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김성수 목사)
(요 3:14-17)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8)인자도 들려야 한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늘에 있는 인자도'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9) 해석자에 따라 15절에서 인용을 끝내기도 함> 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7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15절까지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는 부분이고 16절과 17절은 요한이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요한은 1장 말미에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라는 대 주제를 제시해 놓고 2장부터 표적의 책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 표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서 형식주의에 빠진 생명력 없는 유대교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대조함으로 해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즉 은혜로만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성전 파괴의 사건을 통해 잎사귀만 무성한 인간의 행위를 나무라시며 예수 님 자신이 그 옛 성전이 되셔서 파괴되어지는 은혜의 복음을 또 한 번 반복해 줍니다.
그리고 2장 말미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속까지 다 아시기 때문에 겉만 번드르르하게 믿는 척하는 자들의 그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추임새를 넣은 뒤 지난주에 공부한 니고데모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니고데모는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여기고, 힘이라고 여기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과분하게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영적 상태가 밤에 속한 자라고 일부러 밝혀 줍니다.
요한은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주어지게 되는 것임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 11,12,13절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늘의 비밀을 절대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의 비밀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야 함을 니고데모에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넘어와서 그 ‘거듭남’이라고 제시된 구원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광야에서 놋 뱀이 들려진 것처럼 자신도 들리셔야 한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민수기21장의 이야기입니다.
(민 21:4-9) “4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건너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에돔 지방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자기네 땅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에돔 땅을 둘러서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 여정이 심히 고단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진중에서 또 다시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왜 애굽에서 잘 있는 사람들 데리고 나와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고’ 모세에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불 뱀을 푸셔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을 죽게 하셨습니다. 불 뱀이라는 것은 물리게 되면 불같은 고열이 나고 이내 죽게 되는 맹독을 가진 뱀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하나님께 부탁해서 우리를 좀 살려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부탁을 들으시고 모세에게 처방을 내려주셨습니다.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고 뱀에 물린 자들에게 그 뱀을 쳐다보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죽어 가는 자들이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뱀 때문에 죽어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장대에 뱀을 매달아 놓고 그 뱀을 쳐다보라고 하면 순순히 그 뱀을 쳐다볼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거기다가 그들은 창세기를 이미 배웠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짐승도 뱀이었습니다. 그 것도 설상가상으로 놋으로 만든 뱀입니다. 놋은 심판을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그 놋 뱀 장대는 홀대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고대시대에는 뱀에 물리면 고약이나 술을 사용해서 치료를 했다고 합니다. 차라리 그런 비슷한 약방(藥房)문이라도 주셨다면 열심히 시도라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 놋 뱀을 쳐다보기만 하라고 하시니 다들 기가 찼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그 민수기의 이야기가 바로 당신이 저주의 놋 뱀이 되셔서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예표 하던 것이었음을 명확하게 밝혀주십니다. 니고데모가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제사를 지내며 율법을 목숨 걸고 지켰고 도덕적, 학문적인 숭앙을 받던 그에게 대뜸 ‘너는 거듭나지 않으면 절대 구원받지 못 한다’고 말씀하신 후에 그 거듭남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놋 뱀을 바라본 것처럼 장대에 달리신 자신을 바라보아야 주어진다고 말씀하시니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한 마디로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가능성에 절망하고 오로지 눈을 들어 위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 구원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구약에 능통했던 니고데모는 그 민수기 21장의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임을 거기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그 후로 그렇게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 ‘들리다’라고 번역이 된 ‘휩소오’라는 단어는 아람어 ‘제캅’에서 나온 말인데 ‘들어 올리다’ ‘교수형에 처하다’라는 뜻이 있는 반면에 ‘높아지다’ ‘영광 속에 들어 올려지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 단어가 쓰인 곳을 몇 군데만 찾아볼까요?
