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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유대인과 율법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24.

 

 

유대인과 율법

 

(김성수 목사)

 

 

(엡 2:11-22) “11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뽐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에게 여러분은 무할례자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12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13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2)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또는 '우리 둘을') 17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3)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사 57:19; 슥 9:10) 18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22 그리스도 안에서 4)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또는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함께 건물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거하실 곳이 되어갑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2장11절부터의 내용을 공부하겠습니다. 2장11절부터 22절까지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12절의 “그 때에” 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11,12절 부분과 13절의 “이제는”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13-18절까지, 그리고 세 번째로는 19절의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는 구절로 대표되는 19-22절까지입니다. 각 부분을 대표하는 단어들을 보시면 금방 아시겠지만 이 부분은 이방인으로 대표되는 죄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기술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앞서 공부한 1절에서 10절까지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3절까지는 예수 믿기 이전에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었었고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었다는 과거의 내용을 담고 있고 4-6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걸작품을 만들어 놓으신 현재의 모습을 담고 있지요? 그리고 7절에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1절부터 22절까지에서 7절까지의 말씀을 이방인인 에베소 교인들을 예로 들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카고 무디 기념교회의 담임 목사이셨던 해리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이 캘리포니아에서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어떤 집시 여인이 25센트만 내면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운세를 봐 주겠다고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은 25센트를 그 여인에게 주면서 “나는 이미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정확하게 알고 있소“ ”한번 들어 보실래요?“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신약 성경을 꺼내셔서 오늘 우리가 함께 보았던 에베소서 2장을 읽어 주셨답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을 읽어주시면서 “죄와 허물로 죽어있었고 불순종의 자녀였던 이 부분이 나의 과거요” 그리고 4-6절을 읽어 주시면서 “이게 나의 현재요” 그리고 7절을 읽어 주시면서 “이게 나의 미래요“ 하셨답니다. 화가 나서 자리를 뜨려는 그 여인에게 ”잠깐 앉아보시오, 내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알려 드리리다“ 그러면서 11절부터 22절까지를 읽어 주셨다지요?

 

