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죄 (총정리)
(김성수 목사)
(엡2:1-3)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는 계속해서 인간과 죄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인간과 죄에 대해 전체적인 요약을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유사 이래로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고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사람과 그 사람의 인생에 관한 것들입니다. 계속 발전해 가고 있는 철학은 바로 사람과 인생에 대한 학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인간과 인생에 대한 정의가 인간이 만족할 만큼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팡세에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해괴하고 얼마나 진기한가? 얼마나 괴물 같고, 얼마나 혼돈스러우며 얼마나 모순되고 얼마나 신통한가? 만물의 심판자이자 지상의 힘없는 벌레 진리의 관리자이자 불확실과 오류의 무더기 우주의 영광이자 수치‘ 라고 기록을 해 놓고 있습니다. 당대의 소피스트들에게 외쳤던 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만 보아도 인간이 얼마나 인간에 대해 모르면서 인생에 대해 아는 척들을 해왔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인간과 인생에 대해 속수무책입니다. 수많은 천재 철학자들이 인간과 인생에 대해 정의를 내려놓고 사라졌습니다. 수많은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대 질문을 가지고 인간과 인생에 대해 연구하고 파고들어 많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은 “인간과 인생에 대한 바른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념론 적 인간론은 말하기를 인간은 근본적으로 정신이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물질적 육체는 인간의 근본적 본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생소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에 의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사람의 이성(지성)일 뿐이며 이 정신이 질료(물질,matter)를 취하게 되는데 이 육체는 정신이 존재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며 이 육체를 벗어나야만 인간은 더 고급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영혼의 불멸성은 가르치지만 인간의 육체적 부활은 부인합니다.
반대로 물질주의적 인간론은 인간은 오직 물질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외의 정신적 감정적 영적 삶이란 인간의 물질적 구성의 부산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인간은 단순히 자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존재도 부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의식이니 윤리적 지상명제니 하는 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생뚱맞은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사회구조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악이란 사회 구조로부터 발생하고 사회구조의 변경을 통하여 악은 제거될 수 있다고 철저히 믿습니다.
개인은 자기가 행하는 악에 대하여 일차적인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대신 사회가 집니다.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인간이란 한 인격적 개인으로서 중요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오직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만 그 가치가 인정됩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의 목표는 개인 구원이 아니라 완전한 사회의 미래적 성취에 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사회가 오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계층 간의 갈등들은 제거되고 해소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미래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 폭력을 수반하는 혁명적 행동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또 다른 물질주의적 인간관은 스키너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입니다. 그는 (beyond Freedom and Dignity)라는 책에서 인간은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 질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 행위를 결정짓는 요소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완강하게 부인합니다. 인간 안에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행동은 전적으로 환경에 의해서 결정이 되고 그 환경이 완전하게 인간에게 알려진다면 인간의 행위는 완전하게 예측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한쪽은 오직 인간의 이성, 정신,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고 다른 한 쪽은 인간의 육체적인 측면만을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칸트 이후로 존재론보다는 인식론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궁극적인 실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1)인간의 지식이란 무엇인가?(2)그 지식의 원천과 기초는 무엇인가? 같은 인간 지식의 본성, 기원, 그리고 한계 등에 대한 질문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더더군다나 철학과 신학과 문학에 실존주의가 강하게 부상함으로써 인간의 본체(essence)보다는 실존(existence)이 더 중요하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공통되는 점들, 인간의 본질과 본체에 관해서는 관심이 줄어들고 한 인간 실존에게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인본주의의 발흥이었습니다.
