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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부르심을 입어 순종케 된 자들의 상급?(II) (11)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27.

 

 

부르심을 입어 순종케 된 자들의 상급?(II) (11)

 

(김성수 목사)

 

 

(롬 1:3-6)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제가 지금 사는 곳은 한 여름에 기온이 화씨 110도를 오르내리는 아주 무더운 곳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름철이면, 개미들이 집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하면서 겨울 동안 먹을 양식을 열심히 나르고 있는 모습을 아주 자주 보게 됩니다. 저는 그런 걸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이라서 집안에 개미가 좀 있어도 그냥 놔두는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 둘째 아이는 개미나 거미, 벌레 같은 것을 뱀보다 더 싫어합니다. 그래서 항상 그 아이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손이 닿는 곳마다 벌레 죽이는 스프레이가 놓여 있습니다. 어느 월요일 오후에 제가 집에서 쉬다가 오후 무렵이 되어서 뒤뜰에 나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어김없이 뒤뜰 한 쪽에 개미들이 줄을 지어서 열심히 무언가를 나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참 그 개미들의 부지런함이 감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미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뺀질뺀질하게 자기 편한 길만을 챙겨 가지려 하는 인간들의 추악함을 떠 올리며 한참 은혜를 받고 있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개미!’라고 연신 소리를 지르며, 개미 약을 들고 이리저리 개미들을 학살하고 다니던 둘째 아이가 뒤뜰로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개미들에게 빨리 대피하라고 말을 해 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그 개미들을 발견하는 순간 그 개미들은 전멸이거든요. 그런데 개미들이 제 말을 이해할 리가 만무지요. 그래서 제가 손으로 그 개미의 대열을 흩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던 개미들이 금방 전열을 갖추고 제 길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곧 개미 스프레이가 뿌려져서 다 죽게 될 것 같아 도망가라고 신호를 준 것인데 개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꾸역꾸역 제자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 개미들 중 두 마리를 집어 올려서 조금 떨어져 있는 평상 위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둘째가 그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둘째 아이는 개미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또 다시 ‘개미!’라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개미 약을 분사했습니다. 그 현장은 그야말로 처참한 대 살육의 현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우리 둘째 아이는 그 개미들의 행렬을 추적하여 나무 벽 틈 사이로 뚫려 있는 개미 집 입구까지 찾아내어 그 구멍에다가 개미 약이 흥건히 흘러넘칠 때까지 개미 약을 뿌려 대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제가 평상 위로 옮겨 놓은 두 마리의 개미가 궁금해졌습니다. 그 개미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 둘째의 개미 약에 처참하게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알 수 없는 존재가 자기들을 번쩍 들어 올려서 그 사망과 관계없는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린 것입니다. 그 개미들을 가만히 지켜보니까 자기들이 있던 그 곳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참담하게 황폐되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원래 자기들이 행하던 그 길과 자기의 동료들을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잘 찾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개미들이 원래 행하던 그 길 가까이로 그 개미들을 옮겨 주었습니다. 조금만 헤매면 찾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였습니다. 개미들은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개미 약이 흥건히 뿌려진 그 원래의 길 근처에 당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서 개미 약의 독성을 감지하게 되었는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원래의 그 길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개미들이 그 앞에서 흠칫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두 놈이 다 다른 곳으로 열심히 도망을 갔습니다.

