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상속,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김성수 목사)
(엡 1:15-19) “15 그러므로 나도, 주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5)사랑을 듣고서,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사랑을'이 없음) 16 여러분을 두고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내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19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사도가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도 목사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이 바로 이 내용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목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 성경을 잘 연구해서 쉽게 풀어 전달하여 성도들이 더욱 깊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고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신자들이 궁극적으로 받을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알게 하며 그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려 주는 것이 목사가 해야 할 일이란 것이지요. 지난주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불려 졌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것인지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받을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공부가 여러분이 사시는 날 동안 큰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삶에 대해 한참 고민하던 시절에 몇 년간을 허랑방탕하게 밤이면 술에 젖어 살고, 낯에는 여러 종교의 경전을 뒤지고 잡다한 소설들을 읽어 내려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밤에 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가 하면 나름대로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문인들과 예술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밤을 패가며 삶을 이야기하고 ‘이 지겨운 일상에서 어떻게 하면 탈출 할 수 있을 것인가’ 일탈을 꿈꾸며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지만 결국에는 해답을 찾지 못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 여러 한국 소설가들의 책을 만났습니다. 다른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고 어떻게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가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소설과 잡지가 최고입니다.
소설이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경험이 토대가 되어 엮어지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모델이 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한계가 있듯이 인간의 창조력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소설을 읽다보면 그 작가의 삶을 엿 볼 수 있기 때문에 소설을 즐겨 보았습니다. 그 중에 박완서님과 공지영, 최인호, 최영미 같은 사람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화려한 언어구사에 매료되어 저녁에 술에 취해서도 그 삶을 엿보고 싶어서 몇 줄이라도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 중에 신경숙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풍금이 있던 자리로 유명해 졌지요. 언어구사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인간 내면을 잘 그려내는 작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 중에 J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말미 에필로그에 그 작가가 이렇게 썼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앞을 내다보는 게 아니라 뒤를 돌아다보는 일은 쓸쓸합니다. 후회와 미련, 아쉬움이 번갈아 가며 가슴을 들락거리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과거는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명분이 되지 못합니다”
맞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늘 아쉽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흘러간 과거를 에너지 삼아 오늘을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힘은 내일이라는, 미래라는 목표가 설정되어 있어야 비로소 발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꿈을 이야기하고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멸된 사람은 자살을 하게 되는 것이고요.
만일 오늘 저녁, 내가 사형을 당하기로 되어있다면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밥이 먹히겠습니까? 오늘 죽을 텐데 그 좋아하는 골프나 실컷 치다 죽어야지, 하겠습니까? 다리에 힘이 풀려서 아무 것도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형수들에게도 사형 집행 날짜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마지막 가는 사람에 대한 배려입니다. 사형수들도 언젠가 집행 날짜가 오긴 오겠지만 오늘은 아니겠지 하는 내일에 대한 막연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나서 내가 풀려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내일에 대한 막연한 소망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일, 미래라는 것이 너무 불확실합니다. 자기가 생각한대로 되지 않거든요.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도 아저씨와 어린 왕자가 이런 대화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별이 있다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별이 돈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것이 명예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식일 수도 있고, 모든 인간은 그 별을 바라보며 오늘을 산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내일이라는 목표가 정확하게 정의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들은 각자가 자기만의 소망들을 만들어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내일에 대한 소망이라는 것이 모두 한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섹스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참 가치를 잃어버리고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가치라는 것이 바로 그리로 수렴되기 때문에 인간은 모두 그 곳으로 달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내일에 대한 소망이라는 것은 참 제한적이며 가난한 것입니다. 제가 속해 있었던 저희 대학 동아리 인터텟 게시판에 가보면 글을 올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사람은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국회의원이나 부산시 부시장, 회사 사장, 언론사 국장, 최소한 대학교수 이런 분들은 자신 있게 글을 올리고 만나자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합니다. 그런데 저기 시골 중학교 사회과목 교사, 농장주인 이런 선배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글도 못 남깁니다.
우리 사회가 “가치란 이런 것이다” 하고 정의해 놓고 있고 그것을 성취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으로 그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두들 한 곳 만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 자리에 도달하면 인생의 목마름, 갈증은 완전히 해갈 될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갑니다. 인간의 의지, 결심만으로는 그 대세를 거슬러 올라가며 살 수 없습니다.
