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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종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8. 6.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종

 

(김성수 목사)

 

 

(롬1:1, 20-23)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 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오늘은 로마서 1장 1절의 바울이라는 이름과 그의 신분을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는 종이라는 단어의 개념에 대해 20절부터 23절까지의 내용과 연결을 하여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연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읽으신 구절을 잘 보면 자연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즉 하나님의 영광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고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으며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 둘의 상관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바울의 진술에 의하면 자연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자연의 실체에 대해 포착을 하지 못하고 그 자연은 오히려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일까? 우선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은 자연을 온전히 인식하거나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 하게 드러나고 있지요? 그렇게 인간이 포착할 수 없는 모호한 영역을 ‘카오스(혼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포착되어 ‘자연’이라고 정의된 그 제한되고 부분적인 자연을 ‘코스모스(질서, 우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진짜 자연 안에서, 그 자연에 장악되어 살고 있습니다. 쉬운 말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장악되어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자연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가 된 것이며 그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것이고, 그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임을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인간은 자연에 장악되어 살고 있기에 자기들이 정의해 놓은 자연 밖의 다른 현상을 감지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한된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 자기들이 정의해 놓은 제한된 자연 밖의 진짜 자연을 감지하게 될 때 그들은 그것을 혼돈, 카오스로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 혼돈은 변화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변화와 혼돈이 감지가 되면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합리화하여 굳히려고 합니다. 그것을 인간들은 ‘이성’ 혹은 ‘깨우침’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시도가 선악과를 따먹은 작은 신들의 ‘나’라는 우상 만들기 작업인 것입니다. 조금 어렵지만 잘 들어보세요.

 

인간이 온전히 감지할 수 없고, 온전히 정의할 수도 없는 자연, ‘카오스(혼돈)’를 어떻게 정의를 합니까? 자신들의 제한된 이성에게 포착되고 인식이 된 몇 가지 법칙이나 현상을 눈에 보이는 실험을 거쳐서 형식화하고 합리화 해 버리는 방식으로 자연을 정의 합니다. 예를 들어 사과는 항상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현상과 해는 항상 동에서 떠서 서로 진다는 현상 등을 포착하게 된 인간은 실험이라는 것을 거쳐서 만류인력과 자전과 공전이라는 ‘자연’을 정의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들의 실험, 즉 눈에 보이는 형식과 합리성으로 자연을 정의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정의 할 때 어떻게 정의를 할까요? 당연히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해, 그리고 나타나는 행위에 의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하게 되겠지요? 그건 조금 있다가 살펴보기로 하고, 이렇게 인간은 자연을, 오늘 본문의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만물을 형식화하고 합리화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이것이 자연이다’라고 정의를 합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자연은 인간이 온전히 포착하거나 감지할 수 없는 ‘카오스’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엄청난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정의한 자연 밖의 진짜 자연이 인간들에게 감지가 되면 인간들은 곧 수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재 형식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자기들 스스로 이 역사와 우주의 주체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들의 가치를 스스로 챙겨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우주조차 자신들에 의해 규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형식화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의 형식화 자아의 형식화. 그렇게 자기들의 지혜와 이성과 깨달음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형식화된 자연과 자아를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는 그 행위가 바로 인간의 우상 만들기의 패턴인 것입니다.

 

