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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노아의 방주와 물위를 걷는 자들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7.

 

 

노아의 방주와 물위를 걷는 자들

 

(김성수 목사)

 

 

(창 6:1‐10) “1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3 주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4 그 무렵에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와서 자식들을 낳으니,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다. 5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7 주께서는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9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10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 이렇게 세 아들을 두었다.”

 

 

이제 창세기 5장까지를 다 마치고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창세기6장 노아의 홍수 사건으로 넘어왔습니다. 이 노아의 홍수이야기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아주 친숙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에도 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이 노아의 홍수 기사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가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대 사회에는 신화나 설화 그리고 서사시 등에 이 노아의 홍수와 아주 흡사한 홍수 이야기가 300여 편이나 있었습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 할 수 있는 고대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와 수메르 인들의 작품인 아트라하시스 서사시(The Epic of Atrahasis)입니다. 이러한 고대 바벨론의 홍수 이야기들을 잘 읽어보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사건과 거의 흡사합니다.

 

그 바벨론의 홍수 이야기들을 보면 1) 신이 인류를 홍수로 멸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2) 신이 ‘우트나 피쉬팀’ 같은 그 홍수 기사의 주인공들에게 미리 그 홍수 사실을 알려 줍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께서도 노아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려 주시지요? 그리고 3) 신이 주인공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을 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홍수 기사에서도 4) 주인공은 구원받지만 다른 모든 생물은 홍수로 인해 멸절 당합니다. 5) 그리고 홍수가 끝난 뒤 새를 내보내서 방주 밖의 상황을 알아봅니다. 6) 주인공이 홍수가 끝난 후 방주 밖으로 나와 신에게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7) 그 제사를 신이 받습니다. 8) 그 제사를 받은 신이 주인공을 축복해 줍니다.

 

어떠세요? 창세기 6장에서 8장까지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지 않으세요?

중요한 것은 이 고대 바벨론의 홍수 기사들이나 서사시들이 성경보다 먼저 쓰여 졌다는 사실입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 여러분은 금방 어떤 생각이 드세요? ‘그럼 성경이 그 고대의 설화들이나 서사시들을 베낀 것 아닌가?’ 라는 질문이 안 드십니까? 성경보다 먼저 기록이 된 고대 설화에 노아의 홍수 기사와 거의 흡사한 내용이 있다면 성경이 그 설화를 베낀 것 아닌가요?

 

제가 대학 때 종교 다원주의나 동양 철학, 불경 등을 공부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책들을 수십 권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불경에는 석가모니가 물위를 걷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리고 제자가 그 것을 따라 하다가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마치 복음서의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과 베드로가 생각나지 않으세요? 그런데 석가모니는 예수님보다 600년 앞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석가모니를 흉내 낸 것입니까? 그러니 가뜩이나 의심이 많은 제가 대학 때 얼마나 많은 회의에 빠졌겠습니까? 그 때 잠시나마 저는 지금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성경이 그냥 많은 고대의 설화를 짜깁기 해 놓은 좋은 교훈 책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이야기를 다 믿지 말고 그 속에서 성경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만 잘 받아서 도덕적 윤리적 올바른 삶을 추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포함한 모세 오경이 기록된 시기는 대략 BC1,500년경입니다. 모세가 그 때 사람이니까요. 반면에 고대 바벨론의 홍수 설화들이 기록된 시기는 그보다 100년에서 많게는 300년 전인 BC1600‐1800년경입니다. 맞습니다. 성경이 고대 바벨론 신화보다 더 나중에 쓰여 졌습니다. 그러나 진짜 홍수가 일어난 시기는 그보다 수천 년 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게 된 이후 저는 오히려 그러한 고대 바벨론의 홍수 기사들을 읽으면서 노아의 홍수는 진짜 일어났던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노아의 홍수 사건을 기록하기 전에 이미 성경과 거의 흡사한 홍수 이야기가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고 기록으로 남아있었다면 그 홍수 사건은 틀림없이 역사 속에 일어났던 사건이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수천 년 전에 일어났던 홍수 사건이 노아의 후손인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것이 설화로 서사시로 기록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 것을 BC1,500년경에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 하에 확실하게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지 마세요.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럼 이제 본격적인 내용 분석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설교 시간이나 성경공부 시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아주 간단하게나마 이 노아의 홍수 사건에 등장하는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고 이 홍수사건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그래도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면 이 노아의 홍수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쉽게 연결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구체적인 성경구절을 찾아드리면서 어떻게 이 노아의 홍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동일한 주제로 선지서와 시가서 그리고 신약의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지게 되는지 쉽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 노아의 홍수 기사로 신구약을 하나로 뚫어 볼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잘 들으시면 성경의 전체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리 이해하기 쉽게 노아의 홍수 사건을 하나의 드라마로 각색을 해서 생각해 보자고요. 여러분의 머릿속에 텅 비어있는 무대를 떠 올려 보세요. 이제 그 무대에 등장인물을 집어 넣으세요. 거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선택된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 그리고 역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짐승들입니다. 이제 무대 세트를 세워야지요? 이 노아의 홍수 사건의 무대배경은 어떻습니까? 홍수로 창일한 바다와 커다란 나무 방주입니다. 아주 간단한 무대장치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무대장치와 등장인물에 심오한 복음의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그 등장인물들과 무대장치들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 살펴봄으로써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주제를 찾아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무대 장치인 홍수가 무엇을 상징하는 지부터 보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물 혹은 바다 하면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지요? 죄, 죽음, 저주, 심판 등을 상징한다고 했지요?