세계2차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들이 중요하다고 ”의심 없이 믿어 왔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에 걸친 잔혹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 전체가 뿌리까지 흔들렸고 거기에서 허무주의까지 발흥을 하게 되어서 인간과 인생에 정의를 내려 보려 했던 사람들은 더욱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과학이 발달하고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에서의 새로운 발전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성을 철저히 앗아가고 있고 인공수정, 시험관 아기, 낙태, 유전공학 같은 것들이 자행되어지고 발달하면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공부하겠습니다. 성경이 인간에 관해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피할 수 없는 관계성 속에 놓여있는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세상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다양한 인간론과 인생론은 덮어두고 성경이 말씀하고 계시는 인간론과 죄 론을 다루면서 인간은 누구이며 인간은 왜 이러한 인생을 살게 되었으며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해, 즉 우리가 궁금해 하는 인생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강의가 에베소서 2장 1-3절까지의 내용의 이해에 커다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인간에 관한 견해는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라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탄생되었거나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창 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7)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그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다 하나님께 의존해 있고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느 9:6) “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행 17:25-28) “25 또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시며, 그들이 사는 시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몇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숨도 쉴 수 없는 그런 의존적 존재임을 천명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가 된 피조물인데 어떻게 창조가 되었는지 성경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를 하셨죠. 그런데 인간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습니다.
(창 1:26-27)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서 형상이라고 번역된 “첼램”은 “자르다” “베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모양이라고 번역된 “데무쓰”는 “무엇 무엇과 비슷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르고 베고 깎아서 하나님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어떤 특정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추출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으로 가보세요.
(창 1:31) “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다 만드시고 심히 좋아하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인간이 처음에는 순결했으며 죄가 없었으며 거룩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투영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미국에 있는 한국 대사가 한국을 대표하듯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일성 동상이 북한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 김일성 동상을 보면서 그 김일성의 권위를 생각하게 되고 우리의 통치자는 바로 저 김일성 어버이 동무라는 것을 기억하고 염두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사람은 이 땅에서 그런 역할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구제 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루이스 벌콥 교수님이나 화란의 신학자이신 GC 벌카워 목사님이나 존 칼빈은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동일한 설명을 하십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이란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형상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넓고 포괄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과 그 존재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도록 하게하며 하나님의 소명에 반응해서 살아낼 수 있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상태를 넓은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의 이성적, 합리적 능력들은 하나님의 이성을 방영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도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반영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것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교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정을 하고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뜻에 따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결정능력을 조금이나마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적 감각 역시 저 절묘하고 웅대한 자연의 경관을 만들어 내신 하나님의 미적 감각을 닮은 것이고요. 우리가 노래를 할 수 있는 재는 역시 노래를 부르시며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덕택입니다. 그러면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입니까? 협의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창조될 때 소유하게 된 영적인 특성들, 다시 말해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함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기능적 측면으로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요.
(골 3:10)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엡 4:24)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새 사람을 입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면 얻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입니다. 이렇게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과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모두를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닮아 있었습니다. 조금 쉽게 설명을 해드리면 구조적 의미(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과 기능적 의미(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이런 것입니다. 독수리가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수리의 날개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지요. “난다”라는 결과가 바로 좁은 의미의 기능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고 “날기”위해 필요한 구조적인 것을 우리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죄가 들어온 이후 인간에게 주어져 있던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완전히 상실되었나요?
(창 9:6) “6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이제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오히려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자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땅을 보존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다시 하시고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타락한 이후의 사람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약에서도 한번 찾아볼까요?
(약 3:9)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사람들이 이 세치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지음을 받았다“는 말 ”게고노타스“는 ”만들어지다“라는 말인데 ”기노마이“의 완료 분사 형입니다. 헬라어에서 완료 시제는 ”계속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과거의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본문이 말하는 사람은 “과거의 언젠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그리고 아직도 그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으며 타락한 이후에 그 형상은 완전히 부패되어 거의 소멸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부분이 계속 존재하며 어떤 부분이 부패되거나 상실 된 것일까요? 타락을 한 인간은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계속해서 소유하고 있지만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그러니까 기능적 측면의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타락한 인간들은 아직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하신 재능과 능력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능과 능력들을 죄악의 불순종의 방법들로 사용이 되게 되어버렸습니다.
