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을 입어 순종케 된 자들의 상급?(I) (10)
(김성수 목사)
(롬 1:3-6)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혹시 이런 동화를 아십니까? 어떤 임금이 백성들에게 꽃씨를 나누어주고 가을에 심사하여 잘 기른 자는 큰 상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왕이 준 씨앗으로만 꽃을 피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물을 주며 키웠지만 이상하게 꽃씨는 싹조차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상을 받기 위해 꽃집에 가서 같은 종류의 새 꽃씨를 사서 왕이 준 씨앗과 바꾸어 다시 심었습니다. 그들의 화분에서는 예쁜 꽃이 피어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임금에게 상 받을 일을 기대하며 정성껏 그 꽃을 가꾸었습니다. 임금이 정해 놓은 기한이 차자 씨앗을 받은 백성들이 저마다 자신이 가꾼 화분을 들고 임금 앞에 나왔습니다. 그렇게 저마다 아름답게 핀 꽃을 들고 나왔지만 이상하게 임금님은 기뻐하지 않고 크게 실망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소년이 싹도 나지 않은 빈 화분을 들고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임금이 그 소년을 부르자 소년은 떨며 임금 앞으로 나와 ‘임금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물도 주고 거름도 주며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는데도 이렇게 싹도 피우지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벌을 받아 마땅한 자이니 제게 벌을 주십시오.’하며 울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아니다, 너야 말로 정직하게 꽃을 피웠다. 내가 원했던 꽃이 바로 그 꽃이란다.’라고 말하며 크게 칭찬을 하였습니다. 임금은 그 아이에게만 상을 내렸고 나머지 엉뚱한 꽃을 피워 가지고 온 백성들은 전부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알고 보니 임금이 백성들이 얼마나 정직한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싹이 나지 못할 썩은 씨를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동화를 생각할 때마다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의 모습을 떠 올리곤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썩어질 몸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고전 15:42) 물론 그것은 인간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그 몸은 죽은 몸이라고 하셨습니다(롬 8:10; 엡 2:1) 그건 절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썩은 씨입니다. 바울이 그 썩은 씨들의 현실을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롬 3:10-12,20)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7:18-19)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 하는도다“
이렇게 인간은 죽을 몸, 썩어질 몸에 갇혀 있는 한 절대 하늘 임금이 원하시는 그 어떤 꽃도 피울 수 없으며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단 그 썩어질 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가 그들의 삶을 대신 사실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가 그들의 몸인 가지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현실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볼까요?
(요 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은 인간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길을 제시하시는데 그것이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 그 어떤 인간의 삶에서도 꽃이나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 주체가 줄기라는 말이에요? 가지라는 말이에요? 줄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열심과 노력에서 나올 수 있는 열매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다만 ‘하나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저희들의 힘으로는 열매는커녕 싹도 피울 수 없는 그런 피조물일 뿐입니다.
저희 안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예수라는 열매가 없다면 저희는 절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라는 칭호를 받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라는 정직한 피조물의 고백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라는 꽃과 예수라는 진짜 열매를 들고 하늘 왕 앞에 선 정직한 성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러한 정직한 고백을 하게 만드시기 위해 그들에게 열심도 부리게 만드시고, 때로는 한없이 게으르게도 놔두시며, 어떤 때에는 그들의 삶 속에서 수많은 실패와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하시기도 하시고, 때때로 그들 속에 사시는 예수의 열매를 나타나게 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오롯하게 드러내고 죽은 흙에 불과한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 세상에 창조된 것입니다.
