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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58강. 부르심으로 주어진 구원

by IMmiji 2013. 8. 19.

58강. 부르심으로 주어진 구원 (롬 9:21-26)

 

롬 9:21-26=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많은 분들이 복음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복음을 알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사고가 만연하고 있어요.

이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으로 복음을 이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우상성을 담고 있어요.

우상성이란? 자기 유익을 위하여 신을 찾는 행위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귀가 가려워서 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네 도메노이” 라고 하는데 이는 곧 간지러운 곳을 긁어 준다는 말입니다.

가려운 데를 긁고는 싶은데 스스로는 긁을 수가 없어서 누가 대신 긁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가 합당한 빌미를 주면 면죄부를 받고 찜찜함을 달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욕을 좇는다는 말은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듣는 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복 받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축복 받는다는 말을 하는 목사를 따르게 될 것이고!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러한 일 행하는 목사를 추종하게 될 것이고!

복음을 좇아하는 성도는 복음 전하는 목사를 따르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하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사귀면 불편해요.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과 어울려야 편해요.

생각이 같아야 같은 짓을 해도 마음에 부담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걸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합니다.

 

깡패는 깡패들과 어울려야 천국이에요.

깡패가 착한 사람과 어울리면 지옥이에요.

그래서 끼리 끼리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를 통해서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되고 면죄부를 받기 때문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같은 신앙의 질을 가지고 있는 자들끼리 모이게 되어 있어요.

서로 다른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면 서로가 불편해요.

자기하고 다르면 힘이 쎈 놈이 쫓아내게 되어 있어요.

 

교회 가기도 싫고!

설령 교회에 가서도 아무 것도 하기 싫은데!

자기 생각을 합리화 시켜주는 목사가 있다고 한다면 그 목사를 따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그가 사귀는 교우들을 보면 그의 신앙관을 알 수가 있어요.

기도원 쫓아다니는 사람은 기도원 파들과 사귐을 가져요.

 

성화주의자들은 성화주의자들끼리 모이고!

은사라는 이름으로 무당 노릇하는 자들은 무당 노릇하는 자들끼리 모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주의자들끼리 모이고!

또한 복음 알았으니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영지주의자는 막 사는 자들끼리 모이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믿는 것이 있습니다.

무당도 믿음이 있고!

절간에 스님이나 불자들도 믿음이 있습니다.

물론 교인들도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누가 판단 해 주느냐 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럼 성경의 답을 들어야겠지요.

예수님께서 답을 말씀해 주셨어요.

 

마태복음 7장을 봅시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위에 말씀은 산상보훈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양의 탈을 쓴 이리 같은 거짓 선지자를 말하고 이들을 분별하는 것은 그들의 열매로 나무를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어요.

또한 이 후에는 집 짓는 비유로 산상보훈을 결론합니다.

이 흐름을 잊지 마세요.

 

그럼 먼저 산상보훈이 무슨 의미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의미로 본문을 잘 이해 할 수가 있어집니다.

예수님이 왜? 이러한 말씀을 공생애 사역 초기에 시작 하셨을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구약을 완성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난 후 제일 먼저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일 먼저 산 위에서 말씀을 증거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산상보훈은 구약의 율법에 성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새로운 율법과 같은 것이에요.

 

구약의 율법이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있듯이!

신약의 산상보훈도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있어요.

이 점을 놓치지 마세요.

 

구약의 율법이 인간의 껍데기를 고발하였다고 한다면!

신약의 산상보훈은 인간의 속을 고발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산상보훈도 율법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세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산상보훈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산상보훈은 구약의 율법을 예수님이 재해석을 해 주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러므로 산상보훈 속에는 예수님께서 옛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는 식으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재해석 해 주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구약의 율법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산 위에서 모세의 율법을 재해석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제 그 결론부에 도달했어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이 다 예수를 주여! 주여 라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주여! 주여 했다는 것은 모두가 스스로는 예수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아서 문제이지 각자 나름대로 예수를 믿었어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으로 일을 행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 이름으로 귀신도 좇아냈고!

또한 예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고!

더 중요한 것은 모두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을 빌리면 모두가 다 스스로의 판단에는 예수를 잘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하였으니 다른 사람들 눈에는 최고의 신앙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하면 스스로는 최고의 신앙이라고 자부하던 자들이에요.

 

해박한 지식으로 복음도 근사하게 전하였고,

교회에 충성 봉사도 열심히 하고,

많은 은사적인 능력도 행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인용하여서 말하면,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것을 말하였고,

천사의 말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능력도 행하였고,

자기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줄 정도로 헌신도 많이 하였어요.

겉보기에는 전혀 잘못된 것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합니다.

도리어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면서 내게서 떠나가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지옥에 가라는 말입니다.

이건 엄청난 충격이에요.

 

이러면 우리의 신앙도 안심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이들과 같이 그 날에 주께서 모른다고 내처짐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의 이름으로 복음도 전하고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성도 노릇도 하고 있잖아요.

