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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123강. 예수님의 무덤 속에 들어간 사람들

by IMmiji 2013. 8. 24.

123강. 예수님의 무덤 속에 들어간 사람 (요 19:38-42)

 

요 19:38-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지내지 않고 낯선 두 사람이 지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이들은 드러내 놓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은 경우에는 오늘 본문에 처음으로 이름이 거명되는 생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3장과 7장에서 등장한 인물이지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사람이에요.

그 이후 어디에도 무엇을 하다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이 기록 되어 있지 않아요.

 

마치 드라마에 특별한 역할을 하고 사라지는 카메오와 같이 예수님의 장례를 치루기 위하여 잠간 투입되었다가 사라진 사람과 같아요.

예수님이 그의 무덤에 장사가 되었으니 영적으로는 뭔가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등장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屍身)을 달라고 하여서 가져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소유인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냅니다.

니고데모도 함께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 이 두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입니다.

알다시피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은 이단이라고 재판을 받았어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면서도 예수님을 변호한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님 편에 서 있던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특히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바리새인으로서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한 사람이기도 해요.

그만큼 예수님에게 우호적이었어요.

하지만 12 제자들처럼 드러나게 활동하지 않고 숨어 지냈어요.

 

요한복음 7장과 누가복음 23장을 봅시다.

 

요 7:50-52=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눅 23:50-51=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요한복음 7장에서는 니고데모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탄핵하자 그 판결은 부당한 판결이라고 항의를 하였어요.

그리고 누가복음 23장에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를 재판 할 때 그들의 편을 들지 않고 도리어 반대표인 부(不) 표를 던졌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공회 의원이라서 평소에도 서로 잘 아는 사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특히 예수님을 변호하는 것으로 보아서 두 사람의 신앙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를 죄인으로 규정 할 때 예수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무죄함을 증명하는 두 증인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의 무덤 속까지 들어갔어요.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삶에 끝까지 함께 한 사람들이에요.

드러난 12제자들은 예수님의 주검을 두고서 다 도망을 하고 버려두었지만 평소에는 제자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함께 하였어요.

그러니까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역사적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두 증인들인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어떤 곳인가요?

예수를 죽인 공회에요.

그런데 그 공회의 의원이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고 있어요.

그것도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가고 없는데 말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면 응당 예수님의 제자들이 치러야지요.

그런데 정작 장례를 치루어야 할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어요.

반면에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를 죽이라고 주장할 때 예수님의 무죄함을 주장하던 두 사람이 하고 있어요.

 

이건 뭔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무슨 영적 비밀이 있을 것 같지요.

맞아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장례(葬禮)를 통하여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고 싶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두 사람의 이름이 주는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름 속에 뜻이 있어요.

 

니고데모란? “이긴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이긴 백성입니까?

니고데모의 행적을 보아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죄인이라고 정죄 할 때 니고데모는 아니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신앙을 지켜낸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무덤 속까지 들어갔습니다.

이는 곧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거듭남의 비밀을 알지 못하였다고 해서 그의 신앙을 육적 신앙이라고 폄훼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신앙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에게 분노를 사는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것을 보아도 그의 신앙은 확고한 것임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주는 이름의 뜻은 어떤 것인가요?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그냥 요셉이라 하지 않고 항상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고 부른 다는 것입니다.

이는 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란? “높이 있음” 이라는 뜻이고!

요셉이란? “그가 이김” 이라는 뜻입니다.

두 가지를 조합하여서 보면 “그가 이기게 해서 높이 세웠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이기게 해서 하늘나라 높은 곳이 두셨다”는 말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살펴봅시다.

 

마가복음 15장입니다.

 

막 15:42-43=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지금 빌라도에게 “당돌히”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의원으로서 이러한 행동은 무모하고 대담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산헤드린 공회가 한 일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입장에서 보면 배신행위라고 볼 수가 있어요.

 

여기서 “당돌히” 라는 말은 헬라어로 “톨마오오” 라고 하는데 이는 어떤 일에 대하여 확고한 신념으로 증거 할 때 나타내는 행동을 말해요.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해요.

