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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스크랩] 거미 / 이면우

by IMmiji 2013. 9. 4.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 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시를 쓴 이면우 시인은 당시 연봉 1,380만원을 받는 1년 계약직 보일러공이었다고 하는데, 이 시가 실린 시집이 알려진 배경이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지방도시의 어느 공장에서 홀로 시 쓰기를 즐기는 보일러공이 있었다. 그에게는 소박한 꿈이 있었다. 늦게 둔 어린 아들에게 '시인'이라는 아버지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를 눈여겨본 사장은 시를 쓰라고 그에게 휴가를 선물한다. 휴가동안 그는 한 권 분량의 시를 쓴다. 사장이 사비 들여 오탈자 많은 붉은 시집을 묶어 준다. 이런 시집의 운명이 어떻겠는가? 창고의 비료포대 자루로 들어간 폐품이 가까스로 눈 밝은이의 눈에 띄고 알음알음 입소문이 타서 종내에는 문단에 알려진다. 이면우시인과 그의 시집은 이렇게 태어났다. 말 그대로 '발굴'이었다.

- <한겨례>(2009년 3월 7일자) -

 

어찌 시인만이겠는가. 처자식의 생계라는 엄중한 책무를 온몸으로 감당해야하는(했던) 이 땅의 수많은 가장들의 마음이야말로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에 다름 아닌것을. 생존한다는 것, 먹고산다는 것은 눈물 나도록 엄숙한 일. 그러기에 거미는 '밤을 지새우'고 '필사의 그물짜기'를 할 수밖에 없다.

 

- 김경민의 [시 읽기 좋은 날] -

출처 : 갤러리元
글쓴이 : 노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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