여러분이 11절부터 잘 보시면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무너져 버렸고 이제 둘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대다수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섞여 있던 교회였습니다. 당연히 둘은 하나가 되기 힘들었고 분열의 조짐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대다수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에베소 교회에게 이방인들이 어떤 지경에서 구원을 받은 것인지를 다시 확인시켜 교회의 하나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 이방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유대인들보다 더 구원으로부터 멀어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무 할례 당이라 불릴 만큼 율법도 몰랐고 하나님도 몰랐던 자들이었습니다. 12절에 “하나님도 없는 자“라는 말은 ”아떼오스“라는 말인데 그 말은 ”하나님도 모르는”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서 율법도 받았고 제사도 지냈으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시로 계시해 주던 유대인들과 비교해서 이방인들은 얼마나 무지했고 불가능했던 존재였는가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율법과 제사를 가지고 있었고 아브라함 때부터 수많은 언약들을 받았던 유대인들도 실패했다면 하물며 너희 이방인들은 어떠한 지경이 될 뻔했느냐?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너희가 유대인과 하나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재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화평 하라“고 바울은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15-16절)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당시에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소외를 당했습니다. 성전에도 이방인의 뜰이 따로 있었습니다. 성전 둘레에는 제사장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의 뜰이 있었고 그리고 조금 동쪽으로 여인들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 세 뜰은 모두 성전과 같은 높이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19계단을 아래로 내려오면 커다란 벽이 있었는데 바로 그 벽 너머가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전에 가도 그 벽 너머의 이방인의 뜰에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1871년에 발견된 너비가 1m정도 되는 성전에 붙어 있던 사인 판이 터키의 이스탄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방인도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 너머로 들어올 수 없다. 그같이 하다가 잡힌 사람은 누구든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그 자신에게 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런 이방인들이 지금 유대인들의 하나님이라고 여겼던 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로 적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서로를 미워했던 이방인과 유대인도 하나로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한국 사람끼리 모인 교회가 왜 이 모양입니까? 참, 사랑이 없어요.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파벌을 만들고...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하나라고 하는데, 워낙 가짜가 많아서 그런지 놀 때만 하나지, 다른 일을 할 때는 정말 하나가 되기가 힘들지요? 우리 교회는 아직 무슨 일을 도모해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아마 별로 다르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이 뭐할 때 서로 안 싸웁니까? 어떠한 유익을 얻어내기 위해 한 편이 되어서 동일한 목적을 향해 갈 때, 안 싸웁니다. 극장에서 영화 보다가 괜히 싸우는 사람 보셨나요? 저 주인공이 왜 우리 와이프보다 예쁜 거야, 그러면서 옆 사람 막 패는 사람 보셨나요? 한편이 되어서 한 목적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승승장구가 나에게 전혀 질투를 내게 만들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다른 사람이 영화를 보면서 나보다 더 깊은 감동을 느껴서 나보다 더 많이 울었다고 해서 여러분 화나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목적을 향해서 한 편이 되어 서로 도와주고 일으켜 주며 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더 잘 되고 못 되고의 차이가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똑같은 공동 상속자들입니다. 그런데 뭘 서로 질투할게 있나요? 그런데 왜 싸우죠? 목적이 다르거나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언제 우리는 다투지 않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무덤 안에서 시체들이 싸우는 거 보셨어요? “넌 왜 그렇게 무덤이 커?” 이런 거 보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왜 싸우죠? 살아있으니까 싸우지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었다면서요? 그런데 안 죽은 거지요? 그러니까 남 땅덩어리 보면서 배 아프고 질투 나고 그렇지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가 되신 분들입니다. 벽이 다 헐어졌다고 하는데 왜 여전히 그렇게 두텁고 높은 벽을 치고 계세요?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여러분은 속고 계신 거예요. 다 허물어 버리세요. 여러분은 하나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그렇게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었음을 천명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왜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까? 바울이 이 에베소서를 쓰기 3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로 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같이 있는 모습을 유대인들이 보고 “더러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왔다고”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바람에 로마 천부장이 백부장들과 로마 군인들을 데리고 성전으로 소동을 진압하러 왔다가 바울을 붙들어서 감옥에 넣은 것입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차별을 했던 견원지간의 유대인과 이방인이 십자가로 한 권속이 된 것입니다. 19절에 너희는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 “오이케이오스”는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가족이 되었습니다. 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럼 왜 유대인들이 그렇게 이방인들을 차별 대우했는지 공부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그렇게 개 취급한 것은 자기들은 율법과 제사를 가지고 있었고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킬 때 우상이나 섬기고 열심히 죄를 짓던 자들이었다는 선민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자존 을 심어주었던 율법의 진의가 어떤 것인지 알고 또 유대인들은 어떻게 그 율법을 오해했는가를 공부해보면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율법에 대해서 제대로 잘 공부해 놓으시면 성경 전체의 맥을 짚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정리해 놓자고요.

 

우리는 공부하기를 율법은 지켜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적어놓은 법조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조에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이 그렇게 살면 가장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다“라고 정해 주신 삶의 원리요 방법을 최소한으로 의문으로 적어놓은 것을 율법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살면 신적 성품에 참여하게 되어 행복하고 기쁜 하늘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마치 어떤 기계의 매뉴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기계를 사서 그 매뉴얼대로 잘 쓰면 아주 오래 고장 없이 잘 씁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막 쓰게 되면 금방 고장 날 뿐 아니라 그 기계가 갖고 있는 훌륭한 기능들을 제대로 발휘를 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기쁘고 자기 능력을 잘 발휘하며 살 수 있는 인간 매뉴얼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스스로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인간들을 지으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법, 통치를 상징하는 선악과만 통과했다면 하나님과 같이 만들어서 하늘에서 영원히 함께 사시려고 했습니다. 그게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어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먹도록 사탄이 유혹할 때 어떻게 유혹을 합니까?

