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게 하라(V)
/ 전도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엡 3:17)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전도서의 제목은 히브리어로 코헬레트입니다. “카할”에서 나온 말입니다. “카할”이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assembly, 집회, 교회, 모임”이라는 말입니다. 거기로부터 나온 “코헬레트“라는 단어는 ”모임, 회중,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LXX도 제목이 ”에클레시 아스테스“입니다. “전도자, 설교자, 회중에게 말하는 자”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이 전도서의 내용은 설교자, 전도자가 교회에게 주는 설교입니다. 이 전도서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솔로몬? 어떻게 아시죠? 전도서에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한번이라도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그렇지만 솔로몬으로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전 1:1)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윗의 아들이면 당연히 솔로몬이지요? 그렇지만 여기서 아들이라는 말“벤”이라는 말은 “자손”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입니다. 주다 벤허는 ‘훌의 자손 유다’라는 뜻이라 했지요? 그래서 그 말만 가지고는 저자가 솔로몬이라는 것을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시면,
(전 1:12) “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글을 쓴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다고 하지요? 예루살렘은 남 유대의 수도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는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남 유대와 북 이스라엘로 갈리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왕이 된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이 되지요? 그러면 누구입니까? 바로 솔로몬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의 왕으로 르호보암이 남 유대의 왕으로 갈라졌으니까요. 그리고 전도서 여러 곳에서 전도자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지혜를 소유한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전 1:16) “16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잠언 공부할 때 배웠지요? 누구입니까? 솔로몬입니다.
(전 12:9) “9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솔로몬이 잠언 3,000을 지었다는 말씀을 열왕기상 4장에서 보았지요? 이렇게 전도서의 저자 전도자는 솔로몬이라는 것을 금방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전도서는 다윗 왕의 아들인 솔로몬 왕이 이스라엘의 전도자, 설교자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책입니다. 이것은 참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 이스라엘, 교회에게 참 지혜를 가르치는 모습의 protype입니다. 그러니까 전도서도 역시 “복음”입니다. 이 전도서는 솔로몬의 생애 말기인 BC935년경에 쓰인 책입니다. 전도서의 주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헛되다”“헤벨”이라는 단어입니다. 헤벨은 “수증기, 숨” 이라는 뜻입니다. 한번 불어 내면 없어져 버리는 헛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이 “헛되다“라는 의미인 ”헤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아벨“입니다. 아벨은 등장하자마자 형 가인에 의해서 허무하게 죽었지요? 이렇게 이 “헤벨”은 “공허, 덧없음, 헛됨, 목적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서두에 그 주제가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전 1:2-3)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 되도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것이 바로 전도서의 주제입니다. 왜 모든 것이 이렇게 헛되게 된 것이지요? 인간의 타락 때문입니다. 인간이 타락을 한 이후에 인간의 모든 추구는 다 헛된 것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인간에게서 나오는 착한 일, 선한 일 조차도 헛된 것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에도 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롬 8:18-22) “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0절에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에서의 “마타이오테스“가 바로 ”헤벨“ ”헛됨“입니다. 헬라어 성경 LXX에서 히브리어 ”헤벨“을 ”마타이오테스“로 번역을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헛된 것에 굴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허무한 것의 종착역이 어디입니까? 바로 ”사망“입니다. 모든 자들이 허무함에 굴복하여 살다가 결국 최후의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 바로 타락한 죄인들의 인생입니다. 전도서는 그렇게 인생의 허무함을 계속해서 나열하면서 “너희들 그런데도 그렇게 허무한 것을 좇으며 살래?”하고 열두 장 내내 독자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전 12:13~14) “13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
이렇게 전도서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만이 헛되지 않은 삶이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떠나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다 헛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라. 오직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만이 헛되지 않은 삶이다“라고 교회에게 설교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 전도서의 주제인 “헛되다”라는 말이 주제어답게 전도서에 35번이 나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전도서에 많이 나오는 말이 “해 아래”라는 말입니다. (29번) 그 말은 그 “헛됨”이 미치는 범위가 “해 아래”라는 것입니다. “해 아래”에 있는 모든 만물이 다 헛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 아래” 유사 이래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헛됨에 굴복하고 있는데 그 헛됨에서 벗어나서 헛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해 아래의 삶이 모두 헛된 것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간단합니다. “해 위의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 위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 실력으로는 절대 안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해 위의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해 아래 헛됨에 굴복하고 있는 자들을 품어 안으시고 죽어 버리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헛된 삶을 예수님께서 다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 헛된 삶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어버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해 아래에 태어난 헛된 옛 사람이 죽고 해 위의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갈 3:1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께서 허무한 삶을 산 자, 헛된 자,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죽으시고 우리를 그 허무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서에서 그 복된 이야기를 전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해 아래의 헛된 것에 굴복하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해 위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전도서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 새롭게 태어난 자들은 삶의 기쁨과 만족과 목표와 의미도 새로워 진 자들이기 때문에 다른 헛된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그렇게 살기를 힘쓰며 우리가 궁극에 가게 될 그 하늘나라만을 소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전도서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전도서의 구조를 살펴보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전도서의 제목격인 전도서 1:1을 보세요.
