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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26.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김성수 목사)

 

 

(계 16:17-21) “17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18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21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우리는 지난주에 사람들이 그렇게 궁금해 하는 아마겟돈 전쟁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공부를 했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이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미래의 어느 날 중공군과 아시아 연합군 2억이 이스라엘과 므깃도 언덕에서 치르게 될 전쟁이 아니라 우리 신자의 삶 속에서 매일 매일 치러 내야 하는 치열한 영적 전쟁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것을 구약을 비롯한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해 확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신앙의 여정동안에 치열한 전쟁을 치르게 되지만 그 전쟁의 결과는 이미 시편을 비롯한 성경 전반에 기록이 되어 있음도 알았습니다. 시편 2편의 기록에서처럼 우리의 대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철장에 박살이 나게 될 것이고 갈멜산의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처럼 단 칼에 그 목이 날아갈 것임을 우리는 이제 압니다. 그래서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기뻐하기로, 당당하기로 했지요. 오늘은 대접 재앙의 마지막 재앙인 일곱 번째 대접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먼저 17절을 보셔요.

 

(17절)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일곱 번째 대접이 어디에 쏟아집니까? 공기 가운데 쏟아집니다. 여섯 번째 대접까지는 땅, 강, 해, 물, 짐승의 보좌 같은 구체적인 장소가 등장한 반면에 마지막 일곱 번째 대접은 공기 중에 쏟아집니다. 이 ‘공기’라고 번역이 된 ‘아에르’는 에베소서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엡 2:2)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성경에서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 하는, 마귀가 붙들고 있는 세상을 ‘아에르’‘공중’ ‘공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곱 번째 대접이 ‘공중’에 쏟아졌다는 것은 마귀와 그가 권세를 잡고 부리고 있는 악한 세상 전체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성경기자는 그 ‘공기’라는 단어를 통해 그 마지막 일곱 번째 대접 심판은 물이나 땅이나 해 같은 지엽적인 심판이 아닌, 절대 피할 수 없는 총체적인 심판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공기와 상관없이 살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요. 그러한 일곱 번째 대접심판은 심판의 총체성과 완결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의 총체성과 완결성은 바로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구절에서 더 명확해 집니다.

 

일곱 번째 대접이 공기에 쏟아지자, 그 대접 재앙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납니다. ‘다 되었다!’ 이 ‘다 되었다’ ‘게고넨’은 ‘It's done’이라는 뜻입니다. 이 선언은 사단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멸망되고 피조물이 깨끗하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 행위의 완성을 선언하는 ‘완료 동사’입니다. 우리는 이 한 단어 안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완결을 읽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이 말씀을 똑같이 하신 적이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십자가의 승리는 마귀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철장으로 그 마귀의 허리를 꺾어 버리셨고 이제 그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다가 영원히 멸망하게 될 날이 ‘곧 반드시’ 오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그 ‘게고넨’이라는 단어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18절을 보세요.

 

(계 16:18) “18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일곱 번째 대접이 쏟아지자 ‘번개와 음성과 뇌성과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현현과 심판을 묘사할 때 계속 등장하던 것들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현현이 있을 때 동일하게 이러한 단어들이 사용 됐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출 19:16-19) “16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계 4:5)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계 8:5)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계 11:19)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이렇게 하나님의 현현과 그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심판의 모습이 묘사될 때는 언제나 번개와 음성과 뇌성과 지진과 우박이라는 상징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늘의 보좌가 등장하면 여지없이 번개와 음성과 뇌성과 지진이 함께 등장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일곱 번째 저주의 대접이 공중에 쏟아지자 똑같은 것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이미 심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속성 상 절대 죄와 악을 묵과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 지진은 너무나 큰 지진이라 유사 이래로 그런 큰 지진이 없더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요? 왜 유독 지진에 대해서만 이런 부연 설명이 붙어있을까요? 이 마지막에 있을 진동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것입니다.

 

(학 2:6-7) “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광의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시면서 그 전에 온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에도 이러한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이 등장합니다.

