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
(김성수 목사)
(요 6:60-71)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이제 요한복음 6장의 마지막 부분에 당도했습니다. 내용이 길어서 아주 긴 시간 이 요한복음 6장을 공부했지만 주제는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떡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생명의 떡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떡은 인간의 노력이나 자격에 의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만 먹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떡을 좇아 예수님께 나아온 그 군중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세상은 생명의 떡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오늘 본문 60절을 보시면 군중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던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어렵도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스크레로스’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용납하기 어렵다, 관용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해 봐서 알지만 예수님이 그들에게 절대 어려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알기 쉬운 말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자신의 살과 피에 의해서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 참 생명은 본인들의 노력이나 자격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모인 군중들과 유대인들과 제자들까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가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어져야 한다는 그 말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과 유대인들과 그 곳에 모인 무리들은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보고 그 분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도 기적들을 일으켜서 자기들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속에서 애면글면 주님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이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러한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주어진다고 하니까 제자들을 비롯한 그 곳에 모인 무리들은 그 사실이 마뜩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도다’라고 수군거린 것입니다.
주님은 즉시 그들에게 ‘내 말이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느냐’고 그들의 속내를 들춰내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주님의 말씀이 제동장치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가고자하는 방향을 정해놓고 그 방향으로의 행진을 위해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도와주시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진로에 태클을 걸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바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뜻하는 바를 어떻게 하든지 관철시켜서 이 땅에서의 행복과 만족에 이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올바른 신앙생활은 비록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그렇게 이 땅에서의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이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지적해 주십니다. 그게 본문 62절입니다.
(요 6:62)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이 구절은 아주 중요한 신학을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주님의 선재(先在)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의 그 말씀은 주님이 갑자기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게 되신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이전에 있던 곳’ 즉 ‘하늘’에 존재하시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절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후 부활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게 되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은 주님의 부활 승천을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음을 고지(告知)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본다하더라도 너희는 나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많은 이들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고전15:4-8)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은 백 이십 명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까지 나누었던 제자들까지도 그 후에 갈리리로 돌아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게만 이해되어지고 받아들여지는 비밀스러운 하늘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믿음의 제한(制限)성에 대해 잘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다.
(고전 1:22-24)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은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지혜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속해서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에 속한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생명을 살려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분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부어짐으로만 생명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생명은 영에 속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살려주는 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고전 15:45-46) “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보시는 바와 같이 살려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참 생명을 주시는 하늘의 떡이자 살려주는 영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영적인 눈을 가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영에 속한 말을 하고 있으니 육에 속한 너희들이 어떻게 알아듣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3절 후반부를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지금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믿기만 하면 그 말씀에 의해 그들에게 생명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무리들은 알아듣질 못합니다. 왜 주님께서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실까요? 유대인들은 율법만이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켜냈을 때만 가능합니다.(갈 3:12) 그리고 다 지켜내다가 중간에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을 모두 어긴 것으로 간주됩니다.(약 2:10) 게다가 율법은 마음의 범죄까지도 정죄를 합니다.(마 5:21-28) 따라서 율법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표면적인 행위에 의해 율법의 계명을 잘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율법을 613가지로 세분화해서 지켜내었고 그 율법은 나중에 2134가지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들이 2134가지나 되는 율법의 조항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다 지켜낼 수 있었을까요? 인간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우리 안에서 제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주어지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입니다.
(창 2:17)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보세요. 구약은 ‘먹으면 죽는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어야 하는 자들에게 해독제로 오신 것입니다.
(요 6:50)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구약에서는 먹으면 죽지만 신약에서는 먹으면 살아납니다.
(창 3:24)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쫓아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을 먹은 자들을 쫓아내지 않으십니다.
(요 6:37)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창세기는 요한복음 안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약의 저주는 예수 안에서 생명의 복음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만 배태(胚胎)되고 출산되는 것입니다. 즉 새 생명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새 창조의 존재 양식인데 죄인이 그 새 창조의 존재양식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살리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야 새 생명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진리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한 백성들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 즉 옛 시대의 존재양식(구약)에 의거하여 생명을 취하려 하는 자들은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이 63절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바인 것입니다. 주님의 그 말씀에 대한 증거는 곧 현실에서 나타납니다.