 

제가 우리 둘째 아이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네가 개미 약을 가지고 오기 전에 아빠가 개미 두 마리를 집어서 평상 위에 올려놓았단다. 그 개미들은 아빠 때문에 산거야. 그런데 그 개미들이 정말 아빠한테 고마운 마음을 가질까?’ 저는 복음을 설명해 줄 요량으로 그 말을 꺼냈던 것인데 그 말을 들은 우리 둘째 왈, 그래서 우리 집에 개미가 계속 들끓는 거라고, 왜 내가 다 죽이게 놔두지 않고 두 마리를 살려 줬냐고, 하면서 제게 한참을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두 마리 어디 있냐고 저를 얼마나 달달 볶아 대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만일 그 개미들에게 사유의 능력과 현실 인식의 능력이 인간 정도의 수준으로 주어져 있었다면, 자기들이 누군가에 의해 개미들의 대열에서 번쩍 들어 올려 져서 평상 위로 옮겨졌을 때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처음에는 그냥 깜짝 놀라겠지요? 내 생계의 현장, 유일하게 내 육적 자아의 존재감을 누릴 수 있는 세상 공동체, 내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 세상에서 누군가 자신을 번쩍 들어 올려 완전히 생소하고 생경한 다른 곳으로 옮겨 버렸을 때, 그들이 갖게 되는 상실감과 박탈감, 그리고 외로움과 고립감, 온갖 감정들이 교차하며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닌데 누군가가 자기들을, 자신들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세상 속에서 빼내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당혹스러워 하는데 점점 자기들이 속해 있던 곳의 결국이 감지되기 시작합니다. 영원할 것 같았고, 자신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 만큼 안전한 줄 알았으며, 거기에서 열심히만 하면 지고의 행복에 도달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꾸 그리로 돌아가려 했던 것인데, 가까이 가서 자기들의 원래 자리의 실체를 보니까 거기는 사망이 덮쳐서 이미 모두 죽음 속으로 들어가 버린 무서운 곳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심판의 불이 이미 붙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들도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기 동료들을 덮쳐버린 그 사망에 의해 자기들도 멸망해 버렸을 것임을 그들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거기로부터 열심히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그 개미들이 도망을 가면서 서로 대화를 했다면 어떤 대화를 했겠어요? 제가 그 상황을 극화시켜보겠습니다. 그 두 개미의 이름을 ‘태종’이와 ‘병주’라고 해 보자고요. 병주가 묻습니다. ‘태종아, 도대체 넌 어떻게 저러한 심판이 덮쳐오기 전에 저 평상 위로 도망을 오게 되었니?’ 태종이가 대답합니다. ‘나도 몰라, 난 그냥 열심히 일상에 충실하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날 번쩍 들어서 평상 위로 올려놓았어, 병주야, 넌 어떻게 평상 위로 올라 온 거야?’ 병주가 말했습니다. ‘나도 몰라, 나도 너처럼 여왕개미의 눈에 들어 호의호식 좀 해 보려고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번쩍 들더니 그 평상 위로 옮겨 놓은 거야, 도대체 그게 누굴까?’ 태종이와 병주는 방금 본 그 처절한 사망의 현장을 기억하면서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그 사망의 현장에서 번쩍 들어 올려 새 생명을 준 그 존재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했고 그 존재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번쩍 들어서 그 사망과 관계없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버리신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되는 순간 ‘나’는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고, 그네들과의 관계에서 끊어지는, 나그네요 이방인이요 외인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밀려 나게 되지만 그게 바로 살 길이었음을 알게 되고 나를 그 사망의 자리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싶어 하게 되고, 그분의 그 불가항력적 은혜에 감사하게 되며, 그분의 보호하심에 ‘나’를 영원히 맡기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그러한 구원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개미는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 역사 속에서 다른 존재로 변할 수 없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개미일 뿐입니다. 그 구원받은 개미는 그 후로 아무리 착한 짓을 해도 우리 둘째에게 발견되면 개미 약 세례를 받아야 할 그냥 개미 일 뿐입니다. 바퀴 벌레들이 자기들끼리 선행을 하고 서로를 섬겨주고,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를 위해 자신들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살신성인의 삶을 산다고 해서 그 바퀴벌레들을 사랑해 주실 분들 계세요? 바퀴벌레는 그 존재자체가 사망을 부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은 육의 몸을 입고 있는 한 죽는 날까지 죽어야 할 죄인일 뿐입니다. 그걸 죽은 몸, 죽은 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죽어야 할 몸을 가진 자를 누군가가 지키고 보호하고 계시기에 그들이 심판에서 건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 정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상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일일 수 있을까요? 개미가 자기를 살려준 저를 위해 밥을 짓겠습니까? 빨래를 해 주겠습니까? 공부를 도와주겠습니까? 살림에 보태 쓰라고 용돈을 주겠습니까? 개미는 그냥 개미입니다. 개미는 인간의 삶에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개미와 인간, 그 자체가 완전 다른 영역의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미를 살려 준건 열심히 선행을 쌓고 훌륭한 덕을 쌓아서 훌륭한 개미가 되라고 살려 준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불쌍해서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무조건적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를 부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받은 개미들이 기고만장하여 ‘그 수많은 개미들 중에 우리를 선택한 것은 우리가 뭐가 달라도 달랐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한 걸 거야. 우리는 저 사망 속의 개미들과는 뭐가 달라도 다른 거야.’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 보세요. 그게 맞습니까? 아니요. 저는 그 개미들이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개미들의 미래와 발전 가능성 같은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불쌍해서 몇 마리 구해 준 겁니다. 그런데 그 개미들이 저에게 보답을 하겠다고 제가 먹는 밥에 다가 자기들의 양식인 죽은 파리 시체를 얹어 준다거나 제가 입을 옷을 갉아서 거기에다가 시원한 바람구멍을 내 준다거나 그런다고 해서 제가 그 개미들을 기특하게 생각할까요?

