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
(김성수 목사)
(엡3: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는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공부해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성령으로 교회 안에 와 계심에도 불구하고 교회인 에베소 신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하기를 기도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통하여 자기 안에 와 계신 그리스도를 조금 씩 조금씩 알아 가는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신자가 된 교회를 향해서 그러한 기도를 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성숙해 가면서 “아 주님은 그런 분이구나. 그리고 그 분이 내 안에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거기에 제가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더 잘 알게 되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명확하게 드러나게 해 준다고 했지요? 그래서 몇 주간에 걸쳐서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공부를 한 것입니다. 정말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만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함께 확인을 했습니다. 그렇죠?
오늘의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사도 바울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을 확인하는 방법을 “믿음을 통해서”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다시 번역을 하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신 것을 알게 된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알아 가는 그 과정이 믿음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믿음에 대한 바른 정의만 내려진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쉽게 해결이 될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믿음은 무엇인가?“에 대해 설교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 설교를 함께 참고를 하시면 좋습니다. 제가 그 때 믿음을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롬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good news)이 어떻게 정의가 되고 있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의‘는 무엇이라고 했지요? ’의‘라는 것이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인격이나 존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을 ’의‘ ’짜다크‘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책임을, 하나님의 약속을 성실히 수행해 내시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이라는 것을 갖게 만드시는 것을 우리가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의‘의 결과 즉,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끝내시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은 우리가 국어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어떤 존재나 대상을 받들고 따르는 것“ 곧 ”내가 행하는 나의 행위“로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시고 실행에 옮기시고 완성시키는 전 과정을 ‘믿음‘ ’객관적 믿음‘이라고 한다고 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되는 ’주관적인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의 정확한 해석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오늘은 거기에 대해서 좀 더 확실하게 부연 설명을 해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믿음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는 방법이요 수단이 되는 지“도 아울러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는 국어사전에서의 믿음의 정의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기독교 대 백과 사전에는 믿음이 어떻게 정의가 되어 있는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믿음은 어떤 사물에 대한 신념과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학에서 믿음이란 인간이 절대자 또는 초월자를 이해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믿음은 계시에 응답하는 것이다. 성경에 있어서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믿음이란 일차적으로 신념이라기보다는 신뢰이며 추상적인 지식이기보다는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이다”
이 기독교 대 백과사전에 따르면 기독교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에 대한 신념이나 신뢰라기보다는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 즉, 하나님이라는 인격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기 위해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는 그 계시에 반응하는 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합니다. 시중에서 “믿음이 좋다”라고 하면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하고 방언이나 예언이나 신유의 은사를 한 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고 기도할 때도 입만 열면 청산유수로 좔좔 읊어대는 사람들을 우리가 ‘믿음이 좋다‘라고 하지요? 혹은 그 사람의 그러한 열성적인 종교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게 되면 “저 사람은 참 믿음이 좋아, 믿음이 좋으니까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셔서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 거야‘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믿음이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하던 자들에게 “외식하는 자, 독사의 새끼”라는 말은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은 우리가 기독교 대 백과 사전에서 읽었던 것처럼 기계나 무생물, 혹은 어떤 사실이나 지식, 혹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 같은 것에 보내는 신념이나 신뢰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인격과 인간이라는 인격 사이에서 생성되는 보다 깊고 고급한 어떤 것입니다.
믿음이 인격과 인격이 만나 그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는 말은 믿음이란 강제나 조정이나 억지를 동원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설득과 기대와 신뢰와 사랑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자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상대방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이 만나 상대방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습득하고 그 것을 근거로 ‘아, 이런 사람이라면 내가 정말 나의 모든 것을 맡겨도 되겠다.’라고 신뢰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상대방을 향한 나의 믿음의 행위 이전에 그 상대방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상대방은 강한 힘을 갖고 있고 나는 그 힘을 필요로 하는 약자이기 때문에 나는 무작정 그 상대방을 의지 한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대상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무조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어떤 질서나 법칙으로 취급을 하게 되면 그 대상은 ‘내가 죄를 지으면 나를 자동적으로 벌하는 존재, 내가 조금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내면 나에게 상을 주는 존재’ 이런 식의 기계적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처음 신앙이 그런 것이었죠? 우리는 기계에게 설득 당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기계를 설득하지 않습니다. 엔진이 말을 안 들으면 엔진 오일을 갈아줍니다.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가 안 나오면 발로 세 번 정도 차지 그 자판기를 설득하지 않습니다. ”자판기야 내가 가진 동전이 딱 그거밖에 없다, 그러니까 내 사정을 좀 봐 주라. 좀 힘이 들더라도 마지막 힘을 내서 내 커피만은 좀 내려 줄 수 없겠니?“ 이러지 않습니다.