(요 6:66)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주님의 그 말을 듣고 주님을 좇던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그 말은 주님을 좇던 제자 중에서도 여전히 옛 시대의 존재 양식(구약)에 의거하여 구약의 영광(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이 세상의 영광)을 좇아 왔던 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 곁에 남아 있었던 열두 제자들까지도 구약의 영광을 기대하며 주님을 좇았었다는 사실이 성경 여기저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막 10:32~38, 41)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 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 하옵나이다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주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죽게 될지 그리고 어떠한 수난을 받게 될 것인지를 일러주시는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이야기를 끊고 한다는 소리가 주님이 왕이 되시거든 자기들을 우의정, 좌의정 시켜 달라고 요구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계신데 제자들은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AD30년경이고 요한복음 6장의 가버나움 회당의 이야기는 AD29년경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제자들 또한 가버나움 회당에서 다른 제자들이 떠났을 때 떠났어야 이야기가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전히 세상의 떡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 곁에 남아 있었을까요? 거기에 대한 대답이 67절 이하입니다.
(요 6:67-69)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많은 이들이 주님 곁을 떠나자 주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하고 기특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 말은 ‘주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소유하고(에코, 계시매)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누구에게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마치 베드로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죄인들에게 하늘의 참 생명인 영생이 주어지게 되는 하늘 복음의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기특한 대답을 한 베드로가 왜 주님께 우의정, 좌의정 시켜달라고 졸랐던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을 냈을까요? 자기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먼저 선수(先手)를 친 것에 화가 난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주님이 붙잡혀 가셨을 때 왜 세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했을까요? 아니 왜 부활한 주님을 만나고도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로 떠나버렸을까요? 그 문제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사도 베드로가 다른 곳에서 동일하게 오늘 본문과 같은 기특한 고백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가서 이 문제를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16:13~17)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함으로 주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님을 가리켜 그리스도, 메시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한 베드로가 바로 이어서 주님의 죽으심에 분개하여 주님을 야단칩니다. 우리는 그러한 베드로의 행동을 보면서 참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멋진 신앙 고백 후에 곧바로 주님을 꾸짖은 베드로의 행동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한데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의 고백을 칭찬하십니다. 그 칭찬의 근거가 17절인 것입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다’ 사도 베드로는 여전히 불가능한 존재인데 순간순간 베드로를 이끌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그러한 기특한 고백들은 무엇에 대한 증거이겠습니까? 불가능한 베드로를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의 현현(顯顯)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를 주님 곁에 묶어둔 것은 베드로의 의지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표적을 보고 좇아온 무리들과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내 아버지가 이끌어 내게 주신 자 외에는 나에게 올 수 없다’는 선택과 예정(豫定)과 제한(制限)적 속죄에 대해 강화(講話)를 하시는 중입니다. 그 말미에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베드로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강권(强勸)적 은혜의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베드로와 동일한 고백을 했던 다윗의 고백을 시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시 139:7~10)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다윗이 베드로와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그런데 그가 그렇게 주의 신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8절에서 10절까지 장황하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좇아가신 것입니다. 즉 성도는 일단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쫓아다니시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집요함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라는 구절은 ‘주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소유하시고 우리를 붙들고 계신데 우리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의역을 해서 읽는 것이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지금 베드로를 붙들고 있는 것은 오히려 주님이신 것입니다. 여전히 베드로는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눈이 어두워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멋진 고백 후에도 계속해서 이 세상의 힘을 좇고 세상의 권세 앞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다 돌아가고 있는 그 현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붙드시고 그의 입에서 기특한 신앙고백이 나오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실수할 때마다 주님이 그를 붙들고 놓지 않으심으로 그가 위대한 사도로 생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의 신앙 상태를 요한이 잘 그리고 있습니다.