 

(히 12:26-29)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 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큰 지진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머물게 될 진동치 못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됨을 알리는 축포 같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공포의 진동이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축제의 불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에게는 전쟁이나 기근이나 질병이나 자연재해나 그 어떤 것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시편에 이미 그 마지막 때의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시 46:1-3)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3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속으로 빠져 버리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바다가 넘쳐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피난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환난 중에 만날 우리의 도움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요동치 않는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형 집행 전날 감옥에서 코를 골며 잘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예수님께서 풍랑이 이는 바다 가운데서 곤히 주무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요동치 않는 평안 때문이었지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으시다면 여러분은 두려울 것이 없으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한 순간에 불로 태워 버리실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분의 성실한 보호 아래 안전하게 천국까지 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요일 4:18)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정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지요?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나? 내가 진짜 바로 믿고 있는 것인가를’ 두려워 하셔야 지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담임하시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40년간 장로로 헌신하셨던 어떤 분이 돌아가시면서 ‘목사님 아직 저는 거듭나지 못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돌아가셨답니다. 그 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대단히 충격을 받으셨다고 그 분의 책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분의 장례식장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결심하셨답니다. ‘나는 더 열심히, 더 강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리라, 나와 가장 가까이에서 수 십 년을 함께 했던 나의 동역 자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었다면 그 예배당 안을 가득 메운 그 사람들 중에 정말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몇이나 될 것인가?’

 

평생 예수를 믿는다고 열심을 내고도, 그렇게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 순간 ‘정말 내가 바로 가고 있는 것인가?’를 두려워해야지요. 그리고 열심히 바른 길을 찾아가야지요. 그 것만 확인된다면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이 세상은 멀지 않은 미래에 최종적인 심판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19절과 20절은 더욱 더 선명하게 세상 권세 잡은 자들과 그의 세력들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계 16:19-20)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여기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께 멸망당하는 자들,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게 될 자들을 ‘큰 성’ ‘만국의 성들’ ‘큰 성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큰 성’은 우리가 11장 공부할 때 배웠습니다.

 

(계 11:8)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그 큰 성이 어디입니까?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는 곳입니다. 소돔은 ‘타락한 도시의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그리고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고 핍박하던 곳을 상징하지요. 그러니까 그 큰 성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고 핍박하며 타락과 더러움을 조장하는 마귀의 세력과 그들이 거하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큰 성을 다른 말로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 큰 성은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 큰 성을 ‘바벨론’이라고도 부릅니다. 원래 이 바벨론 이라는 이름은 창세기의 ‘바벨 탑’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바벨’은 ‘혼란’이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을 대적하여 교만의 탑을 쌓던 죄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세상 세력을 바벨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을 바로 그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들어서 때리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 이후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적들을 지칭할 때나 불경건한 세력 혹은 인간의 타락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썼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큰 성 바벨론’하면 이런 구절을 쉽게 떠올렸을 것입니다.

 

(단 4:30-31) “30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31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느부갓네살이 ‘이 큰 성 바벨론은 내가 내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였다 이것이 내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 아니냐?’ 했을 때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느부갓네살 왕을 폐위 시키셨습니다. 그 일로 느부갓네살 왕은 광야로 쫓겨나서 7년간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큰 성 바벨론’하면 교만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났던 엄청난 저주의 사건을 떠올리며 대적들의 멸망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큰 성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과 악으로 대표되는 마귀의 세력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14장이나 21장, 예레미야 51장 같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항상 바벨론의 함락에 대해서 그렇게 통쾌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런 구절들이 등장하지요. 한 군데만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사 14:3-17) “3 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너의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날에(이스라엘의 회복의 날에) 4 너는 바벨론 왕에 대하여 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학대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포한 성이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16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경동시키며 17 세계를 황무케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사로잡힌 자를 그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않던 자가 아니뇨 하리로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바벨론과 바벨론 왕의 멸망을 예고하는 부분입니다. 바벨론 왕은 실제로 하나님의 보좌 위에 앉고자하는 교만을 지닌 자였고 세상을 경동하며, 진동하며 세계를 황무케 하고 성읍을 파괴하고 사로잡힌 자들을 풀어주지 않았던 사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바벨론과 바벨론 왕을 역사 속에서 멸망을 시키심으로 그 바벨론과 바벨론 왕으로 상징되는 사탄과 사탄의 세력의 멸망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그 바벨론 왕을 ‘아침의 아들’ ‘솨하르 벤’이라고 부릅니다. 그 ‘솨하르 벤’을 헬라어로 번역을 하면 ‘헤어스 포로스’이고 그 ‘헤어스 포로스’를 라틴어로 번역을 하면 ‘루시퍼’입니다. 그러니까 ‘루시퍼’는 실제로 타락한 천사의 이름은 아닙니다. 그 루시퍼가 사탄의 이름으로 오해되어진 것은 존 밀턴의 실낙원이라는 책에 ‘사탄의 이름은 루시퍼’라고 기록이 되어진 것으로부터 유래된 것이지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공중 권세를 잡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큰 성 바벨론은 반드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보시면 그 큰 성을 ‘만국의 성들’이라고도 부릅니다. 17장에 보면 그 음녀 바벨론이 물위에 앉아 있다고 나오지요? 그런데 그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자체 해석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큰 성 바벨론을 ‘만국의 성들’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성과 큰 성 바벨론, 만국의 성들은 같은 것을 반복해서 나열한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멸망 한다’

