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언약과 노아의 반응
(김성수 목사)
(창 6:8‐22)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9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10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 이렇게 세 아들을 두었다. 11 ○하나님이 보시니, 세상이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12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썩어 있었다.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 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14 너는 잣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방주 안에 방을 여러 칸 만들고, 역청을 안팎에 칠하여라. 15 그 방주는 이렇게 만들어라. 길이는 삼백 자, 너비는 쉰 자, 높이는 서른 자로 하고, 16 그 방주에는 지붕을 만들되, 한 자 치켜올려서 덮고, 방주의 옆쪽에는 출입문을 내고, 위층과 가운데층과 아래층으로 나누어서 세 층으로 만들어라. 17 내가 이제 땅 위에 홍수를 일으켜서, 하늘 아래에서 살아 숨쉬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을 쓸어 없앨 터이니,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하고는, 내가 직접 언약을 세우겠다. 너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을 모두 데리고 방주로 들어가거라. 19 살과 피를 지닌 모든 짐승도 수컷과 암컷으로 한 쌍씩 방주로 데리고 들어가서, 너와 함께 살아 남게 하여라. 20 새도 그 종류대로, 집짐승도 그 종류대로, 땅에 기어다니는 온갖 길짐승도 그 종류대로, 모두 두 마리씩 너에게로 올 터이니, 살아 남게 하여라. 21 그리고 너는 먹을 수 있는 모든 먹을거리를 가져다가 쌓아 두어라. 이것은, 너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 짐승들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22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 꼭 그대로 하였다.”
(창 9:8-17)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에게 직접 언약을 세운다. 10 너희와 함께 있는 살아 숨쉬는 모든 생물, 곧 너와 함께 방주에서 나온 새와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에게도, 내가 언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다.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및 너희와 함께 있는 숨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13 바로 무지개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가 될 것이다. 14 내가 구름을 일으켜서 땅을 덮을 때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나면, 15 나는, 너희와 숨쉬는 모든 짐승, 곧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날 때마다, 내가 그것을 보고, 나 하나님이,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 곧 땅 위에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세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땅 위의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언약의 표다."
여러분이 보신바대로 오늘 본문에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소위(所謂) 노아 언약과 그 언약에 반응한 노아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메시지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언약은 우리가 지금 읽어본 바대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홍수전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 멸하실 것이지만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는 방주를 짓게 하고 방주 안으로 넣어 살려 주시겠다는 약속이고 또 하나는 홍수 후에 무지개를 주시면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시지 않으시겠다는 약속 두 가지입니다.
그 두 약속을 하나로 연결해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의 궁극적 안식을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죄악의 세력을 다 청소 하실 것인데 그 중에서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당신의 은혜를 부으시고 방주 안으로 건져 내셔서 그 멸망의 홍수 속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절대 홍수 후의 인간들이 홍수전보다 나아지거나 착해졌기 때문에 두 번째 언약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언약의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언약인 것입니다.
(창 8:20‐21) “20 ○노아는 주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집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서,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21 주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 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근거가 뭡니까? ‘세상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했기에’가 아니라 ‘세상이 여전히 악해서’입니다. 그렇지요? 이 구절에는 두 가지의 아주 중요한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21절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언약을 주시는 근거가 세상은 어떠한 경고의 나팔에도 절대 스스로 선해질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다른 방법을 쓰시겠다는 암시이고(은혜)
두 번째는 20절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방주 안에 숨겨져 건짐을 받은 존재들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말미암게 되는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20절을 보시면 애석하게도 부정한 짐승들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정결한 짐승이 제물로 제단에 바쳐집니다. 그 말은 부정한 것들이 정결한 것의 희생으로 살아나게 됨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온전한 당신의 은혜로만 건져 내실 것임을 노아의 언약 안에서도 반복해서 천명하고 계십니다.