욥이 인과율에 근거하여 “나는 아무 죄를 안 지었는데 왜 나에게 이러십니까?”하고 대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욥에게 대답하십니까? 대뜸 “너 악어를 이길 수 있니? 너 하마를 보았니? 그 풀만 먹는 하마가 어떻게 그렇게 힘이 센지 아니? 너 이슬은 누가 만드는지 아니? 서리는 누가 만드는지 아니? 너 우박창고를 봤니?” 이런 것을 물어보십니다. 하나님을 그저 잘하면 상주고 못 하면 벌을 주는 어떤 힘이요, 법칙이요, 질서로 이해하고 있던 욥에게 하나님은,
“나는 무정한 법 개념이 아니다, 나는 의지를 가지고 선과 의를 이루기 위해 자연과 모든 생물의 인격에 개입하는 하나님이다. 나는 네 인생에 있어서 그저 심판관이고 무정한 법칙이 아니라 너를 복되게 하기 위해 네 인격과 네 인생에 개입하는 아버지이고 인도자이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인격자인 나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너에게 허락하는 너에게 최고로 좋은, 참 복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너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욥기를 통해 우리 교회에게 바른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어떤 힘 있는 대상에게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도 아니고 방법도 아니고 나에게서 나오는 어떤 훌륭한 행위도 아닙니다. 믿음은 인격과 인격이 만나 그 인격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상호 신뢰입니다. 히브리서 11장으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히 11:4-7)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4절을 보시면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많이 들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벨은 양 치던 자였기 때문에 피 있는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곡식으로 제사를 지내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들 많이 생각합니다. 구속사적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벨이 피 있는 제물로 제사를 드린 행위를 믿음의 행위라고들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행위를 어여삐 여기시고 하나님이 그 제사를 열납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제사 중에는 짐승을 죽여서 태우는 번제도 있지만 곡식을 태워서 드리는 소제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안 됩니다. 그러면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 4:4-5)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보세요, 창세기의 설명은 제물의 종류나 제사의 방법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제물을 드린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열납 하시면서 그 제물도 함께 열납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열납 하지 않으심으로 그의 제사도 함께 열납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이 땅의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께 선뜻 드려지는 우리의 열심이라든지 행위의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이 땅의 것으로 보상을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 5절 6절 7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에게 맞아 죽었고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믿음이라는 원인이 이 땅의 어떤 것으로 보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누구는 믿어서 맞아 죽고 누구는 믿어서 하늘로 그냥 올라갑니다. 누가 더 훌륭한 신앙인 인지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생성이나 믿음의 보상에 이 세상의 것은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다”가 거기 등장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자기 믿음의 대가로 눈에 보이는 보상을 전혀 꿈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힘 있는 대상에게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해 열심을 부리고 노력하고 치성을 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보상으로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제공되지도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인격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격을 가진 인간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시고 인간은 그 계시에 반응하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그들의 신을 설명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저 그들의 신은 능력이 있고 초월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신을 믿는 자들은 그 힘을 빌어서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주문, 혹은 부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소개하시고, 설명하시면서 우리를 설득하시고 우리를 이해시키시려 하십니다. 그리고 잘못을 하면 야단을 치시고 어르고 달래시고 때로는 화를 내시고 우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감정까지 동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조종하시지 않으시고 기계나 로봇 취급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진짜 친구 삼으시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를 진짜 자식 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장이 나면 눕혀놓고 회로를 갈아 끼우고 전선을 교체하는 로봇처럼 취급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설득하십니다. 회유하십니다.
(사 1:2-6)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 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보세요, 창조주가 피조물이 잘못했다고 해서 이렇게 가슴아파할 이유가 있습니까? 다 죽여 버리고 다시 만들던가 뇌를 개조해서 다시 넣어 신제품으로 만들던가 하시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슬퍼하시고, 화를 내시고, 애원하시고 하나요? 우리를 인격자로 대우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뭘 잘 못했을 때 어머니가 자식의 버릇을 고치려고 “동네 사람들, 다 좀 나와 보시오” 하는 것 같지 않으세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러분 이런 경험 없으세요?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교회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강제로 우리 코를 꿰어서 끌고 가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자신을 설명하시면서 “나는 이런 하나님이다. 너 그래도 나 안 따라올래?” 이렇게 설득하십니다.