원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끔 주어진 재능과 능력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데 쓰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주신 재능과 능력과 은사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어 있던 의와 거룩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본래적 형상을 가지고 있었을 때 인간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을 섬기고,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셨던 피조 세계를 지배하고 돌보았습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그 상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담은 분명 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완성된 결정체“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성장과 연단의 필요성을 갖고 있는 존재였다. 하나님은 인간이 불순종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기꺼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가를 확인하고 싶으셨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선악과였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서로와 피조 세계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able to sin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변질된 형상을 갖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광의의 하나님의 형상, 즉 인간의 재능이나 역량, 은사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형상들이 다른 방향으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과녁을 벗어나 버렸고 엉뚱한 방향으로 활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향해 순종과 경배를 드려야 했던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롬 1:22-23) “22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23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나무와 돌로 우상을 만든 반면, 현대인들은 그들이 경배할 그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 옛날보다 훨씬 미묘한 형태로 우상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 돈, 명예, 자식, 쾌락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던 힘으로 자기 자신을 찬양하는데 씁니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의 변질은 인간과의 관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교제를 통해 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사용하지 못하고 이제 자기 자신만을 위해 다른 이들을 이용하고 밟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되었습니다.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픈 치졸한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 속에서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땅을 착취하게 되었습니다. 왕으로서 피조 세계를 보살피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 피조 세계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죄는 어떻게 인간에게 들어와서 인간을 타락시켰습니까? 타락한 천사가 내려와서 인간을 미혹했습니다. 천사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골 1:16)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리고 천사들은 아마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창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욥 38:4-7)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6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 하였었느니라”
7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번역이 된 부분이 천사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천사들의 우두머리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타락을 했습니다.
(유 1:6)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어떻게 그 천사들이 타락을 하게 되었는지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천사가 내려와서 화와를 유혹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타락한 천사인 마귀는 뱀을 이용해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세우시고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셨고 그 아래 피조물들을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피조물 중 하나인 뱀이 와서 화와를 유혹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유혹하고 아담은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어떤 과정으로 유혹을 하는지 보세요. 마귀는 먼저 인간의 마음에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창 3:1)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금방 하와에게 의심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내 분노를 일으킵니다. 하와의 대답을 보세요.
(2-3절)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분노에 찬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으리라“ 고 말씀하셨음에도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기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세요.
(4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tm려 “너희가 정녕 죽지 않으리라” 하니까 하와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마귀를 믿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곧 마귀가 교만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교만이 들어오자 하와는 그 나무의 열매를 보았습니다. 탐심을 갖고 보는 열매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그녀의 욕망을 자극했습니다. 무서운 불순종으로 끝나버렸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미혹하는 경로도 이와 너무 흡사하지 않습니까? 그 죄의 결과로 인간들은 수치심으로 압도되었습니다.
(7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 전에는 그들이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창 2:25) “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이제 인간들은 수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렸을까요? 귀를 가렸을까요? 코를 가렸을까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치마를 해 입히신 것을 보면 그들은 생식기를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왜 유독 생식기를 가리게 되었을까요? 생식기관은 생명이 잉태되는 인간 삶의 근본적인 샘과 원천입니다. 이제 죄로 인해 인간의 근본적인 원천이요 샘이 완전히 오염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총체적 타락입니다. 그 죄의 결과 여전히 우리는 그 곳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치감 다음에 오는 결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창 3:10)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곧 책임 회피를 했습니다. 아담은 하와가 먹으라고 했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하와는 뱀이 먹으라고 했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아담은 에덴을 지켜야 하는 왕이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하와의 죄를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와에게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나중에 신약에서 또 다른 동산지기가 오셔서 그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그 뒤에 서있으니까 마리아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지요? 일부러 동산 지기라는 말을 갖다 넣은 것은 에덴 동산지기가 실패한 제사장의 역할을 예수님께서 회복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죽어야할 마리아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그 동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아담은 그렇게 성공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곧 원시 복음이라고 하는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창 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한편이 된 뱀과 여자를 원수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인간은 하나님 편으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자에게도 저주를 하십니다.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게 된다는 말은 “테슈카”입니다. 그 말은 “지배하다”라는 말입니다. 4장7절에 똑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창 4:7)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너를 지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이런 말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제 다투지 않고는 안 되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지배하려고 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려 합니다. 늘 부딪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또 자연이 저주를 받습니다.