(창 7:2,8) “2 모든 정결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그리고 부정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두 쌍씩, 네가 데리고 가거라. 8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것도,”
여기보시면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 속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모두 태우게 하십니다. 도대체 부정한 짐승들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부정한 짐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을까요? 그 반대로 정결한 짐승은 뭘 그렇게 잘 했기에 정결한 짐승이 되었나요? 그냥 하나님께서 너는 정결한 짐승, 너는 부정한 짐승 이렇게 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도 짐승들을 분류할 때 그 정결함과 부정함의 구별이 있나요? 지금은 없지요? 그럼 왜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또 제사의 규례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가르셨을까요? 거기서 ‘부정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타호르 로’는 ‘결코 깨끗하지 않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토록 더러운 것들은 그냥 방주 밖에 두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그토록 더러운 것들까지 방주 속에 넣어서 구원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거기에서 구원의 원리와 방법에 대해 힌트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한 가지는 정결하고 부정한 것은, 다른 말로 구원받을 자들과 구원에서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정하신다는 것이고(정결하고 부정한 것들을 하나님 마음대로 정하셨으므로) 또 하나는 너무 너무 더러워 다 홍수 속에 넣어서 죽여 버려야 할 것들이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살아나게 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분류 속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홍수가 끝나자 정결한 짐승들이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은 그 정결한 짐승이 제단에서 불타는 냄새를 기쁘게 흠향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노아의 홍수 사건을 포함한 성경의 모든 내용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향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지요. 여러분, 노아의 이름이 무슨 뜻이라 했습니까? ‘안식’입니다.
(창 5:28‐29) “28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여기서 안위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노아’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성품이나 인생의 내용 등의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했지요?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의 뜻이 열국의 아비이지요. 그 이름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말라기는 무슨 뜻입니까?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말라기의 내용이 뭡니까?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리라’입니다. 나훔의 이름은 ‘위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훔서의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이 심판 속에서도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학개는 축제, 잔치, 절기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학개서는 성전이 재건되고, 축제와 잔치가 열리며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는 일들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하나님이 기억하심’이라는 뜻이고, 요나는 어리석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요약한 것이기도 하고 그 사람의 성품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그 사람의 정체성을 총칭하고 요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이름이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홍수 사건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 성경의 수신자인 교회들에게 설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식이 어떻게 오게 됩니까? 그 안식은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청소를 하심으로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홍수입니다.
우리가 몸이 고단할 때 집에서 푹 쉬고 싶은데 집 안이 너무 더러우면 푹 쉴 수 있나요? 침대위에는 개털이 가득하고 이불은 몇 달을 빨지 않아서 냄새가 진동하고 베개에는 땀 냄새가 배어서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고 그렇다면 우리가 제대로 쉼을 얻을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위로와 안식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더러운 것들과 지저분한 것들이 싹 청소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심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세상 심판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안식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아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오히려 기다리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은요?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쓰나미 같은 천재지변을 바라볼 때 두려움 보다는 ‘이제야 우리 주님이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다 청소 하시려나?’하는 기대의 마음이 더 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최종적인 위로와 안식을 약속하시면서 그 약속을 당신의 약속이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본문 17절과 18절을 보세요.