(골 1:16)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우리는 이렇게 예수에 의해, 예수를 드러내기 위해 창조가 된 피조물임을 자각하고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송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천국 백성들의 현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 역사와 인생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열심을 부려 변하고 성숙하여 왔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절대의존적인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아버지만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어린아이들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나의 자녀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입니다. 어린아이는 아버지의 손만 꼭 잡으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법이니까요.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천국의 어린아이들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절대 못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천국의 아이들은 하나님 아버지만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아이들은 절대 자신이 갖고 있는 선악구조로 상황 판단을 하고, 선악의 분별을 하며, 자기의 야망을 성취하려는 시도를 할 수 없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혹여 이 역사 속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나왔다고 했을 때 그 열매의 주인이 누구라는 말이 되나요? 예수님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간섭 하에 예수님이 맺으시는 열매를 우발적으로 드러내며 사는 이들을 ‘살았다’고 하고 ‘산 자’라 합니다.
그들에게서는 반드시 어떤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정직한 그 소년처럼 ‘하나님, 저는 아무리 해도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 화분에 한 알의 밀알로 심겨지시더니 꽃을 피우시고 열매를 맺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단 하나의 열매도 맺을 수 없었지만 제 화분 안에 들어오신 예수의 열매가 여기 있으니 이 열매를 받으시고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게 바로 진짜 열매를 맺은 자의 삶 속에서 나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게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자의 고백이니까요. 그런데 그러한 이들의 마음속에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이 정도의 수고를 했으니 난 상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라는 마음이 들까요?
(롬 8:9-11)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에 보시면 몸(소마)이라는 말이 나오고, 영(프뉴마)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몸은 죽은 것으로 판명이 나고, ‘의’ 때문에 ‘영’이 살아있는 존재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는 바울이 3장 21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님의 의입니다. 11절을 보세요.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에 의해 우리가 비로소 산 자가 되는 것이고, 그 산 자들의 삶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 사시는 성령에 의해서요. 그래서 신자에게 요구되는 열매가 성령의 열매,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썩어질 우리 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시게 되면 우리의 몸은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죽은 몸, 소마로 드러나게 되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 즉 영의 상태가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면,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면 죽어야 할 ‘육신’과 살아야 할 ‘성결의 영’의 부분이 확연하게 둘로 분리가 되어 인식이 되고, 왜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왜 우리는 성결의 영으로 살아나야 하는 지를 인생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영의 상태가 된 인간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가지 않은 몸은, 에베소서의 진술대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몸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어떤 열매가 맺힌다면, 그건 전적으로 그 인간 안에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맺으신 것이란 결론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매는 영이 맺는 것이고 혼과 몸은 영에 의해 열매를 맺을 수도 혹은 맺지 못할 수도 있는 피동적이며 수동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저는 지금 영과 혼이 몸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독립적인 본질로서 죽을 때 몸을 떠나서 별개로 존재하는 무슨 귀신같은 불멸의 혼백 같은 것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헬라의 플라톤 철학이나 영지주의 등의 영향을 받아서 영과 혼과 육, 혹은 영혼과 육신 등으로 나누어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걸 굳이 이분 설이다, 삼분 설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헬라철학이나 영지주의, 그리고 동양의 혼백사상 등이 얼마나 인간의 이성을 잠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인간 안에 영과 혼과 몸이 각각의 구별된 영역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본질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령선이라든지, 꼬마유령 캐스퍼, 장화 홍련 전, 등의 동화나 옛날이야기나 영화 등에도 그러한 인간들의 인간 존재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몸과 분리된 독립적 개체로서의 어떤 존재가 -그게 영인지 혼인지 분별도 할 수 없는데도- 우리 안에 존재하다가 몸에서 튕겨져 나가게 되면 그 자체가 독립적 개체로 존재 할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그런데 