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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26.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김성수 목사)

 

 

(계 17:1)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우리는 16장까지를 통해서 이 세상에 고난과 고통이 어떻게 하여 오게 되었으며, 그 고통들이 종말에 가까울수록 얼마나 엄청나게 심화되는지를 보았습니다. 그 재앙의 목적이 뭐였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이러한 고통들을 허락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러한 고통들이 왜 일어나게 되는지, 무엇 때문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함으로 해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시고자 함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저지른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일을 훼방한다는 것이 16장까지의 일곱 재앙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 얼마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또한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도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들이 바로 교회, 여러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일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으며, 또한 이들을 지키시고 보존하시며 영원한 천국까지 실패치 않고 기어이 승리케 하신다는 것이 요한 계시록의 전체 주제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 복음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여 점진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가 지난주까지 일곱 재앙 시리즈의 마지막인 일곱 번째 대접을 공부하면서 그 일곱 번째 대접이 바벨론의 최후인 것을 알았습니다. 큰 우박과 큰 지진으로 세상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장면을 우리는 함께 보았습니다. 16장 17절에서 ‘다 되었다’‘게고넨’이라는 단어에 대해 공부를 했지요? 그 ‘게고넨’은 ‘It's done’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요한 계시록은 16장에서 끝맺을 수 있는 책입니다. 아니 16장 이전에 14장에서도 바벨론의 멸망이 나옵니다. 12장부터 14장까지는 전체 구속사를 요약한 요한 계시록의 심장 같은 부분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요한 계시록은 그 전체 구속사를 점진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관점을 달리해서 반복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7장 이후부터 19장 10절까지는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구속사의 내용인 바벨론의 함락과 성도들의 승리를 좀 더 자세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17장부터 19장 10절까지는 일곱 대접의 내용을 다시 자세하게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는 부분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인의 재앙과 나팔 재앙에서도 똑같이 그 재앙의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반복하여 설명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의 재앙과 나팔 재앙에서는 그 부분이 여섯 번째 재앙 뒤에 삽입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반면에 여기 대접 재앙에서는 그 삽입 부분을 여섯 번째 재앙과 일곱 번째 재앙 사이가 아닌 일곱 번째 재앙 뒤로 빼 놓은 것입니다.

 

그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에 들어가 있는 삽입 구절의 내용을 한번 리뷰를 해 보면 오늘부터 공부할 이 일곱 대접의 뒤에 붙어 있는 17장부터 19장10절까지의 내용이 다른 사건이 아닌 계시록의 주제인 구속사를 앞서 설명한 관점과 다른 관점에서 반복하고 있는 부분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일곱 인의 재앙 사이에 들어가 있는 삽입 부분을 리뷰해 볼까요? 인의 재앙은 하나님께서 전쟁, 기근, 자연재해 같은 엄청난 재앙을 세상에 허락하심으로 세상을 심판해 가시는 내용입니다. 그 일곱 인의 재앙에서 여섯 번째 재앙 이후에 등장한 삽입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여섯 번째 인이 6장 말미에서 ‘누가 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 능히 서리요?’라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끝이 나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7장 전체에 삽입이 등장합니다. 그 삽입의 내용은 그 엄청난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을 맞은 하나님의 백성 14만 4천이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민수기의 군사 계수 장면을 인용해서 묘사를 했었지요? 각 지파마다 1만 2천 명씩, 그 말은 이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의 역사 속에서 구원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군사로 세상에서 전투하는 자들로 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삽입의 부분은 일곱 인(印)이 떼어지면서 세상이 멸망해 가는 바로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다른 관점으로 보는 같은 사건의 기록인 것입니다. 나팔 재앙에 들어가 있는 삽입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섯 번째 나팔 재앙이 끝난 후에 10장과 11장 앞부분까지 삽입 부분이 나오는데 10장 서두에 먼저 작은 책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공부하기를 그 작은 책은 ‘복음’이 적혀 있는 책이라고 했지요? 그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가 기록된 책입니다. 그 책의 내용이 언제 끝나게 되지요? 잘 기억이 안 나시지요? 그럼 그 책은 어디서 인용 된 책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시나요? 다니엘서에서 인용된 책이었지요? 한번 확인하고 가지요.