 

여러분,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에 방해만 될 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은 ‘그냥 저들처럼 죽어야 할 나 같은 자를 도대체 왜 살려내신 것일까? 나는 하나님의 일에 그 어떤 도움을 드릴 수도 없는 자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방해만 되는 자일뿐인데 왜 또 나에게 사명이라는 것까지 주시는 것일까? 아, 나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여겨주시는 것이구나, 그리고 나중에 당신이 하신 일을 나에게 전가하여 면류관 씌워 주시려고 그러시는 거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찬송하는 자로 지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의 진의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 개미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둘째 아이가 그 개미들이 한 일을 보고 그들을 기특하게 생각을 해서 살려 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빠가 중간에서 그 개미들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둘째 아이가 그들을 살려 두었던 것입니다. 그 개미들이 그 후로 개미들의 세상에서 아무리 착한 개미로 살고, 훌륭한 업적을 쌓아도 그건 개미 집 안에서의 일일 뿐입니다. 거기에 저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그냥 불쌍해서 긍휼을 베풀어준 어떤 개미들이, 그 개미들의 삶을 열심히 살면서 자기들을 구원해 준 ‘나’라는 존재를 알고 감사의 마음으로 ‘나’를 대적하지 않고 ‘나’와 화목하게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 개미들이 저를 위해 개미집을 다섯 채나 짓고 그 개미들이 먹는 구더기, 파리 시체 등을 열심히 모아서 저에게 예물로 바치고, 자기들끼리 섬겨주고 감싸주고 한다고 제가 그 행위를 기뻐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을 내어 놓고 상을 받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상은 이미 그들을 그 개미들의 행렬에서 건질 때 온전한 것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들을 그 행렬에서 건져 올렸을 때에는 ‘내가 우리 둘째 아들의 진노에서 끝까지 너를 지켜 줄게’라는 구원자의 은혜와 긍휼이 그에게 쏟아 부어진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바로 상입니다.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은 순간 우리가 하나님의 수준으로 높아졌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가 요구하시는 것을 일개 피조물이 해 낼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그 업적과 공로를 통해 상을 받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구원은 은혜로 받고 상은 차별 성과급으로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그건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를 아예 잘 못 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칭의의 영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칭의, 성화, 영화를 모두 아울러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은혜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칭의는 은혜로 받고 성화는 우리의 힘으로 이루겠다고 하는 것이 성화론 아닌가요? 그게 골로새 교회에 들어 왔던 거짓 선지자,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드릴 것인데, 초대교회 때에도 그렇게 알매니언주의가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고 바울 같은 대 사도가 그것을 깨기 위해 그토록 수고를 했단 말입니다. 물론 알미니우스나 펠라기우스는 한참 후대 사람들이지만 그러한 경향과 왜곡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단 말입니다. 그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똑같은 발상인 것입니다. ‘내가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이제 하나님처럼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늘의 삶을 내 힘으로, 내 열심으로 충분히 해 낼 수 있다.‘ 이게 첫 번째 아담의 마귀 적 발상 아니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그 자리로 가서는 안 됩니다. 이 역사는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만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인간의 몸과 혼과 영의 실체와 본질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은 그 안에 들어온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주관하시며 완성하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일에 관해 자신의 소유권을 절대로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그 일의 실체를 파헤쳐 보자고요. 그 형형색색, 가지가지의 일들은 전부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성도의 삶에 주어지게 되는 것인가? 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삶에, 당신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격발시켜 내시는 것일까?