(창 3:17)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제 인간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어버렸고 땅은 수고한 만큼의 결실을 주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저주는 이제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창 3:22)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제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언뜻 보면 좋은 말 같습니다. 인간이 정말 사탄이 약속한 대로 하나님과 같이 된 것입니까? 거기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말씀은 인간은 원래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하나님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순종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어있었는데 이제 인간이 하나님처럼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옳다고 결정을 내라고 스스로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르다고 판단을 하는 “이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 되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만약 그 죄에 찢긴 몸으로 생명나무 과실을 먹었다면 그 저주의 모습으로 영원히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을 쫓아내시고 그 생명나무를 막아버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아 영광스러운 새 몸을 얻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죄는 보편화 되어버렸습니다. 바로 아담의 아들 가인이 아벨을 때려 죽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그 죄는 점점 퍼져나갔고 노아의 홍수 때에 하나님은 이미 그 죄가 세상에 관영함을 보셨습니다.
(창 6:5)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 기술해 놓은 구약의 몇 군데만 찾아보겠습니다.
(왕상 8:46) "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욥 14:3) "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시 58:3) "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시 143:2) "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잠 20:9) "9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
(전 7:20) "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롬 3:23)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엡 2:3)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요일 1:8-10)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왜 이지경이 되었다고요?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라는 히브리어는 일반적으로 사람을 뜻합니다. 남녀 구별 없이 그냥 사람이라고 할 때 “아담”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이 “아담”이라는 단어는 종종 “인류”를 가리킬 때도 쓰입니다.
(창 6:5)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여기서 쓰인 “아담“이라는 말은 전체 인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28절의 문화명령은 전 인류에게 주시는 명령이지요? 이 구절을 그냥 문화 명령에 국한 시키는 것은 성경을 참으로 미시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지만 지금 그 부분을 설명하다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가니까 그 부분의 설명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고 지금은 그냥 문화명령이라는 용어를 써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창 1:28)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런 면에서 26절27절의 남자와 여자를 즉, 아담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전 인류를 대표하는 자로서의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 인류가 그로부터 나오게 되고 아담이 앞으로 오게 될 전 인류의 머리요 대표자인 것입니다.
(고전 15:22)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45) "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성경이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 두 번째 아담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첫 번째 아담도 예수 그리스도와 유사한 관계로 우리를 향해 서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것처럼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으로부터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 5:14)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오실 자가 누구죠? 예수님이십니다. 아담이 예수님의 모형이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처럼 누군가를 대표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히 7:9-10)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해가지고 오다가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그에게 자기가 취한 것의 십 분의 1을 줍니다. 레위는 그로부터 180년 후에 태어날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그 레위가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바칠 때 그 아브라함 안에서 함께 바쳤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원리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담 안에서 죄를 지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적 무능력자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이제 살아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3:3,5)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6:44)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롬 8:7-8)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그 “죄”라는 것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무엇을 “죄”라고 합니까? 인간의 죄는 모두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시 51:4)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말은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라는 것을 다윗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 세상은 이미 cosmic trouble이 있었습니다. 마귀의 세력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선 것입니다. 그 마귀는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지어진 아름다운 천사였습니다.
(겔 28:12-15) "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그런데 그가 반역을 했습니다. 반역의 내용이 뭡니까? 불순종입니다.
(사 14:12-15)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그 악한 천사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인간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하리라” “내가 하리라”입니다. 그로부터 수억만의 인간들이 “내가 무엇 무엇을 하리라”하고 교만과 불순종의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인간들을 향하여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분을 내고 화가 나면 목부터 뻣뻣해 진다고 하지요? 그런 짐승이 하나 있지요? 뱀입니다. 독사는 화가 나면 목이 뻣뻣해 지면서 목이 부풀어 나는데 그 안에 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목을 뻣뻣이 쳐들고 대들 뿐 아니라 독기를 품고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도 그런 부분이 나오지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5번이 뭡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내 이웃을 미워하는 본성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입니다.