 

여러분, 세상은 자기들이 영원할 줄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곧 멸망의 불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추호의 실수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죄인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19절에 그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었다’는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억하셔야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전지(omniscience)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이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시지 않는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 앞에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세상은 무너지고 이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라는 구절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1절을 보시면 재난의 내용으로 우박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우박은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우박입니다. 한 달란트는 130파운드입니다. 우리 큰아들이 120 파운드입니다. 사람이 그만한 우박을 맞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즉사입니다. 이 우박 재앙은 애굽의 일곱 번째 재앙입니다. 이 우박은 구약 성경에서 특히 최후의 종말을 상징하는 전쟁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대적들을 진멸 하는 하나님의 무기로 사용되던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최후의 종말 전쟁을 상징하고 있는 ‘곡과의 전쟁’을 한번 볼까요?

 

(겔 38:21-22) “21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모든 산중에서 그를 칠 칼을 부르리니 각 사람의 칼이 그 형제를 칠 것이며 22 내가 또 온역과 피로 그를 국문하며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그와 그 모든 떼와 그 함께 한 많은 백성에게 비를 내리듯하리라”

 

곡과의 전쟁에 하나님의 무기로 큰 우박덩이가 등장하지요?

 

(수 10:6-11) “6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에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언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조하소서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하매 7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8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9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서 그들에게 갑자기 이르니 10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도륙하고 벧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니라 11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방해하는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아모리 다섯 왕이 연합해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국을 막아섰을 때 하나님께서 그 대적들을 큰 우박으로 다 죽여 버립니다. 이렇게 우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방해하는 ‘영적 소돔과 고모라, 큰 성 바벨론’을 진멸 할 때 쓰시던 무기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우박을 맞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훼방 합니다’ 그게 21절입니다. 그러니까 이 ‘죄’라는 녀석이 얼마나 끈질기고 우매하고 어리석은지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그 마귀의 세력은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심판은 미래의 어느 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물론 미래의 어느 날 완전한 종말이 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심판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놓치시면 안 됩니다. 번개와 뇌성과 음성과 지진으로, 큰 우박으로 이 땅에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오늘도 이 세상에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 이만큼 요한 계시록을 공부하셨으니까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일곱 재앙의 내용을 이미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예언을 하셨었습니다.

 

(마 24:3-14)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러분이 지금까지 공부하신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 여기에 다 요약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최후의 심판을 설명함과 동시에 AD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대목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들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의 작은 모형들을 우리의 역사 내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경험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 멸망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한번 살펴봄으로 해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 속에서 그런 작은 종말들을 만나게 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마 24:16-21)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지어다”

 

(AD70년에 베스파시안의 아들 타이터스에 의해 성전이 파괴 될 때 예루살렘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러 온 유대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서 죽은 유대인들이 11만 명이었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9만 7천명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 예언을 듣고 요단강 계곡에 있는 펠라 산으로 피한 사람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산’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의 근원지’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신앙의 위기가 왔을 때나 고난이 닥쳤을 때 그들의 삶 속에 대접이 쏟아질 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속히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유대인들의 지붕은 평평하게 되어 있어서 서늘한 저녁 시간에 휴식과 묵상과 대화의 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될 때 그 지붕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피난을 가기 위해 집으로 내려가 귀중품을 싸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인생 속에서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 재난을 만난 사람은 이 세상 보물에 미련을 두지 말고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생명부터 챙기라는 것입니다)

 