그 각각이 무엇인지 설명을 해 보라고 하면 성경은 고사하고 심리학이나 철학이나 의학이나 과학에 근거해서도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해 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헬라 철학이나 영지주의, 혹은 동양의 혼백사상이나 무속 신앙 등에서 차입한 수많은 추론과 상상만 난무할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영과 혼과 육이 아주 정확하고 명료하게 구별이 되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개역성경만으로는 그 구별을 다 분별하여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역성경의 번역 자체가 그 영과 혼과 몸, 그 중에서 특히 영과 혼의 부분을 너무 분별없이 번역을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영과 혼과 몸에 대해 분명한 구별과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영이나 혼, 혹은 영혼 등을 사람이 죽으면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가게 되는, 사람 안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 줄이 빠진다느니, 혼난다느니, 그런 말들을 하는 것이고 재채기를 하면 혼이 놀라 도망 갈까봐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는 기원으로 ‘bless you’로 축복을 해 주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초원에서 말을 달리다가 가끔씩 서서 자기의 영혼을 기다린다고 하지요? 자기가 너무 빨리 달려서 혹시 자기 영혼이 자기를 따라오지 못하면 낭패니까요. 심지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혹시 자기에게 해꼬지를 할까봐 장례식 장에서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쏩니다. 군대의 장례식에서 하늘을 향해 조총을 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영혼을 죽이는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귀신 론으로 유명한 베뢰아 파에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120년의 수명을 다 못살고 죽은 영혼은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고 하여 모든 사건과 사고와 질병 등을 그런 귀신들의 책임으로 모두 전가를 시킵니다. 그건 성경이 말하는 영이나 혼, 영혼과 많이 다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영과 혼과 몸이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루아흐’ ‘네페쉬’ ‘바싸르’로 구별이 되어 기록이 됩니다. 신약 성경에도 영과 혼과 몸은 정확하게 ‘프뉴마’ ‘프쉬케’ ‘소마’로 구분이 되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몸인 ‘소마’와 육체인 ‘사륵스’는 또 다른 개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로마서 8장 10절의 영은 ‘프뉴마’입니다. 그 단어는 항상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그 ‘프뉴마’라는 단어가 ‘성도의 영’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살아계신 이는 우리의 영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인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 성도의 영은 우리의 것이 아니면서 외부의 어떤 존재로부터 우리의 것으로 주어지고 인정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영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걸 성경이 ‘영이 죽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그 말은 인간 안에 사유되어 있던 독립적 개체로서의 영이 죄로 인해 죽어 있다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기 전에는 인간에게 영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시게 되면 인간은 비로소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을 하나님을 감지하고, 그 분과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교통도 할 수없는 세상 사람들은 영이 없는 것입니다. 혼은 또 다른 개념을 담고 있는 것이고요.
(요 3:6)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보세요. 성령의 가입으로 비롯되는 개념이 ‘영’인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낳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영’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맺어지게 되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하게 된 그 ‘상태’를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독립적인 개별적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바로 그들이 살아있는 자이고 그들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 2장 7절의 생기(루아흐)를 받고 생령이 된 아담의 그림에서 모형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생기는 ‘루아흐’로서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렇게 성령의 가입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혼(네페쉬)’이 되는 것, 바로 그 상태를 ‘영’의 상태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고전 15:45) “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여기에서 첫 사람 아담에게 쓰인 ‘영’이라는 단어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에게 쓰인 ‘영’이라는 단어는 다른 단어입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쓰인 단어는 우리가 흔히 ‘혼’이라고 번역을 하는 ‘프쉬케’(히브리어로는 ‘네페쉬’)이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에게 쓰인 ‘영’은 ‘성령’을 가리키는 ‘프뉴마’(히브리어로는 ‘루아흐’)입니다.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이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의 부분을 인용 해다가 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단어를 ‘살아있는 영’이 아니라 ‘살아있는 프쉬케’, 즉 ‘살아있는 혼’이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도 살아있는 영이 아니라 살아있는 혼이 되어야 맞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7절에도 ‘루아흐’가 아닌 ‘네페쉬’라는 단어가 쓰인 것입니다.