(롬 8:7)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이렇게 죄라는 것의 본질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런 행위 뿐 아니라 표현은 되지 않았지만 마음에서 올라오는 모든 악한 것도 죄입니다. 의지 그 자체가 죄의 첫 원인입니다.
(마 15:18-20)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 하느니라”
이렇게 죄는 행실뿐 아니라 생각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모든 행위들과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죄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모든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도 선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이 세상이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가?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이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게 되어 런던 시 전체가 지옥이 되어버리는 그런 영화가 있었지요? 그렇게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여기서 또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양심이라는 것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도 그 양심이 율법이 되어 자제를 하게 만드셨습니다.
(롬 2:14-15)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은 사회법과 지도자들을 두어서 죄를 억제시키십니다. 사회법이 없고 양심이 없다면 이 세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조금만 기분 나쁘게 하면 죽여서 갖다 묻어버리고 싶은 게 인간 아닙니까? 그나마 법이 있으니까 무서워서 안 저지르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아직 우주와 함께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회개할 때까지만 보존하십니다.
(벧후 3:7-9)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 하시느니라"
그 때까지는 일반은총으로 죄를 억제 해 놓으시지만 마지막 때가 되면 그 붙들고 계신 끝을 탁 놓아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관점에서의 선한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선한 일을 할 때도 자기를 위해 선한 일을 하기로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가끔 선행을 하고 구제를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모르고도 저렇게 선한 일 하네 뭐, 하고 반문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진정으로 남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벧후 2:19) "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요 8:34)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롬 6:6,17-20)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여기서 “죄의 종”이라는 말 “둘로스”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항상 주인인 죄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사는 자들을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자들이 하는 모든 행위(선하게 보이는 행위를 포함해서)는 다 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인간은 자기중심적이 되어서 자기만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느라 하나님을 사랑치 않고 이웃을 사랑치 않고 자연을 사랑치 않고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위해서 이용을 하고 착취를 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의 경중을 잽니다. “나는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살인한 자보다는 좀 낫다”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으니 도둑질 한 사람보다는 좀 낫다” 그렇게 스스로 위로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거룩의 높이에서 보면 다 똑같은 죄입니다. “불순종의 죄“ 심지어 성경은 인간이 최고의 선을 행한다고 해도 그것도 죄라고 합니다.
(사 64:6)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그것은 더러운 걸레 같은 것이라 합니다. 다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꼭 법을 어기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잘 못한 것만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들이 나가서 싸움질하고 도둑질을 했다고 해보자고요. 아버지는 당연히 아들을 혼내주어야지요. 그런데 이 아이가 도덕적인, 윤리적인 행위는 잘 해요. 그런데 아버지 말을 무시해요. 아버지가 “이제 TV그만 보고 들어가서 공부해” 그랬는데 들은 척 만 척 하면서 계속 TV만 보면 어떠십니까? 아니, 아예 나가서 “ 난 아버지가 없어, 나한테 아버지가 왜 필요해, 난 혼자서 충분히 살 수 있어” 그랬다면 “흠, 역시 생활력이 강한 녀석이야” 그럽니까? 차라리 나가서 싸움박질 하고 다녀도 들어와서 아버지한테 “아버지 , 나 오늘 조금 센 놈하고 붙었는데 내가 겨우 이겼어, 담에는 더 힘을 길러서 완전히 묵사발 만들어 버릴 거야” 그러면 귀엽기나 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 1:19-21) "19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2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행 14:16-17) "16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이 각자의 방법대로 살게 내버려두셨습니다. 17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거리를 주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충분히 자연과 인간의 마음 에 당신을 계시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이 가끔 질문들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 지옥 가는 거냐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하면 모두 지옥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자연을 통해서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히 인간이 만들어 놓은 색깔로 표현 할 수 없는 온갖 꽃들과 새들과 물고기들과 아름다운 자연의 정경이라든가 매일같이 어김없이 뜨고 지는 해와 일정한 모양으로 변해 가는 달과 사계절을 보면서 어떻게 창조주를 모를 수 있습니까? 