(전 1:1)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 책은 언약의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지난 시간에 잠언을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는 구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시편을 공부하면서도 제 2권이 “언약이 아들에게로 이어져서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2권이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시편으로 끝나지요? 여기서도 다윗과 그의 아들이 등장함으로 이 책은 언약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언약의 후손인 교회에게 주는 책이며 그 언약의 후손들에게 참 목자이신, 참 설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목사의 설교는 이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의 내용으로 결론이 나야 합니다. 전도서의 내용이 무어라고 했지요? “당신들의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예수 잘 믿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삽시다.” 항상 이게 결론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우리 목사님은 항상 설교의 결론이 같을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설교자는 다른 이야기 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설교는 “인생은 헛되고 헛된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으로 돌이켜라“ 항상 이것이 설교의 결론이어야 합니다. 목사가 할 일은 꼭 한가지입니다.
(전 3:18) “18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우리 인생의 목적이 뭐예요?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는 짐승입니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는 주일마다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여러분은 짐승입니다” 라는 것을 재확인 시켜드리고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바르게 설교를 하는 목사가 인기가 있을 리가 없지요. 목사가 목사 노릇을 바로 한다면 목사는 절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전 12:11) “11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전도서의 마지막에서 지금까지 너희에게 한 모든 말씀은 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짐승이다. 짐승의 삶은 모두 헛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라“ That's it! 그런데 제가 뭐라고 다른 소리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인생을 통해 “저는 짐승입니다” 라는 고백과 함께 “그래서 제게는 구원자가 필요 합니다”라는 기도를 올리는 자로 변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 15:26-28)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주님 저는 개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짐승임을 인정하는 곳에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이 (1:2-11)까지입니다. 전도서의 주제가 나오지요? “모든 것이 헛되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주제가 나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이 (1:12-11:8)까지입니다. 전도서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번째 부분에서는 헛된 삶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 전도자가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다 가졌고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된 것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 누가 더 많이 가지고 누가 조금 덜 가지고의 차이도 모두 헛된 것이고 “누가 더 착하고 누가 더 악하고”의 차이도 “누가 더 많이 배우고 누가 덜 배우고”의 차이도 역시 헛된 구분이라는 것을 전도자는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 2:14-17) “14 지혜 자는 눈이 밝고 우매 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15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 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16 지혜 자나 우매 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 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 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전 7:13-18) “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18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전 8:11-14) “11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12 악한 사람이 백 번 죄를 지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잘 되지만 13 악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가 하는 일이 잘 될 리 없으며, 사는 날이 그림자 같고 한창 나이에 죽고 말 것이라고 한다. 14 이 세상에서 헛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악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는가 하면,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는다. 이것을 보고, 나 어찌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네 번째 부분(11:9-12:8)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시는 바를 모두 깨달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분은 주권자이시고 왕이시며 항상 옳으신 분이시므로 그 창조자를 기억하고 그 분에게로 돌아가라“ 라는 것을 세 번째 부분과 연결해서 설명해 줍니다. 욥기나 잠언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욥기도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는가를 묻지 말고 ”그 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옳다”라고 인정하고 그 분의 주권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그 분을 경외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회복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잠언도 마찬가지고요.