(창 2:7)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 즉 ‘루아흐’를 불어 넣으셨더니 사람이 살아있는 ‘네페쉬’ ‘혼’이 된 것입니다. 생기, 즉 성령(루아흐)과 생령에서의 ‘영’(네페쉬 하야)이 다른 단어란 말입니다. 네페쉬(혼)에 루아흐(성령)이 들어가니까 ‘살아있는 혼(네페쉬)’ 즉 ‘영’이 되는 형국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면 아시겠지만 구약에서 ‘네페쉬’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주로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아있는 생명체 혹은 생명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인간 속에 있는 어떤 독립적인 본질로서 죽을 때 몸을 떠나서 별개로 존재하는 무슨 귀신같은 불멸의 혼백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서 ‘프쉬케’라는 단어가 쓰일 때에도 구약에서의 ‘네페쉬’와 그 용례가 같습니다. 그러니까 ‘혼’ ‘네페쉬’라는 것은 인간의 몸 안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혼령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 아래에서 숨, 즉 목숨을 갖게 된 모든 피조물들을 가리키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 ‘혼’이라는 단어는 구원받은 자나 구원 받지 못한 자, 모두에게 주어지는 숨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 ‘혼’이라는 단어는 짐승에게도 쓰입니다. 그 ‘네페쉬’ ‘혼’이라는 단어가 쓰인 구약 성경의 몇 군데만 찾아드리겠습니다.
(창 46:27) “27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여기에서 두 명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도 ‘네페쉬’이고 ‘칠십 명’에서의 ‘명’도 ‘네페쉬’입니다. 굳이 직역을 하자면 ‘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진 ‘혼’의 개념으로 이 구절을 번역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요셉이 두 명의 ‘혼’을 낳은 것인가요? 그리고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들어간 야곱의 자손 70명도 70명의 혼령이었나요?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네페쉬’ ‘혼’은 혹자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마음’도 아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전적 개념의 ‘혼령’도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혼’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직접 닿은, 숨이 붙어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피조물에게 하사된, 하늘의 생명과 구별되는, 역사 속의 생명, 그리고 하늘과 구별되는 지옥 속의 생명을 총칭하여 ‘혼’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이 나가면 죽는다고 하는 것이고 ‘혼’이 다시 들어오면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건 육신적인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며 아울러 하늘 생명과 대조되는 지옥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왕상 17장 사르밧 과부의 아들 이야기) 그리고 그 혼이 부어지기 전의 상태를 ‘몸’, 즉 죽은 흙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네페쉬’라는 단어의 용례를 몇 군데만 더 찾아 드리겠습니다.
(출 12:15) “15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 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 지리라”
여기에서 ‘유교 병을 먹는 자’라고 번역이 된 어구에 ‘네페쉬’가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혼’은 빵도 먹는 존재입니다. 혼백이 빵 먹는 것 보셨어요?
(시 107:18) “18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여기도 보시면 ‘혼’ ‘네페쉬’가 각종 음식을 싫어한다고 나오지요? 신약으로 한 번 가볼까요?
(행 2:41)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여기에서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삼천 명에 쓰인 단어가 ‘사람’이 아니라 ‘프쉬케’입니다. 직역을 하면 ‘혼’입니다. 이 혼들은 구원받은 혼들입니다.
(행 27:37)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 륙 인 이러라”
여기에서도 276인이 ‘프쉬케’ 즉 ‘혼’입니다. 바울과 한 배에 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니 여기에서의 혼은 모두 다 구원 받은 혼은 아닙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혼’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의해 산 존재가 된 자들을 가리키며, 그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공히 쓰이는 보편적 칭호입니다. 그래서 그 ‘혼’을 가리키는 ‘네페쉬’나 ‘네솨마’라는 단어는 ‘숨’이나 ‘목숨’등으로 혼용하여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혼, 네페쉬, 네솨마’가 끊어지면 살아있던 존재가 죽은 흙덩이, 먼지 덩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몸’이라 합니다.