인간이 몸 안에 들어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들이 그렇게 자기 역할을 따라 수 천 가지의 일을 해 내면서 우리 몸이 살아있게 되고 자체적인 방어능력을 갖고 면역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의사들이 침을 놓을 때 혹여 침이 혈관이나 급소를 향해 들어오면 혈관이 스스로 그 침을 피하는 것을 아세요? 어떤 고급 카메라가 인간의 눈과 같겠습니까? 이런 것이 우연히 생겨서 진화가 된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그 모든 자연과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흔적이며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담 때부터 하나님은 계속해서 예수님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위에 들어드린 구절을 보시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와 사도행전이 쓰여 진 것은 지금부터 2000년 전입니다. 성경이 지금의 신구약으로 편집이 된 것은 AD400년경입니다. 그 당시는 구약 성경도 아주 희귀하던 때입니다. 그들에게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두셨다” 그래서 그 때도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사람만 보지 못한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아름다움과 선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딤전 4:4)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프랑스의 화가 모네가 죽으면서 유언으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추한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하나님은 베토벤의 재능과 인격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려내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십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먼지 같은 작은 죄도 용납이 안 되는 상태입니다. 백혈병이 심하면 골수를 뽑아내고 다른 골수를 넣습니다. 그렇게 골수 이식을 한 다음에는 무균 실에 넣고 늘 소독을 하고 출입을 합니다. 면역성이 떨어져서 아주 미미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 의해서도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아무리 작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도 용납이 안 되는 무균 실처럼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핑계 댈 수 없는 자들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진노라는 것은 분 냄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을 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상해서 나오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마음이 상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의 공의로 죄를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속성을 진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와 헷갈리시면 안돼요. 그 하나님의 진노는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기도를 하시는데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피해갔으면 좋겠다고 하실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 진노가 모든 죄인들을 덮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러한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복음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18세기 유럽은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합리주의 이성주의가 판을 쳤습니다. 거기에 진화론이 각광을 받고 있었고 기독교는 그야말로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몇 명의 하나님의 종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조지 휫 필드를 비롯해서 데이빗 브레이너드와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위대한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 졌습니다.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청교도를 알프스에 비교하고 루터와 캘빈을 히말라야로 비교하고 조나단 에드워드를 에베레스트라고 비교할 만큼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코네티컷의 엔필드에서 설교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손아래 놓여있는 죄인들”이라는 설교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신명기32:35절을 가지고 설교를 하신 것인데 그 분은 지독한 근시여서 설교를 하실 때 등불을 들고 자기 코앞에 원고를 놓고 그냥 읽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성령이 임하시자 사람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인해 두려워 떨었고 어떤 사람은 “악, 나는 지금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강대상 옆의 목사님이 에드워드 목사님의 바지를 붙들고 “목사님 하나님의 자비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영적 대 각성 운동은 그렇게 죄의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의 영적 대 각성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이 집회 도중에 자기가 어떤 이로부터 100원을 착복한 것을 고백하면서 울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죄의 자각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회복해야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내용의 핵심은 뭡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하게 소유하신 어떤 분을 공부해 보면 알게 되겠지요.