 

(요 6:27-29)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존재 가능성의 완전 부정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내 밖의 다른 존재를 믿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하나님의 일은 전부, 우리가 예수만을 잘 믿는 자로 만드시기 위한 징검다리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구원해 내었는지, 왜 구원해 내었는지, 왜 너희는 그러한 나만을 믿고 의존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터져 나오는 수많은 ‘하나님의 일’을 통해 배워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성과의 차등이 있을 수도 없고 그러한 차등에 따른 성과급의 보상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도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은 그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만을 믿게 되는 데에 다리요 수단 역할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도의 궁극적인 목표지점이 나 자신을 믿던 자리에서 내려와 예수를 믿는 자리에 서는 것이고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우리가 ‘나’라는 신을 믿던 자아 숭배 교에서 벗어나 ‘예수’만을 믿는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 새롭게 탄생하게 되는 일은 이미 십자가에서 완료 되었고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전 언약 안에서 이미 성취된 일입니다. 그 성취된 일을 우리 삶 속에서 실제 화(actualizing)하여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말씀을 통해, 삶을 통해, 배워가고 이해하게 되는 데에 필요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게 완료된 현실을 실제 화의 삶을 통하여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그 일을 근거로 상을 받겠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요? 거기에 대해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 곳이 로마서 4장입니다.

 

(롬 4:2-6)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5절을 보시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그냥 그를 의롭다 여겨주시는 이를 믿는 믿음이 ‘의’라고 하지요? 왜요?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까요. 여기서의 ‘일’은 율법주의가 요구하는 인본주의적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에 이르려 하는 자들은 은혜를 어떻게 여기는 자들이라고 합니까? ‘빚’으로 여긴다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죄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모리아 산 위에서의 아브라함의 행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특한 일을 행한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살리기 위해 대신 제물로 바쳐지는 이삭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건 아브라함의 자유의지에 의한 상급 받을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함에 의한 아브라함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모리아 산 위에서의 아브라함의 행함은 그 본질을 추적해 보면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참으로 용기 없고, 연약한 행위였습니다. 그건 인본주의의 재판정에서 상 받을만한 일이 아니라 벌 받을 일이었습니다. 인본주의가 뭡니까?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도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가슴에 칼을 꽂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 것이라는 언약을 받아 놓은 아브라함에게 달랑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후손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때 하나님을 도울 수 있는 기특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됩니까? 말려야지요. 하나님께 훈수를 둬야지요? ‘하나밖에 없는 후손이 죽으면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일이 성취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지금 잘 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이삭은 살려야 합니다.’ 그렇게 말려야지요. 그때까지 아브라함은 계속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말려 왔잖아요? 애굽 왕 바로에게,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팔아먹으면서까지 자신의 씨를 보존해 온 아브라함입니다. 자신이 죽으면 하나님의 언약이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핑계로 아내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은 것 아닙니까?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내 사랑하는 아내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나의 씨를 잘 간직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야 말리라’는 아브라함의 굳은 의지가 얼마나 멋있어 보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의 열심을 하나도 반갑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리아 산 위의 이삭과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 화하여 아브라함에게 들이 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지혜나 아브라함의 힘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네 생각으로 나를 도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은 ‘예수의 올 때를 기다리다가 보고(요 8:56)’의 현실을 경험한 것이고, 거기에서 자기의 지혜와 힘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돕겠다는 기특한 망상을 놓아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 밖에 없는 후손 이삭의 가슴에 칼을 꽂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일은 내가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최종 목적지인 것입니다. ‘나’의 힘과 지혜를 놓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는 상태, 그 상태가 바로 나를 부인하는 상태인 것이고,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올바로 인식하게 될 때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리아 산 위에서의 아브라함의 행위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인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에 의해 아브라함의 믿음과 자기부인의 행함이 격발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인간적 행함을 동반하지 않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함을 근거로 하지 않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산되어 나온, 자기의의 믿음과 행함은 가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굳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돕겠다고 사라를 팔아먹은 그런 행함이 오늘날 성화론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행함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난 하나님의 일에 절대 도움이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올바른 자아 인식에서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함, 즉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는 행함이 격발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행함에 의한 믿음이 바로 우리의 행함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인데 어떻게 거기에 우리에게 돌아 올 보상이 개입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 상급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 나오는 곳이 창세기 15장입니다.