(왕상 17:22)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보세요. ‘네페쉬, 네솨마’가 떠나면 아이는 고깃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눅 12:20)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여기에서의 어리석은 부자의 영혼도 ‘프쉬케’ ‘혼’입니다. ‘혼’, 즉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떠나면 그 부자 역시 죽은 고깃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혼’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숨, 호흡, 생명’을 가진 피조물의 상태를 ‘혼’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상 28장에서 사울이 접신한 여인에게 찾아가서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올리는 그런 장면을 생각하시면서 ‘혼’이라는 것이 그러한 귀신의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 하시면 안 됩니다. 거기에서 신접한 여인이 본 것은 ‘신’이지 ‘귀신’이 아닙니다. 그 단어는 ‘엘로힘’입니다. 그 대목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앞뒤가 안 맞아요. 신접한 여인이 ‘엘로힘(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혼령은 사무엘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의 혼령을 끌어올리기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부르라고 하자 죽은 사무엘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고 그 여인은 그 존재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른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나타난 것은 사무엘의 귀신이 아니라 그 상황 자체가 하나님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엘로힘의 하나님께서 그 일을 주관하셨다는 그런 말입니다. 거기에서 사무엘의 혼령 같은 것이 올라와서 사울을 야단친 것은 무당이 귀신을 불러올릴 수 있다는 것이나, 이미 죽은 자가 이 땅에 다시 내려 올 수 있는 가 등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하게 추락할 수 있는가와 그러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한 교훈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죽은 인간의 혼령으로서의 귀신은 없습니다. 다만 마귀의 세력들이 그러한 것들로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귀신이라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인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의 혼령 같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전인적인 존재입니다. 몸을 가진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숨, 생명이 들어가면 그 자체가 혼이 되는 것이고, 그 혼에 성령이 들어가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하게 되면 그 상태를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각각이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위 같은 거 눌리면서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건 마귀에게 속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 안에, 성도가 소유한 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로 인해 하나님의 것으로 편입이 된 그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 ‘영’이 살아난 사람, 혹은 그냥 ‘영’ 등으로 지칭하는 것이고 그를 성령이 낳은 영이라 부르는 것이며 그들만이 그 영의 상태에서 하늘 임금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빠져나가면 그들은 곧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 속에서 맺혀진 그 어떤 종류의 열매와 꽃도 다 누구의 작품이라는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의 작품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국에 가서 ‘하나님, 제 힘으로는 절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짜 제물, 진짜 열매이신 예수님을 주신 것이군요, 저는 죄인 중의 괴수일 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늘 임금에게 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완성이 되어 머물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이라 하지 않고 살아 있는 ‘혼’, 하나님의 보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혼’이라 하는 것입니다.
(계 6:9)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여기에서 제단 아래에 있는 죽임을 당한 영혼들은 천상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프뉴마’가 아니라 ‘프쉬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력을 풍성하게 공급받고 있는 상태가 바로 ‘영’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 보좌 앞의 존재는 그저 살아있는 ‘영혼’ ‘프쉬케’가 되는 것입니다. 그 ‘프쉬케’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붙들려 있는 상태가 ‘영’의 상태 ‘프뉴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령과 연합되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자가 된 그들을 ‘영’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영’은 인간 자체에 원래부터 존재했던, 인간에게 속한 어떤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된 어떤 존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살아있는 ‘영’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며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한 ‘영’의 상태를 처음으로 보여주고 가신 분입니다.
