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김성수 목사)
(창 11:27-12:3) “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하란은 롯을 낳았다. 28 그러나 하란은, 그가 태어난 땅,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29 아브람과 나홀이 아내를 맞아들였다.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이고,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이다. 하란은 밀가와 이스가의 아버지이다. 30 사래는 임신을 하지 못하여서, 자식이 없었다. 31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리를 잡고 살았다. 32 데라는 이백오 년을 살다가, 하란에서 죽었다. 12: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창세기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1장부터 11장까지의 원(原)역사, 즉 태고사(太古史)와 12장부터 마지막까지의 구원(救援)사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태고사에 등장하는 아담과 셋 그리고 에녹과 노아 등의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임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아주 초보적인 단계의 그림으로 설명을 해 주시고 이제 12장부터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인물들을 통해 성도의 구원과 믿음의 정체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특히 구원사의 첫 인물로 등장하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의 삶과 그의 인생여정은 장장 열네 장에 걸쳐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 사백 번이나 등장하고 신약에만도 일흔 네 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아브라함의 이름을 수시로 언급을 하셨던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처럼 아브라함은 성경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차차 공부를 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아브라함의 생애 안에는 성도의 믿음과 구원, 즉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내용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신 분들은 이삭과 야곱의 삶 또한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 이미 결정되고 확보 되어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완성을 주제로 하고 있는 ‘신약’은 사실 마태복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따지면 창세기 12장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의 구원(救援)사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구약 시대의 사람입니다. 아니 구약 시대 이전의 사람이라고 해야 옳겠지요? 구약시대는 모세의 언약이 유효하던 시대를 말하는 것이므로 구원 사 속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시대별로 나눈다면 구약 이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전체 구속사 안에서 보면 아브라함에서부터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결과가 이미 시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첫 번째 책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이 어떤 책이지요?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복음 1장으로 가볼까요?
(마 1:1‐2)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신약은 이렇게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을 거쳐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로 이어지는 계보를 통해 흘러 완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부터 공부할 창세기의 두 번째 파트인 구원(救援) 사 속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는 신약을 여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12장 이후부터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여 그 백성들이 경험하게 될 ‘부르심(召命, calling)’을 비롯하여 그들이 걸어가야 할 구원의 서정(庶政)을 삶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모델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복해서 당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전체 하나님 백성들의 대표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호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의 시작과 구원의 완성이라는 결론으로 향하는 인생의 전 과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인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라는 사람의 삶에 관해서도 창세기가 열 세장을 할애하여 기록을 하고 있지만 요셉은 야곱의 일부이며 연속인 인물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요셉은 변화된 야곱의 모습을 메시지로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눅 13:28) “2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에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여기에 보시면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사람들을 그들과 대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쉽게 풀어 보면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가야 하는 모든 자들을 말하는 것인데 그들의 대표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여 그들 세 명의 이름만 호명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냥 모든 선지자로 묶어 버리신 것이지요.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안에 우리 성도들이 연합되어 있는 형국(形局)인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은 이삭과 야곱과 교회를 대표하는 믿음의 조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교회와의 연합(聯合)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실체(實體)로 신약에서 결론지어지는 것이지요. 그 연합의 관계를 그림으로 그려보세요. 왼쪽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중간에 우리 교회 그리고 오른 쪽으로 예수 그리스도, 이런 연합의 그림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우리 성도들의 구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안에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바벨론에서 뽑혀지는 모습으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도 연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勝歸)에도 연합이 되어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체 구속(救贖)사의 그림이 바로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구원은 어떠한 지경에 있는 자들에게 어떻게 시작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구원을 받은 이들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하나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객관적 믿음을 결국 주관적 믿음으로 발휘하게 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귀를 통해 우리 성도에게 주어진 영생이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주어지게 된 것이며 우리의 결국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우신가요? 다른 것은 다 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아브라함을 공부하시면서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은 아브라함은 바로 성도의 대표로 성경에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생육되고 번성되어질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대표라는 말입니다.
(갈 3:6-9) “6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움으로 여겨 주신 것"과 같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 8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주신 복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 복이라 하지요? 9절의 ‘아브라함과 함께’라는 어구는 ‘아브라함 안에서’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13절과 14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복’이 전해지도록 하기 위함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복의 언약은 바로 우리 성도들을 향한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은 바로 우리 성도 전체인 것입니다.
(창 12:2-3)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3절의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는 어구의 뜻은 아브라함이 전하는 복음에 동의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고 그 복음에 동의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아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으로부터 우리 성도에게 주어진 권세이지요? 마태복음 16장의 교회의 권세를 떠 올려 보세요.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그 하늘의 권세를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 백성들의 대표로 가장 먼저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에서 구체적인 예를 몇 군데 찾아 보여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여정과 야곱의 여정과 전체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여정을 비교해 보자고요.