모두가 자신만만하게 나는 천국에 갈 것이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럼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찌 하여야 하나요?

그냥 막연하게 예수를 믿어야 하나요?

아니면 나도 평생 예수 믿는다고 하다가 이들처럼 될 수가 있으니 아예~ 일찍이 포기하고 세상 일락에 취하여 살아야 하나요?

 

이런 말씀 앞에 서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두려운 마음이 듭니까?

아니면 감사하다는 마음이 듭니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한다면 왜? 두렵고!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면 왜? 감사할까요!

 

나는 왜? 두렵고!

나는 이래서 감사하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우면 이들과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고!

감사하면 이들과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을 잘 보세요.

그러면 답이 보입니다.

답은 21절에 있습니다.

 

그럼 21절을 봅시다.

 

마 7: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답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역설적으로 이해하면 쉬워요.

 

누가 천국에 가느냐?

예수를 믿는 자가 가요.

다른 말로 예수의 의(義)로 가요.

 

누가 지옥에 가느냐?

예수의 의(義)가 없는 자가 가요.

로마서에서 두 의(義)가 있다고 합니다.

“율법으로 난 의(義)”와 율법 외에 다른 의인 “예수를 믿음으로 난 의(義)”가 있다고 합니다.

 

“율법으로 난 의(義)”는 자기 행함이고 “예수를 믿음으로 난 의(義)”는 믿음입니다.

결국 행함을 의지하느냐 예수를 믿느냐 입니다.

두 의(義) 중에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의(義)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럼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예수의 의(義)를 붙잡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럼 누구 의(義)를 붙잡고 있을까요?

율법으로 난 의(義)입니다.

즉 자기 행함을 의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설명 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는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원치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얼마든지 자기 스스로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인간들 속에 있는 우상성 때문입니다.

우상 성이 뭐라고 했나요?

 

신(神)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이라고 했지요.

인간들이 언제 신(神)을 찾습니까?

자기가 아쉬운 것이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신(神)을 찾는다는 것은 곧 아쉬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쉬운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얻어 낼 수가 없으니까 자기보다 강한 신(神)의 힘을 빌려서 얻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신(神)을 찾는 것은 일종의 신(神)과 거래하는 것이에요.

내가 신(神)을 섬겨주고 나는 신(神)에게 배가 바라는 것을 얻어내니까 서로 윈, 윈 하는 겁니다.

 

죄인은 신(神)을 섬길 수가 없어요.

신(神)과 거래를 하는 자들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인간도 신(神)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세계에서는 인간도 신이에요.

선악과를 따 막은 인간은 다 하나님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므로 인간들 세계에서의 신(神)은 누가 더 쎈가의 힘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나 보다 저 신이 힘이 더 강하다고 여기면 거기에 가서 무릎을 꿇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들의 신관이에요.

 

언제 인간들이 신(神)에게 찾아 간다고 했나요?자기가 아쉬운 것이 있을 때라고 하였지요.

그럼 그 아쉬운 것을 얻으려면 자기보다 강한 신(神)을 찾아 가야 하겠지요.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구태여 다른 신(神)에게 가서 도움을 구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렇게 자기 유익을 위하여 신(神)을 찾는 행위를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이걸 교회 안에 이야기로 하면 자기 영광을 위하여 하는 모든 것이 우상 숭배가 되어요.

그것이 복음 전함이든, 선교이든, 봉사이든, 구제이든,,,,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 자존감을 높이고 자기 가치를 챙기고 자기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이므로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그 신앙이 아무리 고상하고 열심이 있고 충성스럽고 정성스럽다 하여도 그건 자기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일들이기 때문에 신(神)과 거래하는 우상 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를 다른 말로 하면 종교생활이라고 해요.

종교생활의 바탕엔 자기 의로 가득해요.

자기 영광이 있어요.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 영광과 자기 유익을 챙기고자 하는 것도 종교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누가 가느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간다고 했습니다.

그럼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하겠지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요?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의 의(義)를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통해서 왜? 예수님의 의(義)라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은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재해석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재해석을 하고 있을까요?

이는 유대인들이 지금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진의(眞意)를 모르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 진의를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율법을 오해하였다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못 사용하면 그것이 불법이에요.

 

그럼 유대인들이 율법을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알다시피 율법은 죄를 고발하고 죄인을 옥에 가두는 일을 합니다.

쉬운 말로 율법은 죽이는 법이에요.

죽이는 법에게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럼 율법을 아무리 완벽하게 지켜도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율법 신앙은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행함을 바탕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율법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본질은 다름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 자들을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이란? 법을 잘못 집행하는 것을 말해요.

즉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진의를 모르고 행한 것을 말합니다.

 

그럼 주여! 주여 하면서 자기들이 행한 일들을 자랑으로 늘어놓고 있는 자들은 율법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식으로 믿었단 말입니다.

 

천국에는 생명에 속한 자들이 가는 곳이에요.

죽은 자들은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율법에서는 생명이 나올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율법대로 살았다는 것을 붙잡아서는 안 되겠지요.