(요 21:11)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는데 밤새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님을 알아보고 옷을 걸쳐 입고 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또 다시 그 분의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들이 추구하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좇아 목숨 바쳐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그 물고기를 셌습니다. 그 경황에도 일백 쉰 세 마리의 물고기를 세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을 입으시고 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고작 물고기 백 쉰 세 마리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때까지도 육신의 배를 채울 물고기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끝까지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을 좇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끝까지 좇아오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기억나세요?
(요 21:18)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는 스스로 띠 띠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베드로에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리고 다니시며 당신의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에게 있어서 주님의 은혜를 배제한 삶은 단 한 순간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고백을 인용하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하며 자기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는데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그건 정말 은혜가 뭔지 모르는 우매한 이들의 허풍인 것입니다. 설사 그러한 고백이 진심에서 우러나 쏟아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이끌림에 의한 것이지 자기 자신의 자발적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자랑거리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소유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이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시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발동하여 주님을 붙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의하셔야 할 것은 자신의 유익과 자랑만을 위해서 사는 파렴치한 인간들도 얼마든지 이 세상의 힘을 얻어내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척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잡아주시지 않는 한 그는 끝까지 주님 곁에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많은 이들이 주님을 떠나갈 때에 가룟 유다가 끝까지 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돈독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그는 그 무리의 돈 궤(櫃)까지 맡아서 수고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생의 말씀으로 베드로를 잡아주시는 그 순간에 가룟 유다를 향해 일갈(一喝)을 하십니다.
(요 6:70-71)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주님은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70절을 보시면 그 마귀를 주님 자신이 택하셨다고 하십니다. 열한명은 당신의 사도로 택하시고 한 명은 마귀의 역할을 하도록 주님 자신이 택하여 당신 곁에 두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유다가 마귀인 것을 알면서도 그를 제자로 택하셨을까요? 많은 성경 주석가들이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합니다. 제가 읽어본 책 중에서는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과 존 맥아더 목사님 그리고 존 스토트 목사님과 존 파이퍼 목사님이 비슷한 견해를 보이셨는데 최근에 아더 핑크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 집을 구해서 읽어보니 그 분들이 모두 아더 핑크 목사님의 강해를 인용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아더 핑크 목사님의 책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여 주님께서 유다를 택하여 제자를 삼으신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더 핑크 목사님의 견해를 여러분에게 그대로 옮겨 드리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가룟 유다를 택해서 삼년 반 동안 당신 곁에 제자로 두신 이유 중 첫 번째 이유는 주님의 완전성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했다시피 38절과 39절에 보면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이 땅에 오셨음을 천명(闡明)하십니다.
(요 6:38-39)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 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 것이니라”
히브리서에도 똑같이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히 10:7)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그런데 그 아버지의 뜻은 이미 두루마리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두루마리 책이란 구약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눅 24:44)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그런데 구약에 주님을 가리켜 기록된 글 중에 주님은 친한 친구의 배신에 의해 팔릴 것이라는 게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시 41:9) “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주님은 구약에 자기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내용이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삼년 반 동안 자기를 대적하는 마귀를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두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기 위해 유다를 선택하여 당신 곁에 두신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애쓰셨는지 시편 22편으로 가서 한 절만 더 보겠습니다.
(시 22:1)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지요? 바로 이 구절을 주님께서 그대로 아람어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유다까지도 당신 곁에 두신 것입니다.
