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 예수 그리스도(1)
(김성수 목사)
(요 8:12)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8장 서두에 기록된 간음한 여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송사에 관한 이야기를 공부하면서 그 속에 담겨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상고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 에피소드를 통해 주님은 스스로 간음한 여인이 되셔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여인을 살려내시고 자신이 저주의 돌에 맞아 죽으시는 형국으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 편의 짧은 드라마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괄호로 묶여 있는 그 8장 서두의 이야기를 빼고 7장 52절과 8장 12절을 연결시키면 아주 자연스럽게 문맥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 명절 끝 날에, 8일째 되는 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하고 당신의 생수 되심을 선포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빛이다’라고 당신의 빛 되심을 선언하십니다. 그것은 초막절이라는 절기 동안에 유대인들이 행했던 두 가지 중요한 행사를 배경으로 유대인들의 무지를 일깨우시며 그들을 복된 자리로 부르시는 복음의 외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 빛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시 한 번 7장과 8장의 배경이 되고 있는 초막절 행사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초막절에는 마지막 여덟 번째 날을 제외하고는 칠일 내내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물을 붓는 의식을 행했다고 했지요? 그 의식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성전에 다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하여 화려한 다윗 왕국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대하는 간절한 유대인들의 염원이 담긴 의식이었습니다. 아울러 광야에서 반석에서 물을 내어 그들의 갈증을 해갈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초막절 저녁이면 높이가 150피트나 되는 커다란 촛대를 두 개나 세우고 예루살렘 시내를 밝혔습니다. 그 촛대는 성소 안의 금 촛대를 확대한 모형으로, 가지가 일곱 개나 되는 웅장한 촛대였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 구석구석에도 촛대들을 세워 놓고 성전을 대낮같이 밝혔다고 합니다.
그것은 출애굽 당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자신들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림과 동시에 시내산에서 영광의 광채 가운데 유대인들에게만 밝히셨던 율법계시를 빛으로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자기 자신들만을 위한 이 세상의 문제해결의 측면에서 이기적으로 이해를 했었습니다. 그 말은 자기부인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는 기독교 교리와는 정 반대로 인간들이 여전히 자신들이 부인해야 할 이 세상의 힘과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이 세상의 행복에 도달하려는 목적에서 그러한 의식들을 행했다는 말입니다.
반석의 물이나 불기둥, 구름기둥은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은혜의 구원을 상징하던 것들이었습니다. 아울러 영광의 불 가운데 주어진 율법 또한 이스라엘에게 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가를 알려주시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모두 이 세상의 적들로부터의 보호하심이나 당면한 문제들로부터의 해갈로만 이해를 했고, 율법 또한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도구요 방법으로 여겼으며, 그것은 또한 그들에게만 주어진 빛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초막절이 되면 그렇게 자기들만을 선민으로 택하셔서 풍성한 수확마저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 큰 수확과 보호하심을 간구하며 그러한 행사들을 했던 것입니다. 어차피 그들의 관심은 이 세상의 것들이었으며 그러한 세상 것들을 얻어내는 데에 자신들의 치성이 한몫을 톡톡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율법과 이스라엘의 절기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이미 배우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그러한 기대와 염원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7장과 8장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부르는, 오늘날로 말하면 추수 감사절 같은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토지의 소산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초막절이 담고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단순히 토지소산에 대한 감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풍성한 토지소산은 영원한 장막에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 나라의 풍요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 초막절입니다. 레위기 23장에 가면 초막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레 23:39-43) “39 너희가 토지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40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 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 지니라 42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 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43절에 초막절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초막절은 단순히 풍성한 수확을 즐기고 감사하는 절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지금 누리는 풍요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결과라는 것을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주신 절기였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의 시작과 완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는 것임을 웅변하는 것이 초막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막절은 유월절을 전제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없는 절기인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던 날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살아난 그 사건을 초막절에 기억하라는 말씀을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유월절 또한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하여 완성이 될 하나님 나라를, 다른 말로 초막절을 이미 그 속에 담고 있는 절기입니다.