왜냐하면! 율법 자체가 죽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고 그 율법으로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살펴봅시다.

 

율법을 무슨 용도로 주셨는지를 봅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는 용도가 있어서 주셨을 것이 아닙니까?

예수를 보내도 다 뜻이 있어서 보내셨을 것 아니에요.

그 뜻을 바로 알아야겠지요.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이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범법함이란? 죄를 지었다는 말이에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율법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걸 역설적으로 이야기 하면 죄를 짓지 않았으면 율법이 주어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되겠지요.

 

맞아요.

죄가 없는 곳에는 율법이 필요가 없어요.

율법을 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할게요.

아이가 평상시에 TV를 보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합니다.

이런 아이에게는 부모가 외출을 하면서 TV보지 말라는 법을 줄 필요가 없어요.

 

부모가 외출 하면서 TV 보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할 때는 이 아이는 평상시에 공부는 하지 않고 TV만 보기 때문에 TV 보지 말라는 법을 주신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말은 곧 법이에요.

 

율법이 이와 같아요.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라는 것을 고발하려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주신 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걸 오해 하였어요.

문자대로 하라! 하지 말라! 라고 했으니 그대로 지키면 되는 줄 알았어요.

율법대로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줄 알았어요.

이게 불법이에요.

 

왜? 율법을 지킨 것이 불법이 되는가요?

이는 율법이 요구하는 정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뜻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는 대답을 듣기를 원하셨어요.

이걸 상한 심령이라고 해요.

 

그럼 하나님이 예수라는 메시야를 보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율법으로 예수 믿기로 나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러면 예수 앞에 나는 이런 저런 일을 했다는 자기 행함을 들고 나올 수가 없어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자세로 나아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했습니다! 를 앞세우고 나왔어요.

그래서 불법인 것입니다.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지요.

그럼 천국에는 율법이 없겠지요.

죄도 없고 죄인이 없으니까요?

 

그래요.

천국에는 율법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천국에는 율법을 상징하는 선악과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을 보면 생명과만 있어요.

이는 천국은 의인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악과는 감추어버린 것입니다.

 

그럼 천국과 반대인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요?

죄인이 사는 곳이지요.

세상에 사는 인간들은 모두가 죄인이에요.

그래서 율법이 범법함으로 인하여 더하여 준 것입니다.

 

죄를 안 지었으면 율법을 줄 필요가 없는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준 것입니다.

주지 않아도 될 것을 죄를 지어서 보태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곧 너는 죄인이라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려고 준 율법을 가지고 우리는 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니지요.

그게 아니라고 알려 주어야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보훈으로 율법을 재해석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대로 가만히 두면 율법을 준 목적에서 위배가 되는 일을 계속행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킬수록 하나님의 뜻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 지킨 것으로 나오는 자는 법을 잘못 집행한 것이 되므로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율법 속에서는 의(義)가 나오지 않아요.

 

의(義)는 다른 곳에서 주어져요.

하나님의 의(義)는 약속의 자손이 오셔서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약속의 자손이 오기 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내가 죄인임을 고발당하여야 해요.

나는 죽을 놈입니다! 라고 고백하여야 해요.

그래야 율법을 지킨 것이 되어요.

 

로마서 3장을 봅니다.

 

롬 3:19-22=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주어졌다고 하지요.

이는 범죄한 자들에게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범죄한 자들에게 너희는 죄인이라고 고발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에요.

이걸 범법함으로 인하여 더하여 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받으면 입이 닫아져야 해요.

야! 내가 죄인이네!

나 같은 죄인은 죽어야 해!

율법을 제대로 본 사람은 이 고백이 나와야 해요.

 

그러니까 율법의 끝에는 난 죄인입니다! 가 나와야지!

나 율법대로 살았으니 신앙이 좋지요! 라고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건 율법을 안 지킨 것이 되어요.

 

아까 율법이 언제까지 필요 하다고 했나요?

약속의 자손이 오기까지라고 했지요.

약속의 자손이 누구인가요?

예수그리스도에요.

 

예수그리스도가 오면 율법이 끝이 나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예수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하고 율법으로 죽은 자들을 살려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입니다.

 

갈 3장 24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장 25절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율법이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고 하지요.

몽학선생이란? 길잡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가 나와요.

예수를 만나게 된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율법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만난 자는 율법을 지킨 자가 되고!

예수를 못 만난 자는 율법을 안 지킨 자가 되어요.

율법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보물 지도와 같은 것이에요.

 

예수라는 보물을 못 만나면 보물 지도를 들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보물 지도만 들고 있었지 보물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경인 겁니다.

 

모세의 율법은 겉의 법이에요.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외형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안 하면 모세의 율법을 지킨 것이 되어요.

그래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일을 안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받았어요.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등등

이러한 일들을 안 하는 자들을 믿음 있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율법 아래서는 이 보다 더 좋은 신앙은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율법 아래서는 이러한 짓을 안 하는 자들이 최고의 신앙인으로 자리 잡고 있었어요.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지금 예수님 앞에 나온 자들이 전부 무얼 내어 놓고 있는가요?

