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땅 그리고 하나님 나라
(야베스의 기도 설명)
(김성수 목사)
(창 12:1‐3)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주에 아브라함의 일생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서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우리 교회가 어떠한 지경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어 어떠한 여정(旅程)을 통과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 하나님 나라인 영적 가나안에 입성을 하게 되는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성도의 믿음의 여정에 관해 공부를 하면서 지금의 우리의 모습 속에서 보여 지는 불가능함과 미성숙함과 여전한 더러움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오히려 그러한 우리의 불가능함 속에서 홀로 열심히 당신의 일을 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발견함으로 인해 우리의 소망을 더욱 굳건하게 다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내용들과 아브라함의 결국(結局)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언약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 확실하게 확인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당신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어딘지는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땅과 민족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국가의 삼 요소(要所) : 국민, 주권(主權), 영토)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을 통해 땅과 민족, 즉 하나님이 통치하시는(주권) 어떠한 나라를 이루실 것임을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다음 장인 창세기 13장으로 가면 하나님의 약속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창 13:14‐17) “14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15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16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17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여기보시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셔서 이끌고 계신 당신의 백성의 대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땅을 주시마하고 약속을 하십니다. 역시 그를 통해 이루실 어떤 나라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영토에 관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국민에 관한 약속이지요? 그리고 창세기 17장 4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과 창세기 22장 16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에도 역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게 되는 민족과 나라에 대한 약속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민족을 약속하셨고 히브리서 기자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업으로 가나안 땅을 주셨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5장 7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말년에 아브라함이 소유한 가나안 땅은 자신과 가족의 무덤인 막벨라 굴 하나였고 자손도 이삭 하나를 남기고 죽었습니다. 물론 첩들의 자식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들이 아니었으니까요. 땅과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듯 보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에게 지키지도 못할 거짓 약속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똑같은 약속을 하십니다.
(창 26:2~4)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3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똑같이 땅과 민족을 약속하십니다. 야곱은 어떤가요?
(창 28:14~15)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역시 똑같은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도 자식이 둘 밖에 없었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묻힌 헤브론의 한 평(坪) 땅에 묻혔으며 야곱은 그나마 기근 때문에 가나안 땅을 떠나 정처(定處) 없는 나그네가 되어 아들이 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피신을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역시 그들의 인생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은 어떤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기를 그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지요?
(창 17:8)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직접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출 6:7~8)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정말 영원한 기업으로 받았습니까? 가나안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BC722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하고 BC586년에 남 유대가 바벨론에게 망한 후에 1948년 이스라엘 건국까지 그들은 가나안 땅을 블레셋의 후예인 팔레스타인(블레셋의 땅) 사람들에게 내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어떤 땅과 백성을 약속하시는 것입니까? 보시다시피 하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그 가나안 땅도 그들에게 영원히 주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자체를 전 세계로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한 가나안 땅은 이 세상 땅이 아니라 어떤 다른 땅을 상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시고 잠깐 그들에게 그 땅을 주심으로 그 가나안 땅이 상징하고 있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것임을 설명하시고 그들을 다시 그 땅에서 쫓아내시든지 그 땅을 빼앗든지 하심으로 하나님이 진짜 주시고자 하는 땅이 그 가나안 땅이 아니라 다른 땅임을 주지(周知)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시편으로 가시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그 기업으로서의 땅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약속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 37:9‐11,29,34) “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29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34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잘 보시면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들과 온유한 자들, 그리고 의인들, 그리고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는 자들에게 땅이 약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은 악인이 없는 땅이랍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영원한 기업의 땅이 어디라는 말입니까?
(벧후 3:13)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계 21:1)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의 대표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기업의 땅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천국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설명하시는 산상(山上) 수훈(垂訓)에서 시편 37편 말씀을 인용하여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이 된 기업, 땅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이루는 이들이 바로 성도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큰 민족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워하는 우리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하나님 나라를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주어지는 하늘의 풍성함이, 다른 말로 우리 성도 안에서 풍성하게 열매 맺어지는 하나님의 성품을 비롯한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구약에서 그림자요 예표로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복(福)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신명기 28장의 몇 구절을 함께 보시지요.