다른 성경에서는 이 말을 “담대히” 또는 “감히” 라고 씁니다.

 

이걸 다른 말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돌하다는 것은 확고한 믿음의 표현이에요.

나는 예수님의 죽음을 부당한 죽음으로 간주하고 나도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마치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왕 앞으로 나아간 것과 같아요.

 

요셉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적극적으로 예수님 편에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기로 각오하지 않고서는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평상시에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서 예수 믿는 것을 숨기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지요.

 

오늘 본문에 보세요.

그는 예수를 따르던 제자이지만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예수를 따르는 것을 감추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있잖아요.

평소에는 겁이 많은 사람인데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담대한 것입니다.

 

무엇이 이로 하여금 담대케 하였을까요?

이는 담대함이 자기 실력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누구 실력인가요?

그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담대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나는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담대하게 유대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상식에 맞지 않아요.

 

예수님의 12 제자들과 비교해 보세요.

베드로는 예수가 죽임 당할 처지에 놓이자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극구 부인하고 심지어 예수님이 빤히 보고 있는 면전에서 저주까지 하였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다 도망을 쳤어요.

 

아주 비열하게 말이에요.

살아서는 엄청 의리 있는 척 온갖 폼은 다 잡아 놓고서는 예수님이 막상 죽자 의리를 헌 신짝 버리듯이 하였어요.

 

제자들은 예수가 살았을 때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다가도 예수가 역적(逆賊)으로 몰려서 죽임을 당하자 같이 역적으로 몰려서 죽임 당할까봐서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을 숨겼어요.

 

이런 판국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가 살았을 때는 예수 믿는 것을 숨기고 있다가 예수가 역적으로 몰려서 죽고 나자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나서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제자들과 완전히 상반된 행동이에요.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나도 예수와 같은 편이다” 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예수가 살아서 온갖 능력을 행하고 사람들로부터 환호성을 받을 때는 나는 예수의 제자라고 자부하던 12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가고 없어요.

속된 말로 12 제자들은 예수의 단물만 쏙 빼 먹고 도망을 간 놈들이에요.

 

그런데 예수가 살았을 때는 하나도 혜택을 입지 못하던 사람들이 예수가 유대인의 원수가 되어서 죽임 당하였는데 담대히 나타나서 나는 예수의 제자다 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결국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12 제자들의 신앙의 허구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12 제자들이 신앙이 육(肉)이고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신앙이 영(靈)이에요.

이는 곧 인간의 의지로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 믿는다고 큰 소리 쳤어요.

그러나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은 겁이 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숨겼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성경이 이러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숨겨진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능력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靈)과 육(肉)을 가려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갖다 대 보면 육(肉)인지 영(靈)이지 드러나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는 표면적 신자와 이면적 신자를 갈라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2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까지만 해도 드러난 표면적(表面的) 제자들이었어요.

즉 육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숨겨진 이면적(裏面的) 제자들이었어요.

즉 영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자 표면적 제자들은 다 예수를 떠나고 없는 반면에 이면적 제자들이 예수님의 무덤까지 붙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는 누가 믿느냐?

이면적 신자들이 믿는 겁니다.

그럼 이면적 신자는 어떻게 생겨나는가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겨나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히 행하였다는 말은 믿음이 그를 붙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예수의 죽음에 동참케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이 은혜가 나중에 도망갔던 12 제자들에게도 임합니다.

12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나자 두려워 벌벌 떨던 자들이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예수님과 같은 죽음의 길에 동참을 하게 되었어요.

 

과거 일제 식민지 시절에 신사참배를 강요 할 때 일입니다.

 

평상시에 믿음 좋다고 큰 소리 뻥뻥 치던 사람들은 일본 놈들의 칼날 앞에 서자 하나 같이 믿음을 저버리고 신사참배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믿음이 없다고 하면서 벌벌 떨던 사람들이 막상 일본 놈들이 칼을 들이대자 믿음으로 죽일 테면 죽이라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 하였다고 합니다.

 

마치 12 제자들과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모습과 같지 않나요.

