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과 남편
(김성수 목사)
(요 4:1-19)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사마리아 여자와 말씀하시다]
이제 그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 당도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대단히 많은 분량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 본문이 그렇게 기독교의 주옥같은 교리로 가득 차 있기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본문을 가지고 15번에 걸쳐 설교를 하셨고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11번, 스펄젼 목사님은 12번에 걸쳐 이 본문을 설교하셨습니다. 제가 이 본문을 주해하기 위해서 지난 열흘 간 읽은 논문과 자료들이 약 1,000페이지 정도가 되니까 저도 이 본문을 가지고 충분히 두세 달은 설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교리 부분을 잘 공부하셨기 때문에 교리 부분을 깊이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깊고 복잡한 신학적 담론들도 다 쳐내고 여러분들이 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핵심 적인 부분들만을 요약하고 추려서 두 주에 나누어서 다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길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이 아주 감격스럽고 벅찬 것이기 때문에 절대 지루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선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어떠한 내용의 전개 속에 들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넘어가겠습니다.
1장 말미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인자 위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장부터 하늘이 열리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표적’들이 등장합니다. 총 일곱 개의 표적을 통해 성경은 어떻게 하늘이 열리고 땅과 하늘이 화해하게 되는 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장부터 12장까지를 ‘표적들의 책’ ‘book of signs'라고 부른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표적들은 모두 ’표적‘-’오해‘-’강해‘라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이 열리게 되는 사건‘을 가리키는 표적을 행하시면 사람들은 그 표적을 이 땅의 것으로 오해를 하게 되고 주님은 그 표적이 가리키는 바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는 식으로 표적들의 책은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표적들의 책의 첫 번째 표적이 주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했다시피 그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기적은 형식만 남은 죽은 종교인 유대교는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와 같다는 것을 지적하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러한 형식과 방법으로서의 인간의 행위는 배제되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해서만 잔치는 잔치답게 완성이 된다는 은혜의 복음이 그 표적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표적 다음엔 뭐가 와야 하지요? 오해가 나와야지요.
바로 그 가나의 혼인잔치 표적을 오해하는 인물로 처음 등장하는 사람이 니고데모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이 사마리아 여인인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혼인잔치의 완성은 절대 인간의 노력과 자격과 열심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는 표본의 사람이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주어지게 되며 완성된다는 것이 니고데모의 이야기에서 강해되어집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풀어 주시는 그 강해 부분의 결론을 3장 16절에서 명확하게 밝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심으로, 다른 말로 그 분의 보혈이 항아리에 채워짐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라고 밝힙니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오해가 해결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오해의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이 사마리아 여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모두 복음이 필요한 사람의 표본으로 등장을 하는 것인데 니고데모가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높이 올라갈 사람은 없다는 진리를 나타내는 표본이라면 사마리아 여인은 누구라도 구원을 받지 못할 만큼 밑으로 떨어진 사람은 없다는 진리를 나타내는 표본인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이 주어지며 그 은혜를 받을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인간도 없고 그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앓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정말 극과 극의 차이를 지니고 있는 등장인물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겼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종교적 파당에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정치가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어떠한 지위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학자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여자였습니다. 당시에 여자들은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도덕적으로 높은 지경에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또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던 부도덕한 여자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이름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남자였고 사마리아 여인은 당시 인구 계수에도 들지 않던 여자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자기 평판을 보호하기 위해 밤중에 찾아왔고 사마리아 여인은 지킬 평판도 없었던 여자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엄청난 양극의 대조를 가진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은혜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은혜를 받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결론짓는 4장 42절에서는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부자들만의 구주도 아니고 지식인들만의 구주도 아니고 유대인들처럼 선민들만의 구주도 아닌 ‘세상’의 구주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상’은 은혜를 입은 ‘세상’입니다.
그렇게 많은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이지만 무엇보다도 커다란 두 사람간의 차이는 한 사람은 표적을 보고 자신의 지식을 근거로 주님을 찾아 왔다는 것이고 한 사람은 주님이 누구이신 지 그리고 그 분이 무엇을 하시는 분이신 지도 모르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찾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차이를 이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간 측의 지식이나 노력이나 능력을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 은혜에 의해 주어지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인간 측에서 찾아감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아무 것도 모르는 그 분의 백성들에게 찾아가셔서 그 들의 눈과 귀를 열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 1:3)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 하셨도다”
(롬 3:10-12)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2절의 ‘치우쳐‘라는 단어는 ’길을 벗어나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상실한 이후에 하나같이 다 ’길을 벗어난 상태‘가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에서 그 ’치우치다’ ‘에클리노’라는 단어가 139회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다 길을 벗어나 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아 돌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 그러한 인간의 상황을 잘 표현해 주는 구절이 있지요?