 

(창 15:1)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니라”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이란 자기 힘으로는 파악조차 못할 어떤 세력, 어떤 힘에 의해서 단단히 사로잡혀 있는 상태이고 하나님 쪽에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 영적인 상대를 향하여 전쟁을 벌이시는데 아브라함은 본인이 원치 않아도 그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방패라는 전쟁 용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인간들은 당연히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전쟁에서 아브라함을 방패처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이고 그게 바로 상급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상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 권세를 잡은 악마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하겠습니까? ‘네가 바로 이 세상의 신이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만 듣고 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야, 네 뜻과 네 지혜를 펼치면서, 네 선악의 판단을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고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해봐, 사람들이 널 얼마나 가치 있고 훌륭한 사람으로 봐 주겠어? 세상이 합의하고 정의 해 놓은 멋진 인간상을 너의 행위로 보여 봐.’ 이게 마귀의 공격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전쟁의 방패가 되시겠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절대 그렇게 못 살게 만드신다는 거지요? 왜요? 그렇게 사는 것이 곧 사망이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방패로 막아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시는 당신 자신을 상급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의 상급을 굳이 이 세상 속에서 가시적 형태로 찾으려고 한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겠어요? 일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상급의 증거인 것입니다. 자기의 야망과 꿈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지리멸렬 망해가는 것이 상급의 모양인 것입니다. 우리를 계속 망하게 하시고 도덕과 윤리를 못 지키게 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지혜와 힘을 통하여 성취되는 일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이고, 도덕과 윤리를 지켜서 자신들의 인기와 만족과 영광을 챙기는 일이 얼마나 추악한 짓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이고 그게 연합이며 그게 바로 복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취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상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순간부터 이 사망의 세상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게 되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다시 상으로 주신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다시 당신과 연합시키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인간은 영이 되고 그 영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오는 사망의 증상들과 이별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이루셨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 아닙니까? 우리가 뭘 잘해서 하나님과 다시 연합되어질 수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상은 우리가 뭘 잘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 은혜로, 선물로, 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이라는 상을 받겠다는 것은 정말 얼토당토한 발상이지요.