 

(단 12:4-7)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5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편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편 언덕에 섰더니 6 그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기사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기로 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는 자가 그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때 두때 반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그 책의 내용은 ‘한때 두 때 반 때’‘삼년 반’‘마흔 두 달’‘1260일’동안에 일어날 복음의 이야기가 적힌 책인 것입니다. 그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 즉 말세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지요? 그 기간은 우리가 익히 공부한 대로 성도들이 광야로 쫓겨나서 핍박을 받으며 양육을 받게 되는 기간이고, 두 증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활약하는 기간입니다. 요한이 그 책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까 이 작은 책에 적힌 내용이 바로 나팔 재앙으로 세상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 나오는 구속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그 삽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책에 이어서 나오는 삽입이 성전 척량 사건이었습니다. 그 구절은 한 번 찾아서 읽어보지요.

 

(계 11:2)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여기서 성전을 척량하되 밖은 척량하지 말고 성전 안만 척량하라고 한 것은 우리 성도들이 마흔 두 달 동안 외형적으로는 이방인들 즉, 세상에 짓밟히는 모습으로 가게 되지만 그 영혼은 구원을 받고 있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진리를 역설하는 부분이었지요? 이 내용도 역시 그 나팔 재앙이 일어나는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등장하는 삽입 부분이 두 증인의 이야기였습니다. 두 증인은 역시 삼 년 반 동안 복음을 증거 하는 자로 등장하지요. 그런데 그 두 증인의 내용도 역시 이율배반적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말씀으로 복음을 증거 할 때 사단의 세력이 꼼짝을 못하는 모습과 함께 그들이 큰 성 길 가에서 죽는 모습을 동시에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의 삶은 이러한 이중적인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겉으로는 세상에게 당하는 것 같고 약하고 물러터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삶이 승리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나팔 재앙의 삽입 부분도 역시 그 나팔 재앙의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일곱 재앙에 들어 있는 삽입 부분들은 재앙의 기간 동안에 동시에 일어나는 성도들의 승리의 모습을 재앙을 당함으로 멸망해 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닌 그 멸망해 가는 세상 속에서 승리자로 일어서는 성도를 바라보는 관점을 기록한 것이 바로 삽입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17장부터 19장 10절까지의 내용을 뒤로 빼낸 삽입 부분으로 본다면 이 17장부터 19장 10절까지의 내용도 역시 우리가 앞에서 공부한 대접 재앙의 내용을 다른 관점으로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나누어 드린 handout을 보시면 아시겠지만17장 18장에서는 바벨론이 어떻게 통쾌하게 멸망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고 틈틈이 그 속에서 끝까지 싸워 이긴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는 찬양이 등장하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세상은 그 한 때 두 때 반 때 동안 자기들이 승산이 있는 줄 알고 기고만장해서 아마겟돈으로 그 세력을 모아 하나님께 선전 포고를 하고 있지만 그들은 지금 멸망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승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을 이 17장부터 19장 10절까지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7장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측면에서 바라본 바벨론의 멸망을 보여 주고 있고 18장에서는 경제적, 물질 적인 면에서 바라 본 바벨론의 멸망을 그리고 있고 19장에서는 그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 백성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자들은 성경을 문자 적이며 역사적인 순서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이 17장 이후의 부분을 대접 재앙 다음에 오는 또 다른 역사적인 사건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렇지만 17장만 잘 읽어보아도 이 17장 이후가 대접 재앙의 반복적인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 17:1)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이 17장 이후의 일을 누가 보여줍니까? 일 곱 대접을 가진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일들을 설명해 주는 것도 그 천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17장부터 19장 10절까지의 내용은 일곱 대접 재앙의 반복설명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1절부터 한 절 한 절 풀어 보도록 하지요. 먼저 1절을 보시면 지금부터 전개 될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한 마디로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뭐지요?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입니다. 여기서 음녀는 바벨론을 말합니다.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계 17:18) “18 또 네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그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하기를 그 큰 성이 뭐였습니까? 바벨론이었지요. 그런데 그 세상 권세 잡은 자와 그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벨론을 왜 음녀라고도 부르는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가리켜 ‘창녀, 음녀, 간음 한 자’라고 부릅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창녀 고멜이 바로 진정한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한 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우상을 좇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간음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 1:21-22) “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 들 뿐이었도다 22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보세요, 패역한 이스라엘을 가리켜 창기라고 부르시지요?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던 자들입니까? 하나님이 아닌 은과 포도주를 추구하던 자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힘, 은과 포도주를 추구하는 자들을 성경은 창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것을 다른 말로는 우상 숭배라고도 부르지요.

