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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이기(利己)와 이타(利他)의 갈림길에서(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9. 7.

 

 

이기(利己)와 이타(利他)의 갈림길에서

 

(김성수 목사)

 

 

(창 18:16-33) “16 ○그 사람들이 떠나려고 일어서서,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데로 갔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바래다주려고, 함께 얼마쯤 걸었다. 17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며, 땅 위에 있는 나라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19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 20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이 정말 나에게까지 들려 온 울부짖음과 같은 것인지를 알아보겠다." 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떠나서 소돔으로 갔으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23 아브라함이 주님께 가까이 가서 아뢰었다.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그 성 안에 의인이 쉰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 성을 기어이 쓸어버리시렵니까? 의인 쉰 명을 보시고서도,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그처럼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의인을 악인과 똑같이 보시는 것도,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는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에서 내가 의인 쉰 명만을 찾을 수 있으면, 그들을 보아서라도 그 성 전체를 용서하겠다." 27 아브라함이 다시 아뢰었다. "티끌이나 재밖에 안 되는 주제에,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28 의인이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섯이 모자란다고, 성 전체를 다 멸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거기에서 마흔다섯 명만 찾아도,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다시 한 번 주님께 아뢰었다. "거기에서 마흔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30 아브라함이 또 아뢰었다. "주님! 노하지 마시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서른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거기에서 서른 명만 찾아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31 아브라함이 다시 아뢰었다. "감히 주님께 아룁니다. 거기에서 스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스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32 아브라함이 또 아뢰었다. "주님! 노하지 마시고, 제가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33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신 뒤에 곧 가시고,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성경을 읽을 때 아주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문맥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전체 문맥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분, 부분 떼어서 이해를 하게 되면 자칫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전체 문맥 속에서 이해를 하지 못하면 오해의 소지가 충분히 있는 그런 부분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그런 내용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하여 롯이 살아난 그런 사건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을 통해 ‘중보기도를 열심히 하여 죽어갈 자들을 살려내는 전도의 삶을 살자’라든가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저주의 불이 쏟아진 것을 경고 삼아 우리가 의인이 되자’는 등의 교훈을 끌어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중보자의 삶을 살아내어 멸망의 자리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이끌어 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속한 이 세상에서 의인의 삶을 잘 살아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위에서 말씀드린 그 모든 내용을 아우르면서 더 깊고 웅숭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15장에서부터 출발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쪼개진 제물 사이로 홀로 지나가시는 언약의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탄생은 아브라함의 조건이나 능력이나 배경과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는 것임을 간단한 그림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16장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여 이스마엘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습니다. 하나님은 13년간의 침묵으로 아브라함에게 불편한 심기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13년 만에 다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완전 하라’는 불호령을 내리셨습니다. ‘엘샤다이 코람데오’ 그 말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사회법상으로 완전한 삶을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힘과 지혜 자랑하지 않고 온전한 자기 부인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 했지요? 