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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초막절과 생수의 강 예수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20.

 

 

초막절과 생수의 강 예수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요 7:25-53)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 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 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 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45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 하느니라 하였더라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지난시간까지 공부한 24절까지의 내용에서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이 유일한 목표인 이 세상의 떡에 관심을 둔 자들의 실상에 관해 상세하게 공부했습니다.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과 자기 증명, 그리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까지도 이용하려 한다는 사실을 예수님과 예수님의 형제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고, 세상의 힘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 사는 자들은 인과율에 얽매어 산다는 것을 예수님의 겉모습과 배경을 근거로 예수님을 판단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통해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한 사람들의 표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노력한 만큼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진리라고 확신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이 세상의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믿지 않는 자’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율법과 절기의 진의(眞意)를 아는 이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고 그 은혜를 의지하고, 그 은혜에 순종하게 되며, 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이 세상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인 영생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열심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전자와는 완전히 다른 열심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믿는 자’라 부릅니다. 그게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공부한 7장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시 그렇게 율법의 외양을 형식적으로 지키며 자기영광과 자기 자랑만을 위해 사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먼저 25절에서 27절까지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당국자들을 조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가르치고 계신데 당국자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 30절 말씀에 의하면 아직 예수님이 죽으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우리가 저 사람이 어디서 온 사람인 줄을 아는데 당국자들이 저 사람을 진짜 그리스도로 아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렸습니다.(26절) 역시 예수님의 배경과 겉모습만으로 그 분을 판단하는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자들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본문 28절과 29절을 보겠습니다.

 

(요 7:28-29)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얄팍하고 잘못된 것인지를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안다고 하는데 너희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이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본 왜곡된 것들’이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 분은 결코 메시아 일 수 없습니다. 가난하고, 약하고, 작고, 못 배우고,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은 강력한 힘을 소유하고 그들에게 다윗 왕국의 영화를 다시 안겨줄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는 매력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영광과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절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이 계속해서 말씀을 이어가시기를 당신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누가 보내서 왔는데 그 보내신 분이 ‘참이시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참된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너희들은 그 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 한다’고 자존심을 긁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딱 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신은 그 분에게서 보내심을 받고 왔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을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했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왔다는 자가 자기들의 기대를 송두리째 무너뜨려서 속상해 죽겠는데 거기다가 자신들의 마지막 자존심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까지 무시를 당했으니 그들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당연히 죽이고 싶었겠지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없이 살기 위해 나의 자랑과 나의 증명과 나의 영광과 나의 유익을 위해 살던 ‘나’라는 존재가 깡그리 부인되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오롯이 드러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입고 있는 세상 것들을 모두 벗겨버리고 선악과 앞에 세우셨을 때 ‘하나님 저 이제는 저의 지혜나 노력을 의지하지 않고 목숨 걸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다면 옛 사람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기대하던 것들이 허황된 것임이 판명이 되면 오히려 감사와 기쁨의 찬양을 해야 하는 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그 분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 힘 축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존심만 긁어대는 예수를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과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금방 판별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는 세상의 힘을 공급해 주고 소원이나 들어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인 영생을 주러 오신 분이다.(요6:51) 그리고 그 영생을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표로 하여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를 지는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마16:24) 뿐만 아니라 그 영생은 너희들이 뭔가 남들보다 잘나서, 열심을 부려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난 척 하지 마라(엡2:8-9)’라는 설교를 듣고서 그 설교를 한 사람을 죽이고 싶으면 우리는 가짜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올바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혹시 예수님의 저주를 받았던 유대인들의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계속해서 32절을 보시면 그렇게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유익과 자기 자랑과 자기 증명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던 자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 사람들을 보냅니다. 드디어 예수님 살해 작전을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 하속들에게 당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넌지시 암시를 하십니다.(33,34절) 그런데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수군거립니다.(35,36절) 그러니까 36절까지의 내용도 결국 자기 영광과 자기 자존심을 위한 신앙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신앙은 신앙도 아닐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살해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 요한복음 7장의 요절(要節)이라 할 수 있는 37절을 보시면 초막절의 마지막 날에 일어났던 일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37절 이하도 역시 인간의 노력과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게 되는 영생을 설명하는 에피소드입니다. 초막절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8일째 되는 날에 예수님께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7장을 시작할 때 간단하게 설명해 드린 바와 같이 초막절에는 성전의 번제 단에 물을 붓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7일 동안 매일 아침 제사장이 금 그릇을 들고 성전의 남쪽 문으로 나가서 남쪽 문 바로 앞에 있던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담아다가 성전 제단에다 부어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그 물을 붓기 전에 제단을 한 바퀴 돌아야 했고 7일 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여리고성 함락 작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7일 동안 물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은 율법에 나와 있는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무엇 때문에 그러한 일을 행했을까요?