전부 자기가 행한 일들을 내어 놓고 있지요.

이건 율법 지킴을 자랑하고 있는 것과 동일해요.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였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좇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하였다고 하면서 자기가 행한 일들을 쭈~욱 열거하고 있잖아요.

 

이렇게 행한 일들을 내어 놓은 자들이 누구인가요?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하셨지요.

 

누가복음 18장을 봅시다.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지금 이 비유를 왜? 하는지를~!

자기를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을 고발하고자 하는 비유에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무얼 들고 나왔나요?

자기가 행한 일들을 들고 나왔지요.

 

11절을 보세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하지요.

불의 토색 간음 하는 자들은 율법대로 살지 않는 자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건 산상보훈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자기들이 한 일을 들고 나온 자들과 똑 같아요.

 

아까 예수님의 산상보훈은 모세의 율법을 재해석을 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모세의 율법은 겉으로 나타나는 죄를 지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보훈은 인간의 실존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살인하지 않으면 죄 안 지었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거나 욕하는 자는 살인자라고 규정합니다.

 

모세는 도적질 하지 않았으면 죄를 안 지었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탐심이 있으면 도적질 한 놈으로 간주합니다.

 

모세는 간음을 행하지 않으면 죄를 안 지었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음욕을 품으면 간음 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합니다.

 

미움이니 탐심이니 음욕과 같은 것들은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건 우리 인간들이 억제하거나 조정 할 수가 없어요.

난 이런 짓을 안 할 거야! 라고 다짐을 하고 각오를 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실제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행동으로 실행을 했느냐 안 했느냐 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은 인간의 실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에 내재(內在) 되어 있으면 언제든지 나올 수가 있어요.

환경만 조성 되면 언제든지 안에 있는 것들이 저벅저벅 걸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인간이에요.

 

죄성은 우리의 각오와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이고 우리와 동의하지 않고 터져 나오는 본성들이에요.

지금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이런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살인자이고 도적놈이고 간음한 자이고 거짓 증거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자체를 죄 덩어리로 규정해요.

그래서 죄인인 것입니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그 모든 것은 죄가 되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행동에서 죄다 아니다 나누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선 악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착하다고 한 것도 죄이고 악하다고 한 것도 죄에요.

하나님 앞에는 자기가 한 일을 들고 나오면 안 되어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한 것을 의지하는 것이 죄가 되어요.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가 나와야지,

주여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왔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되어요.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세요.

지금 주여! 주여 하면서 자기가 한 일들을 자랑하는 자들은 제사로 나아오는 자들이에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나요.

 

그럼 하나님 앞에 죄 아닌 것이 뭔가요?

 

그건 예수 믿는 것이에요.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죄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이 뭐냐?예수 안 믿는 거에요.

 

죄가 뭐냐?

예수 안 믿는 거에요.

 

천국에 누가 간다고 했나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했지요.

 

아버지의 뜻이 뭔가요?예수 믿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 하면서 자기 행함을 들고 나온 자들을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은 예수를 믿은 자들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자기 영광을 구한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으로 나 이런 일을 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이러한 일을 하면서 자기 영광을 챙긴 자들이에요.

 

선지자 노릇 하면서 영광을 받았고!

귀신 쫓아내면서 영광을 받았고!

권능을 행하면서 영광을 받았어요.

 

이걸 앞에서는 양의 탈을 쓴 이리 라고 했어요.

이리가 양의 탈을 쓴 것은 양을 통하여서 자기 유익을 얻고자 함이에요.

그러니 양의 탈을 쓰고 이리 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사과나무에서 무화과를 맺었고 무화과나무에서 가시를 맺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사기에요.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맺히고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어요.

양에게는 양이 나오지 이리가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는 양인데 이리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이름 팔아서 장사 한 놈들이에요.

요즘 말로 목사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밥 빌어먹는 자들이에요.

더 나아가 복음 이용하여서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 안 믿어도 선지자 노릇 할 수가 있어요.

이 시대 선지자는 복음 전하는 자를 말해요.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 안 믿어도 복음 전할 수가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아니~ 주여! 주여 하면서 선지자 노릇을 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하면서 지옥으로 가라고 하잖아요.

그럼 지옥 갈 놈들도 복음 전할 수 있다는 말이 되잖아요.

선지자 노릇이 이 시대로 말하면 복음 전하는 것이라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늘 목사를 믿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한다고 해서 다 주의 종이 아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삯군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복음으로 왕 노릇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예수 안 믿어도 각종 은사를 행할 수가 있어요.

이건 제가 개런티 할 수 있어요.

제가 과거에 그랬어요.

 

그 느낌 아니까~

잘 알 수 있어요!~

 

그러므로 그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능력을 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서 열매로 나무를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 7:15-20=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 말씀을 하시고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어요.

그럼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거짓 선지자란 말이지요.

양의 옷을 입고 있는 이리인 것입니다.