하나님은 여전히 그렇게 하나님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5장에서 예시하신 하나님의 쪼개짐이 어떠한 것인지 17장에서 실물교재를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그게 할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들까지 모두 할례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할례는 ‘쪼개짐’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관계된 모든 남자들이 쪼개짐의 흔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쪼개짐의 흔적’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온 몸에 할례를 받아 쪼개져 죽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당신 자신이 그 쪼개짐의 사망을 모두 가져가셔서 십자가에서 쪼개지시고 그 쪼개짐의 사건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가(imputation)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쪼개짐이 전가된 자들은 그 몸에 쪼개짐의 흔적을 갖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을 이미 쪼개져 죽은 자들로 간주해 주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18장에서는 그렇게 마음의 할례를 받아 거듭난 자들이 추구해야 하고 도달해야 하는 삶의 목적지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할례 받은 자들의 그 첫 번째 특징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그네 대접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 속에 제한적으로 남아있는 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남의 자원을 빼앗는 삶을 본성으로 타고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대접하고 섬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들에게는 나 이외의 모든 타인들이 경쟁자요 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할례를 그대로 전가 받아 할례 받은 자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고(하나님이 혐오하는 죄인은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하늘의 복을 다시 풍성히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을 모두 경쟁자로 여길 필요가 없게 되었고 다른 이들의 자원을 탈취하여 자신의 부족한 것을 채울 필요가 없는 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의 나그네들을 대접하며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게 지난주 본문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문맥을 놓치지 마시고 오늘 본문으로 넘어 오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할례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자들의 두 번째 특징은 나의 목숨을 걸고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의 삶을 사는 것임을 오늘 본문은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하고 배웅을 하러 나갔습니다.(16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배웅 나온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과 그들의 심판에 대해 언급을 해 주셨습니다.(20절)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막아서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를 하는 것으로 오늘 본문이 끝이 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멸망당해야 하는 세상을 품에 안고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의 기도를 올리시는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그림자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은 중보자들로 새롭게 태어난 성도들의 신분에 대한 고지이기도 하고요. 먼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모습을 찾아보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어떻게 작은 중보자들의 삶에 적용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아브라함의 중보의 모습은 골고다 언덕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눅 23:34) “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원수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올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중보의 모습 속에서 힌트 되고 있는 것입니다. 잘 연결을 해 보자고요. 우리는 모두 소돔과 고모라인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인류의 타락한 역사가 토해놓은 배설물들과 함께 뒹굴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가 와서 ‘너희들의 모습을 좀 봐라, 너희들은 지금 더러운 토사물 속에 뒹굴고 있는 더러운 존재들이다’라고 우리의 실체를 폭로해 버렸습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감추고 싶은 치부를 드러낸 그 사람을 죽여 버리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우리의 감추고 싶은 치부를 알고 있는 그 사람만 죽여 버리면 마음 편하게 더러움 속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로 그러한 자들을 모두 죽여 버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분노를 막아서서 그 속에 있는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의인들을 위해 기도를 하신 것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위대한 중보 기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전히 소돔과 고모라 같은 혼돈과 공허의 땅에 살면서 예수님의 살해에 가표(可票)를 던졌던 택함을 입은 자들이 의인이 되어 살아나오게 된 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보세요. 지금 하나님께서 타락과 죄악의 대명사인 소돔과 고모라로 심판의 불을 들고 향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길을 막아서서 그 곳에 있는 의인들을 생각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기도에 의해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고 있던 롯이 의인의 반열에 들어가 그 곳에서 건져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롯의 구출사건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 19:28‐29) “28 소돔과 고모라와 넓은 들이 있는 땅을 내려다보니, 거기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가 마치 옹기 가마에서 나는 연기와 같았다. 29 ○하나님은, 들에 있는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살던 그 성들을 재앙으로 뒤엎으실 때에, 롯을 그 재앙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