(사 53:6)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인류는 그들의 가슴에 뻥 뚫린 공허(空虛)를 메울 길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한 노력을 동양에서는 ‘도(道)’라고 부르고 서양에서는 ‘철학(哲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누구도 그 공허를 메울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도(道)’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의 한계 바깥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이라는 논문에서 ‘인간의 이성은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영역 밖의 것을 감지할 수 없다’라고 해서 인간 이성의 절대성을 깨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려하고 자기들 힘으로 그 신에게 가까이 가려는 부단한 노력들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도(道)’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요 14:6)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 도(道)가 어디에 있어요? 인간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길을 잃고 각기 제 길로 가던 자들의 구원은 길이신 주님이 그 죄인들에게 찾아오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바로 그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길이신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그의 마음속에 새로운 영을 부어주실 때에 인간은 비로소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 밖의 것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그 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무식하고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이 나중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돌아가 부끄러움도 다 잊은 채 메시아를 전하게 되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구원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필요성도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어떤 막연한 목마름으로 살아가고 있던 죄인에게 찾아가셔서 그의 눈과 귀를 열고 새로운 생명을 부어주시는 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그게 끝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뒤에 오늘날의 기독교가 원하는 첨언이 붙어있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뒤에 그 여인이 구원을 받은 후 ‘병이 낫고 부자가 되고 기적을 체험 했더라‘ 라는 이야기가 붙어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순결하고 아름다운 복음 뒤에 그런 유치한 이야기를 붙이지 않습니다. 눈과 귀가 열리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감지한 인간은 그냥 그 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성도는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사오니‘’그리 아니하실 지라도‘라는 신앙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고전 2:12-14)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주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고단하게 사마리아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 여인의 처지나 상황을 바꿔주러 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눈과 귀를 열어 영생을 주러 가신 것입니다.
(고후 10:4-6)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하나님은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난 인간의 모든 지식체계와 선행체계를 박살 내시고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복음’이라는 마치 동화와 같은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전히 각기 제 길로 가고 있는 세상의 지식인들은 코웃음도 치지 않는 그러한 도(道)를 따라 묵묵히 그러나 기쁘게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성경은 요한복음 3장에서 유대교 최고봉의 인물로 니고데모를 등장시키고 4장에서 시내 산 모세 언약 체계의 최하 골짜기인 사마리아 여인을 등장시켜서 구원에는 인간의 어떤 조건과 자격과 열심도 보태질 수 없고 또 그러한 것들로 방해되어질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은 인간 측에서 찾아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길이신 예수가 찾아오셔야 하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한 구조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잘 기억하시고 1절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1절에서 3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요 4:1-3) “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 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요한복음이 얼마나 치밀한 논리로 전개가 되는지 잘 보세요. 3장 말미에서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에 대해 선포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흥함인 ‘십자가’와 관계된 자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자신의 쇠함인 ‘순교’로 보여주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흥함인 ‘십자가의 대속’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은 반드시 자신의 쇠함인 ‘자기 부인이라는 십자가‘를 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1절을 보시면 예수님도 누군가의 흥함을 위해 계속 쇠해 지시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세례 요한보다 높아지자 예수님은 황급히 그 높아짐의 장소에서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쇠하여 짐으로 누가 흥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스스로 쇠하여 지심으로 그 분의 흥함을 완성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쇠해지고 약해지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흥함인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쇠함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들이 흥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성도들의 흥함인 구원을 위해 스스로 쇠해지십니다. 그러나 그 쇠함이 참 흥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흥함인 십자가의 완성을 위해 이 땅에서 쇠함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렇게 나를 부인하고 나의 옛 자아를 죽이는 쇠함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내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맥없이 허허 웃으며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는 여러분을 보면서 ‘저런 약해 빠진 얼간이들’이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쇠함입니다. 그러나 그 것이 바로 진정한 흥함인 여러분의 구원의 모습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데 왜 본문 1절이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시는 이유를 굳이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의 인기가 요한의 것보다 나음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렸기 때문이라고 밝힐까요? 3장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들이 결례에 대해 변론을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결례라는 것은 정결 예식이지요. 유대인들은 세례를 정결 예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세례가 더 효과적이고 나은 것인가를 궁금해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는 곳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시는 곳에 더 많이 몰려든다는 소식을 바리새인들이 들었다는 이야기는 그들이 ‘예수님의 세례가 더 나은 세례인가보다‘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유대인들의 ’무지(無知) ‘를 떠나신 것입니다. 온갖 형식과 방법과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했던 유대교를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집으로 확실하게 규정짓는 사건이 주님께서 유대와 바리새인들을 떠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유대를 떠나시면서 갈릴리로 목적지를 정하십니다. 예수님의 행로를 잘 그려보세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혼란케 하시고 유대의 니고데모를 만나시고 갈릴리로 가십니다. 갈릴리는 아무렇게나 선택된 곳이 아닙니다. 주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중에 갈릴리가 등장하는데 구약 성경에서 갈릴리는 구원과는 거리가 먼 ‘이방 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사 9:1-2) “1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 이사야서의 예언을 마태가 인용을 합니다.