 

왜? 양의 옷을 입고 있나요?

이는 양을 잡아먹기 위함입니다.

양처럼 행세해야 양들이 속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혼자 거룩한 척하고 혼자 복음 다 아는 척 하는 자들을 경계하란 말이에요.

이런 자들의 특징이 뭔고 하니 양들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빙자해서 호의호식하면서 왕 노릇하는 자들이에요.

 

복음이 자기가 공부하고 습득해서 알아진 것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복음 아는 것으로 자기 잘남을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마치 자기만 복음 다 아는 척 교만해요.

그리하여 사람들을 자기 수하에 붙잡아 두고서 왕 노릇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사람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느냐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 빙자해서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복음에 사로잡혀 자기 부인의 길로 가고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해요.

주의 긍휼을 증거해요.

자기 자랑이 아니라 주의 은혜를 자랑하게 된단 말입니다.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개의치 않아요.

그냥 주께서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살아요.

 

오늘 본문을 보면 부르심이 나오는데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자기 자랑이 없어요.

 

오로지 불러 주신 분의 그 은혜를 자랑해요.

이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에요.

이러한 자들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천국에 누가 가느냐?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이 가요.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불러 주신 분의 은혜가 담겨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법이 나오지 않고 은혜와 긍휼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이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증거가 되어요.

 

누구를 분별 할 때 그 사람이 누구를 자랑하느냐를 보세요.

자기 잘남이나 남보다 우월하다는 식으로 자기 자랑이 나온다면 가짜라고 보세요.

비록 천사의 말을 하고 엄청난 비밀을 말 할지라도 그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에요.

 

이런 자들의 특징이 자기만 복음 알고 자기만 복음 전한다고 해요.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삼아서 남을 정죄하고 심판 하는 일을 일삼아요.

법이 나온단 말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요.

이처럼 그 안에 법이 있으면 법을 토해내고 그 안에 은혜가 있으면 은혜를 토해내요.

그가 토해 내는 것이 그의 열매에요.

그러니 그 열매로 그 나무를 분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동일한 복음인데 어떤 이는 은혜를 토해 어떤 이는 법을 토해 내요.

 

복음을 증거하면 특히 창세전 언약을 증거 하다 보면 두 가지 반응들을 접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기뻐하고 어떤 분들은 화를 내는 분들이 있어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로 나누어져 있어요.

이 나눔은 인간의 조건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나누십니다.

이건 이미 창세전에 예정(豫定)되어 있어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드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창조주가 이런 그릇도 만들고 저런 그릇도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토기장이가 자기 뜻대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고 하고 이렇게 일을 하시는 것을 예정론이라고 해요.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는 이미 이 그릇은 어디에 사용 할 것인가를 정하고서 만들어요.

밥 그릇이 필요해서 밥 그릇으로 만들어서 밥을 담는 것입니다.

밥 그릇은 토기장이의 예정에 따라서 만들어졌고 사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에요.

야곱과 에서처럼 태어나기 전에 이미 각자 정해진 길이 있어요.

그리고 세상으로 보내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각자 예정된 대로 다루어 가세요.

이게 예정론이에요.

그럼에도 예정론을 말하면 발끈한단 말이에요.

 

이건 창조를 믿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맘대로 예정해서 누구는 천국에 가고 누구는 지옥 가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자율권을 주어서 선택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이건 인간도 좀 인정해 달라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면 이해를 하겠는데 교회 안에서 이야기를 한단 말입니다.

자칭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예정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안에도 두 부류의 신자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창세전 언약을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로 나누이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믿는 자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언약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는데,

믿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의 결과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고집을 해요.

결국 은혜이냐 행위이냐 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것을 분명하게 답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토기장이가 되셔서 ‘진노의 그릇’‘긍휼의 그릇’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건 이미 끝났어요.

후천적으로 우리의 조건에 의하여 긍휼의 그릇이 진노의 그릇으로 변하고 진노의 그릇이 긍휼의 그릇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에요.

창세전에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어져서 보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릇은 인간을 말합니다.

그럼 두 인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두 인간을 하나님이 만드셨어요.

 

토기장이가 긍휼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면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이 되고,

토기장이가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었으면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이 됩니다.

토기장이가 긍휼의 그릇에게는 긍휼을 담고 진노의 그릇에게는 진노를 담아요.

 

모든 인간은 겉 보기에는 다 똑 같아요.

하지만 하나님은 두 종류의 인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밖에 있는 자로 나눕니다.

즉 신자와 불 신자로 나누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양쪽에 두 강도가 함께 매 달려 있습니다.

두 강도는 모든 인간을 상징해요.

그런데 한 쪽 강도는 천국으로 갔고 한 쪽 강도는 지옥으로 갔어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이는 예수님이 이들을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의 주인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는 천국으로 보내고 하나는 지옥으로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들을 분리수거 하러 오셨어요.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갈라내고자 오셨어요.

이게 창세기 1장에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는 것으로 보여 주셨어요.