(출 12:8~10, 24-25)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24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25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제정하시고 그들에게 그 유월절에 먹어야 할 음식을 정해 주시는데 그 음식 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이 있습니다. 그 무교병과 쓴 나물은 광야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무교병과 쓴 나물 등의 곡식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월절 다음날부터 일주일간은 무교절이라 해서 일주일 내내 무교병만 먹어야 하는 절기가 이어집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하나의 절기입니다. 따라서 출애굽의 시작인 유월절은 가나안 입성이라는 결과를 이미 내포하고 있는 절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가나안에 집어 넣어 그 땅의 소산을 먹게 할 것임을 유월절에 이미 내용으로 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 보면 그 유월절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에 이를 때에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은 초막절을 벌써 담고 있는 절기이고 초막절은 유월절을 전제하는 절기입니다. 그 말은 그 두 절기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될 구원과 하나님 나라라는 십자가 복음을 내포하고 있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러한 절기들을 지키면서 그 절기들의 진정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유월절에는 이 세상의 떡을 달라고 조르고 있었고 초막절에는 이 세상의 물과 자신들만을 비춰줄 이기적인 빛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진정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들이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졌던 유대인들만의 빛이라 생각했던 율법을 들어 다른 이들을 송사했고 그 율법에 근거하여 진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 때 그 율법의 주인이시며 초막절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물이며, 내가 참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주제인 빛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빛이시며 당신을 따르는 자들은 생명의 빛이 될 것이라 하셨는데 그게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밝혀보겠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간음한 여인의 송사 사건을 잠시 떠 올려보세요. 거룩한 물이시며 말씀이신 주님이 죄(티끌)를 품어 안고 자기들이 유대인들의 빛이라 생각하는 율법을 들어 간음한 여인을 송사하던 죄인들 앞에 서자 죄인들의 죄가 밝히 드러났고 그들이 도망 가버렸습니다.
누가 빛이고 누가 어두움입니까? 그들의 죄를 밝히 드러내신 주님이 빛이시고 그 빛에 의해 자신의 추한 것이 발각되자 순식간에 모두 자취를 감춰버린 유대인들이 어두움입니다. 그 이야기와 오늘 본문이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두움은 자기들의 가능성과 자존심을 여전히 붙들고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사고와 행동들을 가리켜 어두움이라 하는 것이고 그와 반대로 원수의 구원을 위해 돌에 맞아 죽어주는 십자가의 삶을 사신 주님이 빛이신 것입니다. 그 대조는 항상 머릿속에 담고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고 마태복음 5장 14절에도 보면 주님께서 우리 성도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고 당신을 따르는 자들은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과 같은 빛이라면 우리 성도도 당연히 빛이신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빛으로서 이 땅에서 사는 길은 유대인들처럼 자신의 가능성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힘을 의지하여 행복에 이르려 다른 이들을 밟는 삶에서 벗어나 원수를 위해 자신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요 8:12)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기서 ‘따르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콜루떼오’는 ‘함께 같은 길에 있다, 동행하다’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주님과 함께 그가 가신 같은 길을 동행하며 따르는 자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처럼 주님은 남편이신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간음한 교회를 대신하여 돌에 맞아 죽으심으로 다른 말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으로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창조를 완성해 내셨습니다. 그렇게 새 창조는 하나님의 자해(自害)로 말미암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렇게 상함과 손해와 비움의 십자가의 삶을 사는 존재를 ‘빛’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 세상의 힘으로 권력으로 재물로 확장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바보 같은 십자가의 삶에 의해 확장되고 완성이 됩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이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으로 교회를 탄생케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창조에 우리가 빛으로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십자가의 삶을 삶으로 입으로 세상에 전파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지상 대 명령이며 그것을 쉬운 말로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마28:18-20) 우리의 전도를 통하여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게 되는 것이고 우리의 전도는 십자가의 삶을 전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새 창조는 완성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작은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런 것입니다. 언뜻 보면 패배의 현장 같아 보이지만 그것보다 멋진 승리의 현장은 이 역사 속에서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빛으로 부름 받은 성도는 바로 그 십자가의 삶 속에서 승리를 거두는 역설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원수를 위해 내가 대신 죽어주는 십자가라는 바보 같은 삶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가상칠언을 잘 연구해보면 언뜻 모순이 되는 듯 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당신이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치감이 어느 정도냐 하면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10:38)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바로 나이고 내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조차 자기 마음대로 하시지 않았습니다.