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나팔
(김성수 목사)
(계 11:15-19)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16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7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이제 일곱 번째 나팔로 넘어왔습니다. 일곱 번째 천사가 일곱 번째 나팔을 불자 재앙이 떨어지지 않고 또 천상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일곱 번째 인이 떼어졌을 때의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그 때도 마찬가지였죠? 일곱 번째 인이 떼어졌을 때도 구체적인 재앙의 내용이 등장하지 않고 ‘하늘이 반 시 동안 고요하더라.’로 그 내용이 대치되었었습니다. 거기서 ‘하늘이 고요하다’는 것을 제가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 드렸었지요?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할 때 본 연주전에 열심히 튜닝을 한다고 했습니다. 무척 소란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소란함은 아름다운 연주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단계입니다. 그렇게 튜닝이 다 끝나면 잠시 정적이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 아름다운 연주가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고요함은 튜닝이 다 끝나고 이제 완성된 연주가 울려 퍼지게 되는 재앙의 끝, 재앙의 절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일곱 번째 나팔이 울리자 바로 그 본 연주의 내용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궁극적 우주의 종말이 오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이루어지게 됨을 찬양하는’ 교회의 모습이 일곱 번째 나팔에 묘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일곱 번째 재앙은 심판과 저주의 종결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렸을 때 재앙의 내용이 다음으로 유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재앙이 극에 달해서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의 세력이 완전히 멸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궁극적인 목적이 달성이 되는 장면인 것입니다. 17절을 잘 보시면 24장로가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옛 적에도 계시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뭐가 하나 빠졌지요? 뭡니까? 전에 우리가 공부한 하나님에 관한 묘사와 어떻게 다릅니까?
(계 1:4,8)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장차 오실 이’가 빠졌지요. 이 장차 오실 이 ‘호 엘코메노스’는 ‘미래로부터 역동적으로 현재로 오고 계신 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 표현이 빠졌습니다. 그 말은 일곱 번째 나팔이 우주의 최후의 종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곱 재앙들은 전부 교회시대 전체에 걸쳐 쏟아지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과 완성까지를 전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것이 세 번 반복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보시면 그 일곱 재앙들은 이렇게 항상 어떤 목표 지점으로 수렴이 되고 있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과 우주의 역사는 자연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연적인 happening의 나열이 아니라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정확하게 움직여지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에 관한 묘사가 15절부터 등장하는 것입니다. 먼저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5절)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그 목표지점인 마지막 종말 때가 되면 ‘세상 나라’가 우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실 거라 찬양합니다. 여기서 세상 나라 ‘바실레이아 투 코스무’는 마태복음에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마 4:8-9)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8절의 천하만국이 ‘바실레이아 투 코스무’‘세상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게 누구 거였습니까? 마귀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예수님께 ‘나한테 절만 한번 하면 이 세상 나라를 네게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 세상 나라가 누구의 것이 되었습니까? 우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그 나라의 왕 노릇을 하실 것이라는 것이 15절의 내용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히 미래 적 소망 안에만 들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지금 이 땅에 이미 존재합니까? 베드로전서 2장 9절, 여러분은 ‘거룩한 나라’라면서요. 그러니까 그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존재하고 있고 하나님은 이미 그 나라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지금 이 세상은 마귀가 통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이미 들어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여러분께서 요한계시록을 공부하시는 동안에는 이 already...not yet의 원리를 항상 염두에 두고 계셔야 합니다. 잘 보세요. 분명 여기 15절의 ‘왕 노릇 하시리로다’ 는 직설법 미래시제입니다. 그런데 17절을 보시면 동일한 단어가 나옵니다.
(계 11:17) “17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여기도 똑같이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신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쓰인 ‘에 바실류사스’는 부정과거시제입니다. ‘이미 왕 노릇하고 계셨고, 왕 노릇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 15절의 내용과 17절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 나라는 가시적으로 미래에 완성될 것이고 그 때에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실 것이지만 지금 이 세상 나라에서 이미 그 하나님께서 왕 노릇 고 계시고, 그 하나님의 왕 노릇의 통치 아래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7절에 하나님께서 ‘큰 권능을 잡으시고’라는 구절이 있지요? 거기서 ‘잡으시고’‘에일레파스’는 완료시제입니다. 거기서 완료시제가 쓰였다는 것은 지금은 하나님과 사탄이 전쟁 중이지만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기시고 큰 권능을 잡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권능을 잡으시고 지금 다스리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탄도 그를 따르는 세력들도 어떤 목적을 위해서 지금 하나님에 의해 잠깐 사용되고 있는 것뿐이지 하나님과 대결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인만 되었다면 우리는 걱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내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 나의 처지, 심지어 사탄의 세력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도구로 쓰여 지는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은 나에게 유익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으시면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스캇 펙의 책을 읽다가 보니까 이런 대목이 나오더라고요.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영적인 성장을 위해 의도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사탄마저도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존재케 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다스리심 ‘에일레파스’ 안에서 까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18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한 줄로 요약되어 묘사되어 있습니다.