 

(창 3:5)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탄은 인간들에게 거짓 약속을 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힘으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너희도 하나님과 같이 되고 지상낙원도 만들어 봐“ 지금도 하나님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 앞에 선악과를 두십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말씀하셨던 그대로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는다.” 그 말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들으세요, 분명 행위 언약은 파기된 것이 아니란 것을 여러분은 잘 아셔야 합니다. 자, 그리스도인은 그렇다 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우리는 성경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어떻게 그 법을 알려 주십니까? 양심에다가 그 율법을 새겨 놓으십니다.

 

(롬 2:12-15) “12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망할 것이요, 율법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입니다. 15 그런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의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양심이라는 형태로 집어넣으십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서 율법이 언제 주어졌습니까? BC1,500년 경 모세에게 시내 산에서 주십니다. 그런데 BC1,700년 경 고대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을 보면 마치 모세의 율법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2.2m의 원통형 비석에 적혀 있는 함무라비 법전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수백 년 전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282개 조항의 소송법, 절도 법, 유괴, 강도, 병사에 관한 규정이라든지 상법, 채권 채무 법, 가족 법 등이 적혀 있는데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라, 물건을 훔친 자는 노예로 만들어라, 폭력을 휘두른 자는 곡물로 배상하라“ 같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땅과는 거리가 먼 우리 고조선 의 한서지리지 팔조법금에도 똑같은 법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한다,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갈비를 부러뜨리면 똑같은 갈비를 부러뜨린다.“ 이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모세 율법이 비슷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모세 율법이나 함무라비 법전이나 팔조법금이나 그 맥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마음에 심어두신 양심이라는 것에 새겨두신 법이 총화 되어져서 사회법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심판대에서 핑계를 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하나님의 법은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율법은 모든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인간 매뉴얼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인간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able to sin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제 인간은 타락을 하고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고 죄만 지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저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지킬 수가 없으니까? 그 법은 저주일 수밖에요. 인간의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주 뛰어난 한 민족을 택하셔서 그 율법을 의문에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지켜봐라“ 하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약속까지 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지키면 너희에게 내가 태초에 주려 했던 그 복된 삶을 , 하늘의 풍요를 누리게 해 주겠다”

 

(신 5:28-33) “28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의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복된 삶의 조건이 뭡니까? “법을 잘 지키고 도를 행하면“입니다.

 

(신 28:1-14)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7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8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10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 하리라 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면 하늘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중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비슷한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막 10:29-30)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5)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또는 '기쁜 소식' 30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 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백배나 받게 된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목사들이 헌금을 짜낼 때 많이 드는 구절입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께 투자하면 백배로 돌려받을 수 있는 건가요? 이 구절도 역시 거듭난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핍박 속에서도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평안과 하늘의 풍요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아들을 바치면 100배로 주세요? 아내를 바치면 아내가 100명이 됩니까? 그런 것은 하나도 생각해 보지 않고 “집과 전토를 바치면 백배로 준다.“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잘 보시면 29절에 나열된 것들 중에 30절에는 빠진 것이 있습니다. “아비”입니다. 왜 아비는 빠졌을까요? 아비는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어떤 것에도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걸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사랑하는 자,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은 아비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의 풍성함을 이 땅에서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핍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을 우리도 이 땅에서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신 28:15-)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17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59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60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61 또 이 율법 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이렇게 엄청난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없다? 지킬 수 없다고 했지요? 선을 행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적인 타락 상태인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대신 오셔서 하나님의 요구사항인 그 율법을 다 지켜내시고 그것을 통째로 우리 것으로 여겨 주셔서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킨 자가 되는 것이고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과대평가해서 율법을 오해했습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전체 인간의 대표인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은 그 율법을 거울삼아 자신들의 추악한 모습을 보라고 율법을 주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 거울로 직접 몸을 닦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롬 3: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인간이 율법을 지켜 낼 수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 율법과 함께 희생 제사를 주셨겠습니까? 못 지킬 것을 뻔히 아시고 그것을 못 지켰을 때 속죄의 방법을 함께 주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이 주어지면 정확하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정작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위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정말 눈을 뜨게 해놓으신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반응은 “정직”입니다. 다른 말로 “회개”라고도 합니다.