(신 28:8~11) “8 ○주께서 명하셔서, 너희의 창고와 너희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이 넘치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9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 길로만 걸으면, 주께서는 너희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희를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실 것이다. 10 이 땅의 모든 백성이, 주께서 너희를 택하셔서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보고, 너희를 두려워할 것이다. 11 주께서는,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너희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이 땅에서, 너희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땅의 소출이 풍성하도록 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복들이 총 망라(網羅)되어 있는 장이 바로 신명기 28장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떡 반죽 그릇까지도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이 주어지고 있는데 보시다시피 그 복은 하나님께서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만 유효합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나타나는 물질의 복이나, 자식을 많이 낳는 복이나, 땅을 많이 갖게 되는 복이나, 장수(長壽)의 복 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상징하는 예표(豫表)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뼘의 무덤밖에 안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수신자인 우리 교회에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성도들아, 내가 아브라함 안에 있던 너희들에게 약속한 것은 이 세상의 땅이나 이 세상의 복들이 아니라 하늘의 땅이며 하늘의 복이란다.’하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자신의 땅을 넓혀 달라는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은 역대상에 나오는 야베스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대상 4:9‐10) “9 ○야베스는 그의 형제들보다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렀다.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고, 나의 영토를 넓혀 주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
여기 보시면 야베스라는 사람이 자기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고 자신의 지경(地境)을 넓혀달라는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았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 이 세상에서도 당신의 백성들에게 복으로, 기업으로 땅을 주시는가?
역대기서는 열왕기서와 함께 이스라엘의 역사서로 불리 우는 책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서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대의 역사를 공히 기록한 것에 반해서 역대기서는 남 유대의 역사만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는 짓을 보면 북 이스라엘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남 유대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속에 들어 있는 다윗 왕국의 맥이 이어지고 있는 나라이기에 하나님의 지키심 아래 존속되고 있는 언약의 나라의 이야기가 적혀있는 책이 바로 역대기서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대기서의 주제는 ‘여호와의 언약 속에 들어있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읽은 역대기 본문에 유다의 후손들의 족보가 죽 나열되는 것입니다. 그 후손들의 명단에 야베스라는 사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으로 하여금 유다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을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의 언약이 유다의 왕들과 유다 백성들의 행위를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여전히 불가능하고 패역하지만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역대기서입니다.
바로 그 유다의 족보 중에 ‘야베스’라는 사람이 갑자기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야베스는 세간에 알려지기를 ‘복에 복을 더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실제로 그 기도응답을 받은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경험상 성경이 갑자기 문맥과 전혀 상관없는 그런 내용을 삽입해서 ‘열심히 간구 하면 복 준다, 존귀한 자가 되면 복 준다.’ 이런 이야기하는 책이 맞습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로 말미암게 될 구원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전개하는 과정 속에서 등장하는 뜬금없는 야베스의 이야기는 역시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요?
9절을 보시면 성경이 야베스는 존귀한 자라고 칭한 후에 그가 존귀한 자로 칭해지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수고로이 낳았다‘는 이유 한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는 존귀한 자가 되었고 그는 그러한 존귀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지경의 풍성함이라는 기도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절대 야베스가 다른 사람보다 열심을 더 부려서, 더 부르짖어서 존귀한 자가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의 기도의 내용을 한번 볼까요?
10절 보시면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우리가 좋아하는 내용은 다 들어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야베스의 기도를 그렇게 좋아하나 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복에 복을’ ‘바라크, 바라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필연(必然)적 강조 용법입니다. 이 필연적 강조 용법이 처음 나온 곳이 창세기 2장 17절입니다.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무트 타무트’ 이게 바로 ‘죽음 그리고 죽음‘이라는 필연적 강조용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고 죽어야만 했던 자들 중 어떤 자들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다시 필연적 강조 용법을 써서 ’복에 복을 주리라‘라고 은혜의 언약을 하신 부분이 같은 창세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창세기 2장 17절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구절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 3절을 비롯한 아브라함의 언약에 정확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세요.
