넘어오면 사라의 비웃음이 이어집니다.
(창 18:10-15) 10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다. 12 그러므로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13 그 때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느냐? 14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5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였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인 이삭의 출생에 관한 약속과 그의 출생이 인간적인 조건과 상황 속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임이 반복하여 제시가 되고 21장에서 드디어 이삭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 21:1‐4) "1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2 사라가 임신하였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때가 되니, 사라와 늙은 아브라함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3 아브라함은 사라가 낳아 준 아들에게 이삭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4 이삭이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분부하신 대로, 그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인간 쪽에서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의해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의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였다는 것은 인간적인 불가능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창조가 일어났음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인간 쪽에서의 불가능함에 대한 선언과 증거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한 이삭의 탄생 사이에 들어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약속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인간됨이나 아브라함이 내어 놓은 신앙의 성숙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창조케 됨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아브라함의 실수가 이삭의 탄생 바로 앞에 확인도장처럼 등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아비멕렉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된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부터 시작하여 이해를 하면 쉽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12장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언약들이 아브라함의 파렴치함 속에서 하나하나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 12:1‐3)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막연하게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고 그가 복의 근원이 되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를 보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를 해 주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무슨 대단한 신앙의 경지에서 그렇게 하나요? 그가 복의 근원의 역할을 보여준 때는 자기 아내를 팔아먹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 그 때였습니다.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열심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성취되는 것임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은 창세기 15장에서 후손으로 이어집니다.
(창 15:4-5)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인데 그 민족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에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조금 더 밝게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후손이 배 속에 들어 있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팔아먹는 믿음의 조상의 실수가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라가 풀려나고 21장에서 이삭이 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후손도 아브라함의 노력이나 자격, 열심 등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계시는 17장에서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창 17:5‐8) "5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6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7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8 네가 지금 나그네로 사는 이 가나안 땅을, 너와 네 뒤에 오는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모두 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큰 민족과 나라는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후손에서 시작하여 열 왕으로 나라들로 번성케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열국의 아비와 믿음의 조상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거기서의 열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믿음의 조상 또한 교회의 조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이 태어나지 않으면 그 모든 약속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상황에서 이삭의 어머니 사라를 그랄 왕에게 주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과 그 이삭으로 말미암게 되는 열국처럼 허다한 무리인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탄생케 된다는 은혜의 복음이 이 20장의 에피소드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의 인간 쪽에서의 불가능함과 무력함,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고전 1:26‐29) "26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는데 있어서 인간의 지혜나 재능이나 열심 등을 들어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일을 하심으로 인간 쪽에서 내어놓는 모든 것들을 기각시키시고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부 바보 천치에다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먼지만큼이라도 자신의 자격이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 세상의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받는 것, 없는 것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어떤 실수를 해도 결국은 용서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더라는 방종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토록 보잘것없고, 불가능한 자들에게 은혜로 찾아오셔서 오직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지혜와 당신의 사랑으로 그들을 건져 내시더라는 은혜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이나 열심을 의지하여 자랑하지 말고, 불가능한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뜻에 오롯이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라는 것이 성경 전체의 권고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 1:30~31) "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내는 죄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자랑하는 자로 회복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얻어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거저 받은 자들이므로 그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은 그가 누구에게 전적으로 순종하고 의뢰하여 살아야 하는 상태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 오롯이 순종하여 사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자신의 안전과 안일을 위해 두 번씩이나 아내를 팔아먹은 아브라함, 심지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사라의 태중에 있었음에도 서슴없이 그랄 왕에게 아내를 주어버린 아브라함의 불가능하고 무력한 모습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오직 당신의 은혜로 우리 안에 새 창조를 시작하신 것이고 홀로 그 창조를 완성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러한 전적인 무능력, 즉 전적인 타락과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확실하게 깨닫게 될 때 우리 안에서는 자랑이 없어지게 되고 오직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영광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항복과 순종이 나오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는 진짜 사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못나고 불가능하고 여전히 반복적이며 의도적이며 계획적으로 죄를 짓는 그러한 우리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롬5:8) 찾아오셔서 약속의 자녀로 삼아 주신 우리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의 깊이를 아는 만큼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게 되고 순교의 자리까지 낮아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유일한 의무요 표지는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거룩이며 그게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순교가 뭡니까? 세상 적으로 볼 때 순교는 실패의 절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헌신들이 이 땅에서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현장이 순교의 현장입니다. 성도가 가진 진리와 능력들이 세상의 능력에 꺾이고 압도당하는 현장이 순교의 현장 아닙니까? 그런데 기독교는 순교를 신앙의 최고 경지로 꼽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그렇게 철저한 자기 부인, 심지어 자기의 목을 내어 놓으면서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읍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기쁘게 세상을 떠나는 것, 바로 그 순교의 정신을 핵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사상인 자기 부인의 최고 능선이 순교 아닙니까? 우리는 매순간 바로 그 순교자의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성도입니다. 