작가 신경숙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사무직 직원으로 일을 했었습니다. 그 때 그 출판사 사장은 운동권 출신으로 한국 이념 서적을 총 정리하겠다는 신념으로 출판사를 차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출판업계의 대세는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와 명예가 따라 오니까요. 어느 순간 “K양 이야기”라는 연애 소설과 “무협지”를 출판하게 되더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람들은 내일,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라는 것이 제한적이며 가난한, 돈과 권력과 섹스에 몰려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소망으로 살아갑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루어질 소망이 아닌 내세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이 땅의 소망처럼 불확실한 것을 향해 돌진하는 그런 소망이 아니라, 명쾌하게 제시된 확실한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우리가 받을 그 기업,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풍성을 더 많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소망으로 가지고 있고 힘으로 여기고 있는 그런 것 말고 그 영광스러운 기업의 풍성함이 어떠함을 더 많이 알아 이 땅을 살아가는 힘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못 먹고 못 살 때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굶어 죽으나 그냥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먹고살기가 편해지자 인간들은 웰빙이다 뭐다 해서 오래 오래 살고 싶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보고 즐길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서 받을 복을 이 현세에 미리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내세 사상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그래서 요즘 내세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현실 도피”라고 판단을 내려버립니다.
“현실을 살아 낼 능력이 없는 무능력하고 용기 없는 자들의 현실 도피적 발상”이라고 취급을 해 버립니다. “이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게 많은데 왜 지금 내세를 걱정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목적도 없고 계획도 없고 능력도 없는 약하디 약한 자 취급을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천국은 그저 죽으면 마지못해 가는 곳 정도로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환자 병문안을 가서 “먼저 천국 가셔서 좋으시겠습니다.‘ 그러면 몰매 맞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제 목사도 “천국은 나중에 가시고 여기서 더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사세요” 이래야 환영받습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습니다.
(히 9:27) “27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 죽음이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생각하지 않는 것이 죽음입니다. 내세가 있고 그 뒤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죽음 뒤의 삶을 준비하는 참 그리스도인들 말고는 아무도 자기에게 곧 죽음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정작 어떤 경로로든 죽음이 닥치면 그들은 난감해 합니다. 죽음을 우습게 생각하고 내세를 준비하지 않던 사람들에게 죽음이 돌연히 찾아왔을 때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볼테르라는 시인은 죽음 직전에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소. 만일 6개월만 더 살게 해 준다면 내가 소유한 것의 절반이라도 주겠소.”라고 의사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회의론자인 토마스 홉스는 죽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빠져나갈 구명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제 어둠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려고 한다. 어! 어~”
나폴레온은 죽을 때 이렇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내가 죽을 시간보다 빠르게 죽는다. 내 몸은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위대한 나폴레온이라 불려 졌던 자의 운명이 그러하다. 내 깊은 비참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사이에는 얼마나 엄청난 심연이 깔려 있는가?”
영국의 초대 무신론자 클럽의 회장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은 아주 유명합니다. 둘러서 있던 그 클럽의 멤버들에게 “너희들은 더 이상 나에게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난 지금 보고 있거든. 난 이제 큰일 났단 말이야. 이 망할 놈들아”
반면에 커버넌트 신학교 총장의 딸인 브로닌 여사는 암으로 죽어가면서 임종 직전에 예수님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신앙의 선배들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가족들 앞에서 그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면서 가셨다 합니다. 죤 웨인 쉴레터의 어머니는 임종 직전에 아들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유언을 하셨답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죽은 다음에 내 무덤에는 어떤 꽃도 가져오지 말아다오. 왜냐하면 나는 거기 없을 테니까. 나는 육체를 떠나면 곧장 유럽으로 갈 거야. 너희들 아빠가 맨 날 유럽한번 데려간다고 해놓고 한 번도 데리고 가지 않았잖니? 거기서 유럽 구경을 한 후 내가 그렇게 기다리던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러 갈 거란다. 잘 들 있어라. 그리고 우리는 머지않아 다시 만날 거니까 울지 마.” 그 자리에서 자식들이 모두 웃었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의연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밖에 없습니다.