(창 12:3)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 구절 말미의 복이라고 번역이 된 ‘바라크, 바라크’가 바로 역대 상 4장에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의 내용 ‘복에 복을’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야베스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과 복은 어떤 복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지요? 야베스는 바로 그 땅과 그 복을 구한 사람인 것입니다. 지경이라고 번역이 된 ‘게불’이라는 단어는 ‘영토’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넓히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 ‘라바’는 ‘풍성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풍성한 땅,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땅이며 지경인 내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것들로 풍성하게 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야베스의 기도는 복에 복이 넘치는 그 풍성한 하나님 나라가 내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기를 고대하는 기도인 것이지 이 땅에서의 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럼 이 야베스와 우리 성도들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야베스는 어떤 사람이었다고요? 어머니가 수고로이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존귀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 내용을 잘 연결해 보세요. 이 야베스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수고로이 낳은 존귀한 자식들인 성도들의 기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의 복을 구하고 추구하는 자들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시고 완성하신다는 구속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수고로이 태어나게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의 자격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 안에서 구하는 모든 것,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모든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야베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반드시 풍성한 하늘의 것들을 발산해 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해 내실 것이니까요.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눅 11:8~14)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렇게 이 야베스나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아브라함이나 모두 이 땅에서 ‘하늘의 풍성한 것’을 복으로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늘의 풍성한 것들이 죄인들에게 부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죄(罪)의 문제와 의(義)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하는데 그 해결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모든 내용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복의 내용들이 구약에서 완전하게 주어지지 않는 듯 보이는 것입니다. 그 모든 복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눅 24:44) “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보세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 다시 말해 구약 성경은 모두 예수님에 관해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구약은 여러 가지 그림들과 사건들과 인물들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으로 말미암게 될 하늘의 풍요인 영생, 즉 구원을 설명하고 있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히 10:1) “1 율법은 장차 나타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실체가 아니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드리는 똑같은 희생제사로써는 하나님께로 나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제사가 참 형상이 아니라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하지요?
(골 2:16~17) “16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17 이런 것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에 관한 규례나 절기, 월삭, 안식일 등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이 되는 그림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히 9:24)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성전 또한 참 것이 아니라 참 것의 그림자였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모든 것들은 참 것인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이 나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는 것들인 것입니다. 아니 성경은 오히려 신약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 구약 자체만을 가리켜 죽음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고후 3:6) “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모든 율법과 제사 제도와 성전과 할례 등을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 5:17)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잘 보세요. 구약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는 것이지 그 자체가 결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구약 자체만으로는 미완성품이라는 말이지요.
(롬 3:20)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나의 요구를 다 지킬 수 없으므로 나의 요구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숨어라’를 가르치는 몽학(蒙學)선생이었던 것입니다. 구약 전체는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유대인들이 할례(割禮)를 받아서 구원을 얻었나요? 아닙니다. 할례는 당시에 유대인들만의 관습이 아니라 고대(古代) 근동(近東)의 모든 민족들이 할례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시에 모든 민족들에게 편만(遍滿)하게 퍼져있던 할례라는 것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쪼개짐으로 인한 구원을 상징으로 담으셨던 것입니다. 생식기의 표피를 자른다는 것은 생식기(生殖器)를 절단한다는 의미가 있었고 생식기를 절단한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참 생명이 탄생할 수 없음을 메시지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온 몸에 할례 당하심으로 새 생명들이 줄줄이 탄생하게 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는 어때요? 성막과 성전은 어떻습니까? 모두 참 제사장이요 참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이지요? 안식일은요?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참된 안식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참 안식이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 했으니까요. 십일조는 어때요? 십일조의 대표적인 용도는 레위 지파의 생활비입니다. 레위지파는 하나님께서 유월절에 살려내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들의 대표로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하나님의 것, 곧 제물(祭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져야 할 자들이 자기들 대신에 속전(贖錢)을 지불하고 다른 자들(레위인)이 하나님께 바쳐지고 자기들은 살아나게 되는 형국(形局)이 그 십일조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속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바쳐져서 제물로 찢겨야 할 우리들 대신에 하나님께 속전으로 바쳐지신 분이 있지요?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목숨의 값(출 21:32)인 은 삼십 냥에 팔려 하나님의 장자들 대신에 속전으로 치러지신 예수님이 바로 십일조의 원형(原形)이었던 것입니다.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은 어떻게 해결되었나요? 