 

롯은 쾌락과 화려함의 땅인 소돔과 고모라를 포기하기 싫어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손목을 잡고 끌고 나오기 전까지 그 곳에서 버텼던 사람입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두 눈으로 목격을 하고도 술에 취해 두 딸과 근친상간을 하여 아이를 낳은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땅을 택하여 생명의 은인인 삼촌을 버리고 롯이 택한 소돔에서 두 딸이 배운 것을 보세요. 물질과 쾌락만이 가치와 만족의 척도가 되는 타락의 도시 소돔에서 롯의 두 딸들이 근친상간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지경까지 타락해 버린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이, 세상이 가치 있다고 정해 놓은 많은 것들이 정말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 주고, 만족하게 해주고, 가치 있는 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착각에서 어서 내려오세요. 그렇게 여전히 물질과 쾌락의 노예였던 롯이 의인 아브라함의 기도에 의해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롯을 가리켜 의인이라 부릅니다.

 

(벧후 2:7) “7 그러나 무법한 자들의 방탕한 행동 때문에 괴로움을 겪던 의로운 사람 롯은 구하여 내셨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롯은 소돔 성의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를 의로운 자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의로운 자를 악한 자와 함께 벌하시는 것이 가하냐고 하나님께 묻지요? 거기 있는 의인들은 모두 살려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멸망 받는 악인들 속에서 건져진 롯은 의인이 맞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19장 29절에서 그 롯이 소돔 성에서 빠져나오게 된 이유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롯이 의인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소돔 성에서 빠져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뭐라는 말입니까? 아브라함의 중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롯은 그 자신의 노력이나 됨됨이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중보에 의해 의인이 되어 멸망에서 건져진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말미암는 것이지 선택되지도 않은 사람이 어떤 사람의 기도 때문에 의인이 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롯이 아브라함의 중보에 의해 의인이 되었다고 거듭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 본문의 그림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원형으로 하고 있는 모형이라는 것을 주지시켜 드리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여전히 소돔과 고모라에서 희희낙락하며 살아가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의해 의인이 된 사건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의인이 된 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동참하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의인됨에는 우리의 노력과 됨됨이가 손톱만큼도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 또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자로 서신 예수 그리스도와 할례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성도들이 연합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한 분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은 예수들로 재탄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롬 12:5) 따라서 할례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그의 인생 속에서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보자가 된 자신의 신분을 명확하게 이해한 사람만이 중보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개척 초기에 우리 교인들에게 ‘중보기도’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분들이 마치 자기의 기도에 능력이 있어서 자기가 중보기도를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중보기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만 하실 수 있습니다.

 

(딤전 2:5)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사람을 위한 중보는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한 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은 예수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중보자의 삶과 중보자의 기도를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게 된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 기도가 능력이 있어서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의 동역자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중보 기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되어 하나님의 계시를 분별할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러한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자의 자격에 대해서도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본문 17절부터 21절까지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과 그 땅에 대한 심판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그것은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 어떤 비밀도 없는 친한 친구가 된 사람들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약 2:23) “23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고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또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 부르셨습니다.(대하 20:7; 사 41:8)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숨기겠느냐’(17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로 대접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만 하나님의 친구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 모두를 당신의 친구로 대접해 주십니다.

 

(요 15:13-14) “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비밀스런 말씀을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 바로 모두 하나님의 친구들인 것입니다.

 

(막 4:11-12) “1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12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친구들에게만 하늘의 비밀을 알리십니다. 해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배웅 자리에서 친구인 아브라함에게만 당신의 비밀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친구들만이 하나님의 의중을 알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 감히 중보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친구들에게 어떻게 당신의 비밀을 알리시나요?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자각한 사람만이 중보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성경 말씀이 마치 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하는 것처럼 들리고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출33:11) “11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와도 친구 관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친구처럼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하나님의 친구 모세가 어떤 기도를 드리나요?

 

(출 32:31-32) “31 모세가 주님께로 돌아가서 아뢰었다.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32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출애굽 시작 때부터 자신을 향해 원망과 비난을 퍼부으며 온갖 죄를 다 저지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아서서 그들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중보를 하고 있지요? 하나님의 벗으로 하나님의 의중을 그 분의 말씀을 통하여 이해를 한 자들의 삶 속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또 다른 하나님의 친구 바울은 어떤 기도를 했나요?

 

(롬 9:1‐3)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2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3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모세의 기도, 바울의 기도,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기도가 골고다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많이 닮아있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할례언약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성도도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참된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이들이 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서요.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친구 아브라함에게만 알려주신 그 똑같은 비밀을 우리에게도 알려 주셨습니다.

 

(벧후 3:9-14) “9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소돔성의 멸망을 알려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 땅의 심판의 날에 대해 알려 주셨습니다. 그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의 힘의 원리 속에서 하루속히 빠져나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그 간절한 기도에 의해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롯이 의인이 되어 소돔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지 않았으면 롯이 구원받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해 롯을 구하시는 장면을 우리 교회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반드시 그렇게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며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신다는 구속사의 성취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 언약 속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에서 눈을 돌려 나 이외의 다른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며 나 아닌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입으로 삶으로 열심히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전도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창세기 18장의 주요 메시지 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보기도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하나님 백성의 구원, 좀 더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 백성들의 회심과 거룩의 완성에 대한 기도로 수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체들의 질병이나 가난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지체의 배고픔과 육신의 질병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의 중보기도의 목적이 단순히 그러한 상황과 사건 속에서의 탈출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올바른 중보 기도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서 그 죄인들의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대신 죽겠노라는 숭고한 사랑의 기도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고, 모세가 그러했고,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도 바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 지체의 경제적인 해갈이나 질병의 치유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들을 통해 우리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이 진짜 중보기도인 것입니다.