(계 11:18)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분을 내는 세상을 그 분의 진노로 다 멸하시고 성도들에게 상을 주시는 그 결론이 반드시 오게 됨을 18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심판 하신다’는 구절은 최후의 심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계 20:10-15)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최후의 심판이지요)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자연주의자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은 죽으면 소멸된다고 믿지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다가 사망이 음부가 죽은 자들을 토해내고 반드시 심판이 있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다 성취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돌아오게 되는 최후의 심판의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들은 모두 멸망하게 되고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은 모두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18절입니다. 여기서 ‘상’‘미스또스’는 하나님께서 충성된 종들에게 주실 구원의 유익, 곧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일곱 교회 공부할 때 배웠죠? 이기는 자들에게는 어떤 상이 주어집니까?
(1)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됨
(2)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음
(3) 감추어진 만나와 흰 돌을 받음
(4)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음
(5)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됨
(6)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됨
이렇게 ‘상’‘미스또스’는 바로 구원의 은혜, 구원의 선물,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 것 말고 또 다른 상을 원하세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참 이 상급에 관심이 많아요. 사람들이 왜 상을 받고 싶어 합니까? 다른 사람보다 내가 조금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 상을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살 사람들이 아직도 그렇게 자신의 나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 한다면 정말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천국이 될까요? 엉뚱한 상급 같은 것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의 거룩이 완성이 되고 그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눈물도 고통도 고난도 없는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 그것 말고 뭘 더 바라세요? 여러분이 지금 11장 15절부터 18절까지를 공부하셨습니다. 이 내용을 어디서 많이 보신 것 같지 않으세요? 사실 이 내용들은 시편 2편의 주석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들입니다.
(시 2:1-6,9,12)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이방들이 분노하매)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주의 진노가 임하여)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9 네가 철 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신다) 12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성경 곳곳에 계시되어 있는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요한은 모든 하나님의 대적들이 지금은 오히려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보고 비웃고 있지만 그들의 멸망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시편 2편을 인용 해다가 우리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시록 2장에 보면 역시 시편 2편을 인용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자리에 우리를 함께 동참시키고 계신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 2:26-27)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시편 2편에서는 철장을 가지고 질그릇 깨뜨리듯 세상을 부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계시록 2장에서는 이기는 성도들에게 그 권세가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실상 그 세상의 권세가 언제 질그릇 깨지듯 깨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깨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가시적으로 깨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들이 점점 진화하고 있고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으로 볼 때,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있고 그 악으로 말미암아 점점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질그릇 깨지듯 깨지는 세상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철장을 들고 세상을 질그릇 깨듯 깨는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거기에 참여합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 권세를 받아서 참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권세는 어떤 권세라고 했습니까? 전에 한번 설명해 드렸잖아요. ‘엑수시아’‘엑스’가 ‘밖으로’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우시아’가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그 ‘권세’라는 것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의 본질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엑수시아’는 내 안에 있는, 인격과 삶, 내 본질로부터 나오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인데 그 힘은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상대방이 공동체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잘 살 수 있게 하는 힘을 ‘권세’‘엑수시아’라고 합니다. 그 권세가 이미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권세를 발휘해서 이 땅을 멸하려는 자들을 오히려 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성품과 인격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에 맞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 곧 세상을 심판하며 세상을 멸하는 공격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전투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우리가 왜 이 땅을 이렇게 살아내야 합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바로 천국에 집어넣지 않으시고 이렇게 고단한 인생을 허락하실까요? 오늘 2006년 1월 1일 새해 첫날입니다. 여러분, 올 한 해를 어떻게 무엇을 하시면서 사실 겁니까? 계획을 세우셨나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땅을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 해의 계획을 잘 세우실 거 아닙니까? 태초에 아담이 창조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자연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은 창조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에 이해 영혼이 불어넣어졌고 그들에게는 인격과 성품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인간들은 모든 피조물들의 절대 상위에 존재하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절대 하위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인간은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만물을 다스리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는 사과나 복숭아 같은 과일의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선악과는 모든 인간은 그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복종하는 가운데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설명하는 하나의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관계를 깨 버렸습니다. 절대 상위에 존재하고픈 마음이 도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자기의 위치를 이탈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선과 악도 자기들의 판단에 의거해서 정의를 해 버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이 되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는 것을 선하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는 것을 악하다고 정의해야 하는 존재였는데 이제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판단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담의 후손으로, 아담 안에서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담 안에 있다는 것은 아담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던 그 죄를 우리도 동일하게 짓고 있는 자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갓난아기들이 죽는 것입니다. 분명 사망의 ‘죄의 삯’이라고 했는데 갓난아기들이 무슨 죄를 그리 지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죽습니까? 죄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죽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하나님 앞에 괴로움을 토로하며 쓴 시편이 있지요? 시편 51편으로 한번 가볼까요?