무디는 죽기 전에 병상에서 잠시 깨어나서 둘러서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죽었습니다. “세상은 물러가고 내 앞에 하늘이 열리고 있다. 이것이 죽음이라니 죽음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구나. 거기에는 험한 골짜기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계시는구나. 나는 이제 가야만 한다.” 침상 곁에 서 있던 아들이 말했습니다. “안 돼요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 죽음의 꿈을 꾸고 계신 거예요.”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니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들아. 난 이미 하늘문 안에 들어섰다. 그 곳에 있는 수많은 믿음의 자녀들이 나를 보고 있다. 그들이 환호하고 있다. 난 이만 간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이렇게 죽음 이후의 내세를 준비하여 훈련하고 연습하며 살아간 사람들과 내세를 무시하고 살아간 사람들의 마지막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분명 천국과 지옥은 존재합니다.
(눅 12:4-5)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마 10:28)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25:46)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막 9:43-48)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죽으면 영혼까지 다 소멸 되어버린다고 주장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욥 19:25-26)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마 22:30-32)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그리고 변화 산에서 누가 나타납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1500년 전사람, 800년 전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출애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는 육신의 몸은 죽었지만 여전히 의식을 가지고 하늘과 지옥에서 존재합니다. 분명 우리 영혼은 절대 불멸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영혼은 천국에서 어떤 영혼은 지옥에서요. 아까 마가복음 9장에서 그 불은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왜 그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하느냐 하면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천국과 지옥은 있지만 이 땅에서 예수 안 믿고 죽어서 지옥에 갔다고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로만 카톨릭도 연옥이라는 곳에서 우리가 우리 죄의 대가만 지불하면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면죄부도 팔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구절을 베드로전서 3장 18에서20절까지로 삼습니다.
(벧전 3:18-20)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4)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5)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고난을 받으신',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우리를') 19 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20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표준새번역]
이 구절에 대한 다른 이들의 주장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언뜻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지옥에 내려가서 그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에 "He descended into Hell" 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 한국말 사도신경에만 그 말을 빼 버렸습니다. 한국어 이외의 다른 나라 말 사도 신경에는 전부 그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갔다 오셨다고 합니다.
사도신경의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는 지옥을 경험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2시부터 3시까지 흑암이 온 세상을 덮은 것입니다. 그 흑암 후에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내가 목마르다” 하십니다. 그 목마름은 어디서 보셨죠?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부자가 “내가 목마릅니다. 손에 물을 조금 찍어서 내 혀에 대 주십시오” 하지요?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 대신에 지옥을 경험 하셨다는 말이지 지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장18절에서 20절의 내용은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베드로서는 베드로가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힘과 위로와 격려를 주고자 기록한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에 직면해 있었고 숨어서 신앙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박해와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있는, 때로는 죽음에 직면하는 그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곧 종말이 올 것이고 심판이 있을 것이며 우리의 몸은 죽어도 영은 절대 죽이지 못하니 힘을 내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봐라.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 지금 너희들을 박해하고 있는 자들이 너희를 죽인다 할지라도 너희의 영은 살리심을 받을 것이다. 그들을 절대 너희의 영혼을 죽일 수 없다. 그러니 안심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위에 17절에 무슨 말이 있느냐 하면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들이 잘 참아야 한다.” 고 이야기 한 후에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죽으셨지만 영으로는 사셨다”고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영으로도 또한 육체에 머무셨을 때에 행하셨던 일을 행하고 계신데 그 일이 뭐였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 분이 영으로도 같은 일을 하고 계시고, 전에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뭐지요? 인류의 최후의 심판의 적나라한 모형이 뭡니까? 노아의 홍수이지요. 그 때도 예수께서 영으로 노아를 통해 똑같은 경고를 하셨습니다. “회개하라, 방주로 들어가는 자는 살고 들어가지 않는 자는 죽는다.”
그런데 달랑 여덟 명밖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에도 노아를 통하여 영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알아듣는 자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아듣는 자들이 드문 복음을 지금 너희가 알아듣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복이냐‘라고 교회를 위로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저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나 그 분은 영으로 살아 계신다. 그처럼 저들이 너희들을 육신 적으로는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너희가 방주 안에만 있으면 너희는 안전하다. 그런데 너희는 예수를 믿는 자들 아니냐? 이미 방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자들 아니냐? 그러니 너희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며 저들은 절대 너희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으니 안심해라” 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4장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벧전 4:6)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역시 동일하게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것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오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미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들여 순교를 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만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미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궁금해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서 그 문제를 설명해 줍니다.