신앙은 십자가 앞에 서 보면 드러나요.

죽음 앞에 서 보면 뻥인지 참인지 드러나요.

 

이러한 것들이 교회 안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엄청 믿음이 좋은 것처럼 큰 소리 뻥뻥 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보면 핫바지 방구 세듯이 다 사라져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말썽만 일으키다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다 떠나가요.

 

그러나 어떤 분들은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계세요.

그런데 무슨 일을 하거나 하면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어떤 문제가 생기면 수습하고 어려운 짐을 묵묵히 다 져요.

마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궂은 일들을 다 감당해요.

 

그래서 제가 그럽니다.

신앙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는 주둥이로 믿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믿음은 평상시에는 아무도 몰라요.

어떤 문제에 봉착해 보아야 참과 거짓이 드러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같이 힘든 일들이 일어나 보아야 알 수가 있어요.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을 하였다는 말이에요.

 

이는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이 되었는가요?

물론 성경은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이 되었다는 증거는 없어요.

 

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여서 장례를 하고 무덤 속까지 들어간 것으로 보아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건 인간의 이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서 니고데모의 신앙을 추적해 봅시다.

 

요한복음 3장을 봅시다.

 

요 3:1-5=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잘 보세요.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묻습니다.

이는 평상시에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다는 말은 곧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그동안 하신 행적들을 유심히 지켜보았어요.

그리고는 아~ 저 예수가 혹시 하나님 나라를 회복 시켜 주실 메시야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와서 내가 지금까지 당신을 쭈욱~ 지켜보았는데,

당신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생각에는 당신이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 같은데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라고 물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아니~ 어떻게 알았지!

그러면서 거듭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보고서 내가 하나님께로 온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거듭나야만 알 수가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듭남이란? 하나님께서 알려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3절에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어찌 부모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 날 수 있겠느냐? 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서 어찌 거듭남을 모른단 말이냐?

거듭나는 것은 엄마 뱃속에 들어가서 다시 나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니고데모는 인간의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였어요.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성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나쁘게 말하지 않았어요.

다만 니고데모가 모르는 것을 알려 준 것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어요.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있습니다.

잘 보세요.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하지요.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지요.

앞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보는 거듭남은 물과 성령이 없어요.

그러나 뒤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달라요.

쉬운 말로 예수를 알아보는 것하고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달라요.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게 해 주는 것이에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야 해요.

물과 성령은 두 세례를 말해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두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물과 성령은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말해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실체에요.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행적들을 보고서 이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야 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니고데모는 메시야라고 알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중에 찾아 와서 예수 당신이 행하던 일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도무지 행 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비록 예수님이 행하는 일들을 보고서 메시야 라고 보았지만 그 예수를 진정으로 자기 안에 메시야로 영접하는 것을 달라요.

이건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아야지만 가능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라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도 거듭남이 필요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거듭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신 예수를 알아보는 것도 거듭나야 하고!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실체임을 알고 그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는 것도 거듭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두 번의 거듭남이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건 거듭남이 둘이란 말이 아니고 죄인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일에는 두 번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두 세례를 거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두 세례를 거쳤어요.

요한의 물세례를 받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성령 세례도 받았어요.

 

물 세례는 옛 사람이 죽이는 것이고!

성령 세례는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 두 세례를 두 거듭남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나 인간의 노력이니 힘으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거듭나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된다는 말입니다.

 

거듭남을 “두 믿음”으로 이야기 합니다.

두 믿음을 이해하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봅니다.

 

롬 1: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있어요.

즉 예수 안에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구원 얻을 예수의 의(義)는 은혜로 거저 주어져요.

그런데 이 의(義)는 “믿음으로 ~ 믿음에” 이르는 것으로 주어져요.

 

두 믿음이 있지요.

첫 번째 나오는 “믿음으로” 는 예수를 알아보는 믿음이에요.

두 번째 “믿음에”는 예수를 영접하는 믿음이에요.

그래서 “믿음으로 ~ 믿음에 이른다” 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구원자로 보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몰라보아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코자 함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몰라본다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를 알아보는 믿음을 주세요.