(창 12:6-9) “6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7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8 아브람은 또 거기에서 떠나, 베델의 동쪽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옮겨 가서, 장막을 쳤다. 서쪽은 베델이고 동쪽은 아이이다. 아브람은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아서, 주께 바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9 아브람은 또 길을 떠나서, 줄곧 남쪽으로 가서, 네겝에 이르렀다.”
여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거쳐 간 세 지역이 나옵니다. 세겜과 벧엘과 아이 사이 그리고 남방입니다. 여기서 남방은 남쪽 지방이라는 뜻이 아니라, 네게브, 헤브론 지역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3장19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래를 장사지낸 곳, 남방을 ‘마므레 곧 헤브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남방입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그 헤브론에서 그의 인생을 마칩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의 삶의 여정에서 나타난 지명은 야곱의 삶의 여정에서 그대로 반복이 되어 나타납니다.
(창 33:18-20)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20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세겜 땅에 이르러 단을 쌓습니다. 아브라함과 똑같은 지역에서 똑같은 일을 합니다.
(창 35:14-15) “14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 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제사(전제, 奠祭, drinking offering)를 지냅니다. 역시 아브라함과 동일한 지역에서 동일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창 35:27)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어떠세요? 야곱의 여정 속에서도 아브라함의 여정에 등장했던 세겜, 벧엘, 헤브론이 똑같이 등장합니다.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나왔다는 것은 다 아시지요? 그리고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도 아시고요. 야곱이 그 존재 안에 품고 있던 이스라엘의 여정은 어떠한지 볼까요?
(수 7:2) “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편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일러 가로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벧엘과 아이가 나옵니다.
(수 8:9) “9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복병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편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 가운데서 잤더라”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의 여정 중에 나오는 벧엘과 아이 사이라는 어구가 그대로 등장합니다.
(수 8:30) “30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에발산은 세겜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곳에서 단을 쌓았습니다. 보세요. 모세오경의 저자 모세는 지금 의도적으로 야곱과 이스라엘의 여정 속에 등장하는 지명을 아브라함의 여정 속에 등장하는 지명과 중첩시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또한 그 모세 오경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중첩(重疊)하여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야곱과 이스라엘의 ‘선택과 그들의 신앙 여정’은 이미 아브라함 속에서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窮極)적으로 그 아브라함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탄생하게 될 하나님의 교회의 삶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롬 4:23-24) “23 "그가 의로움을 인정받았다"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24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하신 것이 아브라함만을 가리켜 의롭다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당신의 백성들에게 의롭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연합이 되어 의롭다 인정을 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은 자들과 동일한 자들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브라함 안에 연합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이 되어 이미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엡 2:4‐6)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6절의 ‘앉히시니’는 과거시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기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어구가 나오지요? ‘아브라함과 함께’라는 어구와 마찬가지로 역시 ‘연합’을 가리키는 어구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이어지게 되는지 잘 아시겠지요?
그러면 이제 우리의 대표로 갈대아 우르, 바벨론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부름을 받게 되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떻게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보면 우리의 부르심과 우리의 신앙 여정과 우리의 종국을 추론해 볼 수 있겠지요? 예전에 교리 설교를 할 때 ‘믿음’이라는 설교에서 이 아브라함의 여정을 토대로 ‘믿음’에 대해 공부를 한 번 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주 간략하게만 살펴보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교리 설교 ‘믿음’편을 참고 하세요. 아브라함은 어떻게 선택이 된 사람입니까?