(신 4:32-40)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34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37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38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39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항복할 만한 분이신가를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 분이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하신 약속을 어떻게 신실하게 지키셨는가, 그리고 그들의 구원이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는 것을 광야 40년을 통해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을 통해 모든 것을 비교하고 확인해서 “하나님, 당신만이 하나님이십니다. 당신만이 저의 사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하는 고백을 받아내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 성경이고요.
믿음은 이렇게 인격적인 이해나 인식이 없이 주문이나 부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절대 강요나 강제가 아닙니다. 끊임없는 설득이며 이해의 작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짓게 그냥 놔두시는 것입니다. 강제로 죄 못 짓게 손 발 꽁꽁 묶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열매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하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놔두십니다. 기도한다고 안막아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손발을 움직이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것은 하나도 안 하고 이렇게 기도만 하는 것은 “하나님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어서 우리를 조종해 주세요.” 라고 하나님께 부탁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강제로 끌고 가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인생을 통해 스스로 그 싸움을 싸우게 하시고 결국 “모든 게 다 헛됩니다. 저는 하나님만 택하겠습니다.”라는 항복을 하게 만드십니다.
(창 2:15-17)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다스려라“ 그리고 ”먹지 말아라“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아예 하나님의 명령을 입력한 칩을 뇌에다 장착하지 않으시고 명령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십니까?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접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보고 선택하고 결정하라고 하십니다. ”다스려라, 먹지 말아라“라는 명령을 받고 어떻게 다스려야 되는가를 생각하고 노력해야 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저 선악과를 왜 먹으면 안 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먹을 것인지 안 먹을 것인지 스스로 결정을 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잘 이해하셔야 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셨다는 것을 최종 결재권을 주신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서의 제한적인 선택권입니다. 우리의 운명까지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공부를 열심히 하는 자식으로 키우려고 결정을 하고 아이가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세 번 이사를 합니다. 맹자는 이사 간 곳에서 장사치들 흉내를 내고, 장의사 흉내를 내고 하는 선택을 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훌륭한 학생이 되어야 하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큰 결정은 어머니가 한 것입니다. 맹자는 그 큰 결정 안에서의 작은 선택권을 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억지로 조종하고 입력해서 끌고 가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하나님이 결정해 놓으신 커다란 운명의 방향으로, 설득하시고 이해시키셔서 데리고 가십니다.
이번 주간이 우리 아이들 가을 방학입니다. 아이들이 방학을 하면 아빠하고 놀이 공원에 꼭 한번 가자고 졸라대서 약속을 했습니다. 오전 중에 볼일을 다 마치고 아이들하고 매직 마운틴에 갔습니다. 저는 놀이 공원에 가서 놀이 기구타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건 돈 내고 고문당하는 거지, 도대체 저에게는 매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 놀이 기구 타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신이 나서들 탑니다. 다른 것들은 대충 아이들하고 같이 타 주었는데 롤러코스터는 정말 못 타겠더라고요. 근데 아이들이 꼭 아버님하고 같이 타겠답니다. 그래서 억지로 앉아서 타는데 정말 기분 나쁘더라고요. 그 쇠막대기로 된 안전 바가 철커덩 하고 내려오는데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했습니다. 그게 슬슬 꼭대기로 올라가는데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저 꼭대기에 올라가면 쏜살같이 내려가겠지 하고 겁을 먹고 올라가고 있는데 드디어 그 롤러코스터가 미치도록 빨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뒤에서는 아이들이 좋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내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쩌자고 저에게 이런 시련까지 주십니까?’ 겨우 참고 목적지까지 다 왔는데 뒤에 탄 사람들이 다음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one more time, one more time" 하고 외칩니다. 그러니까 그 오퍼레이터가 무슨 선심 쓰듯이 ” OK one more time" 그러더니 그대로 또 출발시키는 겁니다. 아니, 제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출발시키는 겁니다. 저는 그 안전 바를 올리고 거기서 내리려고 했는데 안전 바가 안 올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꼼짝없이 또 한 번 고문을 당하고 내려와서 그 놀이 공원 바닥에다가 모듬전 부칠 뻔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끌고 가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십니다. 결정권을 주십니다. 시행착오를 허락하십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설명해 가십니다. 왜냐하면 인격 적인 존재들은 힘 있는 자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인격적인 존재들은 더욱 크고 두터운 인격 앞에 굴복합니다. 힘 있는 존재 앞에서는 아부나 약한 척 연극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굴복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힘으로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창 28:10-15)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분명 하나님께서 “모든 족속이 네 자손으로 인하여 복을 얻는 복을 주시며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렸지요? 20년이나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한 인간의 인생을 묵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20년이라는 시간과 기회와 경험의 장을 허락하셔서 인생이 헛되며, 세상에다가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얍복강 가에서 확인 도장을 찍으십니다. 