(요 8:28)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 12:32)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행 2:33, 5:31)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5: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저주의 장대, 즉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저주의 장대 위로 들려 올려 진다는 것은 나의 세상 적 의지와 나의이기(利己)가 부수어 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을 비우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은 자신도 십자가로 들어 올려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시면 그렇게 저주의 장대위로 들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는 자들을 가리켜 ‘저를 믿는 자’ ‘영생을 얻은 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뜻입니다. 십자가로 들려 올려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역시 그들 각자의 십자가 위로 들여 올려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성경은 그 삶을 ‘순종’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을 15절이 ‘저를 믿는 자‘’영생을 얻은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서 영생을 얻은 자들을 저를 믿는 자 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들의 삶을 순종의 삶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3장 마지막 절에서 그 ‘믿음’을 ‘순종’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 3:36)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잘 보시면 ‘영생이 있고 없고’의 결과 절 앞의 원인 절이 하나는 믿는 자이고 하나는 순종치 아니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절묘한 대조를 통해서 믿음과 순종을 하나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번 설명해 드렸다시피 믿음은 항상 행위, 즉 순종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1:5)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약 1:22-25)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 2:14-22)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십자가를 열심히 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의 ‘저를 믿는 자‘의 ’믿는다‘’피스튜온‘이 ’피스튜오‘의 현재 분사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 말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데 그 믿음은 현재 분사형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거기까지가 니고데모에게 주님께서 거듭남에 대해 설명을 하시는 부분이고 이제 16절부터는 요한이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절에 있는 스님들까지도 암송을 하는 구절입니다. 그마 만큼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그 속에 모두 담겨있는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 구절 속에 들어있는 아주 중요한 기독교의 교의(dogma)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교의가 'the sending formula'입니다. '보내심의 교리‘라고 번역을 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 것도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닌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위에서 아래로 보내셨다는 내용입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교리인가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 있는 모든 종교 중에 사람이 섬기는 신이 먼저 사람을 찾아온 종교가 있습니까? 이 땅의 모든 종교는 사람이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신을 찾아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독 우리 기독교만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시는 형식인 것입니다. 그게 'the sending formula''보내심의 교리‘인 것입니다. 그 보내심의 교리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先在) 사상과 /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서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 그 분의 뜻을 집행하는 분이라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the sending formula'가 성립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서의 자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14절의 ‘아들을 보내셨다’ ‘아포스텔로’는 ‘내어 쫓다, 유기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아이 엄마가 아이를 낳아서 갖다 버리는 것을 ‘유기’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이 세상으로 유기 되신 것입니다. 3장 16절 안에 들어 있는 두 번째 교리가 ‘the giving up formula''내어 줌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롬 8:32)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흔쾌히 내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지옥에서 지옥의 연료로 쓰였을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분이 가장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그 분의 아들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부르는데 그 ‘독생자‘ ‘모노게네스’라는 말은 단순히 ‘외아들’ ‘only son’의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어는 ‘독특한 것, 사랑 받는 것, 유일무이한 것’을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는 아비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창 22:2)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가리켜 ‘네 사랑하는 독자’ ‘아하브 아쉐르 야히브’라고 부르십니다. ‘너무 너무나 사랑하는 유일무이한 독생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교회들에게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유일무이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원수 되었던 자들을 위해 보내시고 내어주신 것입니다.
(롬 3:10-18)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5:8)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먼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까지 절대 사랑을 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말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주어가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주도권(主導權)과 선수권(選手權)을 모두 쥐고 계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사랑의 흉내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연 보호를 하는 것,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듯이 부모가 자기 자식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것, 역시 사랑입니다.
예전에 아르메니아에서 대 지진이 났을 때 8일 만에 세 살짜리 아들과 그 아이의 엄마가 매몰된 건물에서 구조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었던 그 곳에서 아기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아세요? 아이가 목이 마르다고 하자 어머니가 자기의 손을 물어뜯어서 그 피를 아이에게 마시게 했다고 합니다. 무려 8일 동안, 역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랑은 결국 자기중심적 이어서 자기감정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수시로 조변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이를 그렇게 목숨 걸고 사랑하는데 아이는 부모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가정이 많은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랑은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노래하는 제 후배 중에 지금 한국에서 가수로 탤런트로 아주 인기를 얻고 있는 친구가 하나있습니다. 그 친구가 참 좋은 일을 많이 합니다. 불쌍한 소년 소녀 가장들을 위해 거액을 쾌척(快擲) 하기도 하고 새만금 간척 사업 때는 자연을 보호하자는 띠를 두르고 상당히 먼 거리를 삼보 일 배를 하며 일인 시위를 하기도 했던 친구입니다. 누가 봐도 사람 사랑, 자연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그 친구가 모 인터넷 성인 방송의 대 주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인터넷 성인 방송이 성인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에게도 얼마나 해가 되는지는 잘 아시지요? 그런데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불특정 다수에게 미칠 해악은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곳에서 대단한 수익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모순이지요?