(전 11:10, 12:1,7,8) “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리고 다섯 번째 부분인 (12:9-14)까지에서 “이제 이 이야기를 다 들었으니 이제 너희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라” 하고 끝을 맺습니다. 잠언에서처럼 여기서도 “내 아들아” 하고 언약의 후손인 교회, 바로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전 12:12-14) “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이렇게 전도서도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헛된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자가 되라“ 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예수를 제시하는 복음이 적혀 있는 책인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허무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그곳이 빛으로, 충만으로, 질서로, 회복 되는 것을 우리가 새 창조, 재창조, 구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전도서가 바로 그 복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 1:2)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바로 이 모습이 “허무”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에서도 창세기 1장 2절의 그 단어들을 그대로 인용해서 타락한 세상을 표현합니다.
(렘 4:23) “23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그렇죠? 창조 전의 혼돈의 상태와 타락한 세상의 모습을 동일한 단어로 표현을 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그 혼돈함을 바로 잡고 공허함을 채워 주시며 그 것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이 다시 혼돈하고 공허하며 헛된 것이 되어 버렸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창 3:16-19)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인간의 죄의 결과로 그들의 마지막 종착역이 “사망”으로 결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것이 사망을 향해 간다는 것은 모든 것이 허무해 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들도 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허무해 진 것입니다. 헛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헛되고 허무한 인생의 모습이 죄인 아담의 아들들에게서 바로 나타납니다. 아담은 아들을 낳고 그가 자기들을 구원해 줄 “여인의 후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키우면서 보니까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둘째를 낳고는 그 아들 이름을 “헤벨” “아벨” 즉, 허무한 것, 헛된 것“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인생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짐승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허무함”이라는 아들, 아벨은 정말 허무하게 형에게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아들 대신에 다른 아들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힌트”하셨습니다. 셋이라는 아들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할 인생을(헤벨) 모두 품에 안고 죄 없는 의인이 죽음으로 그 아벨은 의인이었죠. 그 허무가 죽고 이제 허무함에 굴복하지 않는 새 생명들이 탄생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힌트하신 것입니다. 그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의 protype인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헛된 삶이 되셔서 가인의 후예들에게 맞아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악, 패역함을 말할 때 성경은 “헤벨” “허무한 것” “헛된 것”으로 표현을 합니다.
(신 32:21)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 하리로다”
(시 39:6-7)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 하나이다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과 그 것들을 추구하는 삶은 다 헛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한마디로 “우상을 섬긴다.“라고 표현합니다.
(왕상 16:13,26) “13 이는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 아들 엘라의 죄를 인함이라 저희가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26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헛된 것“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하는 모든 일은, 우상을 섬기는 일은 다 미친 짓이라고 전도서가 강조합니다.
(전 9:3) “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전부 일생동안 미친 짓만 하다가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의 실존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고후 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해 아래 있는 허무한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새로 창조 된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해 위의 삶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under the sun이 아니라 under the son의 상태로 들어간 자들입니다.
(계 21:1,23)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는 천국의 현실이 이 해 아래 사는 우리에게 이미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과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전 1:2)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 되도다”
(고전 15:57-58)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전도서에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니까 이제 우리가 하는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닌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헛된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 하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이제 우리의 모든 일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해 아래 헛된 것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는 분들이 어떻게 여전히 헛된 일에만 몰두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고전 15:17)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마타이오스, 헤벨)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의 믿음은 헛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약 4:13-17)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마타이오스, 헤벨)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해 아래의 것들, 헛된 것들을 자랑하는 것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고지론“이 웬 말입니까? 기독교는 내가 무엇을 이루어 내서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 우리는 짐승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예들이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킬 때에 셋의 후손들은 호미 하나도 못 만들게 만드신 것입니다. 호미가 필요하면 가인의 후예들에게 가서 사서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 분께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예를 보세요. 어찌 보면 베드로가 더욱 더 치사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불가능함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다시 나왔고 유다는 내 죄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목매달아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런 건방을 떠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 매일 확인하세요. “하나님 나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우리는 해 아래의 것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해 위의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골 3:1-4)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그리스도인이면 이제 해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빌 3:20-21)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는 “해 위의 세상”의 시민권자인 것입니다. “해 아래 세상”에서는 이제 자꾸 눈을 떼세요.