(요 17:12)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 이니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완전성에 대한 편견 없는 증거를 제공하시기 위해 마귀의 편인 유다를 당신 곁에 두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다른 사도들과 구원받은 많은 이들이 주님의 완전성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주님의 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증거가 편벽(偏僻)되고 편향(偏向)된 증거로 폄하(貶下)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수를 곁에 두시고 그 원수에게서도 도덕적 완전성을 인정받으셨던 것입니다. 유다는 마귀의 편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곁에 꼭 붙어서 어떻게든 주님의 약점을 잡으려 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마귀는 주님의 도덕적 결점이나 흠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마27:4)는 고백으로 주님의 도덕적 완전성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이 유다를 선택하셔서 곁에 두신 이유는 죄의 흉악함을 드러내고 그러한 죄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엄숙한 경고를 발(發)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다는 구세주와의 교제가 허용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들 중에 최고의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던 자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를 돌이키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마저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팔아먹을 수 있는 흉악한 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엄청난 이적들을 목격하고, 지극히 영적인 가르침들을 듣고, 지극히 경건한 사람들과 교제를 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끄심이 없이는 결코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을 유다의 선택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유다의 선택은 교회라 자처하는 이들 중에 양의 옷을 입은 늑대들이 있을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신자로 자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재산과 가족마저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전도도 했습니다.(마10:4) 기적도 일으키고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주님은 마귀인 그에게도 그런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떤 반대도 드러내지 않았고 최후의 날까지 주님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조차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겉옷을 벗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태연하게 그의 발을 주님께 맡겼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을 감췄는지 제자들이 끝까지 그가 가짜인지를 몰랐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기 전의 우리 인간들의 판단력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영적인 것과 전혀 상관없는 죄인들은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것들만을 판단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던 제자들이 마귀인 유다를 식별해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제대로 된 판단력을 발휘하여 사람과 사건과 상황 등을 해석하고 있습니까? 잘 안 되지요?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에서 다시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겠다고 반복하여 다짐하고 또 다짐하겠습니까?
(고후 5:16)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표준새번역]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죄인들을 가리켜 ‘소경’이라는 표현을 쓰시겠습니까? 죄인들은 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경중(輕重)과 귀천(貴賤)을 가르는 우(愚)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본문이었던 40절과 41절을 다시 볼까요?
(요 6:41-42) “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 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곳의 군중들이 뭐라고 수군거립니까? ‘그는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고 그의 부모도 우리가 아는데 어찌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하고 이 세상의 가치관을 통해 예수를 판단합니다.
여담(餘談)입니다만 저는 어릴 적에 예수님 당시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참 안타깝게 생각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태어나서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 분의 말씀을 들었더라면 이렇게 유약한 믿음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저의 판단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알게 된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요즘은 오히려 제가 그 때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그 때 주님을 직접 뵈었더라면 저도 세상의 떡을 구하러 온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그 분의 초라함과 나약한 모습에 우리 주님을 알아보기는커녕 그 분을 향해 거짓말쟁이라고 욕을 퍼부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세상이 합의(合意)해 놓은 귀천과 경중의 개념을 판단의 잣대로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소경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야고보 사도의 경고를 다시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 2:1-4)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왜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까? 그 분을 외모로만 보아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왜 열한 제자들이 유다가 마귀의 편인지를 식별해 내지 못했을까요? 외모로만 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정말 영적인 눈을 뜨신 분들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세상 적 가치관에서 볼 때 낮고 비천한 지경이라 할지라도 부끄러워하시면 안 됩니다. 반대로 많이 가졌다고 해서 교만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가난함과 모자람을 비웃으셔도 안 되고 다른 이들의 풍부함을 질투하거나 비꼬셔도 안 됩니다. 그게 잘 안 되시거든 차라리 육신의 눈을 질끈 감아버리세요. 육신의 눈을 감아야 영의 눈이 뜨이게 됩니다. 제 말을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판단하는 그 눈을 감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표준새번역]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새롭게 창조된 새 것들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들이여, 육의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십시오. 상대방의 겉모습을 지나 그의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귀한 영혼을 바라보실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절대 사람의 번드르르한 겉모습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우리의 눈도 그렇게 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조작해 놓은 세계관과 그에 따른 가치관과 행동양식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그래야 진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분명 그렇게 변해가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확실한 소망 안에서 우리의 손과 발을 열심히 움직여 보십시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 여러분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주님을 떠나 과학문명이 주는 편안함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물질주의와 실용주의와 성공주의 같은 시대정신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이 땅에 존재하는 종교 등의 수많은 선행체계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옛 사람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복음을 아는 우리는 뒤 돌아서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붙어 있어야 우리는 참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나님은 그 분의 집요한 고집으로 우리에게서 반드시 이 고백을 들어내고야 마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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