(요12:49) 아버지로부터 받은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아버지 하나님과의 일체감을 강조해 오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는 버려짐을 느끼고 계십니다. 일체감과 버려짐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버려졌다는 말씀은 아버지와 분리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아버지와 분리가 되었다는 것은 다 이루지 못했다는 뜻인데 이상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버려짐과 다 이루심을 모두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그런데 그 속에 복음의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예수님 말고 하나님 아버지와 일체될 수 있는 존재가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버려졌다는 것은 분명 일체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인간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일체였던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다는 것조차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도 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일체가 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려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명과 존재에 대한 자신의 주도권조차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생명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고 자신과 일치된 어떤 분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철저한 자기부인이 벌어지는 장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한 철저한 자기부인의 장소에서 비로소 ‘다 이루어짐’이 나타납니다. 이게 바로 복음이 담고 있는 복된 역설인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의 완전한 이루심은 바로 아버지의 뜻에 의해 버려져도 자아가 등장하지 않는 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의 온전한 이루어짐은 온전한 자기부인, 온전한 순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버려짐이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버려짐 말고 아버지의 뜻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질 수 있는 유일한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버려짐을 당하시고 그 속에 당신의 백성들을 품어 안으심으로 우리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버려짐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해요? 우리는 그렇게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버려짐을 당하면서도 자기의 생명과 존재의 주도권을 주장하지 않은 온전한 순종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뜻이 완성되었습니다. 어떤 뜻이지요?
(요 6:40)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아버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버려짐에 의해 온전히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버려짐 속에 우리가 함께 동행 하고 있었고 예수의 버려짐의 삶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어낸 것처럼 우리의 삶도 아버지의 뜻이 다 이루어지는 데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바로 그러한 십자가에서의 버려짐을 실재 화하여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볼까요? 십자가상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버려짐에 의해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참 빛에 의한 새 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일컬어 자신과 똑같은 빛이라 칭해주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당신을 보낸 것처럼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1) 주님은 우리를 새 창조 사역의 동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버려짐의 삶을 살면서도 전혀 자기의 주장이나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털 깎는 자 앞에서의 어린 양처럼 온전한 자기부인을 세상에 보여줌으로 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새 창조를 완성해 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오해하는 것이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있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버려지셨다는 것을 모델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했으므로 우리는 이제 이 땅에서 부귀영화와 만사형통의 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너무나 편만하게 퍼져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연합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버려짐을 당하셨습니다.(롬5:12-21)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분의 버려짐을 동일하게 체험하며 새 창조 사역을 거들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뿐인 이 세상에 빛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을 당 하시면서도 완전한 순종을 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것처럼 우리 성도도 이 세상의 빛으로서 참 빛이신 예수의 빛을 따라 하나님께 버려짐을 당하는 모습으로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 끝까지 순종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빛이라고 선언하시고 너희도 세상의 빛이라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성도의 삶 속에 때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려짐을 당한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잘 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동참하는 삶보다 더 값진 삶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값진 삶 속에서 내가 잠시 버려짐을 당하는 모습으로, 세상에게 지는 모습으로 간다고 해서 우리가 낙심하거나 좌절해서야 되겠습니까? 잘 이겨 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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