(마 4:12-16) “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렇게 예수님은 이방의 갈릴리에 복음을 전파하러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유대를 거쳐 그 이방의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에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십니다. 그것도 ‘반드시‘’must' 그렇게 하셔야 했다고 성경이 기록을 합니다. 본문 4절의 ‘통행하셔야 하겠는지라‘라고 번역이 된 ’디에르케스따이‘의 태는 ’수동디포‘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해 이방의 갈릴리로 가시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음 전파의 명령을 몸소 살며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 성도들에게 떨어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명령은 우리가 힘써서 이루어 내야할 임무이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이루어 내실 것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도 성령이 성도들을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으시고 이방까지 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행 8:1) “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기서 ‘흩어지니라’로 번역이 된 ‘디에스파레산’이 수동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성도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에서 사마리아에서 이방 땅에서 복음을 전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흩어지고 있는데 성령께서 빌립에게 이집트 여왕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의 이방까지 누가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까? 성령께서 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선교는 우리가 우리의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도구요 방법으로 쓰이는 것뿐이지 하나님의 일은 당신께서 직접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그렇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시는 길에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주님의 복음 전파’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시고 나면 전도와 선교에 대한 패러다임도 확실하게 바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창세전에 이미 계획해 놓으시고 택해 놓으신 주님의 백성을 찾아 사마리아로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주님의 열정이 얼마나 깊은 지는 6절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6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행로에 곤하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요 4:6)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 쯤 되었더라”
주님은 6시에 물을 길러 나올 자기의 백성을 만나시기 위해 피곤하여 우물가에 주저앉으셔야 할 정도로 서둘러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이 대목을 읽으면서 눈물을 왈칵 쏟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께서 인간의 제한된 몸을 입으시고 자기 백성을 위해 한 걸음에 먼 길을 고단하게 달려가시는 그 모습 속에서 나를 위해 그렇게 달려오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돼지 취급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그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일이 있으면 요단 강 동편으로 건너가서 상당히 먼 거리를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절대 사마리아 땅을 지나지 않았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시간이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면 3일 이었고 요단강 동편으로 건너가서 돌아가면 6일이 걸렸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번 설명해 드렸지요? BC722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 앗수르는 혼합정책을 썼던 나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점령한 나라나 도시에 앗수르 사람들이나 다른 지역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그 점령지 원주민들은 앗수르 땅이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 혈통과 신앙의 순수성을 말살하고 혼합해 버리는 정책을 썼던 것입니다.
(왕하 17:22-24) “22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의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떠나지 아니하므로 23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로 하신 말씀대로 심지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제하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미쳤더라 24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 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 읍에 거하니라”
그렇게 혈통이 섞여버린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겼던 북 이스라엘의 종교인 유대교와 이방 땅의 우상을 섞어서 이상한 혼합종교를 만들어 내었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그러한 종교를 ‘사마리아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피가 섞이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도 부정한 것으로 명시가 되어 있었으니 신앙과 혈통의 순수성을 목숨처럼 수호했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게다가 남 유대 사람들은 70년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혈통과 종교를 잘 지켜내었기 때문에 더욱 더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오죽하면 BC450년 경 남 유대 사람들이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도 돕겠다고 나섰을 때에 그 도움마저 거절했겠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치욕을 갚기 위해 남 유대의 성전 재건을 오히려 방해했습니다. 성전 재건 현장에 부정한 시체들을 뿌려 놓기도 하고 건축 자재를 도둑질 해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유대와 사마리아의 골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깊어져 가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거의 원수처럼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만일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을 자기 집에 들이면 그 유대인의 자식은 노예로 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음식을 먹으면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하고 더럽게 취급하는 돼지고기를 먹은 걸로 간주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은 걸로 간주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징벌인가 하시겠지만 아이반호 같은 소설을 보시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다툼이 일어났을 때 유대인들 얼굴에 돼지고기를 갖다 대면 유대인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가는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고기는 부정하고 재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무엇을 먹더라도 돼지고기를 먹은 걸로 간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부득이하게 유대인이 사마리아 땅을 지나게 되었을 때 배가 고파 굶어 죽을지언정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음식과 물을 받아먹으면 안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땅으로 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에 주님의 택한 백성들이 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서둘러 사마리아 땅으로 가셔서 제 육시, 그러니까 우리 시간으로 낮12시에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셨습니다. 중동지방의 낮은 아주 뜨겁기 때문에 여인네들이 보통 저녁 때 물을 길러 나옵니다. 그런데 유독 홀로 대 낮에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것만 봐도 이 여인은 같은 동네 사람들과도 쉽게 어울릴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원래 유대인 랍비는 대 낮에 길에서 여자를 만나서도 안 되고 더더군다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와도 길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부정함의 대명사요 부정함의 전달자로 여김을 받고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거신 것입니다.