(살전 4:13-18) “13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들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4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15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이미 잠든 사람들보다, 절대로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
이렇게 먼저 죽은 자들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여러분은 죽은 자들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지금은 죽었지만 살아있을 때 복음을 들었고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처럼 몸으로는 죽었지만 영으로는 살아있으니까 여러분은 안심하시고 여러분도 혹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들처럼 영은 죽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 구절에 이어서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그러므로’를 맨 앞에 넣어서 읽어보세요.
(벧전 4:12-14) “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3 오히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이 기뻐 뛰면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네, 이렇게 죽음 이후에 인간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올 것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밖에 예수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진지하게 내세를 준비하는 내세적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어차피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나라이므로 이 땅에서 나에게 주어진 직업이나 가정에 불성실하게 소홀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세 적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훈련을 받고 있고 나의 환경이나 상황은 모두 그 거룩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므로 무슨 일에든 최선을 다해 나의 거룩을 이루어 가야지” 이것이 바로 바른 내세관입니다.
혹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천국이지 이 땅의 것이 아냐, 공부? 뭐 그렇게 열심히 해야 되나? 일? 대충 아무 일이나 하다가 하나님 부르시면 가면 되지 뭐” 만일 이런 사람 있다면 그 사람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참 잘 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라는 정확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우리에게 필요한 “거룩”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이 뭡니까? 현실은 오늘을 이야기합니다. 오늘이라는 것은 내일이라는 기대와 목표가 확정되어 있지 않으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기준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 달 말에 월급을 타기 위해 오늘 일을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목표와 목적을 정하지 않았는데 무슨 기준을 가질 수 있으며 어디에다 우리의 힘과 지혜를 집중시킬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내세관이라는 것은 그 천국이라는 목표, 목적을 가지고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고 집중하고 노력하고 인내 할 수 있는 근거로 삼자는 것이지 내세라는 이름으로 오늘을 불성실하게 없는 듯이 살자고 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딤후 4:1-5) “1 나는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2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하십시오. 3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4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5 그러나 그대는 모든 경우에 정신을 차려,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열심히 직무를 완수하라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그 분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현실에 충실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그 목표와 목적이 없으면, 그 내세관이 없으면 우리가 말씀을 전파하고 직무에 충실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 나라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열심히 이 땅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혹자들이 내세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자기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정말 천국을 알고 지옥을 아는 사람들은 역사와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합니다. 세속적인 개혁은 언제나 영적 부흥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영원에 대한 눈을 떴기 때문에, 이 땅을 살아가는 목적을 알게 되고 “삶이란 것이 이렇게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배우는 것이구나.”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학교, 병원, 구제기관, 노동조합 같은 것을 만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다 내세를 알고 내세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은 노동조합이 무슨 공산당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만 원래 기독교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노동조합은 ‘인생에 대한 무지와 게으름, 무책임하고 무절제한 노동자들의 삶을 계몽하고 계도하고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천국과 지옥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기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희생해서 남을 돕는 자리로 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고 우리의 시선을 그 곳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사는 둥 마는 둥 불성실하게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을 모르고 이 세상에만 눈을 두고 사는 인간이야말로 더욱 더 퇴폐적이고 불성실해 질 것입니다.
(고전 15:32) “32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33 속지 마십시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칩니다.”
만일 우리의 부활과 천국이 없다면 내가 에베소에서 그 맹수 같은 세상과 싸운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니까 먹고 마시자”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오리란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겁이 없습니다. 그래서 막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살전 5:1-8) “1 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2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3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4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 날이 여러분에게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면서, 정신을 차립시다. 7 잠자는 사람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사람들도 밤에 취합니다. 8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로 하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 주님의 날이 도적 같이 온다고 합니다. 도둑은 언제 올지 모르는 것이죠. 나중에 도둑맞고 난 다음에 “아이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에게는 그 하나님 나라가 도둑같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요? 우리는 이미 그 나라의 영광의 풍성을 알고 있는 자이고, 그 내세를 소망하고 기다리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 날이 세상 사람들에게 도적처럼 올 때에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가 “오셨어요?” 하고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를 보고 기다리는 자로서 이 땅에서 열심을 다해 그 나라에서 살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빨리 데려가시면 “감사합니다.” 하면서 얼른 가는 것입니다.