 

위선으로 가는 사람들은 율법을 받으면 지킬 수 있을 만큼 지킵니다. 남들에게 “선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을 만큼 지켜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포하기를 “인간은 법을 지킬 수 없다“ 고 합니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것처럼 하고 있다는 것은 뭡니까?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법을 지킬 수 없는 자들의 부정직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부 정직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위선, 외식, 부 정직의 죄“

 

(마 23:28-33)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열심히 지킨다고 지킨 유대인들에게 아주 지독한 욕을 퍼부으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뱀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은 창세기를 줄줄 외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뱀이 얼마나 철천지원수로 여겨졌겠습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뱀은 곧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던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더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저주를 퍼부으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왜 똑같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 세리와 창녀들은 받아주셨습니까?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유대인들보다 훨씬 악하게 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자기의 죄를 인정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난 세리입니다. 맞습니다. 전 죄인입니다. 난 창녀입니다. 당연히 저는 죄인입니다“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고 자신의 부정직함과 사악함과 추악함을 인정하는 것을 우리가 회개라 한다고 했지요?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을 회개라 한다 했습니다. 표면적으로 죄인이라 찍힌 이들은 적어도 부 정직의 죄, 외식의 죄는 짓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칭찬을 받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하신 자들은 반드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자기들은 절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구원자로 등장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완벽한 시나리오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이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에서 율법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원리로 과거에도 죄를 짓고 현재에도 죄를 짓고 앞으로도 죄를 지을 지금도 겉으로 보면 율법 아래 놓여 있는 자들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율법에서 자유로워지고 죄를 지음에도 결코 정죄를 받지 않게 되는지, 그리고 유대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오해했던 것인지 로마서를 가지고 부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롬 5:20-21)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20절에 율법이 “가입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 말은 헬라어 ”파레이 셀코마이“입니다. 그 뜻은 ”나란히 들어오다“라는 뜻이거든요? 율법이 무엇과 나란히 들어왔다는 말입니까?

 

(롬 5:12)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가 ”에이 셀코마이”입니다. 거기에 “함께”라는“파라”가 붙어서 그 “죄와 함께 들어 왔다“라는 의미의 ”파레이 셀코마이”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 올 때 율법이 함께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이 죄와 함께 들어와서 한 일이 죄를 더 증가시켰다고 합니다.

 

(20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왜 율법이 죄와 함께 들어와서 범죄를 더하게 했다“라고 표현을 하는가? “더하게 했다” “플레오 나조”는 “명확하게 하다. 많게 하다”의 뜻입니다.

 

율법은 타락한 인간에게 죄에 대한 명확한 분별 지식을 줍니다.

 