 

천국에 상급의 차등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포도원 일꾼의 비유입니다.(마 20:1-16) 이 비유에 보면 각기 다른 시간에 부름을 받고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들이 등장합니다. 각기 다른 시간에 부름을 받았다면 일한 시간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일찍 부름 받은 일꾼은 나중에 부름 받은 일꾼에 비해 일한 양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일한 시간에 따라 받는 삯이 달라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계산 방법이고, 우리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공평한 계산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애초에 약속한 품삯대로 모든 일꾼에게 동일하게 임금을 지급합니다. 그래서 일찍 와서 일한 일꾼들이 주인에게 공평하지 않다고 원망을 합니다. 이것이 상급의 차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모습인 것입니다. 일한 만큼 다르게 받는 게 옳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약속한 대로 주었기 때문이고, 나중에 온 일꾼도 먼저 온 일꾼과 동일하게 지급하는 것은 오직 주인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온 일꾼이 잊은 것은 주인이 자신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그날은 굶어야 한다는 자기 처지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잊지 않았다면, 불러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삯으로 만족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늦게 온 일꾼을 보면서 자신보다 적게 일했는데도 동일한 삯을 받는 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즉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마치 제가 구해 준 두 마리의 개미가 자기들이 어떤 지경에서 건짐을 받은 것인지를 잊어버리고 자기들끼리 열심히 일을 해 놓고는, 저에게 차등 있게 상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똑같은 거지요? 저는 그 개미들이 이루어 놓은 일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결국 상급의 차등을 주장하는 사람은, 죽어야 할 자신을 하나님이 은혜로 불러 주셨다는 것을 잊은 채 자신이 일한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되어 진 일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을 명심한다면 신자는 그저 하나님의 불러주신 은혜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딜 상을 요구합니까? 하나님의 불러주신 은혜 안에서는 무엇을 해도 일을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일을 한 것이 아니기에 보상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되는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장사를 해서 이문을 남긴 종들이 상을 받았다고만 하지 많이 남긴 사람이 더 큰 상을 받고 적게 남긴 사람이 적은 상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 19장의 므나의 비유에서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이 열 고을 권세를 받고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이 다섯 고을 권세를 받은 것은 그렇게 상을 받는 자들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지향성을 갖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권세’라고 번역이 된 ‘엑수시아’는 왕의 사법권과 통제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건 하늘 왕의 권세가 왕에게 상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말인데, 주님은 그 권세를 이렇게 설명해 주신 바 있습니다.

 

(요 17:2)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 이로소이다”

 

하늘 왕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다스림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타났지요?

 

(막 10:45)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

 

하늘 왕의 다스림은 이 세상에서 섬김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건 곧 자기만을 위해서 살던 육적 자아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상급은 이 세상에서의 자기부인으로 벌써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는 자들만 살아날 수 있으니까요.

 