 

둘 다 강도입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둘 다 아담 안에서 난 죄인이므로 저주 받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예수님이 끼어듭니다.

예수님이 한 강도에게 오늘 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라는 허락을 하십니다.

다른 강도에게는 허락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에 의하여 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강도는 구원 받기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예수님이 너는 이쪽으로 너는 저쪽으로 갈라놓으신 것뿐이에요.

한 강도에겐 긍휼을 베풀었고, 한 강도에게는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였어요.

긍휼을 베풀고 긍휼을 베풀지 않고는 예수님 마음입니다.

강도에게 구원의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아요.

우리도 강도에요.

그런데 긍휼을 입었어요.

부르심을 입었어요.

 

우리의 조건에 의하여 구원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된 것이에요.

부르심으로 된 것을 아는 자는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아요.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난 강도였는데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감사하면서 살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강도에요.

다만 긍휼을 입은 강도에요.

그래서 긍휼을 입은 강도로 그 긍휼에 감사하고 살 뿐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천사로 변화되는 게 아니에요.

착각하지 마세요.

 

세상에는 두 강도가 있어요.

부르심으로 구원 받은 강도와 구원 받지 못한 강도가 있어요.

우린 누가 구원 받을 자이고 누가 저주 받을 자인지 모릅니다.

구원과 저주는 오직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십니다.

 

성경을 펴면 우리를 만드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필요를 위하여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토기장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는 긍휼을 보여주는 그릇으로 만들었고, 하나는 진노를 보여주는 그릇으로 만들었습니다.

긍휼의 그릇에게는 계속하여 긍휼을 담는 일을 하시고!

진노의 그릇에게는 계속하여 진노를 담는 일을 하십니다.

 

그릇에 담는 것은 그릇을 만든 주인이 하세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각각의 그릇에 합당한 내용을 담아요.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긍휼의 그릇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긍휼이 덮쳐온 것입니다.

그 긍휼 때문에 죄인이 예수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는 자들은 자신이 긍휼을 받았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노를 받은 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동의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항의 합니다.

자기들은 억울하다고 합니다.

이게 죄에요.

 

왜? 하나는 감사하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억울하다고 합니까?

감사하는 쪽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동의를 하는 것이고!

원망하는 쪽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동의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어찌 되었나요?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하나님이 되었어요.

마귀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했지요.

결국 마귀의 말대로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하나님 같이 심판하는 자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토기장이가 하는 일에 반기(反旗)를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항변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선악과가 몰고 온 죄의 산물이에요.

 

선악과를 먹고 심판하는 자가 되고 보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왜? 진노의 그릇이냐고 토기장이에게 따지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이 시건방진 놈들을 보게! 하면서 그릇을 확~ 깨트려 버립니다.

 

진노의 그릇이 왜? 지옥에 가는 줄 아세요?

진노 받을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오늘 본문에서 부르심으로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이 유대인에게도 있고 이방인에게도 있습니다.

 

이게 중요해요.

특히 유대인들 속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유대인들에겐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들만 선민(選民)이라고 여겼어요.

자기들만 하나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개 같은 자라고 하면서 상종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세가 역전 되었단 말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부르심을 입는 자가 있고 부르심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누가 환영하고 누가 항의 할까요?

당연히 유대인들이지요.

이방인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만 유대인들은 게 거품을 물고 항의 합니다.

이럴 순 없다고 합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으로 특권층으로 살았어요.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깔보고 우습게 여기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그 특권이 날아가게 생겼어요.

그러니 항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항상 복음으로 특권층 노릇을 하고자 하는 자들로 인하여 가려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 때문에 복음이 가려졌어요.

이 사실을 간과하지 마세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잘난 척 하는 자들은 모두가 유대인들이라고 보면 되어요.

이 놈들이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개 같이 취급을 하였듯이 복음 안다는 것으로 복음 모르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고 깔보고 업신여기는 짓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여서 자기들만 특별한 것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특권층을 형성하고 자기와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은 저급한 자들로 취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부르심의 정신에 위배 되어요.

 

부르심의 정신 속에는 자기 잘남이나 자랑이 없어요.

특권층이 없어요.

남을 업신여기거나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삼지 않아요.

남과의 차별성이 없어요.

 

부르심 속에는 자기 가치 챙기는 것이 없어요.

부르심 속에는 내 의(義)가 하나도 없어요.

오로지 긍휼 입음만 있어요.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자랑 할 수가 없고!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잘난 척 할 수가 없고!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남보다 자기가 우등하다고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불러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감읍할 뿐이에요.

 

왜? 구원을 부르심이라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시혜(施惠)의 방법으로 할까요?

이는 천국이 은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창조주의 영광만 존재해요.

그 어떤 피조물의 영광은 존재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피조물의 창조를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창조를 하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려 놓고 스스로 그 그림에 도취하여 기뻐하는 것과 같아요.

마치 엄마가 어린 아이를 예쁘게 꾸며 놓고 예쁘다고 흐뭇해하는 것과 같아요.