멕시코 영화중에 amor es peross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000년에 골든 글로브와 뉴욕 비평가 협회 감독상을 수상한 멕시코의 신예 감독 이나리뚜가 만든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 ‘치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치보’는 전직 대학교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혁명을 위해 가정을 버리고 사빠띠스따에 참여했다가 20년간 감옥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력을 살려 살인 청부업자로 딸 마치를 위해 돈을 모으고 거리의 개들을 돌보며 삽니다. 그러던 중 교통사고 현장에서 피투성이가 된 투견 코피를 집으로 데리고 와 치료를 해 줍니다. 그 투견 코피는 주인의 부를 위해 투견 장에서 상대방을 물어 죽이는 일에 충실했던 무서운 투견이었습니다. 어느 날 치보가 청부를 받은 자를 살해하기 위해 밖에 나갔다 들어왔더니 그 투견 코피가 다른 개들을 모두 물어 죽였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던 개들이 모두 죽은 것을 보자 치보는 너무나 슬퍼서 울부짖습니다. 그리고는 화가 난 치보가 총으로 그 투견 코피를 쏴 죽이려 합니다. 그러다가 그 투견 코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 투견은 주인을 위해 다른 개들을 물어 죽이는 삶을 살았지만 자신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위해 돈을 모은다는 허울 좋은 변명 아래 다른 사람들을 죽여 왔던 것입니다. 이나리뚜 감독은 투견 장에서의 개들의 싸움 속에서 인간사의 개싸움, 이전투구를 그려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멀쩡한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는 일은 번번이 했으면서 정작 자기가 사랑하는 자기 집 개들이 죽은 것에 그토록 분노한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자기의 유익만을 챙기려는 인간.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의 사랑을 잘 추적해 들어가 보면 전부 그 사랑은 ‘자기 사랑’이라는 더러운 썩은 연못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 사랑이 변치 않는 속성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감정에 의존한 ‘타락한 사랑‘은 언제든지 자기 유익 앞에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서 참 사랑인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언제 그 사랑을 입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언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까? 여러분이 착하게 살기 시작했을 때입니까? 아니면 어느 날 여러분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입니까? 우리가 여러 번 반복해서 찾아보았던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우리는 이미 창세전에 택함을 받았다고 분명히 나와 있지요? 그리고 베드로 전서 1장에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도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이 예정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게다가 요한 계시록은 그 어린양이 이미 ‘창세전에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계 13:8) “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 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여기에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이 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의 생명책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 책’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린양은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이미 창세전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십자가는 가시적으로 2,000년 전에 골고다 언덕 위에 선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창세전에 죽임을 당하시고 역사의 저편에서 그 십자가의 효력을 이 세상으로 뿜어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 사랑의 대상은 단순히 민족적 ‘이스라엘’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창세전에 놋 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 살아난 것입니다. 아벨이 유대인인가요? 셋이 유대인입니까? 노아가 유대인인가요? 에녹이 유대인입니까? 뿐만 아니라 룻과 라합 같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든 세상에 열린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세상 ‘코스모스’는 원래 잘 꾸며진 ‘장식’ 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모조모로 잘 꾸몄거나 잘 조화되어서 아름답거나 우아한 사물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cosmetic’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모조모로 잘 꾸미시고 조화시키셔서 아름답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우주지요? 우주는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질서를 잡아 놓으시고 조화 있게 만들어 놓으신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래서 ‘코스모스‘라는 단어가 ’우주‘를 가리키는 단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에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의미 있는 곳이 당연히 지구이고 그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세상’ ‘코스모스’라는 단어가 적용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세상’의 의미는 대부분 하나님과 관계없이 이 땅을 살아가는 전 인류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들을 창조해 내시자 그 때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는 인류를 지칭하며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과 대조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단어의 곡해가 보편 구원론 자들과 알매니안 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게 된 것입니다. 칼 라너 같은 보편 구원론(universalism)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는 말씀을 가지고 ‘거봐라, 하나님은 어차피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하실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일견 make sense하지요? 사랑의 하나님이 자기가 창조한 인간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거기에 비해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전 인류를 위해 일단 아들을 죽이시고 그것을 믿어주는 자들을 기특히 여겨 구원을 해 주시는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미 모든 인간에게는 선행적 은총, 즉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보편 구원 론 자들의 의견에 대한 반박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독생자를 보내셨을까요? 그러면 그 독생자가 전 인류의 죄 값을 모두 치러 놓았는데 지옥 가는 사람은 뭡니까? 성경은 분명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마 23:13,15)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눅 13:28-29) “28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에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29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보편 구원론 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죄의 값이 다 치러지고 그들은 놓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럼 지옥 가는 사람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분명 지옥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사랑뿐 아니라 ‘공의’도 있음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세상’을 위해 아들을 보내서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준비를 해 놓으시고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의 발동과 선택을 사용해서 그 예수의 죽음이 자기의 죄를 대속 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으로 잘 살아내는 사람은 구원을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넣어 버리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을 냅니다. 착하게 살려고 열심을 내고 탈락하지 않으려고 전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여서 죄를 사해 놓았는데 인간들이 하나도 안 믿어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괜히 죽으신 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획 없이 인간의 의지에 좌지우지하시며 일을 하시겠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전 인류를 위해 오셔서 죽으신 것도 아니고 일단 전 인류를 위해 죽어 주셨다가 아무도 안 믿어주면 그냥 없던 걸로 해 버리는 허탈한 일을 하시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 어떤 택해진 한 무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 17:6)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예수님은 세상 중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 17:9)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 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 17:14-16)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 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지금 예수 의 관심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어떤 한 무리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만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십니다.