(막 10:42-44)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니까 므나의 비유에서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이 열 고을 권세를 받고,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이 다섯 고을 권세를 받은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급 차등 론의 차원에서 차등 있는 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섬김의 삶, 즉 자기 부인의 삶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볼까요?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고 묻는 것은 제자들이 천국을 높고 낮음의 차별적 구조가 존재하는 세계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또한 상급 차등 론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존재의 결과물을 가지고 큰 자, 작은 자를 가르는 것이니까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다’라고 답하십니다. 이것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큰 자고 낮추지 못한 사람은 작은 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3절을 보시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언을 하신 후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자기를 낮추는 어린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서는 전부다 큰 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천국의 속성인데 어떻게 ‘내가 크냐, 네가 크냐’의 차등 상급 론을 주장할 수 있느냔 말입니다. 여기에서의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의 아버지 의존적 삶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전부 다 아버지 손잡고 아버지 덕으로 천국에 들어 온 자들이 무슨 상을 바라냐고요. 은혜를 아는 신자는 결코 상급의 차등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부름 받고 주를 믿는 믿음의 세계에 참여한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눅 17:7-10)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보시다시피 종은 주인의 명령대로 일을 한 후에 ‘나를 알아 달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종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종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의식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일을 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우리가 십자가의 실제 화의 삶을 살아내면서 구원의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고 자각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은 모두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이며 열매인 것이지 우리가 우리 것으로 챙겨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오해를 할 만한 구절들을 몇 개만 설명해 드리고 오늘은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바울 서신 서에 나오는 몇 가지 오해가 될 만한 구절들을 자세하게 설명을 해드리고 이 기독교의 상급 론에 결론을 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전 3:6-8)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8절을 보시면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거기에 상을 받는다는 말은 있어도 차등 있는 상을 받게 된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 어절은 오히려 바울이나 아볼로처럼 각기 다른 종류의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 들이 한 일의 종류나 수고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각기 자기들의 상인 영생을 똑같이 받게 된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왜요? 그 답이 7절입니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고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이 그 일의 주관자시오 실행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에 붙어 있는 이야기가 그 유명한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고전 3:10~15)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사도 바울이 바로 위에서 상 이야기를 했는데 그 상이 어떤 것이었냐면 바울이나 아볼로가 한 그 어떤 행위도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동일한 상이었습니다. 왜요? 결국 심고 물 준 것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까요.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면 그들의 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되니까요. 그리고는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터 위에 예수가 지으시는 집 이외의 모든 공력은 다 불타 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의 공력, 즉 업적에 의해 상을 받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발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사도가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어떤 공력과 공적이 하나님의 심판의 불 앞에서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그때 인간의 공력은 다 불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발상에서 열심히 노력한 자들의 공력이 어느 날 다 불타 없어져 버리고 예수라는 터와 예수라는 집만 남게 될 때, 쉬운 말로 그들의 노력과 열심에 상관없이 똑같은 상을 받게 될 때, 세상 적 관점에서 그들 수고가 어떻게 보여 지겠습니까? 손해로 보여 지겠지요? 죽어라고 했는데 그 공력은 다 불타버리고 상은 똑같이 받으니까요. 그래서 15절에 ‘해’라는 단어가 ‘제미오오’ ‘손해를 입다’라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순간 ‘그럼 난 이제부터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하고 마음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바로 예수라는 터 위에 엉터리 집을 짓고 있던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최후의 심판대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집만 남고 나머지 모든 공력들이 다 불타 없어질 때 우리 성도가 느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이랍시고 내어 놓은 일은 다 쓸모없는 것이었구나’가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다 불타버린 우리의 행한 일 앞에서 부끄러운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불 가운데서 얻는 부끄러운 구원인 것입니다. 거기에 어디 차등 있는 상을 준다는 말이 있습니까? 이번에는 로마서 2장으로 가보세요.

 

(롬 2:6~8)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여기에 보시면 바울이,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을 하신다고 딱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응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상을 주다’라는 단어입니다. 선을 행한 사람에게는 영생으로 상을 주시고 진리를 좇지 않은 사람에게는 노와 분으로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일에 열심인 사람은 상을 주고 악한 일만 하다가 간 사람은 벌을 준다는 그런 차등 상급 론을 말하는 것이라면 로마서 2장은 자체 모순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밑의 11절에 이런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롬 2:11)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 이니라”

 

제가 수요 예배 때 이 ‘외모’라는 것이 단순히 겉모양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해 드렸지요? 여기에서의 ‘외모’는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들의 가시적 행위를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바로 위에서는 하나님이 인간들의 행위를 근거로 상벌을 정하신다고 해 놓고 바로 밑에서는, 하나님이 인간들의 행위를 보시고 사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가 여기에서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선’과 ‘악’에 관한 개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구조에 빠져 있는 인간들이 정의하는 선은 도덕과 윤리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도덕과 윤리의 틀에 맞추어 사는 사람을 선하다고 인정해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나누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행위는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선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만일 도덕과 윤리의 틀로 선과 악이 나누어진다면 이런 구절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롬 3:12)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을 모르고도 도덕과 윤리 안에서 착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자들의 모든 선한 행위를 ‘선’으로 인정 안한다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지요? 그 옛 사람이 과거에 저지르던 도덕적 윤리적 범법 행위를 가리키는 거라면 예수를 모르면서도 착하게 잘 사는 사람은 벗어 버릴 옛 사람이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를 모르고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주 착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새 사람으로 인정 안 하신다니까요. 예수를 믿고 예수만 의존하는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다시 로마서 2장으로 가서 7절을 보세요.