 

(왕상 8:10-11) “10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 함이었더라”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어느 시점에 성전을 떠나 버립니다.

 

(겔 10:18-19) “18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19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목전에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다시 돌아왔을 때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겔 44:4) “4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을 통하여 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대”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채워진 성전을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겔 47:1-2) “1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돌아왔을 때 그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립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학개가 다시 성전을 재건했을 때 그 학개가 재건한 성전에 또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학 2:3) “3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

 

이스라엘은 그 후부터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여 또 다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화가 찾아오게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인위적으로 성전 제단에 물을 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초막절 제단에 물 붓기 행사는 세상적인 기복(祈福)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7일 동안 열심히 물을 붓는 것을 끝낸 8일 째에 예수님께서 ‘내가 물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7이라는 숫자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창조의 수, 안식의 수, 완전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인 8일째에 부활하셨고, 8일째에 승천하셨고, 8일째에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8일과 관계있는 분이십니다. 7이 창조의 수라면 8은 무엇입니까? 완전한 창조 뒤에 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재창조입니다. 8은 재창조, 새 창조의 숫자인 것입니다. 주님은 첫 창조, 즉 율법 아래 있는 그 첫 창조에 속한 것들을 허무시고 재창조를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바로 그 8일 째에 성전에 나타나셔서 7일 동안 열심히 율법과 절기의 물을 붓고 안심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너희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아오게 하려는 시도는 다 헛된 것이다. 내가 물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나로부터 회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은 너희들의 열심과 노력이 아닌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 물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화려한 세상 권세의 회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인 영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7장을 통해 공부한 내용에 확인도장을 찍어주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열심히 쏟아 부은 물은 곧 말라버립니다.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열심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손톱만큼의 도움도 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 안의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히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지점 또한 화려한 이 세상의 다윗왕국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자랑하고 나를 증명하고 나의 영광을 드러내며 이 세상의 힘을 쌓는 것에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을 줄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생명력, 즉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서만 행복하고 만족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성도로 선택된 자들은 이 세상 것들이 아닌 하나님의 생명력이 풍성히 부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됨됨이가 나에게서 나오게 되기를 소원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물 붓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막에서 갈증을 느끼듯 하나님을 찾고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편 기자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시42:1)고 표현을 한 것이고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된 자’(마5:6)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은 그러한 목마름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이미 진정한 영적 해갈을 가져다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이 갈증을 다 해결하실 것임을 믿으십니까?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 예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오라고 초청하셨지만 그 초청에 응하여 예수를 마시는 사람들은 목이 마른 사람들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를 마시고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에 목말라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에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목마르다’라고 우리의 목마름을 전부 삼켜버리시고 그 목마름을 십자가에서 처리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공로로 완전한 해갈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하나하나 깨닫고 알아가는 삶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완성해 내신 그 목표지점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제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과 됨됨이가 완벽하게 나오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해갈입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우리의 인생 속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그 완전한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참된 해갈을 가져다 줄 그 물이 어떤 물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요 7:38-39)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39절을 보시면 생수의 강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38절의 ‘배’는 헬라어 ‘코일리아’입니다. 그 단어는 ‘가슴, 자궁’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존재의 핵(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에서’라는 어구는 ‘나를 믿는 자의 배에서’ 라고도 번역을 할 수 있고 ‘예수의 배에서’라고 번역을 해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에 누구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와야 맞습니까? 예수님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와야지요? 그런데 우리의 배에서도 생수가 흘러나올 수도 있는 건가요? 왜 요한이 이런 애매한 문법의 문장을 택했을까요?