(요 15:19)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전 인류인 ‘세상’을 위해 오셨다면 왜 제자들보고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은 세상에서 건짐을 받은 어떤 무리만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16절에 쓰인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제가 전에 설명해 드리기를 요한복음에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고 했지요? 그 하나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전체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을 해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세상이었으나 그 세상 속에서 건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할 때 ’세상‘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랑하셨는가에 강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더럽고 추한 자들에게도 구별 없이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에 강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럴 때에는 ‘세상’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 것인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1장에도 후자의 ‘세상’이 나옵니다.
(요 1:29)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여기서 쓰인 ‘세상’ ‘코스모스’가 바로 후자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 중에서 건져 올려진 ‘세상’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은 가나의 혼인 잔치와 성전 파괴 사건 그리고 니고데모의 이야기로 은혜의 복음을 전개해 나가면서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그러한 인간들의 열매를 보고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준비하신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그 분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전히 죄인이었고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한 세상을 향한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요한은 감탄문을 사용합니다. 3장 16절을 헬라어로 보면 ‘후토스 가르 에가페센’으로 시작됩니다. 그 말을 직역하면 ‘오 이 얼마나 큰사랑인가’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어떤 것을 강조할 때 감탄문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요한은 감탄문을 써서 그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제가 새벽 예배 때 히브리서 13장의 영문 밖으로 나가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설교하기 위해 도대체 예수님께서 끌려 나가신 영문 밖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인가를 성경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곳은 정말 끔찍하고 더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전에 예수님께서 바로 그 곳으로 끌려 나가 죽임을 당하시기로 이미 작정이 되어 있었다니 그 사랑의 크기를 우리가 무슨 수로 그릴 수가 있겠습니까? 몇 군데만 볼까요?
(레 13:46)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 살지니라”
(레 24:14) “14 저주한 사람을 진 밖에 끌어내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로 그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신 23:12-13) “12 너의 진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13 너의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민 5:2)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둥병 환자와 유출병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되”
우리 주님은 이렇게 더러운 것들이 버려지는 곳, 살인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곳, 똥 버리는 곳으로 나가셔서 우리를 위해 더러운 문둥병자가 되시고 살인자가 되시고 똥이 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극진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를 드라마로 보여준 것이 바로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부르셔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의 역할을 하고 고멜에게 구원받을 세상의 역할을 시켜서 드라마를 한번 만들어보자’ 그렇게 하나님의 Q-sign이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드라마를 창녀 고멜을 찾아가서 청혼을 하는 호세아의 모습으로 시작을 하십니다. 호세아는 창녀 고멜을 찾아가 청혼을 하고 고멜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연거푸 낳습니다. 그런데 창녀 고멜은 그 몸에 배인 음란한 삶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웁니다. 그 때마다 호세아는 찾아가서 고멜을 데려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집에 찾아가 그 상대방 남자에게 먹을 것까지 전해주고 옵니다.
(호 2:5,8) “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그런데도 고멜은 계속 다른 남자들과 행음을 하다가 결국에는 단물 다 빼앗기고 노예로 팔리게 됩니다. 당시 고대시대의 노예시장에서는 노예의 옷을 모두 발가벗겨서 전시해 놓고 사람들에게 경매로 팔았습니다. 그 발가벗겨져서 노예 시장에 나온 아내를 남편이 사러 갑니다. 에덴동산에서 벌거벗음으로 부끄러워했던 죄인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되어서 고멜은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노예로 팔리는 순간 그녀는 죽는 날까지 지옥 같은 노예생활을 해야 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세상의 쾌락을 좇아 살면서 자신에게 이러한 순간이 오리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고멜은 처량하게 희망을 상실한 눈으로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그녀의 값이 매겨집니다. 그 때 노예의 값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돈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살짝 올려다보았을 것입니다.