나의 무능력함과 불가능함과 지혜 없음을 매 순간 인정하고 그렇게 무력한 우리가 진정한 행복과 만족, 즉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우리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길만이 유일한 길임을 자각하여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우리의 모든 것을 던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순교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성도를 가리켜 순교자라 부르는 것입니다.(계 6:9‐11, 11:8) 성도의 표지인 사랑의 다른 말 또한 순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랑은 반드시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입니다.(고전13:5) 자기의 손해와 상함을 전제로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이 발휘 될 때 그 현장에는 반드시 손해 보는 이가 있습니다. 시간을 손해 보기도 하고, 물질을 손해 보기도 하고, 자기 자존심을 손해 보기도 합니다. 그 때에 진짜 사랑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 것이 비워지고 내 것이 죽어짐으로 해서 다른 이들이 유익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순교라 하는 것이고 그 순교적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를 순교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순교자들의 피를 타고 면면히 흘러 내려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능력과 성공에 의해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순교의 현장에서도 과감히 원수들을 향해 자신의 목을 내어 놓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온 것이고 완성시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가 교회를 탄생시킨 것처럼 수많은 예수의 형제들의 순교의 삶이 또 다른 형제들의 새 창조에 기여를 하여 기독교는 이렇게 확장이 된 것이며 앞으로도 그 십자가의 원리에 의해서만 하나님 나라는 확장이 되고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성도의 자기부인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확장되고 완성되는 것인데 교회 안에 웬 능력의 종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고지 론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망발입니까? 오늘 날의 교회는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과시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 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온전하여 지고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된다(고후12:9)는 ‘엘 샤다이, 코람데오’를 그토록 많이 읽고 배웠음에도 내가 강해져야 하나님의 일도 더 잘된다는 사기가 정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그러한 'I'm nothing'과 'god is everything'의 진리를 배우게 되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everything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고 그 순종의 삶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격발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모두 사망의 불길 속으로 던져져야 하는 땔감들에 불과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본체이신 예수가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해서 우리가 이렇게 위대한 성도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세요.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아닌 망나니에 불과합니다. 그는 21장에서 태어날 이삭이 없으면 열국의 아비도 믿음의 조상도 될 수없는 가련한 티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 은혜로 주어지게 될,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탄생케 하시는 약속의 후손 이삭이 태어나게 되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약속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지옥의 땔감에 불과한 자들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만족과 쾌락을 위해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까지도 수시로 팔아먹을 수 있는 그런 파렴치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약속의 후손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를 건져 내셨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는 당신의 약속을 성취해 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상기(想起)해 보세요. 잘못은 아브라함이 했는데 하나님이 아비멜렉을 혼내십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말대로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행하는 자였습니다. 자기가 아브라함에게 속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침 일찍 이러나 그 일을 바로잡는(8절) 경외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 하였도다’하고 아브라함의 잘못을 나무라는, 아브라함보다 훨씬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참에 아브라함을 버리시고 차라리 아비멜렉을 택하셔서 다시 시작하시는 편이 나을 듯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을 선지자라 부르셨고 아브라함이 기도해야 아비멜렉이 살 것이라는(7절)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지요?(12장) 하나님은 그 상황에서도 당신의 택한 백성인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실수와 실패로 점철된 삶을 사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협박을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죄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명년에 태어날 이삭 때문에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죄의 결과로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죄를 덮어버리는 은혜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다가 머리를 빳빳이 쳐들고 자신의 능력과 성공을 자랑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 것들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될 거라고요? 천만에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주관되고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동방 연합군의 뒤를 좇아가 그들을 쳐부수고 롯과 전리품들을 빼앗아오는 두려움 없는 신앙을 만들어 낸 것이고, 소돔을 멸하러 가시는 하나님을 막아서서 중보기도를 올리는 중보자로 만들어 낸 것이고, 모리아 산에서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완전한 자기부인의 모델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열심과 능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삭을 낳기 바로 전에 아브라함이 어떠한 자인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업적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며 ‘나 잘했지요?’하고 자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롬 14:7-9) "7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은 우리가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머슴처럼 불렀다가 돌려보냈다가 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살라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가 자기 자신이 인생과 우주의 왕이 되어 살던 그 자리에서 내려와 주님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고 주님이 가난하라면 가난해야 하며 주님이 병들라 하면 병을 감수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십자가가 섰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백성이지 주님을 이용하여 나의 영광을 챙기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성숙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자기 부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제발 자기를 증명하려 하지 마세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마세요. 피조물이 유(有)의 자리에서 내려와 우리 자신이 무(無)임을 자각하고 깨닫는 무(無)에로의 창조가 바로 새 창조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자꾸 유명해 지려하고 많이 가지려 애를 쓰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 아니겠습니까?
(눅 16:15) "15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요구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러한 일이 자신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함이라는 거짓말도 하지 마세요. 나는 자꾸 부인되고 우리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가 드러나는 참 성도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죽을 사(死)자를 풀어보면 ‘하나 일(一), 저녁 석(夕), 비수 비(匕)’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하룻저녁에 비수처럼 날아드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대 낮에 날아오는 비수는 어찌어찌 막아볼 수 있겠지만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비수는 피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렇게 죽음은 느닷없이 비수와 같이 찾아오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살 생(生)’자는 ‘삐칠 별(丿)과 앉을 주(主)’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명이란 있던 자리에서 삐쳐 나와 다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황혼녘에 느닷없이 날아드는 비수에 맞아 사망으로 떨어질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우리를 삐쳐 나오게 만드시고 그 자리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앉혀 놓으셨습니다. 그 사망이라는 비수에 예수가 맞아 죽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삐쳐 나와 생명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게 구원이며 그 은혜의 구원을 자각하고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순교의 삶, 사랑의 삶을 사는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렇게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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