창세기 창조 기사를 보세요.

 

하나님이 창조 하시고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피조물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홀로 영광이 부르심 속에 담겨져 있어요.

 

부르심을 입은 성도에겐 특징이 있어요.

그게 무엇인가 하면 자기 자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감사만 있어요.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분별 할 때 이 기준으로 하세요.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타나나요.

그러나 부르심을 입지 않고 스스로 온 자들은 자기 자랑이 나타나요.

 

자랑은 자의 의(義)에요.

자기가 뭔가 하였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을 해서 이러한 것을 내어 놓았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이 뭐라고 생각하는가요?

 

신앙생활이란? 글자 그대로 자기가 믿고 바라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성결 구절 많이 안다고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에요.

성경적 지식이 풍부하다고 해서 신앙이 좋은 것도 아니에요.

그건 유익은 될 수가 있어도 본질을 아니에요.

 

성경적 지식이 많고 성경 구절을 많이 아는 것은 형식이에요.

형식은 껍데기에요.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문자라는 껍데기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에요.

문자라는 껍데기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성령께서만 깨닫게 해 주세요.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내용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자유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인위적이거나 억지로 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부르심을 입었는가?

입지 않았는가 알 수 있는 시금석은 간단해요.

믿어지면 부르심을 입은 것이고 안 믿어지면 부르심을 입지 못한 것입니다.

은혜가 나오면 부르심을 입은 자이고 법이 나오면 부르심을 입지 않았어요.

원리와 원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노력과 상관없이 예수가 믿어지고 언약이 믿어지면 부르심을 입은 자에요.

술람미처럼 솔로몬 왕과 하룻밤 동침을 한 경험을 가진 자는 스스로가 왕의 사랑을 알아요.

왕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어요.

그러니 주변에 그 많은 핍박과 조롱과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을 지켜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안에 증거를 가진 자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아요.

자기 주변에 사람이 다 떠나간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아요.

누가 나를 뭐라고 하여도 개의치 않아요.

 

그가 나를 알고 내가 그를 알면 끝이에요.

이걸 온전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필요 없어요.

 

요일 4: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좇아낸다고 하였어요.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유배당하면서 천수를 누린 사람입니다.

그 혹독한 핍박과 고난을 어떻게 이겨냈겠어요.

이는 그 안에 온전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도 술람미처럼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핍박과 멸시와 조롱을 당하면서 살았어요.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주님 약속 안에서 평강하면서 두려움 없이 자유하면서 살았어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러니까 부르심을 입은 성도만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를 살펴봅시다.

 

본문 24절을 보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인 중에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유대인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부르심을 입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이방인이라고 해서 부르심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는 곧 인간의 혈통이나 조건에 의하여 부르심이 결정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어떻게 부르심을 입느냐?

그건 부르시는 이에게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오야(주인) 마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말이죠.

하나님이라고 해서 즉흥적으로 맘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들과 세운 언약을 근거로 하세요.

그 언약 속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부르심이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이방인 중에서도 긍휼의 그릇이 되고!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으면 비록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여도 진노의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불러 달라고 청탁하지 않았어요.

뇌물을 바치지 않았어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부르심을 입었어요.

받기만 했어요.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 같이 여겼어요.

그런데 예수가 오셔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을 무너지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인종과 혈통의 벽이 무너지고 오직 부르심만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이 유대인보다 이방인의 수가 훨씬 많았어요.

그런데 이러한 일에 분개 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혈통적 이스라엘을 외치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부르심을 입지 못한 진노의 그릇들인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속에서 강퍅이 나오고 시기와 질투가 나온 것입니다.

 

반면에 부르심을 입은 이방인들은 자신은 부르심을 입을 하등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신앙생활의 모든 면에서 은혜를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감사와 찬송 밖에 없었어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바울은 부르심을 이야기 하면서 호세아의 글을 인용합니다.

이는 호세아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 그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이야기가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란 말입니다.

 

호세아 1장을 봅시다.

 

호 1:1-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3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6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8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 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명을 내립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인인 고멜과 혼인을 하라고 합니다.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을 받잡고 고멜과 결혼을 합니다.

 

호세아는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를 상징하고 고멜은 유대인을 상징해요.

유대인이 고멜과 같이 음란한 여자란 말입니다.

이러한 곳에 예수님 오셨어요.

이를 호세아가 고멜에게 장가든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을 통해서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을 해 내실 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호세아와 고멜을 봅시다.

호세아가 고멜에게 장가를 가서 자식을 낳았어요.

 

첫째는 아들을 낳았어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 이라는 지으라고 합니다.

“이스르엘” 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왕조를 심판하겠다” 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둘째는 딸을 낳았어요.

그 이름을 “로루하마” 라고 합니다.

이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음란한 여자가 낳은 자식은 자식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로암미” 라고 합니다.

이는 “내 백성이 아니라” 라는 뜻입니다.

 

전부가 부정당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요.

이는 호세아 당시의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죄를 범하므로 긍휼을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가 되고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심판당하고 버림당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심판 당하는가요?