 

(사 57:20) "20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시 32:6) "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심판) 저에게 미치지 못 하리이다"

 

(미 7:19) "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이렇게 성경에서 물, 바다, 홍수는 죄악 된 세상과 그 죄악 된 세상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심판 혹은 저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물, 홍수에 빠지면 모두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 아래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온 땅에 창일한 홍수는 바로 인간의 죄악과 그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저주의 물위로 방주가 떠 있고 그 방주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은 그 방주의 죽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무대 장치인 방주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방주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테바‘는 사실 배가 아닙니다. 최근에 나온 Evan almighty 같은 영화에 보면 노아의 방주가 커다란 배 모양으로 나오지만 사실 노아의 방주는 길이 135m X 폭 22 m X 높이 13m 직육면체 상자입니다. 구약에는 그 ’테바’ ‘방주’라는 단어가 또 다른 곳에 한군데 더 나옵니다.

 

(출 2:2‐3) "2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3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모세가 애굽에서 태어났을 당시는 애굽 왕 바로가 히브리 사람들의 번성을 막기 위해 히브리 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낳고 석 달을 숨겨서 키우다가 모세를 역청을 칠한 갈 상자에 넣어 물위에 떠다니게 만들었습니다. 그 모세가 탔던 갈 상자가 바로 ‘테바’ ‘방주’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역청을 칠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역시 모세의 방주도 역청을 칠합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노아처럼 ‘테바’ ‘방주’를 타고 죽음의 물에서 건져진 자입니다. 모세는 노아와 그의 식구들처럼 히브리 사내아이들과 다 함께 저주의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자였습니다. 애굽에서 모두 죽어야 하는 히브리 사내아이들의 운명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죄인들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모세라는 아이가 방주에 의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 상자가 어떻게 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인지 조금 이해가 가시지요? 모두 다 죽어야 할 자들 중에서 어떤 선택된 소수의 무리를 방주가 품어 안고 그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조금 더 나가보지요. 이제 선택받은 자들을 품에 안아서 그들의 생명을 건져낸 방주가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홍해 사건입니다. 홍해 바다는 하나님 앞에 범죄 한 모든 죄인들이 빠져 죽어야 하는 저주와 심판의 바다입니다. 그래서 그 홍해 바다에 세상의 죄인들을 상징하는 애굽 군대가 모두 빠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똑같은 바다에 빠져 죽지 않고 그 바다를 마른땅처럼 걸어서 건넌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성경은 그 사건을 가리켜 이스라엘이 구름과 바다에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 10:1‐2)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노아의 홍수 사건과 모세의 구출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품어 저주의 물로부터 구원해 낸 것이 ‘테바’ ‘방주’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홍해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을 품에 안고 그들을 구원해 낸 것이 방주가 아니라 ‘모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모세의 품에 안겨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주와 모세는 어떤 한 가지를 동시에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 모세가 누구를 상징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신 18:15) "15 주 너희의 하나님은 너희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모세가 이야기하고 있는 자기와 같은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6:14)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이렇게 홍해 바다에서 이스라엘을 품에 안고 그들을 구출해낸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친절하게 모세가 홍해 바다에서 행한 그 일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날 것인지를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통해 한 번 더 그림으로 설명해 줍니다. 복음서를 보면 죄인들이 모두 빠져 죽어야 하는 저주의 물에 빠지지 않고, 마치 방주처럼 그 물위를 걸어 풍랑에 빠져 죽어야 할 제자들을 건져내시는 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막 6:45‐52) "45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46 그들과 헤어지신 뒤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47 ○날이 저물었을 때에,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셨다. 48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노를 젓느라고 몹시 애쓰는 것을 보셨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가시다가,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하고 소리 쳤다. 50 그를 보고, 모두 놀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51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다. 그래서 제자들은 몹시 놀랐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무디어 있었다."