(롬 7:7)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서 탐심이라고 번역이 된 “에피뒤메오”는 단순히 남의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원하고 원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눅 22:15)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이 단어하고 같은 단어라고 설명 드렸지요? 그런데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합니다. 이 탐심은 율법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십계명의 10번째 계명이지요.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출 20:17)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해놓고 열 번째에서 전부 종합해서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열 번째 계명은 ”네가 행위로 저지르지 않았을지라도 네 마음속에 간절히 원하고 원하는 그 것도 율법을 범한 것이다.“ 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10계명에서 그렇게 ”내가 행위로 저지르지 않았어도 내 속에 그 것을 하고 싶은 원하고 원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어도 죄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 것이 죄인 줄 몰랐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유치원에 가서 친구의 장난감을 집어오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나 어머니가 그 것이 잘 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전에는 아이는 절대 그 것이 잘 못된 것인 줄 알지 못합니다. 율법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나는 무지하게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율법이 죄와 함께 들어와서 인간의 죄를 더욱 명확하게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롬 7:8-9) “8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 합니다. 예전에는 한국에 장발 단속법이 있었습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면 법에 걸렸습니다. 양담배를 피우면 법에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남자가 리마리오처럼 머리를 길러도 됩니다. 전인권 씨처럼 평생을 파마를 하고 다녀도 괜찮습니다. 미니스커트가 아니라 수영복을 입고 다녀도 누가 뭐라 안 그럽니다. 양담배를 TV에서 판촉을 합니다. 죄는 법이 있어야 비로소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함께 율법을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영원히 죄가 뭔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계속 그 죄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찌꺼기가 가라앉은 겉으로 보기에만 맑은 물 컵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더러운 찌꺼기가 가라 앉아있는 물 컵은 젓가락으로 한 번만 휘저어 보면 얼마나 더러운 물인지 금방 알게 됩니다. 인간의 삶에 율법이 없으면 인간은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인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게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리고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다고 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빌 3:4-6)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율법을 깨닫지 못 했을 때에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펄펄 살아서 날 뛰었습니다. 그런데 계명이 깨달아지자 그렇게 펄펄 살아서 날 뛰던 자기가 죽고 젓가락으로 찌꺼기가 든 물 컵을 휘저은 것처럼 더러운 죄가 살아나더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뵈옵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요한이 밧모 섬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하지요? 다니엘도 에스겔도 하나님을 보자 모두 죽은 것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깨닫고 나서 그 의미를 알고 나니까 펄펄 뛰던 자신이 정작은 죽어있던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 7:9)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은 이렇게 죄를 명확하게 드러내어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율법은 타락한 인간이 죄를 더 짓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롬 7:8)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죄가 기회를 타서 “압홀메”라는 말은 “지렛대를 삼아서”라는 뜻입니다. 죄가 율법을 지렛대로 이용해서 죄인의 마음속에 “에피뒤메오” 탐심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이 필라델피아에서 elementary school 6학년 때 학교에서 폭죽을 가져오지 말라-그 목사님은 그 때가지 폭죽이 뭔지 관심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폭죽을 절대 가져오면 안 된다고 하니까 그게 뭔지 되게 궁금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것을 갖고 있는 친구를 물어, 물어 찾아내서 그 친구 집에 가서 그 폭죽을 얻어다가 학교에 가지고 가서 터뜨렸다고 합니다. 율법은 죄인들에게 죄를 더 짓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전에 읽은 로마서 5장 20절에,

 

(20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율법은 죄와 함께 들어와서 그러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 율법에 대해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힘을 쓸 수 있습니다. 그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들에게는 율법이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롬 7:1-6)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자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설명을 해 드리는데 율법에 대해서 또 가물가물 하시면 안 됩니다. 분명 타락한 인간은 율법 아래 태어납니다. 율법은 원래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이며 그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인간이 살게 되면 인간은 가장 행복하고 기쁘게 되는 이상적인 삶의 원리라고 했지요? 그런데 인간은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을 상실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부담이 되고 저주가 되어 우리를 옭아매는 사탄의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영원히 그 율법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 이런 죄 졌어, 너 저런 죄 졌어” 계속 율법이 우리를 고소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히 율법을 지킬 수도 없으면서, 율법으로부터 정 죄만 받는 인간들 중에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만 골라 내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으셔서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종이었던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지금 로마서 7장의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법적으로 그 남편에게 매여서 다른 이와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여인은 자유롭게 되어서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율법과 이혼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관계가 끝납니다. 둘 중 하나가 죽으면 그 관계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안에 넣어서 죽여 버리시고 다시 창조하셔서 예수님과 결혼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양의 신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망명(亡命)이라는 말이 있지요? 과거에 독재 정권 시절에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국가 보안법에 걸리면 다른 나라로 망명(亡命)을 하지 않습니까? 그게 죽을 망(亡), 목숨 명(命) 자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로부터는 죽고 다른 나라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대한민국 법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사람으로서의 그 사람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에 대해서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율법에 대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율법이 여러분을 붙들고 죄를 더 짓게 만들거나 고소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불쌍한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 노예는 아주 포악한 왕 밑에서 고생,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포악한 왕은 언제나 자기의 뜻대로 그 노예를 부렸습니다. 그 노예는 틈만 나면 탈출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실패를 하고 그 포악한 군주에게 걸려서 매만 흠씬 맞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나라의 선한 왕이 그 노예의 사정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선한 왕은 그 노예를 구출해 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포악한 왕이 절대로 놔주지 않을 거란 것을 그 선한 왕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한 왕은 그 노예를 죽여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 선한 왕은 그 죽은 자를 무덤에서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 선한 왕은 그 노예를 십자가에 달아서 죽여 버렸습니다.