(창 6:17‐18)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 9:9‐10)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시고 그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로 들어가 안식을 취하게 하시겠다는 언약을 하시면서 ‘내 언약’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도 그 약속을 가리켜 ‘내 언약’이라 부르십니다. 그 말은 그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이 그들의 열심을 보태거나 도와서 이루어지는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이 혼자서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 언약’입니다. 그 언약이라는 단어 ‘베리트’는 원래 ‘자르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언약을 할 때 항상 고기를 쪼개놓고 그 사이로 언약 당사자가 지나가는 의식을 행했기 때문에 ‘언약’이라는 단어가 ‘베리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가리켜 ‘내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시면서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께서 홀로 지나가셨던 사건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인간의 도움이나 인간들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닌 당신 홀로 세우시고 완성하실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사실은 방주의 구조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방주는 삼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방주는 삼층 천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방주의 조감도를 누가 그립니까? 하나님이 그리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하나님에 의해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됩니까? 방주의 문은 안에서 닫을 수 없는 문입니다. 방주의 문은 하나님이 밖에서 닫아 주셔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하나님에 의해 완성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의 창문은 단 하나인데 16절을 보시면 그 창은 위에서부터 한 규빗 깊이로 내야 합니다. 그런데 16절에서 ‘위에서부터’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마알’은 70인 역에서 ‘아노뗀’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에 요한복음 공부할 때 배웠듯이 그 헬라어 ‘아노뗀’은 예수님이 잘 쓰시던 단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은 어떻게 받습니까?’라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위로부터 거듭나야 한다’고 답을 하신 장면이 기억나세요? 거기서 쓰인 단어가 ‘아노뗀’입니다. 그러니까 방주의 창문은 유일하게 밖을 볼 수 있는 창이었는데 그 창이 하늘을 향해 나 있었고 위로부터 나 있었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은 오직 하늘만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 창이 위로부터 난 것’이라는 어구 속에서 그 하늘 소망은 오직 하늘에서부터 선물로만 주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함께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고 싶은 자들에게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이지 우리 인간 측에서 무언가 공로(功勞)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을 신학에서는 ‘언약 안에 있는 자’라 표현을 하기도 하고, 그 은혜의 혜택을 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켜 ‘언약 밖에 있는 자’라고 표현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방주는 하나님의 언약이다’라고도 이야기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서 완성이 되는 것이므로 ‘방주는 하나님의 언약이다’라는 명제는 참인 것입니다. 그런데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노아의 언약(言約)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豫表) 하는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당신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 택한 백성들을 당신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넣으시고 영원히 함께 거하시는 천국의 현실을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수단이 바로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모형에 해당하는 작은 약속들을 끊임없이 하시고 그 약속을 지켜내십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의 현장인 것입니다. 그 언약 안에 우리 성도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지켜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안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서두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기식하는 것들을 다 쓸어버리시겠다는 공포(公布)와 함께 노아와 그의 식구들에게 방주(方舟)를 지으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그 방주 안으로 넣으셔서 살려 내시겠다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노아는 그 언약을 믿고 그 때부터 방주를 지었습니다. 따라서 노아에게 있어서 방주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방주를 짓고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노아가 그 언약 안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 7:23) “23 이렇게 주께서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을 없애 버리셨다. 사람을 비롯하여 짐승까지, 길짐승과 공중의 새에 이르기까지, 땅 위에서 모두 없애 버리셨다. 다만, 노아와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과 짐승들만이 살아남았다.”
이렇게 방주라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자들만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언약이라는 단어는 ‘약속과 계획’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 안에 들어 있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을 의로운 자라 부르고, 거룩한 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마음대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누어서 ‘이러한 종류는 정결하다고 해라. 그리고 저러한 짐승들은 부정한 짐승이라 해라’고 하나님 마음대로 정하신 것처럼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따라 그냥 정결한 자, 거룩한 자,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롬 9:11‐13) “11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지속되게 하시며, 12 하나님의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3 그것은 기록된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이지요. 이 십자가로 말미암은 은혜의 선택,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 방주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노아는 자기가 뭘 잘해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의인이 된 것이고 완전한 자로 간주(看做)가 된 것입니다. 그 은혜의 교리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노아와 일곱 식구가 방주 안으로, 다른 말로 언약 안으로 구별되어 들어가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쓰레기처럼 더럽게 패괴하고 강포하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부은 어떤 자들을 구별해서 건져 내시는 것을 가리켜 ‘의’라 하고, ‘거룩’이라하는 것이며 ‘완전한 자’라 하는 것입니다. 잘 구별하셔야 합니다. ‘의’나 ‘거룩’이나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함’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구별하셔서 방주에 넣으시는 것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명령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 하라’는 말씀에 겁을 먹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꼴을 보면 절대 난 온전함에 이를 수 없는 자인데 어떻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실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구별시켜서 언약 안에 집어넣은 자들은 노아처럼 당세에 완전한 자로 여겨 주시는 것이고 반드시 새로운 몸 안에서 그렇게 만들어 내실 것이니까요. 