이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메시야 라는 것을 알아보아요.

이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거듭남과 같아요.

이렇게 예수를 알아보는 믿음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럼 그 믿음으로 예수를 믿고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도록 일을 하세요.

즉 예수를 구주로 영접케 하신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으로”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봅시다.

 

요 6:38-45=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다!

누구든지 나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수군대며 웅성거립니다.

 

아니 우리가 저 놈이 요셉의 아들인줄 아는데 어떻게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느냐!

저 놈이 미치지 않았나!

그러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아무나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나에게로 이끌어 주지 않으면 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믿게 해 주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다 내게로 온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를 알아보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예수를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 “믿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믿음이 기관차처럼 우리를 예수에게로 인도하고 알아보게 하여서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지요.

다 하나님께서 해 주셔서 하는 것이지요.

이걸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하나님께서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나요.

 

마태복음 16장을 봅시다.

 

마 16:13-18=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더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세례요한이나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건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바라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안목(眼目)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냥 선지자 중에 한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肉)으로 보았고 베드로는 영(靈)으로 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를 알게 하신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고백케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지 베드로의 실력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알게 해 주신 것으로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한 고백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하신 고백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만 아버지가 자기 안에서 고백케 하신 것을 입술로 말한 것 뿐이에요.

 

이것을 “믿음으로” ~ “믿음에”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 믿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고 싶으면 “로마서 10강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를 참고 하세요.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고 메시야 라는 것을 알게 해 준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믿음에 의해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고백을 하였다고 해서 예수를 마음으로 영접한 것은 아니에요.

예수를 마음으로 영접 하려면 성령이 와야 해요.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이시고 부활하여서 승천 하신 후에 와요.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유명한 신앙고백을 하였으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일들이 벌어지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야 라고 고백을 한 것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그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듭남은 성령이 오셔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발생 되어야 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는 거듭남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과 같은 것이 되겠지요.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거듭남은 하나님이 예수를 알아보라고 선물로 주신 그 믿음으로 예수를 믿고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아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과 같고!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그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에요.

이는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과 같아요.

 

자 보세요.

물 세례는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서 죽어주신 것을 믿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자신을 위한 죽으심이라는 것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그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 나라이니까요.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물 세례를 통하여서 자신은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할 죄인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여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임을 알 수도 없고 또한 예수를 영접 할 수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간들 힘으로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사람으로 낳게 해 주어야지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 당연히 이스라엘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났잖아요.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선택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어요.

 

알다시피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에요.

관원이란? 선생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응당 알아야 하지요.

그런데 모르고 있어요.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에요.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았어요.

이걸 안다고 하면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가 없어요.

 

니고데모는 지금 방법론을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이 됩니까? 라는 식의 방법론을 이야기 할 수가 있느냐 에요.

이스라엘은 어떤 방법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이에요.

그러니 방법론을 찾는다는 것은 육의 한계성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나!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는 방법이 없어요.

 

그건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주어야지만 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고서 이 분이 하나님께로 온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나와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갖가지 기적들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와서 묻는 것입니다.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출교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에요.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에요.

최고의 신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를 만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 눈에 띠게 되면 그 즉시로 출교를 당할 수가 있어요.

그럼 모든 기득권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백주 대낮에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남들이 다 자는 밤에 찾아 온 것입니다.

너무도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궁금하니까 찾아 온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니고데모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오늘 본분에 나오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다른 사람들 몰래 예수를 따랐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隱諱)하더니” 라고 하지요.

“은휘하더니” 라는 말은 몰래 감추어 왔다는 말이에요.

왜? 예수 믿는 것을 몰래 숨겨 왔다고 합니까?

유대인들이 두려워서입니다.

 

왜? 두렵습니까?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알면 출교 당하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도 드러내 놓고 예수를 따르지 않고 몰래 감추어 왔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몰래 예수를 따랐어요.