제가 그러한 인간들의 형식화에 대한 집념을 쉽게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 예배당에 앉아 계신 여성분들은 모두 다 깨끗하고 아름답고 정리가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 남자들이 생각하기에 이런 외모와 부지런함을 가진 여성들은 자기가 사는 집이나 방도 아주 깨끗하고 정갈할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있는 여자들의 행태를 보아서 아시겠지만 그 여자들이 밖에서 보여 지는 그 깔끔함과 아름다움과 정갈함이 집에서도 이어지지는 않지요? 왜 그럴까요? 아니 바꾸어서 질문을 해 볼까요? 왜 여자들이 자기 집이나 부엌이나 자기 방과 같은 헝클어지고 정리 안 된 모습으로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요? 그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의 자기규정이라는 것입니다. 신이 되어버린 ‘나’는 혼돈 속에서 형식화의 과정을 거쳐 ‘나’라는 가치 있는 존재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보여 지는 ‘나’는 항상 정리 정돈이 되어 있고, 형식화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자기의 가치와 영광과 안위를 챙겨야 하는 인간의 안타까운 현실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나’가 규정한 것이 진리여야 하고, ‘나’라는 존재가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80먹은 할머니도 ‘나’가 노출이 되는 상황에서는 좋은 옷을 입고 깨끗하게 머리도 빗고, 화장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러한 형식화의 노력은 숫자에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사과가 한 개가 있습니다. 그것을 숫자로 표현해 보세요. 1입니다. 사과가 두 개가 있습니다. 그것을 숫자로 표현해 보세요. 2입니다. 그렇다면 0은 뭡니까? 없음입니다. 왜 없음은 가리킬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없음에다가 0이라는 숫자를 붙였을까요? 신이 되어버린 인간은 혼돈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없음에다가도 0이라는 기호를 붙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들의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인간에게 온전히 포착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형식화되어 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되어 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역사라는 가시적 영역 속에서 보이는 자연이 형식화에 붙들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형식화의 노력은 인간의 자아를 형성하고 규정하는 데에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인간들은 ‘나’라는 자아를 규정할 때 눈에 보이는 어떤 것들을 모아서 ‘나’를 규정합니다. 그게 경험이고 체험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과거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말하기를 ‘인간은 느낀다는 감성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오성에 의해서 자신의 과거 체험을 정리정돈 함으로써 새로운 자아, 즉 주체가 형성이 된다’라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이성 속에 남아있는 과거를 규합하여 ‘자아’를 규정합니다. 그러한 과거의 경험과 체험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지요? 행위입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어떤 행위를 하고 어떠한 변화와 발전이 있었는가를 가지고, 그 창이에 의해 ‘난 잘난 자, 난 못난 자, 난 성공한 자, 난 실패한 자’등의 판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잘나고 성공한 자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자신이 잘 나 보이고, 성공한 자가 되기 위한 행위를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신을 스스로 기특해 하고 칭찬해 줍니다. 그것이 인간 자아의 형식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카오스라는 혼돈 속에서 살고 있는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늘 변화에 노출이 됩니다. 애써서 자신을 형식화 해 놓았는데 외부에서 변화가 주어지게 되면 인간은 곧 자신의 행위수정에 들어갑니다. 그것을 메타(meta)형식이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신자의 행위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사람은 곧 신자라는 자아 규정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오랫동안 형식화의 삶을 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자 됨을 자신의 행위에서 찾게 됩니다. 인간의 자아는 과거의 규합으로 정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심을 합니다. ‘난 적어도 하루에 성경 5장은 읽을 거야, 그리고 2시간 씩 기도할거야, 왜? 