 

잘 보세요. 어떻게 노아의 방주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모세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지가 여기에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은 마태, 마가, 요한복음 공히 오병이어의 기적 뒤에 붙어 있습니다. 그 뜻은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은 오병이어의 사건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읽으신 마가복음 6장 52절에도 보시면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 이러라’라고 예수께서 떡을 떼셨던 오병이어의 사건과 이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이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모르면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제자들도 오병이어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물위를 걸으신 사건도 이해하지 못하고 놀라고만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를 하면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이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나겠지요? 오병이어의 사건은 제가 이미 여러 번 설교를 했을 뿐 아니라 다음 수요 성경 공부 시간에 자세하게 공부를 할 것이니까 오늘은 대충 그 전체적인 윤곽만을 짚어 보자고요.

오병이어의 사건이 일어난 곳은 디베랴 바다 건너편입니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를 말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도를 간단하게 설명을 해 드리면 팔레스타인 지방은 요단강으로 동서로 갈라집니다. 성경은 요단강 동편을 광야라고 부르고 요단강 서편을 가나안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요단강 북쪽에 갈릴리 바다가 있고 정확하게 남쪽에 사해가 있습니다. 사해 남서쪽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사건이 일어난 곳을 성경이 디베랴 바다 건너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쪽일까요? 서쪽일까요?

 

(막 6:35) "35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여기서 빈들이라고 번역이 된 ‘에레모스’가 ‘광야’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곳은 광야입니다. 그러니까 그 곳은 디베랴 바다 동쪽이라는 말이 됩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잘 그려보세요. 먹을 것이 전혀 없는 광야에서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먹고 남을 만큼의 음식이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무슨 그림이 떠오르세요?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모세에게 불평을 하던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만나 사건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지금 복음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바로 출애굽기의 광야 만나 사건과 연결시키기 위해 일부러 ‘에레모스’ ‘광야’라는 무대장치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그대로 두면 모두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어떤 식량도 찾을 수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의 만나가 하늘로부터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에서는 음식을 마련할 수 없는 광야 빈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굶고 있던 자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 두 사건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이 주어져 그 떡을 먹은 자들이 살아나게 될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요 6:33‐35,51)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하늘에서 내린 떡, 만나와 방금 빈들에서 맛보았던 오병 이어의 떡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두 사건은 단순히 꿀 과자 만나와 오병이어로 부풀려진 물고기와 이 땅의 떡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표적을 보면서 오로지 이 땅의 떡에 관해서만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라고 외치며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당신을 좇아온 사람들을 나무라십니다.