 

(엡 5:5) “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 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보세요, 성경은 이렇게 음행과 더러운 것, 탐하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음행의 영적 의미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우상 숭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음행을 조장하는 음녀는, 하나님 말고 다른 힘 즉,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마귀의 세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바벨론이었지요? 그래서 바벨론을 음녀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당 안에서 세상의 힘을 약속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겠노라고 예배당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간음을 하게 만드는 악한 행위인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이러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요일 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세상의 힘을 추구하게 만드는 음녀들은 하나님의 권능의 날에 반드시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여러분도 부지불식간에 음녀의 미혹에 넘어가게 되고 급기야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엄하게 금하시는 음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요.

 

(계 14:4)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보세요, 우리 성도들은 그 음녀의 유혹을 뿌리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모두 그 화려한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 버립니다. 2절을 보시면 그 음녀의 유혹이 얼마나 달콤한지 땅의 임금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 즉, 하늘에 속하지 않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음행을 행하던 자들이라고 나오지요.

 

(계 17:2)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위엣 것을 찾지 않고 땅의 것에 매달려 있으며 이 땅의 것으로 일희일비 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음녀와 함께 음행을 하고 있는 분들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음녀의 개념의 출발점은 구약 성경의 이세벨 왕비입니다. 그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였습니다. 그 이세벨 왕비는 아합 왕에게 시집을 오면서 자신이 섬기던 우상을 함께 들여와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을 섬기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그녀를 가리켜 ‘이스라엘로 행음하게 한 여자’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계 2:20)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그 이세벨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미혹했는지 열왕기 하 9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왕하 9:22) “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음행과 술수로 이스라엘을 미혹했던 여자였습니다. 여기서 ‘술수’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케쉐프’가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에서는 ‘활마케이아’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활마케이아’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 똑같이 쓰인 곳이 있습니다.

 

(계 18:21-23)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여기 보시면 큰 성 바벨론이 만국을 ‘활마케이아’‘복술’로 미혹했다고 하지요?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바벨론과 음녀는 같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바벨론은, 즉 음녀는 이렇게 세상을 음행과 복술, 마술, 기적으로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힘을 사랑하며 추구하는 ‘음행’과 ‘마술, 복술’이 함께 등장할까요? 여러분 마귀가 교회를 공격해서 음행을 조장하는 무서운 무기 중의 하나가 바로 기적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왜 사람들이 기적을 찾습니까? 그 기적이 나에게 적용이 되어서 나의 삶에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기적을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기적의 추구’는 ‘기복’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음행’과 ‘복술’이 음녀와 함께 등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둘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동일한 욕구에서 출발된 것들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마술사 ‘시몬’이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기적을 좇다가 결국 어떤 저주를 받게 됩니까?

