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 예수 그리스도(2)
(김성수 목사)
(요 8:12)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거대한 촛불을 켜 놓고 자기들의 종교행위를 자랑하며 이 세상의 힘을 구하고 있는 유대인들 앞에서 ‘내가 빛이니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빛이신 주님이 이 땅에서 완성하신 일에 대한 동역자로의 초청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버려짐’을 통해 완성되는 ‘다 이룸’의 역설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버려짐’ 속에서 교회의 탄생이 ‘다 이루어진’것입니다. 그게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 빛이 당신의 희생으로 탄생하게 될 당신의 백성들인 또 다른 작은 빛들에게 ‘너희도 나와 같은 삶을 살라’고 초청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하늘의 왕의 신분으로 종의 형체를 취하고,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자신의 삶 속에서 재현하며 살아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빌 2:5-8)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새롭게 창조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분적으로 운명적으로 선언적으로 이미 완성이 되었지만 그 새 창조의 과정을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성도의 삶에 버려짐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며, 낮아짐의 삶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의 신앙생활은 자신이 성경을 통해 배워 알고 있고, 고백하고 있는 복음에 관한 지식을 삶으로 번역해 내는 과정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교회를 탄생케 했듯이 그렇게 탄생한 교회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몸으로 번역하여 살아냄으로 창조를 이해하고 그 삶을 통해 또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의 정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삶으로 번역이 되지 않고 지식으로 남아 있는 부분은 그릇된 권위주의로 남거나 영적인 교만으로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삶으로 번역이 되지 않는 신앙 고백은 오히려 죄를 쌓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반드시 우리가 배운 지식을 모두 쏟아내어 삶으로 번역해 내는 작업에 매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본문의 내용을 구약의 그림에서 한 번 찾아보고 그것을 다시 요한복음과 연결하여 성경의 일관성이 얼마나 치밀한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 앞에 실제로 빛이 나타나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일이 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징하는 가나안으로 진군했던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 13:21-22)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현(顯現)이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불기둥, 빛을 따라서 홍해를 건넙니다. 그렇게 빛을 따라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곳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출 14:19-22) “19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편에 가까이 못 하였더라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구름기둥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뒤로 돌아가 애굽 쪽에는 어두움으로 이스라엘 쪽에는 빛으로 비추어 이스라엘을 지키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하나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지요? 우리는 6장에서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걸으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공부하면서 왜 예수님이 제자들을 앞서 보내셨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이 구절을 살펴보았습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그들을 이끌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징하는 가나안으로 몰고 가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출애굽기의 그림이 빛이신 예수님을 좇아 빛으로 살며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경험하며 새 창조를 완성해 내는 성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그림입니다. 여기 보시면 불기둥, 구름기둥과 여호와의 사자가 함께 움직이지요? 불기둥과 구름기둥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인 것입니다. 그 불기둥, 즉 빛의 실체로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누구인지를 알면 오늘 본문의 이해가 한결 수월해 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곳 뿐 만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에만 서른 네 번이 나오는데 이제 곧 찾아보겠지만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지시고 여호와라 불리는 분입니다. 그런데 사자(使者)입니다. 사자(使者)는 보내심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여호와이며 사람의 눈에 보이게 오신 분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몇 군데 근거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말 3:1-2)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여호와이신데 여호와가 보내시는 분,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주, 언약의 사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때부터 사람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명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incarnation은 이 천년 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창세 때부터 일어났던 것입니다.
(출 3:2,6)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6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여기 보시면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 부르시지요? 사사기 6장 21절 이하에도 똑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셨는데 성경이 그 여호와의 사자를 여호와라 부릅니다.(삿6:21-23) 그런 곳은 성경 여기저기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스가랴 3장, 역대상 21장 등등에 여호와이시면서 여호와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십니다. 사사기 13장으로 가면 그 여호와의 사자가 당신의 이름을 말씀하십니다.
(삿 13:17-18) “17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당신의 이름을 기묘라 합니다. 이사야서에 가면 그 기묘라는 이름을 가진 분의 정체가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 9:6)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기묘라는 이름의 여호와의 사자는 평강의 왕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영존하는 아버지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성자 예수님이라는 것은 이제 재론의 여지가 없지요? 그 여호와의 사자이신 예수님은 구속사 속에서 여호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무엇을 이루시는 분입니까?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 내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가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신 일들을 보세요. 그 여호와의 사자는 모리아 산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깨달아 알게 하셨습니다.(창22) 그래서 주님은 아브라함이 당신의 때를 기다리다가 당신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요8:56) 그리고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예수의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맡기셨던 것이고(출3)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구원은 반석이신 예수에게서 불이 나와 제물이 타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의 사자는 지금으로부터 이 천년 전에 베들레헴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바로 그 일을 십자가에서 실행에 옮기셨던 것입니다.