 

이렇던 사람들이 지금은 당당하게 예수님의 장례를 드러내 놓고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엄청난 반전(反轉)이에요.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도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도망을 간 마당에 숨어서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제자들과 반대로 행하고 있으니 12 제자들과 뒤 바뀐 셈이 된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따라 다니던 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다 도망을 쳐서 숨은 마당에 숨어서 따르던 자들이 공개적으로 나는 예수를 따르는 자라고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놀라운 사건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육(肉)과 영(靈)이 뒤 바뀌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고 드러난 것이 감추어지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제자들이 뒤 바뀌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 동안 예수 믿는다고 드러난 자들은 다 도망치고 숨겨진 자들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영과 육이 뒤 바뀌는 사태가 벌어진 것을 상징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감추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찾아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내가 놋 뱀처럼 하늘에 달리면 이제부터 영생 얻는 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면 하늘나라 백성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그 동안 숨겨져 있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하늘나라 백성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므로 예수님이 무슨 죄목으로 죽었는지를 잘 알아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여겨서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님은 역적이에요.

역적인 예수의 시신을 수습해 준다는 것은 예수와 같은 죄인으로 취급당할 수가 있어요.

 

그럼에도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역적 소리 들을 것을 감수하고 예수님의 장례를 공개적으로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목숨을 내어 놓지 못하면 할 수가 없는 일이에요.

 

믿음이 이들로 하여금 평상시에 하지 않던 일들을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역적인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자신들도 예수님과 함께 역적이 되어서 죽음에 길로 뛰어든 것과 같아요.

 

이를 상징하듯이 니고데모와 요셉은 예수님과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덤 바깥에서 보면 무덤 속에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한 무덤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니고데모와 요셉을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을 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덤 속에는 들어가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어요.

니고데모와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니고데모나 요셉은 모르는 척 하고 있었으면 무덤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어요.

결국 무덤에 들어갈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무덤에 갇히고 만 것입니다.

쉬운 말로 사망이 가둘 수 없는 자들을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망은 죄인만 가둘 수가 있어요.

무덤은 사망 권세를 상징해요.

그 사망이 지금 죄 없는 사람들을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예수님은 죄가 없어서 죽지 말아야 할 분이에요.

그런데 죽임 당하여서 무덤 속에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도 그동안 예수 믿는 것을 감추고 있었듯이 예수 믿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으면 무덤 속에 들어갈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나는 예수와 한편이라고 커밍아웃을 하고 예수와 함께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무덤 속에는 사망이 가둘 수 없는 의로운 사람 세 분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와 요셉이 의인이란 말이 아니고 무덤 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의미에서 의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지만 무덤 속에는 단 두 사람만이 들어갔느냐! 에요.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무덤 속에는 니고데모와 요셉 두 사람만이 들어갔어요.

 

마가복음 15장 16장과 누가복음 23장을 봅시다.

 

막 15:42-47=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16:1-6=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눅 23:50-56=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52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잘 보세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무덤 바깥에서만 보았어요.

무덤 속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이들은 예수님이 무덤 속에 들어간 것을 보고 안식일이 지난 후에 와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향품을 사러 갔어요.

그런데 안식일 후 첫날에 무덤에 갔을 땐 이미 예수님은 부활을 하고 난 후였어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들은 무덤 속에 있는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빈 무덤만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와 함께 무덤 속에 들어간 사람은 니고데모와 요셉뿐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둘은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어요.

 

요셉을 일컬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지요.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어요.

 

그래서 제가 무덤 속에 의인 세 사람이 들어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덤은 죄인만 가두어요.

의인은 가둘 수가 없어요.

 

무덤이 가둘 수 없는 의인들을 가두었으니 어찌 될까요?

토해 내야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을 하실 때 이들도 함께 부활을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을 했다고 하니까 니고데모와 요셉이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아니고 영적인 의미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잘 이해하세요.

 

예수와 연합 한 자들은 예수와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자들이에요.

 

다시 말해서 십자가로 나아가 옛 사람을 죽이는 자란 말입니다.

죽음을 피하는 자가 아니라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이걸 연합이라고 해요.

 

누가 예수와 하나로 연합이 된 자들인가요?

이는 십자가라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이 된 자들입니다.

이렇게 연합이 된 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부활을 하는 자들이에요.