그 날이 늦게 온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차근차근 많이 준비해서 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내세를 아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언제 부르셔도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사막에서 장사를 하는 아저씨가 대화를 나눕니다. 아저씨는 무엇을 파세요? “응 난 갈증을 잊게 해주는 약을 팔지, 이 약을 먹으면 사람들은 이 사막에서 일 주일에 53분쯤 절약할 수 있어. 그만큼의 시간을 목마름을 잊을 수 있단다” “그럼 그 사람들은 그 절약한 53분을 어디다 써요” “응,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지” “나 같으면 그 시간동안 샘을 향해 걸어갈 텐데”
사람들은 자기의 심심함과 권태와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이모저모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갈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방법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일시적으로 기쁨을 얻는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목마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목마름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남을 위할 줄 아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거룩을 향해 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가 올 나라를 생각하고 알고 준비하는 자들은 성실하고 이타 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자”이렇게 인생의 좌우명을 삼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있지요? 여러분의 삶이 정말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오늘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두 번째로 그 나라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이 땅에서의 환난을 잘 견뎌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건져내어졌고 세상은 우리를 배척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신자에겐 고난이 필수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축복입니다. 정금을 만들어내기 위해 금에 붙은 지푸라기 먼지 같은 것을 다 태워 버리려 풀무 불에 녹이고 시안화나트륨 같은 화학 물질로 걸러내고 별의 별 공정을 다 거쳐야 합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과하여 정금 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축복이라고 했지요? 호박도 몽둥이로 패야 왕 호박이 되는 것 아십니까?
영국의 알프레드 윌리스의 자연과학 수필에 참나무 누에나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에고치를 헤치고 나비가 나오는데 너무 힘겨워 보여서 누에고치 끝을 조금 찢어 주었더니 그 구멍을 통해 쉽게 나온 나비는 잠깐 퍼덕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난에는 다 뜻이 있는 것입니다. 몸부림치며 누에고치를 찢어야 하는 고난은 나비에게 생명을 주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그 고난을 없애 버렸더니 나비는 죽는다니까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의 삶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꾸 눈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데에 고난만큼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약 1:12)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인정하심을 받다‘는 말은 “도키모스”입니다. 그 말의 원어의 뜻은 자격을 “인증 받다, 공인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어내고 잘 참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증하시고 인증하시고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의 면허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검을 주러 왔다. 누구와 누가 싸운다고요? 부자지간, 모녀 지간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핍박받고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를 이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게 하고 이 세상의 것을 반대하게 만듭니다. 당연히 세상은 우리를 몰아붙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공격 합니다 .예수를 믿자 친구도 친척도 가장 가까운 혈육도 건강도 모든 것이 우리를 반대하고 나섭니다.
“어, 나는 아직 그런 고난 없는데” 기다리세요.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밖에 안 주십니다. 조금씩 자라가면서 이제 차근차근 하나하나 주실 겁니다. 힘이 들 겁니다. 그 때에 그 우리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우리가 가게 될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풍성을 아는 만큼 잘 참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 12:1-8)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실 때 그 앞에 놓인 즐거움을 생각하시며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생각하시며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너희에게 본을 보이시고 가신 그 예수님의 삶처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풍성을 깊이 공부하고 깨달아서 견뎌내라는 것입니다.
(롬 8:18)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후 4:17-18)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는 그 나라를 바라보며 참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영광의 풍성을 아는 자들이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더러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알아 가라고 사도는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거하는 곳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 영광의 풍성의 극치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영원히 거한다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가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 14:1-3)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미 너희에게 일러주었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3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요 17:24)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우리 예수님과 똑같은 몸이 되어서 그 나라에 살 것입니다.
(요일 3:1-3)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사랑을 주셨는지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 모습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누구나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빌 3:21) “21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풍성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자격 없는 우리에게 그 영광의 기업을 유산으로 주셨습니다. 그 나라는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우리와 피조물이 새롭게 변화되어 썩지 않고 병들지 않고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요한이, 모세가, 직접 올라가서 본 그 나라를 성경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그 나라를 이해하고 깨닫고 보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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