주님이 만드신 무대 장치를 보십시오. 만일 주님 곁에 제자들이 있었다면 주님은 제자들의 만류로 그 여인과 길게 대화를 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모두 양식을 구하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보통 양식을 구하러 가는데 제자들이 전부 가나요? 주님은 자기의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모두 물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아주 긴 시간 동안 그 여인에게 차근차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주님께서 자기의 백성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일부러 그 땅을 찾아가셔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신 이야기라는 것은 주님께서 당도하신 그 ‘수가’라는 마을의 지명에서도 이미 힌트가 되어 있습니다. 5절을 보시면 그 수가라는 곳이 이렇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요 4:5)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수가는 야곱이 세겜의 추장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은 일백 개를 주고 산 세겜 땅으로 에발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있는 동네였습니다. 그 ‘수가’라는 단어의 의미는 ‘값을 치르고 사다’라는 의미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대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야곱의 우물이 있던 ‘수가’라는 곳이 구약 성경에 어떻게 소개가 되고 있는지 보시면 더 놀랍습니다.
(창 33:18-20)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 백 개로 사고 20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여기는 분명 야곱이 은 일백 개를 주고 샀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창세기 48 장에 보면 조금 다르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창 48:21-22) 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33장에서는 돈을 주고 샀다고 했는데 48에서는 칼과 활로 빼앗았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빼앗았다는 말은 산적처럼 강제로 탈취했다는 뜻이 아니라 정당하게 샀으면서도 그 것을 원수들 손에서 어떻게 지켰는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빼앗기지 않았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야곱의 우물이 있는 ‘수가‘는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나라가 완성 될 때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구속 사‘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 준비해 놓으신 무대 장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신 분들은 주님의 이 요구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분명 주님은 본문 31절에서 제자들이 먹을 것을 드렸을 때 그 양식을 거절하시면서 주님만이 아시는 양식에 대해 언급을 하십니다. 그런 주님께서 왜 그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을까요? 주님은 지금 주님이 해갈하실 물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요구를 통해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을 드러내시기 위해 물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주님의 요구가 어떻게 전개되어 흘러가는지를 잘 보시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을 거시자 사마리아 여인이 깜짝 놀랍니다.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는 아주 오랜 기간을 외면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복식(服飾)이나 외양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런고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유대인이신 줄을 금방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여인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지요?’
(요 4:9)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그러자 주님께서 바로 그 이야기를 ‘생수’에 관한 이야기로 끌고 가십니다“.
(요 4:10)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기서 ‘생수’라고 번역이 된 ‘휘도르’는 ‘흐르는 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겜에 있는 야곱의 우물은 깊이 100피트의 오아시스입니다. 그 여인 앞에는 지금 100피트 깊이의 우물이 있을 뿐입니다. 그 사막의 어디에도 그 오아시스인 우물 이외에 물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흐르는 물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여인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수가 무엇인지 아주 궁금했을 것입니다. 아마 실없는 남정네의 농담으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10절의 이야기에서 그 생수는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하나님의 선물을 줄 수 있는 메시아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십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주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여인은 대뜸 ‘이 곳에는 물을 길을 그릇도 없고 이 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사마리아 뿐 아니라 사막의 오아시스에는 항상 물을 길을 수 있는 염소 가죽으로 만든 그릇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썼던 그릇을 절대 써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유대인인 예수님이 쓸 그릇은 여기 없다는 의미에서 그릇이 없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생수를 육신 적인 해갈을 해 줄 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니고데모의 우매함이 여기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니고데모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을 육신의 거듭남으로 오해를 했었던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서 주시는 영생의 샘물을 이 세상의 물로 오해를 했습니다. 주님은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십니다.