 

(롬2:7)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영생이라는 상을 받을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게 된다고 하지요?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고 합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뭡니까? 내 몸과 내 행위와 이 세상의 대척점에 서 계신 예수님이며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도의 선은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나 행복, 썩어질 자신의 행위, 등을 의지하던 마음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의만을 의지하여 항복하고 엎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 스스로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고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면 인간은 절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롬 1:28)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시면 인간들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치 못한 일만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의 삶에서 선한 일, 즉 예수의 의만을 바라보며 썩지 않을 나라인 하나님 나라만을 의지하는 행위가 발생했다면 그건 곧 누가 개입을 했다는 말이 됩니까? 죄 속에 내 버려두셨던 하나님이 그를 붙들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생과는 다른 영생을 상으로 받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눈이 이 세상에서 들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예수님의 의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시는 자들은 어떻게 살게 되겠습니까? 여전히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며, 자신들의 가치와 영광을 위해 당을 짓고, 진리를 좇지 않겠지요? 그게 8절입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당을 짓고 하나 됨을 추구한 최초의 사건이 선악과 사건이었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바벨탑에서 똑같은 일을 저지릅니다. 이 역사 속의 인간들은 그렇게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나 됨을 추구하고 연합을 시도 합니다.

 

즉 자신이 살기 위해 하나 됨을 추구합니다. 그건 죄입니다. 하나님 나라, 즉 묵시를 사는 이들은 자신을 죽여 하나 됨의 연합을 이루는 자로 밀려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였고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절대 진리이신 예수님을 좇지 않습니다. 자신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이들은 절대 상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고, 자신의 행위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삶에 하나님의 열심이 당신의 백성들을 ‘자신을 죽여 하나님과 이웃과 연합을 이루는 지향성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상을 바라는 자로 놔두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하늘의 평화를 추구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자들이 상을 받아 다른 사람들과의 차등 있는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 어떻게 말이 됩니까?

 

(계 20:12-13)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여기에서 ‘행위’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엘곤’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본 ‘하나님의 일’에서 나온 바로 그 단어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일’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과 무관한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일에 의해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의 행위에 의해, 자기의 일에 의해 상을 받고 벌을 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계 19:8)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 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여기에서의 옳은 행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가 평생 동안 쌓은 선행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의 옳은 행실은 ‘디카이오마’ 즉 ‘의’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그 ‘의’, 옳은 행실을 입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는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결론으로 로마서 3장 21절 이하를 읽고 마치겠습니다.

 

(롬 3:21-28)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여러분, 우리의 일은 예수만을 믿고 의지하는 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완료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완료하신 그 일의 의미와 가치를 이 세상에서 배우고 가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상이 웬 말이며 공로가 웬 말입니까? 성도는 구원을 받는 그 순간부터 자기 자아를 차압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은 죽고 예수의 몸, 지체로서의 새로운 나, 집단적 존재로서의 ‘나’, 교회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우리가 각 지체의 공로와 행위를 근거로 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팔과 다리가 자기들은 더 많이 수고 하니까 밥을 더 달라고 조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처음자리가 어디였는지 절대 잊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만을 찬송하는 서머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저 평상 위로 옮겨진 개미일 뿐입니다. 말씀 드린 대로 다음 시간에 골로새서를 중심으로 바울 서신의 몇 군데를 더 찾아서 부르심과 순종케 하심의 교리가 왜 복음이 되는지, 왜 우리는 상급을 바랄 수 없는 존재인지 조금 더 설명을 해 드리고 기독교 상급 론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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