 

(행 8:18-20)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을 저주하기를 ‘은과 함께 네가 망할 것이다’라고 저주를 합니다. 마술사 시몬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적을 동원해서 돈을 벌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오늘 날 신비주의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마술사 시몬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그건 우상 숭배이며 음녀의 속임수입니다. 이렇게 기복과 신비는 음녀, 큰 성 바벨론의 미혹인 것입니다.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성경이 이렇게 처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하 9:36-37) 36 돌아와서 고한대 예후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로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지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 같이 밭 면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음녀 이세벨의 고기를 개들이 뜯어먹도록 저주하십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자들의 말로는 이처럼 처참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음녀의 말로가 어떻게 묘사가 되고 있는지 계시록 17장 16절로 가겠습니다.

 

(계 17:16) “16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세벨의 말로와 똑같은 말로가 여기 나오지요? 역시 음녀도 살을 뜯깁니다. 그런데 그 음녀의 살을 누가 뜯어 먹느냐하면 개가 뜯어먹고 ‘짐승’이 뜯어 먹습니다. 둘은 같은 편 아닌가요? 음녀가 타고 있던 짐승이 오히려 음녀를 뜯어 먹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하나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은 스스로 서로를 뜯어먹으며, 서로 서로 미워하고, 스스로 자멸한다는 것입니다.

 

(딛 3:3)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세상에 속한 자들을 묘사하는데 그 목록 중에 ‘그들은 서로 미워하는 자’라는 대목이 있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공동의 유익 앞에서는 손은 잡는듯하지만 그러한 이익이 사라지게 되면 언제든지 서로를 적으로 여기며 미워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스스로 자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편인 것 같았던 짐승이 음녀를 뜯어먹는다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음녀의 미혹에서 건져진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여전히 서로 뜯어먹어야 합니까? 아니죠?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을 대표적으로 특징짓는 단어가 ‘사랑’인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제 서로를 뜯어먹는 개들이 아니라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 음녀와 어린양의 신부를 정확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음녀는 심판을 받아 살을 뜯기는 저주를 받게 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어린양의 신부는 화려한 혼인 잔치를 하게 됩니다. 음녀는 자기의 운명 공동체인 짐승에게 결국 뜯겨 먹히게 되지만 어린양의 신부는 어린양 예수님께서 끝까지 보호하시고 사랑하셔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 내십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렇게 흰옷을 입은 순결한 신부와 붉은 옷을 입은 음녀의 결국을 자세하게 기록을 함으로 해서 아직 이 땅에서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어린양의 신부들에게 용기와 위로와 격려를 쏟아 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계시록 14장4절에 그 신부들은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어린양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시겠습니까? 그 어린양께서 우리 신부들에게 딱 한 가지 요구를 하고 올라가셨지요?

 

(요 13:34-4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의 신랑이신 어린양은 우리를 이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음녀를 좇는 자들은 ‘피자 미워하는 자들’이었지만 어린양을 좇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 들’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 나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나의 유익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세상의 은을 좇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에게 왜 세상의 기적, 복술이 필요합니까?

 

제가 우리 청년 부 철야기도 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하는 종교 행위들은 모두 이 ‘사랑’을 만들어 내는 재료일 뿐입니다. 성경 공부, 봉사, 헌금, 구제 이 모든 것은 ‘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재료들입니다’ 그런데 재료는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제품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 소용없는 헛수고 인 것입니다.

 