난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에게는 그 결심과 행위가 ‘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규정된 ‘나’가 아주 자랑스럽고 기특하게 여겨집니다. 그게 바로 형식화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규정이 된 ‘나’에게 변화가 찾아옵니다. 한동안 자영업을 하던 ‘나’가 사업의 실패로 직장인이 되어서 새벽부터 직장에 나가 육체적 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하루에 성경 다섯 장을 읽고 두 시간씩 기도하는 일에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곧 형식화 된 그 자아의 수정에 들어갑니다. ‘지금의 내 상황에서의 최선은 성경 읽기를 하루에 두 장으로 줄이고 기도도 하루 30분으로 줄이는 것이다, 그것도 나의 처지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이러한 수정에 의해 그 사람은 여전히 자신을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멋진 사람’으로 규정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메타(meta)형식인데, 그렇게 형식화 되어 버린 자신에게 닥친 변화와 혼돈에 수정을 가해 여전히 기특하고 훌륭하고 멋진 나를 챙기는 재 형식화, 즉 메타 형식을 가리켜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우상을 형성하는 과정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진 인간이 자신이 포착할 수 없는 혼돈에다가 자기들의 이성과 지혜와 깨달음을 근거로 하여 규칙을 집어넣어 질서를 만드는 그 자체가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나’라는 국가로 귀소하려는 욕망에 의해 재 고착화, 재 영토화로 돌아가는 인간 세상의 노마디즘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들이 다 감지해 낼 수 없는 하나님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성과 지혜와 깨달음과 실험 등으로 하나님을 정의 하려 하고 자기 자신 또한 눈에 보이는 자신들의 행위로 규정해 내려 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와 인생의 주체와 주인이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아무리 그렇게 재 형식화, 재 고착화, 재 영토화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찬양해도 불안과 공포와 공허가 남습니다. 그것을 +a라 했을 때 그 +a를 신의 영역으로 규정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 신인식이라는 것이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모든 종족에게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신인식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인간의 형식화와 자아 수정의 메타형식 외의 잉여에 대한 부분으로 밖에 인식이 안 되는 보잘 것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신 인식은 결국 자기 자신의 불안과 공허를 채우는 것으로 귀결이 되고 맙니다. 결국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나’라는 우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인간이 ‘하나님을 알되’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긴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 왜 성경이 ‘하나님을 알되’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엉터리로 알고, 자기들 마음대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실험과 경험을 통하여 신을 규정하고, 그 신을 ‘나’라는 우상 안으로 포섭하려 한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나’라는 자아를 행위, 즉 과거를 근거로 하여 규정을 하고, 외부의 변화에 의해 끊임없이 그 자아를 재 형식화 해 가는 메타형식에 의해 존재의 의미를 찾으며, 그 속에서도 메워지지 않는 불안과 공허를 신으로 메우려는 시도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선악 구조라는 것입니다. 그게 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가 바로 그 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인간이 위로 받고, 인간이 격려 받고, 인간이 영광 받고, 인간이 찬양받아야 좋은 교회로 취급이 됩니다. 그게 마귀의 교회인 것입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장악이 되어 자신의 행위와 역사를 부인당하고 부정당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릇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기고만장하여 ‘나’라는 우상을 섬기기 위해 신을 방법과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인간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죄의 종이라 합니다.