(롬 4:18) “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 자신의 능력으로 바랄 수 없고 믿을 수 없었는데 그에게 바램과 믿음이 주어졌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수 24:1-2)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그 우두머리들과 재판관들과 공직자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섰다. 2 그 때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소. ○ '옛날에,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 개역성경)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이 구절은 여호수아가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를 비롯한 많은 조상들이 유프라테스 강 저편, 즉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하는 장면입니다. 여호수아는 거기서 ‘조상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늘 본문 11장 말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나홀과 데라로 이어지는 ‘셈의 후예들’이 유프라테스 강 건너 편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데라를 예로 든 것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바로 아비인 데라의 영향 아래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우상을 섬겼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당시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였고 아주 풍요한 도시였습니다. 이미 사 천년 전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던 곳이니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했던 것인지 미루어 짐작이 가시지요? 그 곳 사람들은 달의 신인 ‘씬’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었고 야곱과 라헬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망 나올 때 가지고 나왔던 가족 수호신인 ‘드라빔’과 같은 종류의 가족 수호신을 집집마다 우상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는 그러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고 그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넋 놓고 살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스스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건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들보다 잘나서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굳이 우상을 섬기고 심지어 그 우상을 만들어 팔던 데라의 아들에게 찾아오셨을까요? 이왕이면 아브라함과 동시대 사람인 욥 같은 사람을 택하셨으면 하나님의 체면이 그렇게 구겨지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대표로 택해서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너무나 말을 안 들었잖아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더니 역시 달의 신인 ‘씬’을 섬기는 하란에 머물러서 일흔 다섯 살까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란은 갈대아 우르보다 더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하란이라는 말 자체가 ‘교차로’라는 뜻인데 아브라함과 데라가 중도에 머물렀던 하란은 실제로 동쪽으로는 앗수르의 니느웨, 서쪽으로는 헷 족속의 알렙포, 남동쪽으로는 갈대아 우르, 남서쪽으로는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사면(四面)팔방(八方)으로 이어지는 국제 무역 로의 교차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은 달 신인 ‘씬’의 대 신전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건져 가나안으로 데려가시려고 그를 부르셨는데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보다 더 화려하고 더 타락한 하란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던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의 달콤함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정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던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세상 힘의 달콤함과 우상이 주는 편안함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열심으로 당신의 백성을 건져내시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우리 모든 성도들의 상태가 바로 그러한 불가능한 상태였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이라는 사람이 택해지기 전의 배경을 한 번 보세요. 11장 30절에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잉태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다고 나오지요? 생육과 번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당시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저주받은 자의 상징으로 회자될 만큼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28절에는 아브람의 형 하란의 죽음이 나옵니다. 생명으로부터의 단절입니다.
32절에는 아버지 데라의 죽음이 나옵니다. 역시 단절입니다. 그리고 12장 1절에서 아브람을 부르시는데 ‘어디’라는 장소도 정해주지 않으시고 무작정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백성을 부르심에 있어 철저하게 인간의 이름이 들어갈 여지를 부수시고 시작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아브람의 부르심의 자격이요 원인으로 쓰일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끊어 놓고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내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우리의 불가능함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바벨론을 떠날 것을 지시하셨던 하나님께서 타락한 도시 하란에서 어슬렁거리며 안주하려 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에 보면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로부터 건져내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란에서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12장 1절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 번째 부르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보다 더 타락한 도시인 하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빨리 그 곳을 떠나라고 또 다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경고가 데라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버지가 하란에서 죽자 아브라함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나타나신 분이 어떤 분이신지는 잘 몰랐지만 그 분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게 되면 어떠한 일이 생기는지를 경험으로 체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의 게으름과 세상에서의 안주(安住)를 가시와 담과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사용하여 경각(警覺)시키시며 약속의 땅으로 몰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75세까지 하란에 머물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끈질기고 고집스러운 인도(引導)로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그 땅에 기근(饑饉)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곧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나타나서 ‘복을 줄 테니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했던 하나님에게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복을 준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복은커녕 기근이 뭐냐고 투덜댔겠지요. 그러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애굽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왕에게 팔아먹습니다. 원래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異腹) 누이입니다.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른 이복 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왕이 자기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죽일 것을 염려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그냥 누이라고만 밝히고 애굽 왕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제가 왜 팔았다는 표현을 쓰는가 하면 아브라함은 애굽 왕이 자기 아내를 데려가는 대신 많은 가축과 재물과 종들을 주었을 때 그것들을 아무런 가책 없이 덥석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큰 부자가 된 것은 그 때부터입니다. 아내를 팔아서 부자가 된 것입니다. 그 때 받은 하인 중에 한 명이 바로 이스마엘의 어머니인 하갈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사라만 팔아먹지 않았어도 오늘날 이스마엘의 후예들인 아랍과 이삭의 후예들인 이스라엘의 길고 지루한 전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투쟁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잘못을 한 아브라함은 놔두시고 애굽 왕 바로를 혼내주심으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당시 세계 패권을 쥐고 있던 애굽 왕 바로보다 훨씬 강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왜 아브라함을 혼내지 않으셨을까요? 그 때는 아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징계(懲戒, paideia)를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여정 속에서 계속해서 실패하고 실수하며 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가르치시며 가나안으로, 모리아 산으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고 세상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며 그렇게 복을 받은 너의 후손이 저 바다의 모래처럼 많고 저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을 하시며 아브라함을 이끌고 가십니다. 거기에 반해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라고 반문을 하는 행동으로 일관을 하고요.