 

(요 6:26)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오병이어의 기적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알지 못하고 그저 먹고 배부른 떡만을 위해 주님을 좇는 자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좇는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로 죄인들을 살리러 이 땅에 오신 분이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의 떡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을 충족시켜주는 물질적 축복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인 영생이었습니다. 광야의 만나 사건과 오병이어의 사건은 바로 그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시자 주님을 좇아 왔던 많은 사람들이 많이 물러가고 다시는 주님을 좇아오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은 예수로 말미암는 영생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이 땅의 떡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 6:66)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오늘 날 교회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 치유나 물질적 축복이나 소원성취를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라고 설교를 하면 많은 이들이 떠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 땅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사건이 메시지로 담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을 간략하게 정리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당신을 좇아오자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주님을 좇겠다고 따라온 사람들을 기쁘게 품어 안아 주시지 않고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피하셨을까요? 그렇게 세상 것을 원해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다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피해 도망가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디베랴 바다를 건너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이 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산 위에서 그 제자들을 계속 지켜보고 계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상황을 잘 그려보세요. 제자들은 지금 디베랴 동쪽 광야에서 서쪽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 풍랑에 빠지면 모두 죽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여 노를 젓습니다. 그런데 풍랑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 나타나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은 그 즉시 가나안 땅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이게 주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의 대략적인 개요입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지금 제자들은 요단 동편 광야에서 요단 서편 가나안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곳에서 세상으로부터 가나안으로 향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새로운 출애굽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풍랑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홍수와 바다에 빠져 죽게 될 자들이 어떻게 해서 생명력을 회복하고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되는지를 친절하게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으로 부연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물, 바다, 홍수는 인간의 죄악과 그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는 그 것이 백성들의 굶주림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그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물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물을 밟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해내시는 사건은 이미 구약에 여러 모양으로 예언이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시 77:16,19‐20) "16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20 주의 백성을 무리 양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욥 9:8) "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시 18:16) "16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이렇게 구약에 예언된 대로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바다와 홍수, 즉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주님께서 밟고 올라서시니까 풍랑이 잔잔해 지고 제자들이 그들의 목적지인 가나안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요 6:18‐21) "18 그런데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졌다. 19 제자들이 배를 저어서, 십여 리쯤 갔을 때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배로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였다. 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시니, 21 그들은 기뻐서 예수를 배 안으로 모셔 들였다.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그 풍랑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잘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저 쪽에서 주님께서 그 물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랐지만 얼른 그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풍랑이 잔잔해지고 자신들이 탄 배가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0절에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 바로 출애굽기에 나온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주님은 지금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물을 밟으시고 그 백성들을 구원해 내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그림으로 그려드리면 이러합니다. 홍수로 다 죽어 가는 세상에서 노아의 여덟 식구가 주님을 상징하는 방주로 들어갔더니,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하면 ‘영접했더니’ 그들이 안전하게 그들의 가려던 땅에 도착하여 죽음을 모면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 사건에 무대 장치로 등장하는 ‘방주‘’테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떡을 먹고 세상 것으로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달라고 좇아온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나를 먹는 길밖에 없다‘ 다른 말로 ’나를 믿는 자들만이 영생을 얻고 진정한 안식과 행복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것은 바로 우리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풍랑을 헤쳐 가며 노를 저어 가려던 땅에 가고자 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의 힘으로는 절대 약속의 땅에 도달할 수 없으니 나를 의지하고 나를 믿어라, 오직 그 길만이 너희가 가려는 안식의 땅, 행복의 땅, 평화의 땅에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것을 교회들에게 친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두 사건 다 ‘굶주림에서, 풍랑 속에서 살아나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은 너희가 너희들의 힘을 발휘하여 세상의 것들을 차지하고 쌓음으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의 자랑이나 육신의 정욕의 충족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 봐도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와서 이 땅에 또 다른 다윗 왕국을 세우면 자신들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매불망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육신을 살지게 할 세상의 떡을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실제로 그러한 용사가 이스라엘에 와서 또 다시 화려한 다윗의 왕국을 세웠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은 진정한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매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이 땅의 왕국에서만 찾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우리는 저주의 물, 심판의 홍수에서 벗어나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이야기는 바로 그 복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은혜로 영생을 주시겠다는 예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영생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만을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너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왜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나에게서 원하느냐? ‘하고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바로 그러한 우매한 인간들의 대표로 나섭니다.