 

나의 거룩과 나의 지체들의 거룩, 그리고 아직도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여전히 세상 속에서 더러운 오물과 함께 뒹굴고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하루 속히 그 더러운 힘의 원리 속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완성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 그것이 할례 언약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 백성들의 두 번째 특징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거룩한 중보기도는 가정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창 18:19) “19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를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말씀을 잘 새겨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년 이맘때에 이삭이라는 약속의 자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는 이 말씀을 붙이신 것입니다. ‘의와 공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사는 올바른 생활을 가리킵니다. 약속의 자녀가 태어나거든 잘 가르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올바른 일을 하는 자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녀들을 위해 금은보화를 많이 남겨주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사는 올바른 삶, 거룩한 삶을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널 택한 이유라고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정에서부터 우리 자녀에게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벗어나 멸망의 자리에 서지 않도록 잘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들보다 잘난 사람이 되라는 식의 교육은 소돔과 고모라의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인간 세상의 행복과 쾌락을 삶의 제 일 목표로 삼고 살던 소돔과 고모라의 자녀들은 모두 다 멸망의 불바다 속에서 불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이 인생의 제일 목표라는 가르침 속에서 자란 자녀는 약속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천국에 입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안 가는 것은 무슨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일어난 것처럼 법석을 떨면서 아이들이 교회에 안 가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부모들은 지금 아이들을 소돔 성에 버려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자식과 식구들에게 먼저 의와 공도를 행하도록 가르치라고요. 그리고는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이 바로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을 위한 중보의 삶임을 오늘 본문이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가르침 역시 소돔의 가르침과는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올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을 가리킴과 동시에 약속의 자녀 전체를 상징으로 담고 있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르쳐져야 할 ‘의와 공도의 삶’은 바로 우리에게 가르쳐져야 할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이 땅에서의 힘과 쾌락을 얻어내겠다는 번영의 신학은 소돔과 고모라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들에게 주어져야 할 가르침은 여러분이 확인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힘의 원리를 버리고 자기 부인과 순종의 삶을 열심히 가르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삶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 그에게서 나오는 기도가 진짜 중보기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 세상이 이렇게 어두워 졌습니까? 왜 유토피아를 꿈꾸던 인간들의 세상이 디스토피아가 되어 가고 있습니까? 죄인들이 중보의 삶을 살지 못하고 이기의 삶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왕이 되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모든 인간들과 사회와 국가들의 목표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이렇게 난장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소아 비만을 걱정하여 수많은 소아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만들어 지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진흙을 구워 먹고 있습니다. 세계 유수의 곡물 회사의 창고에는 곡가를 높이기 위한 매점매석의 쌀가마들이 산처럼 쌓여있는데 어느 곳에서는 한 줌의 쌀을 구하지 못해 일가족이 굶어 죽는 일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면서 우셨던 주님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눅 19:42)

 

나라나 인종, 종교나 문화의 차이를 가로질러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끈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없어 세상은 암흑으로, 지옥의 변방으로 변해갑니다. 하나님이 우주 속에 세워두신 자연법칙을 죄인들의 이기심이 파괴하고 있습니다. 환경호르몬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환경호르몬이란 ‘내분비계 교란 물질’(endocrine disrupter)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호르몬은 우리 몸 구석구석을 돌면서 각각의 세포가 제 역할을 하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호르몬은 동물의 발달, 성장, 생식,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화학 신호’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환경 호르몬이 몸속에 들어오면 호르몬의 전달 과정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려 정상적인 삶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창조 속에서 환경 호르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들 돌아 볼 것 없습니다. 바로 내가 나의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내 가정의, 내 직장의, 교회의 환경 호르몬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그네를 섬기십시오. 중보의 삶을 사셔야 합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이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셔야 합니다. 그게 할례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우리 성도들의 삶이어야 하니까요.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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