(18절)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이 구절도 역시 재난의 긴박성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유대인들은 밭에 나갈 때 겉옷은 집에 벗어 두고 활동하기 좋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갔습니다. 일을 하고 있는데 위기나 재난이 닥쳤을 때 그들은 집으로 겉옷을 가지러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종말은 맞는 자세는 매우 단호해야 하며 또 급박한 것이기 때문에 머뭇거리거나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타이터스가 감람산에서부터 포위망을 좁혀 들어 올 때 펠라 산으로 피하지 않고 머뭇거리던 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신앙에 위기가 오거나 그들의 삶 속에 재난이 닥쳤을 때 과거의 악으로부터의 단호하고 확연한 갈라섬과 비 신앙에서 신앙으로의 돌아섬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 말은 아이를 배는 것이나 젖 먹는 아이를 가진 여인네들을 나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그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너무나 두렵고 급박한 것이기 때문에 미리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큰 일이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밴 여자나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네들은 자신의 구원에 몰두하기가 힘이 들지요? 아이들에게 신경 써야 하니까요? 그 정도로 우리의 구원은 진지함과 열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0절)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유대인들의 겨울은 비가 많이 와서 땅이 질퍽거렸습니다. 그래서 그 팔레스타인의 진흙탕은 걷기조차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식량의 확보도 아주 어려워서 겨울에 재난을 피해 어디로 도망을 가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 1.8KM이상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BC168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안식일을 지킨다고 가만히 서서 살육을 당한 사람들이 태반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진노의 재난을 피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관심과 오감을 다 동원해서 거기에만 초점을 두고 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그 것은 긴박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21절)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AD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11만 명이 죽었고 9만 7천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로마 군대는 그 죽은 유대인들의 배를 갈라서 위장을 다 헤쳐 버렸습니다. 당시 피난을 가면서 보석을 삼키고 가던 사람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 보석을 꺼내기 위해 죽은 사람들의 배를 모두 갈랐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살육 후에 각종 전염병과 기근으로 자기 아이들을 잡아먹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치적이며 군사적이며 경제적인 재난이 자연 재해와 함께 최후의 심판의 모형으로 이 역사 속에 계속 있어왔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산으로 도망을 쳤고 회개를 했으며 말씀 앞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눈 먼,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손아귀에 있는 불순종의 자식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모두가 사망의 불길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떤가? 어떠세요. 여러분의 인생 속에도 이러한 종말의 모형들이 나타나고 있나요? 사람들은 이러한 정치적이며 경제적이며 군사적인 재난이나 자연 재해 같은 것은 재난으로 생각하지만 세상 풍조나 유행이나 사상, 시대정신 같은 것들 속에 들어 있는 정말 무서운 재난은 재난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의 영혼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은 정신 적인 재난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그 더러운 영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악한 시대정신과 더러운 세상 풍조 속에서 자멸해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그 재난이 재난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개구리가 끓는 주전자 속에서 따뜻하게 죽어 가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의 영혼은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에 넣으면 개구리가 난리를 치지만, 개구리를 미지근한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 속에 넣고 1도씩 천천히 온도를 올리면 개구리는 따뜻하게 만족하며 죽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방치함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대접입니다. 전쟁, 기근, 질병, 자연재해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죄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것을 심판의 도구로 쓰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음녀 바벨론이 세상에게 먹인 포도주를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그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롬 1:18,28-32)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그 진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다음 절을 보세요.

 

(28-32절) “28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 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보세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정말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내용이 뭐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성을 말리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것이 정당하지 못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마음대로 하는데 아무런 징계나 제재를 받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일은 잘 되고 있을지 몰라도 그 영혼은 파리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불의와 추악(醜惡)과 탐욕과 악의와 시기와 질투와 분쟁과 사기와 악독과 미움과 교만과 자랑과 부모를 거역함과 무정함과 무자비함 같은 더러운 영에 속한 것들이 들어 올 때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그 더러움을 즐기지요. 그러나 눈을 뜬 성도들은 그러한 더러운 것들이 마음속에 올라올 때 괴롭습니다. 그리고 벗어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도 안 되면 눈물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산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재난에서 구원을 받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는 매일 매일 이러한 종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진노의 우박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는 그 쏟아지는 우박 속에서도 매일 매일 구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의 거룩을 다듬어 가고 하나님 앞으로 발길을 돌리는 회개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아무 것도 두려워 마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을 하나님의 자녀 됨을 만들어 가는 복된 기회로 선용하셔서 행복하고 기쁜 여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 전서 3장 말씀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겠습니다.

 

(벧전 3:9-14)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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