 

(마 14:27‐31)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주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 ‘에고 에이미’ ‘내가 바로 너희를 구원할 하나님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에 눈이 어두워 ‘주님 저도 물위를 걷게 해 주세요’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물위를 걸어보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일단 살아야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가 아닌 ’주님 저희도 폼 나게 물위를 걷게 해 주세요‘하고 요구를 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부와 명예를 얻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더럽고 추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저 좀 살려 주세요‘하고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으로 숨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자신을 증명하며 살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그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행복이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건 뉴에이지 사상이 지향하는 바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건 저주의 바다, 풍랑의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이용해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어떻게 됩니까? 바다에 빠집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심판의 바다, 저주의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베드로는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주님을 좇은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던 자들과 배 위에서 여전히 세상의 떡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모두 저주의 바다, 심판의 홍수에 빠지게 될 것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노아의 홍수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그 곳에 네피림과 용사, 세상의 왕이라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들 때문에 저주의 물이 하늘에서 쏟아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네피림과 용사와 세상의 왕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유일한 목적은 세상의 왕이 되는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용사가 되어 자신을 자랑하는 것뿐입니다.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해 삽니다. 그게 아담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위에 진노의 물을 쏟아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저주의 홍수, 분노의 바다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그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주님은 그렇게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네가 믿음이 없어서 빠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을 좇아 물위를 걸으려 하는 자들, 이 세상에서 자신을 과시함으로 행복을 찾으려 하는 자들은 모두 다 그렇게 저주의 바다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우리가 살아나서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다를 밟고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노아는 비도 오지 않는 산꼭대기에서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그 때에 방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만일 눈에 보이는 세상 부귀영화와 체면과 자랑을 챙기는 자였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그를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그 조롱을 참으며 그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나에게 주어지지 않을 때에 방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조롱할 것입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지금 살아있다면 너를 그렇게 만들 수 있겠느냐?’ ‘왜 네가 믿는 하나님은 너를 도와주지 않니?’ ‘왜 네가 믿는 하나님이 네 병을 고쳐 주지 않아?’ 세상은 우리를 조롱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그들에게 말해 주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나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난 눈에 보이는 것이 오히려 내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 감사해, 노아가 120년 동안 맑고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홍수를 대비했듯이 나도 우리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세상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거야’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뭡니까?

 

(벧후 3:10‐13)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 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 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생활 가운데서, 1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을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마 24:37‐39) "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제는 물이 아니라 불로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불바다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아처럼 세상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인생동안 다른 짓 안하고 방주를 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를 그 저주의 불바다 위로 끌어올려 방주처럼 물위를 걷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용서하실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그 구원의 방주는 물위에 뜨게 되지요? 우리가 빠져 죽어야 할 홍수 속에 우리 주님께서 대신 빠져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 불바다 위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눅 12:50)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께서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가리켜 ‘받을 세례’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여기서 ‘세례’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는 ‘밥티조’입니다. ‘밥티조’는 ‘물에 잠그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침례교에서는 침례를 줄 때 물에 푹 넣었다가 빼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세례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빠져 죽어야 할 저주의 물, 홍수 속으로 푹 빠져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 홍수 속에서 죽으셨습니다. 바로 저주의 물을 맞고 죽는 방주의 모습입니다. 방주는 저주의 물에 맞아 죽고 그 안에 들어있는 노아의 여덟 식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물위를 걸어, 가려던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요나서에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는,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들을 가리켜 요나의 표적이라 하시지요? 요나의 표적이 뭡니까?

 

(욘 1:11‐17) "11 ○바다에 파도가 점점 더 거세게 일어나니, 사람들이 또 그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우리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12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시오. 그러면 당신들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바로 나 때문에 이 태풍이 당신들에게 닥쳤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13 뱃사람들은 육지로 되돌아가려고 노를 저었지만, 바다에 파도가 점점 더 거세게 일어났으므로 헛일이었다. 14 그들은 주를 부르며 아뢰었다. "주님, 빕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우리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주께서는 뜻하시는 대로 하시는 분이시니,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15 그들은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졌다. 폭풍이 일던 바다가 잔잔해졌다. 16 사람들은 주를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주께 희생제물을 바치고서, 주를 섬기기로 약속하였다. 17 ○주께서는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마련하여 두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밤낮을 그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다."