하나님의 우선적인 목적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야곱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애정과 열심과 진심을 받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긴 시간과 과정을 통하여 항복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한시도 야곱에게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20년간 수많은 고생과 오해와 반목과 질시를 받으며 살았던 야곱의 인생이 하나님이 함께 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야곱의 상황들을 섭리하시면서 야곱을 설득하시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형을 만나서 형을 어떻게 부릅니까? “내 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자신은 종이라고 합니다. 이제 야곱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뿐입니다. 야곱이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기꾼인 나에게 하신 약속을 그대로 지켜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야곱은 안 것입니다.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얍복강을 건넜는데 하나님의 약속대로 엄청난 부를 거머쥐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자식들의 모함으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게 모두 20년 전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그가 그렇게 목숨 걸고 자기 꾀로 긁어모은 재산을 에서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삶은 원수를 향하여 주라 부르고 자신이 오히려 종이 되어주는 삶, 즉 원수를 사랑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야곱이 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믿음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하고 심사숙고하고 선택하고 결정을 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신학에서 구약에 나타난 대표적인 신학적 주제를 “계약 신학”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언약 신학”이라고도 부릅니다. 창세기서부터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라, 그러면 너는 복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을 누릴 것이고 이 명령을 어기면 너는 벌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언약을 어기고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과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과 약속을 하십니까? 우리가 창세기 15장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과 약속을 하시지만 늘 혼자 그 약속을 지켜내십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인간과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혼자 지나가십니다. 그건 하나님 혼자 그 약속을 지켜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럴 거면 다 해 놓으시고 나중에 “짠”하고 “이거 내가 했다”하시면 될 것을 왜 굳이 하나님이 인간과 약속을 하시느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통해서 이루어 내실 어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을 그 자식이 꼭 알아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혼자 이루실 것이면서 하나님이 그 자식들하고 계속해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 7:6-11)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그 약속을 지켜 내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자식들에게 알리시기 위해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인격 적인 두 대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가 꼭 시행되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은 쌍방 간의 믿음이 전제가 되어야 약속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떤 약속을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신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여러분이 과거에 믿음을 정의하실 때 믿음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약한 자가 강한 자에 대한 신뢰요 의뢰인 것으로 정의하셨지요? 그러나 믿음은 그렇게 약자가 강자에게 보내는 신뢰일 뿐 아니라 강자가 약자에게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이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는 인격적인 신뢰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아, 아버지는 너를 믿는다.”라고 이야기할 때 아버지는 아들을 인격적인 차원에서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지, 아들에게 어떤 유익을 원하는 차원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동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버지의 믿음, 강 자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히 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표현합니다.
(행 7:2-4)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 팔던 데라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수 24:2-3)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너희 조상들“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그 다른 신들을 섬기던 조상들은 아브라함, 나홀, 데라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아니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우상을 섬기던 집안에서 태어나 우상을 섬기는 아버지와 함께 생활해 오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란에서 머물면서 밍기적 거리다가 아버지 데라가 거기서 죽었고 하란에서 밍기적 거리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십니다. 그게 창세기 12장입니다.
(창 12:1-4)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그리고 12장,13장,14장에서 여러 사건들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납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가 가뭄이 심 하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애굽 왕 바로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서 팔아먹습니다. 그 때 애굽 왕에게서 받은 노비와 양과 염소 나귀, 약대, 은, 금으로 아브라함이 부자가 됩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바로보다는 크신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롯과 헤어지는 사건도 겪습니다. 그리고 롯이 네 왕의 연합군에게 잡혀가게 되고 아브라함이 318명의 머슴들을 데리고 네 왕의 연합군과 싸워서 롯을 구해 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을 만나고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창 15:1-6)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렇게 보시다시피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 가서야 여호와를 믿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나왔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히 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By faith Abraham, when called to go to a place he would later receive as his inheritance, obeyed and went, even though he did not know where he was going.