(골 1:15)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고후 4:4)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히 1:3)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서 본체의 형상이라고 번역된 "카락테르"는 동전 같은 것은 “똑같이 찍어내다”라는 말입니다. (exact representation) “정확한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 땅에서 완전하게 정확하게 복사해 내신 분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중심부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를 알면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중심부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빼어 닮은 형상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의 심장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불순종이, 시기 질투 교만이 하나님의 형상의 왜곡의 열매라면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롬 13:10)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갈 5:14)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엡 5:1-2) “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막 12:29-33)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바로 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사랑하게끔 만들어진,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는 그 형상의 회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롬 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미리 사랑하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미리 사랑하신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왜 택하셨는가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해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원상 복구해 놓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자들은 당연히 사랑하는 자들로 회복되어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갈 4:19)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고후 3:18)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반사하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신 구속의 목표는 사랑이신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꼭 알아두고 가자고요. 인간은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격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피조물로 지으셨지만 인격체로 대우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주시고 말씀을 하셔서 우리를 인도해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인격체라 함은 일종의 독립성을 지닌 존재라는 말입니다. 인격체라는 것은 결단력을 지니며, 목적을 세우며 그 목적을 향하여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즉 인격체는 적어도 자신의 선택에 대한 자유를 소유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벌두인’은 인간을 가리켜 “선택권을 소유한 피조물(creature of option)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즉, 인간은 피조물인 동시에 하나의 인격체, 곧 피조 된 인격체(created person)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이며 신비입니다. 즉 피조물인 인간은 종속(dependence)되어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격체인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입니다.(freedom)
(롬 9:21)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성경은 이렇게 종속적인 인간의 처지를 묘사하지만
(수 24:15)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렇게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피조성과 인격성은 반드시 균형 속에서 살펴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피조 성만을 강조하고 인격성을 무시하다보면 우리는 자칫하면 숙명론(Determinism)에 빠지게 되고 피조 성을 무시하고 인격성만 강조하다보면 사람 자체가 신성화 되게 되는 이단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죄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 인격성이 갖고 있는 자유가 없었다면 인간은 벌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을 의지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사람이 인격체라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그 인격체가 할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시작된 구원이 가시적으로 완성될 때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절대 인간적인 책임을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성령의 힘을 입어 눈을 뜨게 되지만 그는 자발적으로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빌 2:12-13)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분명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요구해 놓고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하라는 겁니까? 말라는 것입니까? “구원을 이루라“에서 ”이루라“는 말은 헬라 말로 ”카테르 가제스데”입니다. 그 말은 농부가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데 쓰이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것을 너희가 자라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노력이 없이는 일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레일을 깔고 우리는 그 위를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레일이 깔리면 기차는 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네, 기차는 레일이 깔리면 당연히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골 3:9-10)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새롭게 회복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벗어버리고”의 “아페크 두사메노이”와 “입었으니”의 “엔 두사메노이”는 모두 부정시제입니다. 부정시제라는 것은 순간적인 한 번에 일어난 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하심”이라고 번역된 “아나카이 누메논”은 현재분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한 번에 일어난 것인데, 새롭게 되는 일은 계속해서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자들은 genuinely새롭게 된 것이지 totally 새롭게 되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속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로운 자아가 점차적으로 새롭게 되어져야 합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완전히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실을 다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하나 까서 보여주십니다. 나중에는 “아, 나는 그런 복을 받은 자구나” 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을 하고 이 땅의 것들을 모두 놓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창12장에서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22장에서 또 축복 하십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이유를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여서’라고 대십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축복은 이미 주어진 것이고 아브라함은 그 축복을 받을만한 자로 만들어져 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의 행위를 근거로 축복하십니다. 그게 우리의 신분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피조성과 인격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책임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알매니안 주의를 경계해야 하며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하는 ‘워치만 니 식‘의 주장도 경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무시무시한 죄에서 건져졌습니다. 그 은혜를 아는 자들로서 이제 우리가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여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약을 먹었으면 당연히 약효가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거듭난 자는 당연히 그 삶에 결과가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요일 3:16-18)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4:20-21)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렇게 우리의 삶에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복음이라는 약, 신약과 구약을 정말 먹은 사람은 이렇게 약효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도 이런 선행을 합니다. 하물며 사랑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져야 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진짜 은혜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선행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절대 자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모습과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고 자연을 보호하고 다스리도록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타락한 천사로부터 죄가 들어왔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심하게 부패되고 왜곡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구조적 형상)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조적 형상이 엉뚱한 곳에 쓰여 지게 되었고 악한 열매가 맺혀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상을 섬기고 이웃을 질투하고 시기하며 자연을 착취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인간은 불순종의 원흉인 마귀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게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 진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한 무리의 백성들에게 그 왜곡되고 상실되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듭나고 부터 계속해서 그 사랑의 삶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그 사랑의 열매가 계속해서 맺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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