 

참 재미있는 것은 말이죠.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이 사건 이후로는 흔적이 없어요.

성경의 기록에서 사라져요.

이는 곧 영적으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간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전 이렇게 은혜를 받아요.

 

그럼 왜? 예수님의 무덤 속에 두 사람이 들어갔는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성경에서 두 사람은 증인을 상징해요.

어떤 일에 증인으로 세울 때 두 사람 이상을 세워야 해요.

증인이란? 실제 사실을 본 목격자입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와 요셉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직접 목격하고 증거하는 증인인 셈입니다.

 

니고데모와 요셉은 두 사람 다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에요.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거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무덤 속에까지 들어가서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어요.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어요.

예수님의 죄 없음을 증거하는 증인이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인 것입니다.

 

증인이 되려면 예수님과 동일한 사건을 겪어야 해요.

니고데모와 요셉은 예수님과 함께 무덤 속에 들어감으로서 예수님과 동일한 일을 겪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고 겪는 사람이 요한계시록으로 가면 두 증인으로 나타나요.

 

요한계시록 11장을 봅시다.

 

계 11:1-14=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세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두 증인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요?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 동안 예언을 하지요.

그러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들이 죽임 당한 곳을 뭐라고 하는가요?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라고 하지요.

이는 두 증인과 예수님은 동등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사흘 반 만에 부활을 합니다.

두 증인들은 예수님과 똑 같은 길을 걷다가 예수님과 동일한 모습으로 죽고 예수님과 동일한 모습으로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누구인가요?

멀리서는 12 제자들이고 가까이는 우리들이에요.

우리가 곧 두 증인들이에요.

예수님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두 증인은 곧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처럼 예수님의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자들이에요.

 

그리하여서 예수님의 죽음을 경험한 증인으로서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사라진 후에는 이 증거를 누가 했나요?

오순 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 12제자들이 했어요.

 

성령을 받고 난 후 12 제자들이 두 증인이 된 것입니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의 역할을 12 제자들이 하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증인이라고 자처하고 있어요.

즉 니고데모와 요셉이 목격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사도들이 증거하기를 시작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봅시다.

 

행 2:29-33=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2절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은 이 일을 알리는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 동안 두려워서 숨어 있다가 성령이 임하고 나자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담대하게 나와서 예수님과 연합 된 자로서 증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12 제자들은 예수님의 장례에는 철저하게 외면당하였어요.

예수님의 장례는 숨어 있던 니고데모와 요셉이 나타나서 치렀어요.

 

예수님의 장례가 끝나고 이제 니고데모와 요셉은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는 성령이 제자들에게 부어집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부어지기 전에 숨어 있었어요.

마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숨어 지낸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다가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모두가 목격자로서의 증인으로 자처하고 나선 것입니다.

성령이 숨어 있던 자들을 커밍아웃을 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숨어 있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커밍아웃 시켰듯이 오순절에 성령이 오셔서 숨어 있던 12 제자들을 커밍아웃을 시킨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느끼는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능력으로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지요.

숨어 있던 자들에게 은혜를 주어서 드러나서 일을 하게 하시잖아요.

 

숨어 있던 12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난 후로는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의 증거들을 가지고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았어요.

이들의 실력은 12 제자들이 실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령의 능력이에요.

 

그러니까 영적으로 보면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나 12 제자들은 다 같아요.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를 들어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게 하셨어요.

그리고 성령을 보내서 12제자들을 의롭게 하시고 난 후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참예케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니고데모와 요셉처럼 의로운 자들이에요.

예수님의 무덤 속에 들어간 자들이에요.

예수님과 함께 연합된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두 증인들이에요.

그러므로 니고데모와 요셉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담대하게 증거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어려운 공부를 했는데 곰곰이 잘 이해를 하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들이 두려워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조차 감추고 살았던 유약한 자들을 들어서 강함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봅니다. 우리도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처럼 예수 믿는 것을 감추고 사는 믿음 없는 자들입니다. 니고데모와 요셉에게 능력으로 함께 하셨듯이 우리에게도 은혜와 능력으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담대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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