여기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구절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피스테이 칼루메노스”입니다. 수동태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해서(by faith)불림을 당했다”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어서,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어서 거기서 나왔다는 뜻보다는 믿음이라는 것이 아브라함의 부름을 주도한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11장의 이 믿음과 창세기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향해 어떤 목적을 세우시고 그들을 끌고 가시는 이해관계를 떠난 인격적인 대우를 또한 우리는 믿음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그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상대적으로 열등하고 약한 자가 종속적인 차원에서 강한 자에게 기대고 의지하여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만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인격 적인 존재 쌍방 간에 일어나는 인격적인 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믿을만한 존재여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꼭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만들어 내시고 마시겠다는 사랑과 은혜의 결단을 전제로 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끌어내셨고 그로부터 하나님은 열심히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설명해 가시는 믿음의 행위를 계속해서 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그 믿음의 행위가 아니면 절대 살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사망으로 던져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믿음의 행위가 우리를 살게 하며, 결국에는 그 객관적 믿음이 우리의 주관적 믿음을 이끌어 내시는 것이며, 그래서 이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을 사도 바울이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열심을, 우리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믿음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스스로 믿음을 만들어 내거나 선택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이 축약되어지고 농축되어져 나타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하나님의 열심이 어떤 한 사건으로 설명이 됩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기필코 만드시고야 마시겠다는 그 인간을 향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으신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이렇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엡 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 믿음, 구원, 선물은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9절의 행위와 자랑 즉, 인과율과 자랑과 대조해서 기록이 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 즉, 하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기게 된 하나님의 선물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내용 중에 우리에게서 기인한 것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로 인해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에 의해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구원에 관해서 조금 더 살펴보자고요.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롬 5:9-10)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제가 “의”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 드렸지요? “의”라는 것은 관계를 맺고 있는 네페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것을 “의”라고 한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책임을 열심히 성실하게 수행해 내시고 인간은 인간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것을 “의로운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10절에서 ‘하나님과 화목 되어진 관계’라고 하지요? 맞습니까? 그러니까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가 의로운 관계로 회복되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다른 말로 화목 되어진 관계라고 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그 믿음은 하나님의 열심에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가 진행되어지면서 우리에게서 믿음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이 있는 겁니다.
(롬 3:21-26)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그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가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제가 지금까지 드렸던 말씀이 여기 다 들어있지요?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를 우리가 하나님의 의라고 하고 하나님의 의는 여러 번 설명해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책임을 열심히 수행하시는 것’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의라는 말 대신에 믿음이라는 말을 넣어보세요. 하나님의 믿음이 나타나서 우리를 믿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이 화목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성경이 구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우리가 만들어 내는 어떤 종교적 열심도 아니고 하나님께 어떤 보상을 받는 근거도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어 우리에게서 반응을 받아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인격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종교행위를 믿음의 행위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근거로 나오지 않는 모든 행위들은 전부 쓰레기 같은 것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더러운 쓰레기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호되게 꾸짖으셨습니다. 겉으로는 번드르르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전부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주님이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공생애 첫 설교 때 “복과 율법과 거짓 선지자에”대해 설교를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들에게 편리하게 마음대로 뜯어 고쳐서 “나는 율법 지켰네, 나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네” 이렇게 써먹었습니다. 예를 들어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유부녀만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라고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해서 지켰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장로들의 유전을 악용해서 “고르반“즉, 하나님께 드려질 물건이라고 속여서 부모를 마땅히 봉양하는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부모가 달라고 할까봐 부모 앞에서 ”이건 고르반입니다“ 하고 선포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도 드리지 않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썼다는 것이죠. 아니면 드리긴 드려도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면서 부모에게 봉양해야 할 것을 거기에 포함해서 바치는 행위를 했습니다. 인간들이 믿음의 행위로 내어놓는 사랑도 잘 보면 원수를 만드는 사랑입니다. 인간은 자기편만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자기편만을 사랑하다 보면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사랑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믿음의 행위라고 내어놓는 수많은 종교 행위들은 이렇게 가식적이며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말 1:7-10)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2:3) “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근거하지 않고 만들어내는 믿음의 행위, 신앙의 행위라는 것이 모두 이런 것들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자기를 계시하시고 자기를 설명하시며 아울러 우리가 누구인지를 경험하게 하시면서 정말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 이라는 것을 설득해 내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가? 이런 질문이 안 드세요? 제가 지금까지 믿음이라는 것은 인격 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상호 신뢰라고 했지요? “인격 적인 관계“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인격적인 존재는 상대방의 인격이 강하게 그를 감동시키고 설득시킬 때에 당연히 반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반응이 반드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인격 앞에 반응을 해서‘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한 자들은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입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믿어주시고 그들에게 믿음의 행위를 하심으로 믿음이 시작되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열심에 반응을 하게 되어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은 “의”라고도 표현 할 수도 있고 그 믿음과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강제로 주입시키지 않으시고 시간과 경험과 기회의 장을 열어주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점점 쌓아가면서 그 믿음이 성장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은 한 마디로 인간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과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행위이며 그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에게서 책임이라는 반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는 자랑이 없고 그들에게서는 겸손과 감사와 찬양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게 믿음 있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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