 

요나가 타고 가던 배가 폭풍을 만나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을 판입니다. 그 때 요나는 자신을 바다 속으로 던지라고 합니다.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 속으로 던지자 바다가 이내 잔잔해 졌습니다. 예수를 상징하는 요나가 물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속에 빠짐으로 선원들이 살아납니다. 그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물속에 빠져 다른 이들을 구해낸 요나가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 밤을 죽어 있다가 살아나지요? 뭡니까?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빠져 죽어야 할 홍수 속에 빠져 죽으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 저주의 홍수 속에 빠져 죽으심으로 우리는 물위에 둥둥 떠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이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홍수와 풍랑을 피해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의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 예수를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반복하고 반복하여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설교여야 합니다. 설교는 세상에서 심리학이나 경영 학 같은 것을 이용해서 이 땅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설교는 자기를 부인하고 홍수와 풍랑을 피해 우리가 가려던 땅에 도착하는 방법인 복음만을 설명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예수를 믿으시는 많은 분들이 조금 의아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풍랑이 잔잔해 진다고 하고 홍수도 피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 삶에 일어나는 이 풍랑은 무엇인가? 네, 좋은 질문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우리 성도들에게서 그 풍랑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거기서 발휘해야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는 풍랑 속에서 잔잔하게 물위를 걸으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내 삶 속에는 여전히 풍랑이 일고 있지만 나는 믿음으로 잔잔한 바다 위를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환경은 몰아치는 홍수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하고 말씀하셨기에, 그리고 그 약속의 땅에 반드시 나를 데리고 들어가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 까짓 거’하면서 믿음으로 물위를 걷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이러한 풍랑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언젠가 이 모든 풍랑들이 가시적으로도 다 사라지고 우리는 영원한 행복과 안식과 기쁨만 있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계 21:1)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보세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이제 저주의 바다, 심판의 홍수가 없습니다. 그게 예수 믿는 여러분의 실존입니다. 그 땅을 바라보며 이 땅의 풍랑을 잘 이겨내십시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생의 자랑이나 육신의 정욕만을 채우려 혈안이 된 자들은 베드로처럼 풍랑 속으로, 바다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들이 빠지게 될 바다는 여느 바다가 아닙니다. 그 곳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불과 유황으로 타는 저주의 바다, 심판의 바다입니다.

 

(계 21:8) "8 그러나 비겁한 자와 신실하지 못한 자와 가증한 자와 살인자와 음행하는 자와 마술쟁이와 우상 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지금 여러분의 삶을 바라보면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빠져 나갈 길이 없다‘하고 외치고 계신 분들이 이곳에도 계실 것입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만이 길입니다. 주님 이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만일 돈이 우리의 행복의 길이 된다면 주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돈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어야 지요. 명예가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면 주님은 명예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성취가 여러분의 행복의 길이 된다면 주님은 ‘너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오직 주님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요,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면 이 세상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성도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모두가 낭떠러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금 낭떠러지로 밀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드십니까? 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라는 유일한 길을 찾아 올라오라고, 오직 그 길로만 들어서라고 주님은 여러분을 낭떠러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라는 길을 찾으십시오.

 

성도는 이 땅에서, 풍랑이 이는 바다 같은 이 땅에서, 홍수가 무섭게 창궐하는 이 땅에서 잔잔하게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만을 붙드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의 삶 속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홍수와 풍랑이 일고 있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예수를 붙드세요. 세상에서 이름 떨치고, 세상에서 자랑스러운 자들이 되려 하지 마세요. 그러다 보면 정작 붙들어야 할 예수를 놓치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잘 가고 계신 것입니다. 힘내십시오. 여러분의 목적, 여러분의 계획, 여러분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려 하지 마세요. 그 사람들이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저주의 바다에 빠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셔야 합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서 기독교 TV의 ‘새롭게 하소서‘라는 프로에 출연을 하고 왔습니다. 사회를 보시던 오미희씨와 임동진 목사님께서 저에게 마지막으로 ‘목사님의 비전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비전이 없습니다. 목사가 자기 비전을 갖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그게 욕심이 되어 올바른 목회가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우리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계획과 비전을 이 순간 바다에 다 쏟아 넣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인 ‘하나님의 자녀로의 성숙’을 여러분의 목표로 삼으십시오. 이게 노아의 홍수가 담고 있는 주제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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