옷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이 원단과 실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 것에만 만족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곧 파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성경 지식과 열심과 헌신을 가지고 ‘사랑’을 만들어 내셔야 하는 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 가지고 자랑하지 마세요. 만일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그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누구 누구는 복음을 몰라, 그러니까 그 사람하고는 놀지 마’라고 여러분에게 말하거든 ’이 음녀야 물러가라‘하고 외쳐 주세요. 자기가 가진 성경 지식을 가지고 남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과 자기를 구별하는 배타의 무기로 쓰는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창고에다가 옷감과 실만 잔뜩 쌓아놓고 그 걸 쳐다보면서 만족스럽게 침만 질질 흘리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곧 파산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그런 편협한 배타성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정답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이것이 배타성입니다. 그러나 그 배타성은 ‘포용성’을 포함한 배타성인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시면 오늘이라도 우리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열어두고, 기다려 주는 포용성, 그리고 누구에게나 성장의 과정이 있듯이 아직 연약한 사람들을 기다려 주는 포용성과 인내심을 동반한 것이 진짜 기독교가 갖는 배타성이요 유일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누구를 위해 기도를 가장 많이 할 것 같으세요? 아내? 자식? 부모? 아니요, 제가 늘 예로 드는 기복과 신비를 한국 교회에 정착시킨 그 노(老) 목사님을 위해 가장 많이 기도합니다. 그 분이 신비와 기복의 뿌리를 하루속히 잘라내서 그 분을 추종하고 있는 수십만 명의 영혼들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틈만 나면 기도합니다. 그게 기독교가 갖고 있는 진정한 배타성인 것입니다. 그게 피차 미워하는 일을 중단한 어린양의 신부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를 단순히 종교 적인 행위를 하는 정신적인 것으로만 알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아직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젖어 계신 분들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처럼 정신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영적인 것입니다. 형이상학적이며 정신 적인 것은 물질세계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지만 영적이라는 것은 이 물질 세계 속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영적인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되어 그 영적인 나라를 바로 여기 이 땅에서 구현해 내는 연습과 훈련을 하는 것을 영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 것을 잘 하는 사람을 영성이 깊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40일 금식 기도를 하고 1000일 새벽기도를 하고 틈만 나면 입에서 찬양이 흘러나오고 방언 기도를 줄줄 하는 것을 영성이라고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많은 분들이 수련회 같은 데 가서 ‘놀아라’하면 굉장히 불안해하십니다. 노는 건 세상 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영적인 것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우리 목사가 그냥 놀라고 하니까 불안 한 것입니다. 이 번 수련회에서도 제가 밤에 이리 저리 다녀 보니까 어떤 방에서는 밤새 복음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잘하셨습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렇게 밤새 복음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아침에 밥 먹으러 나와서 밤새 그냥 논 다른 사람들을 보며 ‘저런 세상 적인 것들, 목사가 놀라고 그랬다고 어떻게 밤새 잡담이나 하고 게임이나 하고 그렇게 놀 수가 있어’ 만일 이러한 정죄의 마음으로 그 종교 행위가 이어진다면 여러분은 밤새 헛수고하신 것입니다. 그냥 노래 열심히 해서 목만 쉰 것이지 그걸 영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밤새 고스톱을 치고 논 사람들이 훨씬 낫습니다. 밤새 고스톱을 치면서 내 이웃을 속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광이 나와도 안 먹고 많이 잃고도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는 그게 기독교이지 나의 종교 행위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영성은 현실에 뿌리를 박고 있지 않으면 다 헛것입니다.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를 소화해 내실 실력이 있으신 분들이라 믿기 때문에 이런 예를 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또 ‘우리 목사가 고스톱 쳐도 된 대’ 그러고 다음 수련회 때 전부 담요 챙겨 오시지는 마세요. 제발 서로 미워하지 마세요. 다투지 마세요. 상대방을 업신여기지 마세요. 여기 이 자리에서 그 걸 훈련하여 열매로 내 놓는 것이 영성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음행을 조장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음녀의 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신 분들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마세요. 그러면 자꾸 나를 증명하고 싶어집니다.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마세요. 그런 것들 추구하니까 자꾸 다른 사람들이 경쟁상대로 보이게 되고 심지어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피차 미워하며 서로를 뜯어먹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흰 옷을 입은 어린양의 신부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선물해 주신 이 깨끗한 흰옷, 그 더러운 우상 좇느라 더럽히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깨끗하게 유지해서 우리 주님 만나는 날 서로 서먹서먹하지 않도록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해 서로를 사랑합시다.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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