(눅 24:39)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여기보시면 주님께서 ‘영’, 즉 ‘성령’은 살과 뼈가 없다고 하시면서 부활하신 당신은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때문에 무소부재와 편재의 속성을 포기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살과 뼈를 가져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1호 시민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영’이신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셨으나 살과 뼈를 가지신 상태에서 ‘성령’과 함께 연합하시어 여전히 ‘영’의 상태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바로 이 현실이 살과 뼈를 가진 아담에게 생기가 부어지는 그림인 것이며(그 상태가 바로 ‘영’) 아담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인 하와가 살과 뼈를 가진 상태에서 산자의 어미로 등극하는 그림인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에서 주님이 교회의 첫 열매이며 맏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첫 열매라는 것은 그렇게 살과 뼈를 가지신 존재로 성령과 연합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언약의 성취자가 되신 예수 자체가 열매라는 뜻이고, 그러한 모습으로 구원을 받게 된 우리 자신이 바로 열매라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이 열매인데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행위가 뭐 그렇게 대단하게 상을 받을 만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영’이라는 것은 피조물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관계를 맺고 사는 피조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의 성령 아래에서 하나님에 의해 쓰임을 받는 모든 존재에게 ‘영’이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전 3:20~21)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여기에서 ‘혼’으로 번역이 된 단어가 ‘루아흐’입니다. 영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도 영이 있고 짐승에게도 영이 있다는 말인가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창세기 1장의 첫 창조 때에 짐승들에게는 생기(루아흐)가 불어 넣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짐승은 그냥 ‘네페쉬’ ‘혼’의 상태인 것입니다. 인간만이 ‘하이 네페쉬 하야’인 영의 상태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떠한 형국으로 창조가 될 것인지에 대한 원시 모형이라 했지요? 그런데 왜 여기에는 짐승에게 마치 영이 있는 것처럼 기록이 되어 있는가?
여기에서 ‘인생’과 ‘짐승’은 하나님의 백성과 유기된 자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바로 위의 17절을 보면 전도서 기자가 의인과 악인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인생과 짐승의 이야기로 옮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영은 하늘에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아래로 내려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관여하신 성령은 그 백성들을 반드시 ‘영의 상태’로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이며, 유기된 자들의 삶에 관여하시는 성령께서는 그들을 이끌고 땅으로 내려가셔서 영원히 죽은 흙의 자리로 돌려놓으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걸 멸망이라고도 하고, 지옥이라고도 하고, 사망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 성령의 장중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인생의 영, 짐승의 영, 등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을 이 역사 속에 갇혀 있는 인생이 어찌 포착하고 이해를 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누가 알랴?’
예를 들어서 발람을 태우고 가던 당나귀가 말을 했을 때, 그때 그 당나귀에게 성령의 감동이 임했던 것이지요? 그 상태를 ‘영’이라고 합니다. 당나귀에게 영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한시적으로 하나님의 영과 관계를 맺고 성령에 의해 쓰임을 받는다는 의미에서의 영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완전히 당신의 백성들에게 임하시기 전까지, 즉 구약 때까지는 모든 영이 그렇게 한시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임했던 성령도 마찬가지이고, 바사 왕 고레스에게 임한 성령의 감동도 마찬가지로 한시적인 ‘영’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를 가리켜 ‘너는 나의 목자이며 네가 나의 뜻을 다 이룰 것이다’라고 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건 그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 아니라 한시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쓰임을 받고 있는 ‘영’의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장중에서 하나님께 들려 쓰임을 받는 그 상태를 ‘영’의 상태라 하는 것이고 그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하나님 백성들과 성령의 연합의 상태를 ‘영’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 등장하는 영과 혼과 몸의 개념을 잘 구별하여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살전 5:23)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주님이 강림하실 마지막 때에 우리 성도의 영(성도에게만 적용되는 상태)과 혼(살아있음, 숨, 생명)과 몸(여기서의 몸은 소멸되어야 할 ‘사륵스’가 아닌 ‘소마’로 성도가 부활 시에 입을 새 몸 또한 ‘소마’이다)이 소멸하는 불에 의해 멸절되지 않고 새로운 것으로 변하여 보존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영의 상태로 말미암아, 혼, 즉 살아있음이 단절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몸을 입은 상태에서 영원한 ‘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영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히 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 영이고, 어떤 것이 살아있음, 즉 혼이며, 어떤 것이 몸이고, 어떤 것이 죽어야 할 육체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발라내어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과 혼과 몸만을 남기시는 것입니다. 그게 언약의 성취입니다. 이렇게 ‘영’은 죽은 흙에 불과한 우리 몸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 넣어져 “살아있는 ‘혼’”이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 2장 7절의 ‘하이 네페쉬 하야’입니다. ‘영에 의해 살아있게 되는 혼’ 그래서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살려주는 영’이라 부른 것이고요. 차치하고, 그렇게 우리 성도의 ‘살아있음’의 상태가 우리의 자기 계발이나 자기 성숙이나 공로나 업적이나 자격이나 열심 등을 배제한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에 의한 것이라면, 그 살아있는 존재들의 열심은 누구에 의해 격발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살아있는 존재로 ‘여김 받게’ 해 주시는 ‘성령’에 의해 격발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살아난 자들의 행위의 다소에 따라 상급이 차등 있게 주어지는 것이 말이 됩니까?