(시 51:5)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표준새번역] “실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고, 어머니의 태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 안에 있던 자들을 자기 안에 넣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새 사람으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그게 구원이지요? 바울 서신에 두 줄 건너 한 번씩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말이 어떤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아담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하다고 우기고, 자기가 자기의 기준에서 악한 것만을 악한 것이라고 우기던 자들이었다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사람들입니까? 자기의 뜻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우리를 죄에서 건져낸 구원의 방법이요 수단으로만 생각하신다면 그 것은 아직 반쪽밖에 모르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단순히 그렇게만 이해하고 계시니까 자꾸 하나님께 뭔가 보답을 해 드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나와서 가야할 목적지가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구원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신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집어넣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셨다는 데까지가 완전한 구원에 대한 이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어떤 보답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격적이며 성품 적으로 이미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존재론 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신 8:2-6) “2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를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너희를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너희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3 주께서 너희를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너희도 알지 못하고 너희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다. 4 지난 사십 년 동안, 너희의 몸에 걸친 옷이 해어진 일이 없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다. 5 너희는, 사람이 자기 자녀를 훈련시키듯이, 주 너희의 하나님도 너희를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겨 두어라. 6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하여라.”
이스라엘이 버스로 여섯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왜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돌고 돌아야 했습니까?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거기는 거인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 들은 너무나 크고 견고하다“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이 모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40년 광야를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그 광야에서 40년을 유리방황하게 하신 것은 너희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 광야 40년을 우리 인생에 비유를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목적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생업이나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은 전부 하나님께서 주신 가시적인 만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진짜, 배만 부르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지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만나를 통해서 ‘이 만나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게 될 때 정말 행복한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광야 인생을 허락하시고 만나를 주시는 것입니다.
(출 16:2-4) “2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스라엘이 ‘우리가 배가 고파서 그렇지 배만 부르면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 할 수 있다’라고 불평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너희가 정말 배만 부르면 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지 내가 시험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 속에서 광야 40년을 살면서 ‘우리의 참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 그 것 밖에는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소유가 풍부해지고 우리의 힘이 강해지면 우리 하나님을 잊게 되는 존재구나, 그런데 그 삶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구나, 정말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순종하며 살아야 행복해지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신 8:12-16) “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15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직업, 환경, 상황이 다 왜 주어지는 것입니까? 마침내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려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는 이 만나가 아니라 하늘의 만나,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숨어서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셔야 진정 참 행복을 누리게 되는 자들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담 안에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던 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서의 거룩한 삶을 한 발 한발 경주하면서 세상을 질그릇 깨듯 묵사발 내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는 오늘 본문처럼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복한 우리의 목적지를 자꾸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목적지를 향해 오늘도 열심히 달려라’ 여러분, 어떤 식으로든 여러분의 인생은 곧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하나도 빠짐없이 서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저주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목표 지점만 바라보십시오. 혹시 여러분의 환경, 상황, 직업, 이 땅의 만나 때문에 기죽어 계신 분들 계십니까? 그 만나 아니라고 그러시잖아요? 혹시 여러분의 가진 것과 힘이 넘쳐서 하나님과 소원하게 되신 분들 안 계신가요? 그게 우리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진짜 힘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올 한해도 우리 바른 목표지점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서머나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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