법통으로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는 자들이에요.

즉 혈통으로 나는 이스라엘 자손이다 라고 하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바다의 모래같이 중 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산을 해 낸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산하는가 하면 부르심으로 한다고 합니다.

너 내 백성 해 라는 식으로 한다고 합니다.

이 때가 언제인가 하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는 때라고 합니다.

한 왕이 와서 갈라진 둘을 하나로 통일을 이룬다고 합니다.

 

남쪽 유다는 유대인을 상징하고 북쪽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상징해요.

그런데 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한 지도자는 예수님을 말해요.

이렇게 예수에 의해서 나아진 자들을 “암미”라고 하고 “루하마”라고 부르게 된다고 합니다.

 

“암미”란? 내 백성이란 말이고!

“루하마”란? 불쌍히 여김을 받은 딸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전에는 긍휼을 입지 못하던 자들이 긍휼을 입게 된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긍휼을 입지 못한 자들이 누구인가요?

이방인이에요.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게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허물었어요.

이제는 혈통적 이스라엘이 사라졌어요.

오로지 부르심을 입은 이스라엘만 있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이스라엘에게는 긍휼이 담겨져 있어요.

 

이들이 신약의 성도인 “암미”이고 “루하마”에요.

“암미”와 “루하마” 속에는 긍휼이 담겨져 있어요.

부르심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흔적이 있어요.

은혜성입니다.

 

혈통 속에는 긍휼이 없어요.

이는 하나님은 인간의 법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긍휼로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긍휼 속에는 인간의 조건이 없어요.

그러니 긍휼로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는 자기 자랑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적 유대인들을 모두 심판했어요.

전부 버렸어요.

그리고는 성령으로 오셔서 영적 유대인으로 다시 살려내십니다.

 

살려냄을 당한 자들에게는 버려짐의 심판과 되찾음의 은혜가 담겨져 있어요.

이는 법 아래 있는 자를 죽이고 은혜로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되찾음을 입은 자들에겐 긍휼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걸 로마서 11장에서 감람나무의 접붙임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롬 11:11-25=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 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 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 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바울은 지금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 중에서 긍휼을 입은 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이스라엘 중에서 넘어진 자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완악한 자들을 얼마를 잘라냈다고 합니다.

왜? 잘라냈는가 하면 하나님의 긍휼에 거하지 않고 법 아래 거하였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잘난 척 했다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잘난 척 하는 자들을 잘라내고 못난 이방인들을 그 자리에 접붙임을 하였다고 합니다.

 

접붙임을 당한 자들은 긍휼로 접붙임을 당하였어요.

그러니 너희도 꼴값을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꼴값을 떨면 먼저 꼴값을 떨다가 잘려 나간 자들처럼 잘려 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너희가 잘려 나간 그 자리에 잘려 나간 자들을 다시 접붙임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접붙임을 당한 자들에게는 긍휼로 접붙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다시는 꼴값을 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감람나무에 붙어 있을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긍휼을 입은 자들 뿐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자식들만 남기겠다는 말입니다.

 

감람나무가 바로 긍휼의 나무에요.

긍휼의 감람나무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모두가 부르심을 입은 긍휼의 그릇들인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누가 예수 안에 거하는 자인가?

긍휼을 보이는 자에요.

 

나무의 가지를 뿌리가 보존하고!

뿌리가 가지에게 진액을 공급해서 열매를 맺게 하듯이~!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성도는 예수라는 뿌리에서 진액을 공급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데!

이렇게 맺어지는 열매는 모두가 뿌리의 진액인 긍휼을 담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나무의 뿌리에서 공급하는 진액은 긍휼이에요.

은혜에요.

그러므로 진실로 예수에게 붙어 있는 성도는 자기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복음 안다고 꼴값 떨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왜? 그리 복음 안다고 하면서 꼴값을 떠는 자들이 많은지 몰라요.

복음 아는 것으로 특권층이 되어서 자기들만 복음 안다고 하면서 남을 무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어요.

 

이건 자신들이 긍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에요.

아마도 로마서 11장의 감람나무 접붙임의 비유가 응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방인의 때가 찬 모양입니다.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워 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을 입은 이방인들 중에서 꼴값을 떠는 자들이 일어나는가 봅니다.

 

바울은 때가 되면 이방인 중에서 꼴값 떠는 자들이 일어난다고 했어요.

그럼 하나님은 꼴값을 떠는 이방인들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예전에 유대인 중에서 꼴값을 떨다가 잘려 나간 자들을 다시 긍휼로 접붙임을 한다고 했어요.

이 시대 육적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자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의 징조로 볼 수가 있어요.

 

이 모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요?

부르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부르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부르심으로 주어진 구원에서 잘라 낼 수가 없어요.

부르심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담대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부르심을 입은 자가 어찌 잘난 척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눈을 열어서 내 주제를 알게 하옵소서. 그리고 내가 지금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사나 죽으나 부하거나 빈하거나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구원의 즐거움으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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