(전 1:9)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해 아래 새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고후 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해 아래 새것이 있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무한 데 굴복하지 않는 새 것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과 저입니다.
(전 2:22-23) “22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골 1:9-12)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 5:16-18)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타락한 해 아래의 인생들은 모든 수고가 슬픔으로 결론을 맺게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기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18절을 보시면 “우리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삶 속에 기쁜 일과 감사한 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주시지도 않고 억지로 기쁨과 감사를 만들어 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예수로 말미암는 기쁨과 감사의 일들을 항상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겟세마네에서의 대 제사장적 기도에서 우리는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7:13)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는 해 아래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신 그 기쁨을 동일하게 가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슬픔과 수고뿐인 삶에서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슬픔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국 그들의 모든 수고가 “사망”이라는 결론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헛되고 허무한 사망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만일 이곳에 아직도 그 헛된 것들의 노예로 사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그 헛되고 허무한 것에서 빨리 돌이키십시오. 나중에 그 불타버릴 헛된 것들과 함께 지옥의 땔감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전 4:1) “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 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 자가 없도다”
타락한 인간의 슬픔과 아픔과 고난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습니까? 가족이라고 상대방의 아픔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습니까? 부모 자식 간에도 진정한 위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의 아픔이 제일 큽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모든 위로는 가면일 뿐입니다. ‘in my country’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samuel jackson과 julliette binoche가 주연을 한 영화입니다. 그 영화는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의 대통령이 되고 데스몬드 투투라는 카톨릭 대 주교가 인도하는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이라는 것이 남아프리카의 인종간의 화해 위원회가 하는 일들을 취재하면서 그 동안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당한 것을 지켜보면서 거의 실성을 할 정도로 흑인들에 대해 연민을 가집니다. 그들은 흑인들을 위해 목숨도 걸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들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웁니다. 흑인들의 인권에 대해 취재하며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두 유부남, 유부녀가 바람을 피운다는 말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누가 누구를 위로해 줍니까? 자기 곁에 있는 남이 아무리 커다란 아픔 속에 슬퍼한다 해도 자기 앞에 있는 작은 초콜릿 케잌에 눈이 머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위로 자가 생겼습니다.
(고후 1:3-6)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의 위로가 되셔야 합니다. 남편에게 자식에게 아내에게 여러분의 위로를 구하지 마세요. 그들은 진정한 여러분의 위로가 못 됩니다.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가 되십니다.
(전 8:14) “14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 되도다”
세상 사람들은 판단하기를 어떤 사람이 돈도 잘 벌고 하는 일이 잘 되면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럴만한 이유와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치부를 해 버립니다. 못살고 못배우고 일도 지지리 안 풀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슨 잘못이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악인이 의인의 대접을 받을 수 있고 의인이 악인의 대접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가?
(요 3:35-36)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들을 믿는 자를 의인이라 하고 아들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자를 악인이라고 합니다. 의인과 악인의 구분은 “아들 안에 있느냐, 아니냐?“로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전 3:11)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8:17) 17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이렇게 타락한 죄인들은 하나님의 행사를 깨닫지 못하던 자들이었는데 죄인들은 감히 하나님의 뜻을 상상할 수도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깨달은 자들은 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롬 12: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가능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분, 노여워하시는 분, 구름, 불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묘사가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죄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 18:11-14) “11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2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4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시 97:1-3) “1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2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3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
(신 5:22-27) 22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 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23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26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7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타락한 인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죄가 거룩 앞에 서면 그냥 녹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자신을 감추신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너무나 깊고 넓은 구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리가 되셔서 둘 사이에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 분과 사귐이 있게 되었습니다.
