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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야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중 - 15번째

by IMmiji 2013. 7. 16.

< 이 편지<들>를 읽는 여러분은

악마가 거짓말쟁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 C.S. 루이스 -- >

 

 

        ( 참고 ) :

   1> 스크루테이프 : 삼촌 악마

   2> 웜우드 : 스크루테이프의 조카이자 신참 악마

   3> 환자 : 각각의 악마들이 맡은 '사람'을 가리킴

   4> 원수 : 악마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말함

 

 

                   

 

( 편지 15 )

 

 

사랑하는 웜우드에게,

 

 

물론 유럽 전쟁 - 인간들이 뭣도 모르고

'대전<The War> 이라고 부르는! - 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다는 건 나도 주목한 바이고,

그에 따라 환자의 불안감 또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를 부추기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계속 걱정하게 만드는 편이 좋을까?

괴로운 두려움이나 어리석은 자신감,

둘 다 바람직한 심리상태지,

우리가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려면

몇몇 중요한 문제들을 고려해야 한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살고 있지만

원수는 그들을 위해 영원을 예비해 두었다.

그래서 인간의 주된 관심을 영원 그 자체와

이른 바 현재라는 두 가지 시점 모두에 집중시키려 들지.

현재는 시간이 영원에 가닿는 지점 아니냐.

원수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인간은 현재의 순간, 오직 그 순간에만 원수와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즉 현재의 순간에만 자유와 현실성을 얻는 게야.

 

그렇기 때문에 원수는 인간이 계속 영원에 관심을

갖거나<이건 곧 원수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다>

                                                                현재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할 게다.

원수와 영원히 하나가 되는 일과

영원히 분리되는 일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하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현재 들리는 양심의 소리에 따르거나

현재 주어진 십자가를 지거나

현재 주어지는 은혜를 받거나

현재의 즐거움에 감사드리게 하려 든단 말이지.

 

따라서 우리의 임무는

인간을 영원과 현재로부터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가끔씩 한 인간<이를테면 과부나 학자>을 유혹해서

과거에 파묻혀 살게 하는 것도 다 이런 관점에서 하는 일이야.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지.

이런 치들은 과거에 관한 한

어느 정도는 참된 것을 알고 있는데다가,

과거는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영원을 닮아 있거든.

그러니 과거보다는 미래 속에 살게 만드는 편이 훨씬 낫다.

 

인간의 열정은 생물학적 필연성에 따라

앞을 향하고 있는 법이므로, 미래에 대한 생각은

당연히 희망이나 두려움으로 불붙게 되어 있다.

더구나 미래는 미지의 것이 아니냐.

그러니 미래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은

곧 비현실적인 허상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마디로, 미래만큼 영원과 닮지 않은 건 없어.

미래는 시간 가운데서도 가장 완벽하게 찰나적인 부분이지.

과거는 꽁꽁 얼어붙어 더 이상 흐를 수 없고,

현재는 영원의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으니까.

우리가 창조적 진화니 과학적 인본주의니

공상주의 같은 사상체계에 격려를 아끼지 않은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사상들은 인간의 애착을 미래에,

그 찰나성의 핵심에 붙들어 놓지.

 

따라서 거의 모든 악은 미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감사는 과거를 바라보고 사랑은 현재를 바라보지만

두려움과 탐욕과 정욕과 야망은 앞을 바라보지.

혹 정욕은 예외일 거라고 생각지 말거라.

현재에 쾌락을 느끼는 순간, 죄<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인>

이미 저질러져 버린 상태가 된다구.

이 과정에서 쾌락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로서,

쾌락 없이도 죄를 짓게만 할 수 있다면

얼른 빼 버리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이 쾌락은 원수가 제공하는 것이므로 현재에 경험하게 되지.

그러나 우리가 제공하는 죄는 역시 늘 앞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원수도 인간이 미래를 생각하기 바라지.

다만 내일 실천 해야 할 정의나 자비의 행동을 

계획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만큼만 생각하길 바란다.

내일의 일을 계획하는 것은 오늘의 의무니까.

모든 의무가 그렇듯이, 그 재료야 미래에서 빌려오는 것이지만

막상 그것을 실천하는 시점은 현재 아니냐.

 

이건 좀 시시콜콜히 따져보며 생각할 문제다.

그 작자는 인간이 미래에 신경을 쓰면서

미래에 보물을 쌓아두길 원치 않지.

우리야 물론 그렇게 되길 바라마지 않지만 말이야.

원수의 이상형은 하루종일 후손의 행복을 위해 일한 

다음< 그 일이 자기 소명이라면>, 그 일에 관한 생각을

깨끗이 털고 결과를 하늘에 맡긴 채 그 순간에 필요한

인내의 감사의 마음으로 즉시 복귀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미래에 잔뜩 가위눌려 있는 인간,

이 땅에 금방이라도 천국이나 지옥이 임할지 모른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인간, 그래서 천국을 얻을 수 있다거나

지옥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불어넣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원수의 계명을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

 자기는 생전에 보지도 못할 계획의 성패 여부에

믿음을 거는 인간이 최고지.

우리가 바라는 건

전인류가 무지개를 잡으려고 끝없이 쫓아가느라

지금 이 순간에는 정직하지도, 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게 사는 것이며,

인간들이 현재 제공되는 진정한 선물들을

미래의 제단에 몽땅 쌓아 놓고

한갓 땔감으로 다 태워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보면,

그리고 다른 조건이 동등하다면,

환자가 현재를 살아가는 것보다야 불안이든 희망이든

<둘 중 뭐가 되든 상관없다> 온통 전쟁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는 편이 훨씬 낫지.

사실 '현재를 산다'는 표현에는 좀 모호한 데가 있어.

불안이 미래와 관련된 것만큼이나,

'현재를 산다'는 것 역시 미래와 관련된 과정을

묘사하는 말일 수 있거든. 

그러니까 네 환자가 미래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진짜 현재에 몸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는 좋을 것'이라고

스스로 설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말씀이야.

 

정말 이런 이유로 환자가 평온을 찾은 것이라면

우리한테는 이득이다.

잘못된 희망이 산산이 부서질 그날을 위해 더 큰 실망감과

그에 따른 조급함을 쌓아가는 셈이니까.

그런데 반대로 환자가 무서운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이겨 낼 미덕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그러면서 모든 의무와 모든 은혜와

모든 지식과 모든 쾌락의 유일한 거처인 현재에 몸담고 있다면,

이건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니

즉시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

 

이런 일을 처리할 때에도

우리의 언어학적 무기가 아주 쓸 만하다. 

'자기 만족' 이라는 말을 한 번 써 보거라.

물론 그가 지금 '현재를 사는' 이유는 단순히 몸이 건강하고

일이 즐겁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그저 자연적인 것일 수도 있지.

그래도 마찬가지다.

나라면 더 볼 것 없이 이런 현상을 즉각 분쇄해 버리겠다.

자연적인 현상치고 우리에게 이로울 게 없으니까.

게다가 그 인간이 행복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단 말이냐?

 

 

 

너를 아끼는 삼촌,

     Screwt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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