 

(요 8:31-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죄의 종으로 사는 이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실은 마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요 8:41-44)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 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조금 전에 설명해드린 그러한 선악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신 됨을 챙기려 하는 자들은, 아무리 그들이,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라고, 우긴다 할지라도 그들의 아비는 마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귀의 종들이 자유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마귀는 실존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절대 의존자로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 하나님의 떠나서 스스로 자기 생의 주인이 되어 살겠다고 하는 자들의 총체적 이름입니다. 따라서 마귀는 ‘나’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세요. ‘나’가 바로 마귀란 말입니다. 주님은 그 ‘나’에게 사로잡혀서 집요한 자기 사랑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죄의 종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계속 잡혀 있으면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측에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측에서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36절을 보시면 아들이 그들을 자유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걸 언약이라 합니다. ‘나’라는 우상의 종이 되어 살던 자가 아들의 공로를 힘입어 자유케 되어 주님의 종으로 편입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들에 의한 구원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 야곱의 때에 이스라엘을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집어넣어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어린양의 보혈을 인방과 문설주에 바른 집, 즉 어린양의 보호 아래에 있는 집 사람들을 무상으로 사망에서 건져 주십니다. 그렇게 건져진 자들이 하나님의 사자로 오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오신 어린양과 함께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바로 그러한 구원의 내용을 잊지 말게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법으로 종의 규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출 21:1-6) “1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 하니라 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 할 것이며 3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4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자녀 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5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하나님은 모세가 백성들에게 세울 첫 번째 규례로 종에 대한 규례를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종의 규례가 그 어떤 규례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신명기 15장 12절에서 18절까지를 보시면 종에 대한 규례가 출애굽기보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신 15:12-18) “12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13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14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 지니라 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16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17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 18 그가 육 년 동안에 품 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시내산 언약이 약 40년 후에 모압에서 갱신되면서 더욱 구체화 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시면 일곱째 해에 종에게 자유를 주는 이유가 나옵니다.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너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속량 하셨음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인이 종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어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 있지요? 그런데 빚이 너무 많아지고 갚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되면 그 빚 대신에 자기 몸을 종으로 파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채무자가 아무리 많은 빚을 졌더라도 7년째에는 자유를 주고 오히려 그에게 후하게 주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 빚을 진 타락한 인간들을 하나님의 아들의 공로에 의해 자유하게 풀어주시는 구원의 이야기를 모형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후하게 주어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의 금은을 풍성하게 갖고 나오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 자체가 구원의 모형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그러한 구원의 이야기를 행함으로 보이라고 명령을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으로 주신 것입니다. 힘의 원리 속의 세상에서는 종이 많을수록 강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세상은 종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다른 말로 자기보다 아래 사람을 많이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전 인생을 투자하여 삽니다. 그런데 7년마다 종을 놓아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계속해서 제자리, 처음자리로 돌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힘 삼아 사는 자들은 당신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한 번도 그 명령을 지킨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진노하시지요? 그 내용이 예레미야 34장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렘 34:13-14) “13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워 이르기를 14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렸거든 칠 년 만에 너희는 각기 놓으라 그가 육년을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케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나를 듣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한 번도 지킨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입어 망한 상태입니다. 그렇게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남 유대가 바벨론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시켜 당시 유대 왕이었던 시드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명으로 주신 종의 규례에 따라 종들을 풀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처음에는 풀어 주었다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물리시자 다시 종들을 잡아 들였습니다. 종들이 바로 자기 자신의 힘이었거든요. 그게 바로 ‘나’라는 우상을 집요하게 섬기는 인간들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렘 34:22) “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 성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 성읍들로 황무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다시 바벨론을 불러서 유대를 멸망시켜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아주 흥미 있는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렘 34:17) “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시겠다는 표현을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라고 하십니다. 어디로부터 자유하게 만드시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종 되었던 자리에서 자유롭게 풀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유를 얻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답니까? 칼과 염병과 기근이랍니다. 즉 사망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종의 자리에서 풀려나게 되면 그는 곧 멸망의 자리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종으로 살 때 가장 안전한 것이고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들은 예수를 믿으면 자유가 없어진다고 엉뚱한 생각들을 합니다. 그건 자유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의 사슬에서 해방이 되어 진짜 자유함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출애굽기 21장과 신명기 15장의 종의 규례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규례에 의하면 종은 6년간 열심히 일하고 나서 7년째에 해방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종이 주인을 사랑하고 자기 가족을 사랑하게 되면 풀어주어도 안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주인은 그 종을 데리고 가서 기둥에 대고 그 귀를 뚫어서 영원한 종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 종은 상속권도 갖게 됩니다. 한 마디로 주인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종들이 영원히 하나님의 종으로, 가족으로 남게 되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그 어떤 인간도 절대 누구의 종이 되고 싶어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기 위해 귀를 뚫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자기의 종을 자기의 권세와 힘을 자랑하는 도구가 아닌 가족으로 대하여 사랑해 줄 수 있는 인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힘의 원리와 선악 구조에 빠진 인간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2,000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셔서 완벽하게 종살이를 하신 것입니다. 생사여탈의 권한까지 하나님께 차압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주인 되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시고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신지를 아셨기에 기둥으로 끌려가 귀 정도가 아닌 손과 발과 옆구리를 뚫리는 고통을 당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종,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다른 말로 하나님과 영원히 연합이 되신 것입니다.

 

(빌 2:5-9)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렇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종이 되셔서 죽기까지 복종을 하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분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다고요?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는 죄의 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종의 자리로 해방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다시 말해 가시적인 역사와 인생 속에서 6년간의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종살이는 죽기까지 복종해야 하는 종살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주인의 종으로 영원히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들이 진짜 자유롭게 풀려난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을 선물 받은 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삶이 때로는 자기 마음대로 풀리질 않는 것입니다. 왜요? 종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 된 삶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 안에서 기쁘게 감내 되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이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종 된 삶, 즉 하나님 절대 의존의 삶을 살겠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자기 부인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나’라는 우상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까지도 형식화하여 재단하고 스스로의 행위로 자아를 규정하고 끊임없는 메타형식으로 우상을 조작해 내며, 그래도 부족한 부분을 신으로 부르며 살고 있을 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낮아지고 부인되며, 부정되고, 해제되는 삶을 살면서도 견뎌내며 살아내는 그런 돌연변이들로, 성경의 표현대로 바꾸면,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이 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잘 견디세요. 잘 이기세요.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왜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만 살아야 비로소 존재가 되고 비로소 가치를 입게 되는가’를 배우세요. 사도 바울이 위대한 복음의 서신을 기록하면서 왜 ‘종’이라는 말로 시작을 하는지 아시겠지요? 그것도 누구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둘로스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을 내십시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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