(요일 1:5-7)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우리가 여러 번 살펴보았지만 구약에서는 흑암 속에 감추이신 분이셨지요?)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이제는 감히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벗”이 된 것입니다. 아니 “벗”정도가 아니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요 17:11,22,23)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하나가 되어 갑니다. 하나라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대등한 차원에서의 교제”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고 계신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 하나님과 대등한 차원에서의, 하나로서의 교제와 사귐을 원하시기에 우리를 억지로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신 것입니다.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신 것이고 궁극에는 그렇게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교제하고 사귈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전도서가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값나고 빛나게 밝혀 주는지 아시겠지요?
(전 9:3-4) “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4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타락한 인간은 평생 미친 마음을 품다가 결국에는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들은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개처럼 산다 할지라도 이승에서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개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잖아요.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끝이며 영원한 형벌의 시작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릅니다.
(요일 5:11-12)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 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으며 미친 짓을 하다가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사람들에 비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새 생명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복이 되어 버렸습니다.
(계 14:13)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헛된 삶을 모두 가져가시고 우리가 새로운 자가 되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이 되었고 헛된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었고 모두 다 미친 짓을 하다가 죽어 가는 세상에서 새 생명을 소유하고 복된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전도자, 참 설교자가 우리 교회에게 지금 이 시간 하나님 없는 인생들의 허무함을 가르치시고 계신 책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헛된 것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사용해야 헛되지 않게 사용하는 것일까?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 것들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방법을 알아야겠지요? 마지막으로 거기에 대해 살펴보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 땅의 헛된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를 택하시겠습니까? “돈”입니다. 물질계의 모든 것은 “돈”으로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헛됨의 상징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걸 잘 정리하고 있으면 헛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지요?
여러분은 왜 돈을 버십니까? 보통은 이렇게들 정리를 하고 계시지요? 예수를 믿기 전에는 우리 배를 위해,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그리고 세상에 자랑을 하기 위해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이웃과 교회를 위해 쓰기 위해 돈을 법니다. 돈을 버는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서 아무리 선하고 아름답게 쓴다고 해도 그 돈의 소유주가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면 그는 지금 헛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왜 주일 날 광고 시간에 우리교회는 카타리나 수재 의연금 내는 것을 보류한다고 말씀을 드렸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불의 한 청지기의 비유가 누가복음에 나오지요? 제가 작년 야외 예배 때 그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었습니다. 벌써 1년이 훨씬 넘었으니 기억이 잘 안 나시겠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세요. 불의 한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다가 주인한테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가서 무엇을 해서 먹고살까 생각해 보니 도대체 먹고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그 빚을 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기름 백말을 빚진 사람을 불러서 50말로 감해 주었습니다. 밀 100석을 빚진 사람은 80석으로 감해 주었습니다. 아주 얍삽한 행동입니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남의 재산을 축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 불의한 청지기의 행동을 지혜롭다고 칭찬을 합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제가 어떻게 설교를 했는가하면 당시에는 율법상 고리대금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나 레위기나 신명기에 보면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물건을 꾸어주거나 돈을 꾸어주고 절대 이자를 받을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자 없이 누가 돈이나 곡식을 꾸어줍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이 생각해 낸 것이 차용 문서에다가 아예 이자까지 보태서 차용금액을 적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에 기름은 연 이자가 80%에 보험료가 20%였습니다. 그래서 이자가 합이 100%였습니다. 그러니까 기름50말을 빌린 사람은 일 년 후에 기름 100말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문서에 100말을 빌렸다고 적은 것입니다. 채권자가 율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합법적으로 채무자와 합의하에 그렇게 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밀은 이자20%에 보험료 5% 해서 합이 25%의 이자를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밀 80석을 빌리게 되면 문서에는 100석이라고 적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불의한 청지기가 쫓겨나기 전에 행한 일은 주인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사후예방을 한 것입니다. 이자를 빼고 빌려준 그대로 적게 만든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함으로 채무자들에게는 많은 짐을 덜어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머리를 써서 자신의 미래를 긴박함을 가지고 준비했다는 점에서 그는 칭찬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눅 16:8)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그 불의한 청지기는 이 세대의 아들들을 대표하는 것이고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제자들이 빛의 아들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이 세대의 아들들도 자기가 속한 나라의 원리를 따라 열심히 자기의 내일을 준비하는데 너희들은 빛의 아들들이면서도 왜 너희가 속한 나라의 원리를 따라 너희의 내일을 긴박하게 준비하지 않느냐?” 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빛의 아들이 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서두를 꺼내는가 하면 그 돈이라는 것이 자기의 삶 속에서 “재(再) 정의(定意)” 되지 않고, 패러다임shift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 돈으로 좋은 일을 한다 해도 역시 그는 “불의한 자, 이 세대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허무하고 헛된 일을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돈을 가지고 옳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약 5:1-5)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돈을 가지고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결국 다른 이들을 울게 만드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불의하고 악한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인간에게 맡기실 때 주인과 청지기의 관계로 맡기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배만 불리우는 데 쓰는 사람은 결국 다른 이들의 몫까지 혼자 먹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울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청지기도 있습니다.