아마 고멜은 그 순간 온 몸이 쏟아져 내리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평생 동안 그토록 괴롭게 했던 남편이 자신을 위해 고운 옷을 준비해 가지고 자신을 사러 온 것입니다.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 당시 보리 한 호멜 반의 가격은 은 열다섯 냥이었습니다. 합이 은 삼십이지요? 은 삼십은 생명의 속전이었습니다.
(출 21:32) “32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지니라”
(호 3:1-3)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3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그렇게 발가벗겨져서 죽음의 장소까지 내 몰렸던 고멜을 생명의 속전으로 산 호세아는 고멜에게 말합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혼인을 하실 때 우리에게 어떤 것을 지참금으로 주시는지 아세요? 하나님은 결혼 지참금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주십니다.
(호 2:19-20)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은 우리 신부들에게 정의와 공변됨(공평), 은총과 긍휼히 여김, 그리고 진실함을 결혼 지참금으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거듭나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씩 드러내며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성품을 ‘나’를 죽임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되면 불 속으로 집어 넣으셔서 ‘나’를 죽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환난이며 시험이며 고난인 것입니다.
(슥 13:7-9)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목자를 치셔서 죽이시면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하나님께 건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불 속에 던져 넣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그 백성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단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끊임없는 옛 자아의 죽음으로 점철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거듭난 분들이 맞다 면 여러분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오염과 부패가 지속적으로 떨어져 나가는 불 속 같은 상황들이 나타나야 맞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종국에는 세상 사람들이 힘으로 소유하며 자랑하는 것들을 초개처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나와 브닌나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브닌나에게는 아들들이 있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브닌나를 일컬어 ‘대적 브닌나‘라고 부릅니다. 브닌나가 무엇을 했길래 성경이 브닌나를 보고 ’대적 브닌나‘라고 부를까요? 브닌나가 한 것이라고는 자기에게 있는 아들들을 한나에게 자랑하며 한나를 격동케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자를 가리켜 ’대적‘’짜라‘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거기서 ’짜라‘’대적‘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대적‘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적은 세상의 것을 가지고 그 것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우쭐대고 자랑하고 그 것으로 상대방을 격동케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의 힘의 원리로 사는 자들을 하나님의 대적이라 부릅니다. 분명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나를 잉태치 못하게 하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나에게는 세상의 힘을 소유한 자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갖지 못함으로 구박을 받는 역할이 맡겨진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힘으로 그 힘의 원리를 벗어나 살도록 되어 있는 자들을 핍박을 함으로 해서 악의 실체를 드러내게 되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에게 당해 줌으로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대적임을 폭로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역할로 인해 기가 죽거나 기고만장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에게 역할을 맡기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TV에서 하는 ‘체험 삶의 현장‘같은 프로에서 유명한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이 나와서 탄광의 막장이나 공사판에서 며칠 일을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잠깐의 역할을 맡은 그들이 그 일을 부끄러워하던가요? 아니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그 때 잠시 그런 막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진짜 신분은 유명한 정치인이요 연예인이라는 것을 본인들과 TV를 보는 모든 이들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잠시 체험 삶의 현장을 찍으면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죽지 마십시오. 지금 그 자리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 주십시오. 분명 여러분을 깔보고 무시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주변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당해 주십시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대적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들의 행위가 지옥행 증거 화면으로 낱낱이 찍히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당당한 것입니다. 참으세요.
그런데 성경이 조금 이상한 내용으로 이어지지요?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대적 브닌나가 가지고 있는 ’힘’ 즉 ‘아들’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한나의 기도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구하는 기도로 가르치고 있는데 그러한 가르침은 잘 못된 가르침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한나는 하나님께 자식을 구하면서 그 자식을 주시면 도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기도를 합니다. 잘못 생각하면 브닌나가 너무 미워서 ‘나도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것만 한 번 보여주면 자식을 도로 가져가도 된다는 분풀이 용 기도응답을 구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나의 기도는 그러한 기도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한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하나님의 대적들이 갖고 있는 것을 구하고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구하는 것을 응답으로 주시는 그런 류의 해석은 마귀 적 해석인 것입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구한 것은 세상이 힘으로 여기고 자랑하고 있는 그 것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초개처럼 여기고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아들을 주시자 젖을 뗀 직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사시겠습니까? 한나와 같이 세상의 힘을 초개처럼 여기며 오직 하나님만을 기뻐하며 사시겠습니까? 브닌나처럼 세상의 힘을 소유하고 그 것으로 다른 이들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며 자신의 자랑을 챙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으신 분들이라면 당연히 한나의 삶을 살아 내셔야 지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여러분, 우리 열심히 그 길을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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