(요 4:13-14)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신 생수는 그저 육신의 목을 축이는 물이 아니라 영생을 주는 생수의 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생수는 다름 아닌 성령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요 7:38-39)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러나 우매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파 놓은 우물이 그들의 목마름을 해갈해 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수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는 생수를 마셔야 한다, 너희는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을 때 유대교의 최고봉이었던 니고데모도, 모세의 시내 산 언약의 최하 골짜기인 사마리아 여인도 못 알아 들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는 지식과 명예와 도덕성과 부라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러한 우물물로 자신의 갈증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유대교의 대표로 등장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구약의 율법체계를 상징하는 야곱의 우물이 자신의 목을 축여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시내 산 언약의 체계 속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생수가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수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부어지는 성령입니다. 오직 성령의 부어짐만이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고전 10:3-4)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렇게 자신의 목마름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여인에게 주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그 목마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히십니다. 주님은 갑자기 ‘당신이 말하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한 번 줘 봐요’라고 비아냥대는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 오라’고 하십니다. 여인은 갑작스러운 주님의 질문에 자기는 남편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의 그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그 사마리아 여인의 죄를 폭로해 버리신 것입니다.
주님의 의도는 이러한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복을 상실한 이후에 끊임없는 목마름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성 바깥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인식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 분께 다가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다른 것들로 그 목마름을 채우려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와 명예, 섹스, 도박, 술 이러한 많은 집착과 중독으로 자신들의 목마름을 채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도 자신의 목마름을 여러 명의 남편들을 통해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여인의 잘못된 해갈 방법을 들춰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에게 ‘너는 너의 목마름을 너의 남편들로 해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목마름이 해갈이 되더냐?’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체계인 야곱의 우물과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남편들을 통해 자신의 해갈을 추구하고 있었던 그 여인에게 이제 진짜 남편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바로 여러분과 저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았습니까? 돈과 명예와 도덕성과 종교행위 등으로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자들이 바로 우리 아닌가요? 그런데 그러한 부정한 여인에게 신랑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마치 창녀 고멜에게 호세아가 찾아와 청혼을 했던 것처럼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구약을 잘 읽어보신 분들은 왜 주님께서 이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나셨는지 금방 눈치를 채실 것입니다. 구약의 우물가는 신랑이 신부를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얻은 곳이 어디입니까? 우물가입니다.
(창 24:13-15) “13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 섰다가 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15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야곱이 자기 아내 라헬을 어디서 만납니까?
(창 29:10-12) “10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11 그가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
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를 어디서 만납니까?
(출 2:15-17)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무리에게 먹이니라”
이렇게 성경에서 우물은 신부가 신랑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 우물가에 부정한 여인의 대명사인 사마리아 여인이 서 있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의 남편들을 통해, 다른 말로 이 세상의 힘을 통해 목마름을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진짜 남편, 이제 다시는 그녀를 버리지도 않고 실망시키지도 않을 진짜 남편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렘 3:14-15)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그 남편은 그녀가 뭐가 잘나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똑똑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주님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원천리 사마리아까지 고단하게 그녀를 찾아오셔서 생수를 부으시고 그녀의 남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녀는 목마르고 버림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그녀의 목마름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그녀의 목마름을 가져가 버리시고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시며 목마른 자가 되셔서 죽으심으로 그녀는 영원한 해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버림받음을 가져가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시며 스스로 버림받은 자가 되셔서 그녀가 영원히 남편에게 버림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아직도 이 세상의 우물을 파고계십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아직도 이 세상을 남편 삼아 여러분의 목마름을 해갈하려 하십니까?
(렘 2:13)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보세요. 여러분이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계속해서 엉뚱한 우물을 파고계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이지 절대 성도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수는, 여러분의 우물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 분으로만 만족하고 그 분의 선물인 영생으로만 행복해 하실 수 있는 분들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사 12:2-3)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우물이 아닌 구원의 우물로만 기뻐하는 진짜 성도인지를 확인하시기 위해 우리 성도들에게서 세상의 우물들을 빼앗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통해 그 때에도 오직 주님만으로 기뻐하실 수 있는 실력자가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엉뚱한 우물 파지 마십시오. 세상의 남편들에게서 이제 눈을 돌리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우물과 영원한 남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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