홀로 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 되심으로 부정한 것들이 살아나는 십자가가 그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바다가재나 새우나 게 등을 마음 놓고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모든 내용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제시되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땅이나 재물이나 자식과 같은 복들은 어떨까요?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이 되는 상징들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직 참 것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되는 하늘의 풍요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세상 사람들이 복의 대명사처럼 여겼던 땅과 재물과 자식들의 확장과 번성으로 하늘의 복을 모형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의 눈에 보이는 풍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 된 하늘의 풍요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풍요는 성령의 강림(降臨)과 내주(內住)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인식이 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성령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주하게 된 신약 시대 이후로는 눈에 보이는 구약의 영광과 복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참 것이 왔기 때문에 이제 그림자와 예표와 모형들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역자 주)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며 안식일을 목숨 걸고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부정한 것이라고 구별되었던 음식들도 마음 놓고 먹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유독 구약의 ‘복’만 신약 시대 이후로도 계속 유효(有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제사와 할례와 안식일과 성전은 모두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되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복만은 여전히 구약의 모형들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복은 하늘의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가시적인 복들은 단지 영적인 복을 상징하는 것들이었을 뿐입니다. 제사를 잘 지내고 율법을 잘 지켰을 때 주어지는 이 땅의 복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지킴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질 하늘의 복인 영생을 상징하는 그림자였을 뿐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는 ‘믿음’이라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여야 하는, 구약과는 정 반대의 삶이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참 것이 오시기 전인 구약에서 재물이나 땅이나 자손이나 건강 등의 보이는 것으로 설명이 되었던 그 하늘의 풍요가 이제는 성령을 통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일련의 무리가 보이지 않음 속에서 보임을 삶으로 증거 하는 것으로 설명이 되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아무리 여러분이 종교행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 보답으로 재물이나 땅이나 자손의 풍성함이나 건강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주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이해한 믿음의 사람들인 것이니까요.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고 할례를 받음으로 재물과 땅과 자손과 건강이 주어지는 시대는 그림자요 예표의 시대인 구약 시대의 것들입니다.
제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제 말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종교 행위의 보상으로 주시는 세상의 힘과 세상의 복 같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바울이나 요한 같은 사도들이 여전히 구약의 율법을 강조하며 가르치던 자들을 향해 거짓선지자, 적그리스도라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거짓 선지자들과 적그리스도들이 예수님을 전하지 않았을 것 같으세요? 그들은 분명 예수님을 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던 사람들이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지자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는 했지만 거기에다가 구약을 보탠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이 땅의 것으로 복을 받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는 했지만 그 분이 구약의 결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거짓 선지자요, 적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예수의 이름만 부르던 마귀들이었던 것입니다.
(계 20:10) “10 그들을 미혹하던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로 던져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복음에 구약에서 제사를 잘 지내고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에게 예표로 주어졌던 이 세상의 복을 보태는 자들은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거짓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십일조 잘하면 복 받는다, 주일 성수 잘하면 복 받는다, 전도 많이 하면 복 받는다, 건축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 이런 말씀 많이들 들어 보셨지요? 그게 다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인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자기 무덤 한 평(坪) 소유하고 떠났다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힘으로 행복해 하며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을 참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때로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세상의 힘들을 오히려 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목발 빼앗기는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지는, 야베스의 표현대로 하면 지경이 넓어지는 복을 받은 것이지 이 세상의 복을 받은 사람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 참 복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자기백성들을 향한 힘 빼기’의 과정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과 만족에 이르기 위해 만들어 놓은 모든 문명과 세상의 힘들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자로 서서 그 하나님만으로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안식을 느끼는 자로 회복되는 과정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TV나 인터넷이나 집이나 재산이나 자동차나 취미 생활 등의 문명의 옷을 모두 벗고 에덴동산의 선악과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그 상태에서 행복하실 수 있으세요?
하나님은 분명 그 상태를 가리켜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그 상태에서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으로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다른 행복을 구하다가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바로 그 에덴의 선악과 앞으로 끌고 가신 것입니다. 그게 모리아 산이며 아브라함은 그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함으로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두 번째 아담의 모습을 예표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의 문명과 힘을 모두 벗은 자로서 하나님만으로 행복했다는 것을 한 평 무덤으로 증거하고 간 것입니다. 여러분도 바로 그 자리에 서야 하는 분들인 것입니다. 엉뚱한 거짓 선지자들의 속임수에 속지 마시고 정녕 구해야 할 것들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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