(갈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2절의 성령의 열매는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라는 뜻입니다. 지금 바울이 성도들에게 맺으라고 하는 열매는 성령이 임한 자들 안에서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 열매를 ‘성령’이라고도 합니다.
(롬 8:23)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표준새번역] “23 그뿐만이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맺히는 열매는 성령이 맺으시는 것이고, 그래서 성령 자체가 열매인 것이며, 그래서 그 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이 바로 우리가 맺어내야 하는 의요, 거룩함이요, 지혜요, 구속함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고전 1:30)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 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어떠세요?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이 맺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이 맺으시는 것입니다.
(빌 1:11)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표준새번역] “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으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열매를 거저 받은 자들의 입에서는 찬송밖에 나올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분명히 나오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순종케 하나니'라는 말과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들은 하나같이 주님께서 하신 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순종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순종하게 하셨다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부르셨을 때 내가 '예' 하고 달려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렀다'가 아니라 '부르심을 입었다'라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불렀다는 것은 부름에 대한 반응이 우리에게서 나와야 함을 의미하는 말이고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부름에 순종하는 것까지 주님께서 하신 일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결국 이 말씀들은 복음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개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순종 또한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게 되고 믿고 순종하게 된 모든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가능하게 된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분께 복종하게 된 모든 사건들이 성령이 하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자의 할 일은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24장로가 자꾸 자기에게 씌워진 면류관을 벗어서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가보니까 자기가 한 것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부끄러운 구원,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는 그날까지 죄만 짓다가 갑니다. 영의 상태에서 혼을 소유한 자가 몸 안에서 계속 죄만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의 상태에 있는 이들은 그 안에 계신 성령,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를 가시적으로 맺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이미 예수에 의해 그 존재 안에 가득 맺어진 은혜의 열매의 표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서는 자랑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랑 없음의 상태, 하나님 절대 의존의 상태를 만들어 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심을 내게도 하시고, 때로는 한없이 추락을 하게 하시기도 하시며, 경건한 삶을 살게도 하시고, 추악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들이 전부 합력하여 자기 부인의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 안의 성령께서 열심을 내게 하시면 최선을 다해 열심을 내라’고도 하는 것이고, ‘여러분의 추악한 실체가 드러나면 거기에서 절망하지 말고 그 때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뒤로 숨으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이 드러나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하신 일만이 드러나야 합니다.
아기들이 언제부터 거짓말을 하는 지 아십니까? 태어나면서부터 거짓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굳이 울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엄마 젖을 얻어먹기 위해서 웁니다. 그건 배고픔에서 오는 본능적 반응이라기보다는 이렇게 하면 엄마의 반응이 온다는 것을 인식한 아기의 거짓말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엄마의 가슴이 아프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철이 들면 이타적 삶을 살 수 있나요? 노인이 되면 ‘나’라는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인간은 나면서부터 ‘나’만을 위해 살다가 죽을 때도 ‘나’의 위상과 영광을 붙들고 죽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불가항력적 은혜로 어떤 무리들에게 임하여 그들 속에서 열매를 맺으시고 그 열매를 간혹 밖으로 하나 둘씩 보이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영의 열매만 보십니다. 그것만 하나님 앞에서 카운트가 됩니다.
(갈2:20-21) “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21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게 하여 주심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표준새번역]
이렇게 내 안에서 열매를 맺으며 사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상을 받겠다고요?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그 많은 상급과 보상에 대한 구절들은 다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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