그 여호와의 사자가 지금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을 잘 연상해 보세요. 그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와 배경이 어떠한 것들이지요? 이스라엘이 불기둥과(빛) 바다(홍해)와 바람(동풍)과 함께 어떤 역사적인 사건 앞에 놓여 있습니다. 불기둥은 빛이고 바다는 물이며 바람은 ‘르와흐’ ‘하나님의 신’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지금 이 그림과 동일한 그림이 창세기 1장에 있었지요?
(창 1:2-3)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수면(바다) 위에 하나님의 신(바람)이 운행하는데 거기에 빛(불기둥)이 보태집니다. 그러자 천지 만물이 창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 14장의 이야기는 첫 창조와 똑같은 배경과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빛에 의한 하나님 백성들의 새로운 창조를 모형으로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의 첫 창조 또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인, 죄와 허물로 죽은 죄인들이 빛이신 주님에 의해 작은 예수들로 재탄생 하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를 미리 그 속에서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빛에 의한 새 창조의 현장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쪼개짐’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는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쪼개짐’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쪼개지고(둘째 날) 물과 뭍이 갈라집니다.(셋째 날) 홍해가 갈라지고 물과 뭍이 갈라져 마른 땅(출14:21)이 드러난 사건과 동일한 그림이지요?
창세기에서는 그렇게 쪼개지고 나누어진 물과 뭍에 짐승들과 식물들이 채워집니다. 그리고 일곱 째날 안식이 옵니다. 그렇게 해서 창조가 완성이 되지요? 출애굽기에서는 어떻습니까? 출애굽기에서는 그렇게 쪼개지고 갈라진 홍해 속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쪼개짐 속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롭게 창조되어 가나안 쪽으로 살아서 올라옴으로써 하나님의 새 창조는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쪼개짐 속에 그 내용물이 채워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출애굽기에서는 그 쪼개짐 속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갔다가 다시 새로운 창조물이 되어 살아나오는 형국인 것입니다. 계시의 점진성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1장의 첫 창조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개괄(槪括)적으로 제시한 후에 출애굽기에서 그 첫 창조에서 예시된 셋째 날까지의 틀 속에 채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저주의 쪼개짐 속에 참여함으로 해서 탄생케 될 것임을 점진적 기법에 의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쪼개짐 속에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을 ‘세례’라는 단어로 표현을 합니다.(고전10:2) 그 세례는 구약의 할례의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라는 단어 역시 ‘쪼개짐’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할례라는 단어는 창세기 15장의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신 하나님의 언약 체결장면에서도 그대로 쓰여 집니다. 창세기 15장도 횃불(빛)과 연기(구름)와 쪼개짐과 하나님 이라는 동일한 소재와 배경으로 구성된 그림입니다.
같은 이야기지요? 그러니까 출애굽기의 홍해 사건에서 창세기 15장으로 거꾸로 타고 올라가 보면 그 새 창조 속의 백성들의 탄생은 빛이신 하나님의 쪼개짐에 의해 탄생하게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빛과 하나님의 신인 성령과 물과 쪼개짐이라는 소재와 배경으로 빛이신 예수님의 쪼개짐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탄생하게 될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구속의 이야기는 신약으로 와서 요한복음 1장에 그대로 반복되어 설명이 됩니다.
첫째 날 빛이 오셨는데 사람들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지요?(요1:1-10) 두 번째 날에는 예수님의 세례 사건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쪼개짐입니다. 세 번째 날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거합니다.(요1:39) 하나님과 죄인, 즉 빛과 어두움이 함께 거할 수 있게 된 근거가 뭡니까?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그리고 넷째 날과 다섯째 날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셋째 날까지의 쪼개짐과 나누어짐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사흘 째 되던 날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하는 혼인 잔치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이 요한복음의 기사가 창세기의 첫 창조와 출애굽기의 홍해 도하사건을 하나로 묶어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완성이 되는데,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탄생하게 되는 데, 예수님의 쪼개짐(세례)이 원인이 되어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은 이 어두움의 땅에 내려와 자신의 쪼개짐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에 속해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빛으로 끌어내는 새 창조의 주역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한 자기 부인,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내는’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빛’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새 창조를 완성하실 예수님 앞에 여전히 자신들의 가능성과 힘을 포기하지 못하고 율법을 들고 나와 그 참 빛을 죽이려 하고 그 율법으로 다른 이들을 송사하는 유대인들이 서 있습니다. 그들이 어두움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빛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당신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버려짐과 쪼개짐의 삶을 사는 자들이 바로 생명의 빛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은 스스로 쪼개지는 빛의 인도로 역시 쪼개지고 버려지는 작은 빛이 되어 참 빛이신 주님을 좇는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탄생했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후배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버려지셨습니다. 완전히 쪼개지셨습니다. 힘의 원리를 숭앙하는 세상은 버려짐과 쪼개짐이 곧 승리라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 공식에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줄곧 세상의 냉대를 받으신 것입니다.