(호 12:8) “8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겔 28:4-5) “4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5 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모든 인간은 재물을 가지게 되면 남이 울든 말든 이기적으로 자기 배만 채우게 되거나 아니면 선한 일에 쓰면서 스스로 교만하게 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돈이나 지식이나 힘을 써야 헛되지 않게 잘 쓰는 것인가? 선한 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착한 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데 어떻게 사는 것이 헛되지 않은 삶인가?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말미가 어떻게 맺어지는지 보세요.
(눅 16:10-11)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불의한 재물에 충성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최선을 다해서 벌어서 최선의 방법으로 쓰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쓰는 것이 과연 바르게 쓰는 것인가?
(눅 16:12)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우리가 불의한 재물에 충성을 하고 헛되지 않게 쓰기 위한 첫 번째 주지사항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다 “남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것”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게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근검절약해서 남을 돕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 마음에 은근한 자랑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랑은 교만이며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벌어서 선한 일을 하면서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헛되고 허무한 것들을 “남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 주인이 시키는 대로 잘 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선한 청지기들입니다.
그 선한 청지기들은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가난한 자입니다. “아무 것도 자기 것이 없으니까” 그래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가난한 자들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만 생존할 수 있는 아주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이 있건 없건, 지식이 많건 적건, 힘이 세건 약하건 늘 주인의 도움을 구하며 삽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헛되지 않은 삶을 사는 자들, 선한 청지기들은 절대 이 땅의 헛된 것들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고 우리가 우리의 안전의 근거를 삼고 있는 것은 모두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마 6:19-24)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 질 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하나님과 맘몬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도 결론을 이렇게 내리는 것입니다.
(눅 16:13)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잠 23:4-5) “4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딤전 6:9-10) “9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 구절들은 돈을 많이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게 무슨 돈이든 지식이든 건강이든 힘이든 자식이든)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나의 목적이 아니라 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이고 결국에는 완성이 될 것이라는 정확한 정의 아래 그 것들을 너희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칭 “부자”가 없습니다. 모두 다 가난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돈”이 “재(再) 정의(定意)”가 된 사람들은 그게 조금 없어져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나의 그리스도인 됨을 위해 하나님은 그 상태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니까요, 그들은 돈이 많아도 절대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 상태도 하나님께서 나의 거룩에 필요하니까 허락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헛된 곳에서, 허무한 곳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모든 피조물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회복을 기다립니다. 그 물질계의 대표가 바로 돈입니다. 우리의 돈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서 세상이 정의하고 있는 그 가치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시 새롭게 “남의 것”으로 정의되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개, 돼지의 삶을 사는 것이요, 허무한 데 굴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의 소유로 정의 된 돈이 아무리 선한 곳에 쓰여도 그것은 허무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확실하게 정의가 된 사람은 열심히 수재의연금도 내시고 구제사업도 하시고 하세요. 그러나 아직 그것이 확실하게 정의되지 못하신 분들은 조금 더 참으시고 자기 의를 쌓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허무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제 그 허무한 것에 굴복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제 허무한 것에서 벗어나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기쁘게 살아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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