15장으로 가면 그러한 인간의 불가능함과 하나님의 열심이 재미있는 그림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 몸에서 날 후손을 주시고 그 후손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언약을 하신 후 제물을 쪼개 놓으라고 하시곤 그 쪼개놓은 제물 사이를 홀로 지나가시지요? 창세기 15장의 그 장면은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언약 관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두 사람이 언약을 할 때에 언약 당사자인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잡고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감으로 해서, 둘 중 하나가 그 언약을 어기면 어기는 자가 이 쪼갠 고기처럼 쪼개질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히브리 관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홀로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 인간은 이 언약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아니므로 홀로 지켜 가시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기사를 보면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는 자로 그려지고 하나님은 계속하여 당신의 언약을 신실(信實)하게 지켜 가시지요? 그러나 죄 속에 태어난 인간은 절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은 죄인들인 그의 백성들이 약속을 지켜낼 수 없었기에 쪼개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지켜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쪼개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그게 바로 여러분과 저,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계속 언약을 어겼으며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의 제물이 쪼개지는 그림 속에서 십자가를 보십니까?
아브라함은 그렇게 ‘네 몸에서 날자가 네 후사(後嗣)가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애굽 왕에게 자기 처를 팔았을 때 받았던 하갈이라는 애굽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하나님은 13년간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13년 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혼내주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온전 하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너는 왜 전능자인 나 하나님의 말을 믿지 않고 네 마음대로 하느냐’는 질책(叱責)인 것입니다. 애굽에서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리고는 또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비웃습니다.
(창 17:17‐18) “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여러분, 이걸 믿음이라고 하나요? 이러한 아브라함의 인생을 개괄(槪括)적으로 살펴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여기서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특별함이나 열심이나 성실함이 보이십니까? 정말 엉터리 같은 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열심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열심을 찾아내야지 아브라함을 본받자고 나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본받아서 하나님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아내를 팔아먹고 자기 마음대로 첩의 자식을 낳고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가라는 땅에서 도망쳐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그러실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의 여정 속에서 가끔 칭찬 받을 만한 일들이 보여 진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분가를 할 때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지요?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우상을 섬기고 화려한 문명과 세상의 힘을 좋아하던 아브라함에게서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조카 롯이 잡혀갔을 때에 자기 집에서 기르던 병사 삼백열여덟 명을 데리고 네 나라 연합군과 싸워서 이기고 롯을 구해 옵니다. 애굽 왕이 무서워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겁쟁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겁 없이 말도 안 되는 숫자의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을 치른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여정을 가는 아브라함에게서 문득문득 변화되어진 모습이 보여 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곧 그랄 왕 아비멜렉이 무서워 두 번째로 아내를 팔아먹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기적처럼 허락하신 이삭이 자기 아내 뱃속에 들어 있을 때였습니다. 정말 한심하지요?
보세요. 우리가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았듯이 그렇게 어느 한 가지 제대로 한 적 없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징계와 교훈과 훈련을 거친 후 백세에 낳은 자식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척 드리는 실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 속에서 보여 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여정인 것입니다. 그 모리아 산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 22:16‐18) “16 말하였다. "주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까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을 칭찬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이미 오늘 본문과 또 다른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반복해서 주신 언약의 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이삭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믿음으로 바친 아브라함에게 마치 상으로 그 복을 주시는 것처럼 이야기 하십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제 신앙의 여정을 막 시작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리아 산의 이삭을 바치는 사건 이후에 주어지는 복의 내용과 똑같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신앙의 여정 속으로 몰아넣으실 때 이미 그를 완성 시키실 것을 계획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에서 주시는 복을, 시작할 때 미리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난 반드시 너희를 내가 원하는 자들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해 살펴 본 것처럼 믿음은 이렇게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당신의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서 반드시 주관적 믿음인 믿음의 고백과 믿음의 삶을 받아내시고야 마신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애굽으로 도망가고 있는 아브라함 속에 있을 수 도 있고 애굽 왕과 그랄 왕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아내를 팔아먹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팥 죽 한 그릇으로 형을 속이고 거짓말로 아버지를 농락한 야곱 속에 들어 가 있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도 그 것을 믿지 못하고 비웃는 불신앙의 모습을 여러분 안에서 발견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안심하게 하는 것은 그러한 자들 속에서 홀로 열심히 당신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빚어가고 계시기에 우리는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내가 의지하고 있는 세상 힘들을 하나님 앞에 난도질 하여 바치는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 방종(放縱)을 조장(助長)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다 이루실 것인데 우리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식의 무 율법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관해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 안에서는 그 분께 대한 순종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육신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넘어지고 실수하고 실패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 ‘난 아닌가봐’하고 자폭(自爆)하지 마시란 것입니다. 자폭해 버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과 좌절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다시 일어나 신앙의 여정을 힘을 내어 가는 것은 참 힘이 든 것입니다. 넘어지셨습니까? 다시 일어서세요. 신앙을 포기하고 싶으세요? 아니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대로 놔두시지 않습니다. 일어서세요. 그리고 함께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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