따라서 여러분은 이미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님처럼 온전한 분들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방주 속에, 언약 속에 들어와 있는 자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 있던 노아가 방주를 짓고 방주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함으로 그가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 있던 자라는 것을 증명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자라는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서도 분명 세상과 구별되는 어떤 증거가 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를 짓고 방주로 들어가는 노아의 그림이 오늘날에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어야 합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방주 속으로 들어간 것은 비가 아직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 속으로 들어가서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비가 안 오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바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객관적인 정황으로 볼 때 충분히 내가 바보가 될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을 행위로 보여주는 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날 방주로 들어갈 수 있는 길도 똑같이 이 세상에 믿음을 보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나의 죄를 속하시고 나를 구원하셨으며 이제 곧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방주를 탄 이 시대의 노아들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마치 나에게는 보이는 자처럼, 분명히 내 안에 살아계신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모습이 우리에게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분명 완성이 되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을 세상에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지금 우리 세대에서 방주를 짓고 방주 속으로 들어가는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세대에도 노아의 홍수 때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경고의 메시지를 똑같이 주셨습니다. 아니 더 무시무시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벧후 3:12) “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경고의 메시지에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벧후 3:3‐5) “3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4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뒤로, 만물은 처음 창조 때로부터 그냥 그대로다" 할 것입니다. 5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오랜 옛날부터 있다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서 물로 형성되었다는 것과, 6 또 물로 그 때의 세계가 홍수에 잠겨서 망해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일부러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조롱거리로 삼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왜 지금 아무런 징조가 안 보이냐는 것이지요.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벧후 3:6‐9) “7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서 멸망을 당할 때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회개의 기간 동안에 얼른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에 올라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불타는 종말을 눈으로 보는 자들이 바로 성도이며 그 종말을 보는 자들로서 그 종말을 준비하는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으로 방주를 짓는 자들이고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지만 하나님께서 온전한 자로, 완전한 의인으로 간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롬 3:21‐24)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노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값없이 온전한 자로 간주(看做)가 되는 것입니다.
(롬 5:1) “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확실하지요? 우리는 노아처럼 세상이 바보라고, 어리석다고 조롱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온전한 자, 의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의 방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믿는 길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당에 앉아 있는 사람치고 예수를 안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예배당 안에 가라지 들이 무수히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무엇으로 구별이 될까요? 다른 말로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자와 방주 밖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벧전 2:6‐8) “6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골라낸 귀한 모퉁잇돌 하나를 시온에 둔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8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요,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보시면 예수를 믿지 않는 자를 가리켜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계관과 가치관과 행동양식의 변화를 반드시 수반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하던 자들이 ‘너는 죽고 하나님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믿는 자의 행위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실수나 실패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삶의 전 영역에서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행동양식에 머물러 있으면서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라고 우기는 것은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저 ‘예수는 하나님이고 그 분이 실제로 존재하셨으며, 우리를 위해 갈보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 동의에 불과하다면 귀신들도 전부 의인이 되어야 하고 그들도 전부 천국에 가야 합니다.
(약 2:19) “19 당신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그런 종류의 믿음은 귀신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압니다. 그리고 그 분이 언제 오셔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눅 8:27‐28) “27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동네에 사는 귀신 들린 어떤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았으며, 집에 머물러 있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 28 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서, 그 앞에 엎드려서, 큰소리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우리 성도의 믿음과 귀신들의 믿음은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 성도의 믿음이 귀신들의 믿음과 다른 것은 우리 성도들의 믿음은 귀신들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거룩한 행위가 수반된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한 것들이 우리 안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질 때에 하나님에 의해 나타나게 되는 것이기에 귀신들은 절대 그러한 참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게 된 자들의 삶 속에서는 노아처럼 순종의 삶이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삶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신 도구요 방법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자신을 죽여 하나님과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서는 반드시 그 십자가의 삶과 자기 부인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성도의 삶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삶과 새로운 몸으로의 부활의 삶이 실재(實在)화(actualize) 되어지는 것이 반드시 보여 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삶이 곧 새로운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면 반드시 우리의 인생 속에서 그 십자가와 자기 부인과 부활의 actualize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뭡니까? 죄 된 옛 몸이 죽고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요?