(요 1:5)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여기서 ‘깨닫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카탈람바노’는 ‘힘으로 이기다‘’소유하다‘’소각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빛이, 말씀이 다가가면 이기려고 덤벼들고, 소유하려고 덤벼들고, 소각시켜 버리려 덤벼든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요한복음 1장 5절 말씀의 부연설명인 셈입니다. 율법과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고 자신의 자존심을 굳게 지키려 하는 유대인들의 어두움에 대고 빛이신 주님의 일갈이 참으로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결국 자신들이 빛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어두움들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어두움으로 꺼 버립니다. 그러나 그 예수의 버려짐, 예수의 쪼개짐, 예수의 꺼짐은 영원한 천국의 불길이 되어 지금도 활활 타 오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예수라는 빛의 쪼개짐과 버려짐이 어느 정도였는지 아세요? 주님은 빛이신 당신을 향해 어두움의 물을 뿌리는 원수들을 위해 지옥까지 경험하셨습니다. 그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사도신경 원문에 보면 ‘주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말 사도 신경에는 빠져 있지만 영어를 비롯한 다른 번역에는 모두 ‘He descended into Hell'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거기서 지옥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헬라어 ‘하데스’입니다. ‘하데스’는 ‘지옥’이라는 장소적 개념으로도 쓰이지만 ‘죽음의 상태, 하나님과 단절되어 분리된 상태’를 가리키는 데에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쓰인 곳을 한 번 찾아보지요.
(행 2:31) “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음부에 계셨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 음부를 땅 아래 곳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엡 4:9)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말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지옥에 내려갔다 오신 것일까요?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이 근거 구절로 내어놓는 것이 베드로 전서 3장 19절 이하입니다.
(벧전 3:19-21)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이 구절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던지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입니다. 바로 위의 16, 17절과 연결하여 보시면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벧전 3:16-17)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사도가 성도들에게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고를 한 후에 선한 양심으로 살게 되면 고난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와 그 분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일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베드로 전서 3장 19절을 원어로 보면 거기에 ‘지금’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옳게 번역을 하면 ‘예수님께서 영으로 지금 옥에 있는 영들에게 이미 복음을 전했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옥’이라는 단어도 ‘음부’라고 번역이 되는 ‘하데스’와는 완전히 다른 ‘휠라케’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 단어는 ‘감옥’이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는 진짜 장소적, 공간적 개념의 지옥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는 영들은 과거에 노아의 시대에 노아의 말을 듣지 않고 방주 속으로 들어오지 않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영으로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대에도 정말 주님께서 직접 복음을 전하셨나요? 노아는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항상 성령의 감화를 받아 성령이 시키는 말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 하지요? 따라서 노아의 시대에 선지자 노아에게 임한 성령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것입니다. 이제 19절은 이해가 가시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혹자들의 주장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까지 태어나고 죽었던 하나님 백성들이 머물고 있던 선조 림보에 내려가셔서 그들을 복음으로 푸셨다는 로만 가톨릭의 이야기나,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셔서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루터교의 주장 등은 옳지 않은 주장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그렇게 예수님께서 영으로 선지자들에게 임하셔서 복음을 전했는데도 겨우 여덟 명 믿었는데 너희들은 지금 그 소수의 백성 안에 이미 들어가 있는 자들 아니냐? 그것만 해도 얼마나 큰 은혜냐? 그러니까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느라 고난을 당하고 있다 할지라도 잘 참아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저주의 홍수에 빠져 죽으시고 너희를 그 속에 담아 살려내신 세례라는 것은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대답하는 것’(21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세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쪼개짐에 의해 살아난 성도들은 선한 양심,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대답(에페로테마)하는 것을 목적으로 다시 태어난 자들이니 너희가 어찌 그 고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라는 의미의 권고 구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이나 사도행전,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주님이 내려가셨다가 올라오셨다는 ‘하데스’ ‘음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 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지옥의 경험처럼 고통스러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지옥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영원히 지내야 하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모든 성도들의 영원한 지옥을 여섯 시간에 걸쳐 모두 받아 내신 것입니다. 그게 쪼개짐입니다. 그게 버려짐입니다. 주님은 손에 박힌 못, 발에 박힌 대못, 옆구리에 박힌 창 그런 것이 두려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것 아닙니다. 주님이 정말 두려웠던 것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상태로 여섯 시간을 버텨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빛이 겪어야 했던 버려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버려짐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했고 의지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고 승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우리 성도를 그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마 5:14)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엡 5:8)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은 어떻게 산다고요?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쪼개지는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그분을 끝까지 의지하여 아버지의 뜻인 거룩의 삶을 잘 살아내어 또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을 창조해 내는 데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것이 빛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우리 안에 그러한 빛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창조하여 심어 주신 것입니다.