 

포악한 왕이 와서 보니 자기가 수족처럼 부리던 노예가 죽어있었습니다. 그 포악한 왕은 아주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러나 노예는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어쩔 수없이 그는 노예를 내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그 선한 왕이 그 노예의 무덤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노예를 무덤에서 살려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노예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폭군의 나라에서 그 노예는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나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선한 왕의 나라에서 그는 이제 자유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자가 된 것뿐만 아니라 선한 왕은 그 노예를 그 나라의 왕자로 삼아 주었습니다. 평생 더럽고 지저분하게 그 폭군이 시키는 온갖 악한 일을 하던 그 노예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거절도 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고 말이지요. 나는 정말 왕의 궁전에서 문지기를 시켜주시더라도 감사하게 하겠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선한 왕은 그에게 반지를 끼워주고 노예라 신발도 신지 못 하고 있었던 그의 발에 신을 신기고 왕자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로마서 7장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이며 성경 전체가 가르치고 있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차고 넘치는 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까 읽었던 로마서 5장 20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롬 5:20-21) “20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죄가 “더한“ 곳이라는 구절의 ”더한“은 ”플레오나조“ ”아주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죄가 그렇게 아주 많은 곳에 은혜는 넘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넘쳤다“는 단어”휘페르 페릿수오“는 ”차고 흘러넘치다”라는 뜻입니다. 망가지고 훼손된 것을 고치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상쇄하고 없애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상상할 수도 없는 다른 새것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수해로 경기도 청북면 삼계리 옹포라는 마을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수백 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그 마을을 다시 원상 복귀 시켜 주는 것도 정말 큰 은혜요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황폐해진 마을에 뉴욕 시티 같은 도시를 세워 주는 것이 바로 “은혜가 넘쳤다, 은혜의 왕 노릇이다“ ”휘페르 페릿수오“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그런 것입니다. 은혜는 로만 카톨릭이 주장하듯이 인간의 행동을 보조하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은혜는 능력입니다. 우리를 장악하고 이끌고 가는 힘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러한 율법을 잘 못 이해하고 그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 나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으로 이방인들을 갈라내서 개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유대인들을 통렬하게 비난하십니다. 마태복음을 비롯한 사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는 거의 전부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 바리새인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지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에서 이른 아침에 온 “왜 난 이렇게 일을 많이 했는데 나도 한 데나리온 밖에 안주냐?”고 불평을 했던 일군이 누구라고요? 유대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만난 자를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 인이 누구를 상징합니까? 열심히 율법을 수행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킨다고 하지만 정작 자들이었다고 합니까?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때려죽인 자들이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았으나 초청하러 온 왕의 종들을 때려죽인 자들이며 한 달란트를 받아서 자기의 방법대로 땅에다 묻어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마 25:30)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율법은 이렇게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몽학선생입니다. 절대 그 율법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그 율법은, 우리를 구속하고 옭아매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주는 하늘나라 백성들의 삶의 표준이며 행복한 삶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놓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그렇게 차별을 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의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새사람이 되신 분들 맞습니까?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이 여러분과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아니라면 기도하세요.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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