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이웃을 용서해 주고, 참아주고, 사랑해 주고, 화평케 해 주는 것은 세상 적으로 볼 때 내가 지는 것같이 보이고, 내가 죽는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만을 위해 살던 세상 왕으로서의 옛 몸이 죽고 자기를 죽여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새로운 부활의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과 귀신의 믿음은 그렇게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악마의 도구로 쓰여 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예배당 안에서 예수를 믿는 척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이단 종파에서 나누어 준 DVD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만이 온전히 예수를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교회들은 전부 괴멸(壞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보니까 앞에서 교육을 하는 교육 목사가 자기 교회 교인들을 세상의 다른 교회들에게로 들어가서 그 교회들을 공중분해 시키고 오라고 파송을 하면서 그 파송(派送) 식에서 이르는 주의 사항이 이러했습니다. 첫 번째가 ‘교회에 잠입을 하거든 그 교회에서 가장 경건한 자라는 평판을 얻어내라’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그 교회 목사와 가장 친해져라’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목사와 친해지거든 교인들과 목사와의 문제점을 파악해서 교인들과 목사와 싸움을 일으켜라’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공중분해(空中分解) 시키라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출정(出征)식을 갖고 자기들이 깨야 할 교회로 경건한 껍질을 쓰고 잠입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수년 간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가서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하면서 호시탐탐 교회를 깰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는 마귀의 가라지 들도 경건한 탈을 쓰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귀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 진심으로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절대 자기가 부인되고 다른 이들이 인기를 얻는 모습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이렇게 진짜 믿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가 따라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저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낮아지고, 작아지고, 섬기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자기 몸을 죽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진짜 언약 안에,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도 연극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자고요. 여러분은 과연 방주 속에 들어와 계신 분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방주 밖에서 방주를 짓는 노아들을 향해 비웃음을 보내는 분들이십니까?
(창 6:22)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보십시오. 은혜를 입은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 어떠한 것인지가 믿어지자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노아가 세상과는 담을 쌓고 120년 동안 방주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위의 2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120년 동안 식량도 저축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그와 그의 식구들의 생계에 필요한 농사도 열심히 지어야 했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대로 다 하면서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그러한 일상생활은 방주를 짓기 위한 생존의 수단이었습니다. 노아의 관심(觀心)은 온통 방주에 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성도들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확실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예수를 믿는 일을 삶의 우선순위에 올려놓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수반하는 것이라 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데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정과 직업과 사회생활과 교회 생활에 최선을 다함으로 그 일상의 삶들을 우리 신앙 성숙의 도구로 잘 쓰면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일상생활은 하나님의 명령인 방주를 짓는 일을 하기 위한 생존의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인들의 삶은 노아가 그랬듯이 우리의 뜻이 아닌, 우리의 꿈과 비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데에 기여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소원이 뭡니까?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잘 반사해 낼 수 있는 하나님의 처소로 아름답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사람,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하늘만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창문이 하늘을 향해 한 개밖에 뚫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언약 안에는 세상으로 난 창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하늘만을 소망하며 바라보고 계십니까?
(골 3:1‐3) “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자들, 다른 말로 방주 안으로 들어가 구원을 받은 자들은 세상 것, 땅의 것이 아닌 위엣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백 이십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온갖 세상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바라고 믿었던 것처럼, 창일하는 홍수 속에서 일 년하고도 십칠일을 방주 속에서 오직 하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소망했던 것처럼 우리도 방주 안에, 언약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로서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과 하늘의 것을 소망하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유일한 증거여야 하는 것입니다.
(벧후 3:10‐14)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 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 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 가운데서, 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을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14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만큼,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는 것. 이것이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방주 짓기인 것이며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방주 안에 들어가는 자들은 반드시 세상을 향해 안타까움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경고의 메시지를 삶으로 입으로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벧후 2:5)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성경이 노아를 가리켜 ‘의를 전파하는 노아’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만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입으로 삶으로 전파하며 살았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노아는 성경에 나오는 복음 전파자들 가운데 가장 긴 세월을 사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잖아요? 120년을 사역한 선지자나 복음 전도자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도 읽어보았지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냥 ‘세상이 악해서 다 쓸어버릴 것이니까 너는 방주를 짓고 그 속에 들어가라’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중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그 마음을 그대로 자신의 삶에 담아서 세상에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6장 6절의 하나님의 한탄과 근심을 보고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삶과 입으로 대변을 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복음 전도자들에게 필요한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서 반드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바로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다른 말로 ‘나는 정말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마음을 헤아려 알고 있는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게 되는 실수는 그들의 복음 전파가 악인들의 구원보다는 심판 예언의 성취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 선지자였습니다.