 

요한이 문법을 몰라서 그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일부러 그러한 표현을 택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배에서 흘러넘치는 생수의 강에 푹 잠겨 생수를 마시게 되고 그 생수의 강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사람들이라는 내용을 그러한 표현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롬8:9) 그 성령은 참 성전이신 예수님에게서 흘러넘쳐 예수님을 닮은 작은 성전들인 교회에게 전해졌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 성령의 물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게서는 하나님의 성품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며 문득문득 하나님의 됨됨이가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작은 예수들이 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이 부어져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우리의 배에서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며 세상 사람들은 당해주고, 속아주고, 모욕당하고, 수난 받으면서도 사랑해주고, 용서해주고, 용납해 주는, 바보 같은 삶, 그 십자가의 삶을 고난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을 반드시 통과하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십자가의 삶으로 말미암는 고난이야말로 성도에게서 흘러넘치는 성령 충만함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부어져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십니다.(갈2:20) 그게 성도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는 예수의 삶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성령이 예수에게서 나오듯이 우리의 배에서도 성령이 흘러나온다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수로 오신 성령은 무엇을 하러 오신 분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그 은혜에 감읍하여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을 돕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보여 져야 하는 하나님의 됨됨이, 하나님의 성품들이 성도에게서 흘러나오도록 도우러 오신 분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엡 5:26-27)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보시면 물은 우리를 씻어서 하나님 앞에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모습으로 세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잘 나와 있지요?

 

(벧전 3:21)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물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십니다.

 

(고전 12:3)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 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또한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그 분만이 참 생수이시며 그 분만이 진정한 해갈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기위해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면 여러분 안에는 이미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그 성령이 여러분에게서 흘러넘쳐 하나님의 성품이 문득문득 나오게 될 때 그것을 성령 충만한 삶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세례나 성령 충만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second blessing의 차원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성령 세례, 성령 충만은 뜨거운 체험이나 방언, 예언, 신유 그런 것과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성령 세례를 통해 성도가 되며 그렇게 성령 세례를 받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을 가리켜 성령 충만 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을 오해하여 성령하나님은 마치 기적이나 일으켜 주고 신비한 체험이나 하게 해 주는 어떤 능력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복적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적이나 신비가 자기의 삶에도 일어나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다주기를 소원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대단한 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신비주의나 기복주의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왕왕 있지요? 그 분들이 얼마나 열심을 부리는지 여러분도 잘 보시지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신비한 체험이나 기복을 목적으로 하여 부리는 열심은 7일간 인위적으로 제단에 물을 퍼부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와 위대한 다윗왕국을 재건해 주시기를 기대했던 바리새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이고 이 귀에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로만 행복할 수 있는 자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8일째에 나타나셔서 ‘내가 물이니 나를 마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40절 이하를 보시면 그렇게 자기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의 치부가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 하속들을 보냈는데 그들이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예수를 믿는 자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율법을 모르는 자들이나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그 말은 바리새인들이나 당국자들처럼 많이 배우고 높으신 양반들은 절대 초라하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문제를 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출생지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날 것임을 성경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예언한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갈릴리 나사렛사람으로 불렸습니다. 사람들이 그 분의 출생지를 갈릴리 나사렛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마 2:22-23)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 이러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으로 칭함을 받는 것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것이기에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왜 베들레헴 사람으로 불리지 않고 나사렛 사람으로 불렸는가? 거기에는 아주 깊은 구속사적 예언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탄생과 통치에 대한 예언이 기록이 되어 있는 이사야 9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사 9:1) “1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주님은 분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은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내었습니다. 헤롯의 질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애굽으로 쫓아버렸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애굽에서 나오셔서 베들레헴이 아닌 갈릴리로 향하셨고 그 일로 그 분은 갈릴리 사람으로 불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이방 갈릴리의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율법에 묶여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며 자기의 의를 쌓는 자들의 대표인 유대인들은 주님을 쫓아 버리는 우(愚)를 범하게 되고 주님은 그 일로 이방의 빛이 되셔서 교회를 탄생시키시는 구속사의 과정과 내용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40절 이하에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무엇을 자랑하며 무엇으로 예수님을 묶으려 합니까? 율법을 자랑하고 그 율법으로 예수님을 묶으려 합니다. 그렇게 인간 쪽에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들은 그들의 구원에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게 되는 원인 제공이 될 뿐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 7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 인과율과 율법주의에 빠져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모습을 통해 오늘날 교회들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7장은 다시 8장 12절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 중간에 8장 1절부터 11절까지에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 이야기가 삽입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 부분은 오래된 성경 사본에는 들어있지 않은 내용이라 괄호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그 부분을 설교하지 않습니다만 저는 하겠습니다. 저는 그 부분이 7장 전체의 내용을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다음 주에 그 삽입부분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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