(고후 4:6)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그래서 그렇게 창조된 새로운 빛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권고를 합니다.
(엡 5:9-10)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요일 2:9-11) 9 빛 가운데 있다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이게 빛들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베드로전서는 그러한 빛들의 삶, 세례 받은 자들의 삶,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삶은 고난을 수반한다고 하지요?(벧전 3:17) 우리가 열심히 그 삶을 살아보느라 참고, 참고 또 참다 보면 ‘어떻게 이런 데도 하나님이 그냥 지켜만 보시나’하는 의아심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버려진 자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버려짐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 쪼개짐의 시간 동안에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의 마음을 드릴 수 있는 자가 바로 빛입니다. 지금 우리 속에 타오르고 있는 빛은 너무나 미미하여 훅하고 불면 금방 꺼질 것 같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지펴진 하나님의 빛의 씨는 절대 다시 꺼질 수 없는 그러한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이 살다 가신 그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성취해 내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게 어두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어두움에 속해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독교는 하나님에게 버려짐을 당하는 모습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에 대한 권리 주장도 포기하는 완전한 자기 부인을 그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은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표현이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자폐적 공간의 이미지를 어서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얻은 구원에 만족하며 우리끼리 잔치하다가 떠나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빛이신 예수처럼 쪼개지면서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많이 손해 보세요. 많이 당해 주십시오. 그러면서도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해 주세요. 그게 십자가 아닙니까? 거기에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쪼개짐이요, 그게 다 이루었다라고 당당하게 외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버려짐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쪼개지고 버려지는 삶 속에서 절대 자기의 주장이나 지혜나 힘을 의지하여 자신의 실속을 채우려 하지 마시고 그 속에서도 오롯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참된 성도의 삶을 사십시다. 왜 주님께서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는 유대인들의 명절 끝 날에 ‘내가 빛이니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시겠지요? 쪼개지세요. 버려짐 속에서도 나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김현승 선생님의 <흙 한 줌 이슬 한 방울>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온 세계는 황금으로 굳고 무쇠로 녹슨 땅,
봄비가 내려도 스며들지 않고 새소리도 날아왔다
씨앗을 뿌릴 곳 없어 날아가 버린다.
온 세계는 엉겅퀴로 마른 땅,
땀을 뿌려도 받지 않고 꽃봉오리도
머리를 들다 머리를 들다
타는 혀끝으로 잠기고 만다!
우리의 흙 한 줌 어디 가서 구할까,
누구의 가슴에서 파낼까?
우리의 이슬 한 방울 어디 가서 구할까
누구의 눈빛 누구의 혀끝에서 구할까?
우리들의 꽃 한 송이 어디 가서 구할까
누구의 얼굴 누구의 입가에서 구할까?
시인은 우리가 흙 한 줌이 되고, 이슬 한 방울이 되고, 꽃 한 송이가 되어야 한다고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삶은 십자가의 삶입니다. 버려짐의 삶이고, 쪼개짐의 삶이며, 기다림의 삶입니다. 황금(물질주의)으로 굳고 무쇠(힘의 논리)로 녹슨 이 땅에 한 줌의 흙이 되고, 한 방울의 이슬이 되고, 한 송이 낙화(落火)가 되어 생명을 잉태하는 하나님의 참 신부로서의 삶을 잘 살아 보십시다. 그러한 하나님의 가슴 벅찬 초대에 응답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 이런 복을 누리며 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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