우리가 내일 송구영신 예배 때 요나서를 가지고 공부를 할 텐데, 그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셔야 한다는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짜로 니느웨가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자 화를 내면서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땡깡을 부리지요? 여러분 전도자의 염원은 세상의 멸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안 됩니다. 전도자의 염원은 구원의 소망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왜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의의 복음을 전파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식하는 것들을 다 죽여 버리시겠다고 하시고 방주를 지으라고 하시는데 방주를 딱 한 개만 지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심판의 홍수 속에서 살아 날 수 있는 생물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 방주 안에 동물들이 더 많이 타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기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그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그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자신의 입과 삶으로 세상에 전한 것입니다. ‘제발 이 방주가 더 이상 필요 없게 어서 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나는 이미 구원 받아서 괜찮은데 너희는 이제 큰일 났다. 아이고, 쌤통이다’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심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렘 18:7‐8) “7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그들을 부수거나 멸망시키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8 그 민족이 내가 경고한 죄악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생각한 재앙을 거둔다.”
(벧후 3:9) “9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요 3:17) “17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바로 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만 당신의 생명을 불어 넣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한 무리를 택하셔서 그들을 당신께 순종하는 의로운 자들로 다시 만드셔서 방주 안에다가 넣으시는 것입니다. 노아가 바로 그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스스로 의를 전파하는 복음 전파의 사역에 투신(投身)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아주 잘 나타난 곳이 요나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욘 3:4) “4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하나님의 경고가 이러합니다. ‘사십일 후에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가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니느웨를 무너뜨리지 않으십니다.
(욘 4:10‐11) “10 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11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은 변덕이 죽 끓듯 하시는 분이라는 둥 하나님은 일구이언 하시는 분이라는 그런 망발(妄發)을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장면들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꺼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노아는 그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안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라면, 방주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헤아려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지 까지 고민하고 묵상하며 행동에 옮기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향하여,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혹은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여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로 그들에게 대응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지금은 이렇게 당해 주지만 심판 때가 되면 너희들 큰 코 다치게 될 거다’ 이렇게 그들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갈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자신을 향해 바보라고, 어리석다고 손가락질을 해대는 사람들에게 ‘우리 하나님은 당신들이 회개하고 참회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이 방주에 모두 타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어서 어서 그 죄악의 자리에서 돌이켜 이 방주로 오르세요.’라고 하나님의 의의 전파를 위해 몸을 던졌던 노아처럼 우리도 그렇게 우리 하나님의 심장으로 세상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해 주며, 원수를 위해 그들의 발을 닦아주고, 원수를 섬겨 주셨던 우리 주님의 그 삶을 좇아 우리도 이 땅에서 그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 보십시다. 성도의 삶은 바로 그 그리스도의 삶의 actualize 현장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주신 우리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임에도 사랑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계신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여러분 우리 그 하나님의 뜻과 심중을 좀 헤아려 이제 그 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한 발 한발 경주해 나가십시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당에 나와서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하는 것을 방주 짓기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120년 동안 3만 5천 톤에 육박하는 커다란 방주를 자기와 자기의 세 아들들과만 지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전문적인 목수들이나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을 임금을 지급하고 고용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노아와 함께 방주를 짓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노아만 방주를 지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은 진짜 방주를 짓는 것은 겉모양만 번지르르한 배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손발을 움직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의 진짜 방주 짓기, 진짜 신앙생활은 예배당 안에서의 번지르르한 종교행위가 아니라 여러분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순종의 삶인 것입니다. 이기적인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열심히 나를 죽이고,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열심히 우리의 이웃들을 섬겨 주자고요. 그게 진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짓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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