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恩惠)
(김성수 목사)
(요 1:12-14)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5)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 '남자의' 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제가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지난 2년 반 동안 여러 차례 다루었던 교리 부분은 그냥 지나가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강해를 하면서 그냥 가볍게 다루고 넘어간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아주 기본적이며 중요한 개혁 교회 기독교 교리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계신 분들이 있는 것 같아서 오늘은 지난주에 공부했던 12절부터 14절까지의 내용을 보충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13절을 강해하면서 12절의 내용은 여러분께서 당연히 쉽게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넘어갔었는데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13절을 공부할 때 분명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임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마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믿고 자신이 영접을 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있지요? 그런 구절들은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행 16:30-31)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도 마치 죄인이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믿고 영접하는 행위를 해야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계 3:20) “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도 문을 여는 주체가 마치 인간 쪽인 것처럼 보여 집니다. 여러분 정말 아직도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셨습니까? 아직도 여전히 우리의 구원에 우리 의 선택과 우리 자신의 힘이 보태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오래 전에 배운 개혁주의 5대 강령을 기억하십니까?
TULIP
Total depravity (전적타락)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 (제한적 속죄)
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
Perseverance of the saint(성도의 견인) 이것이 개혁주의 5대 강령입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입니다. 이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복음은 Good news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전적인 타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Total'은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범위를 나타낸다고 했지요? 전 범위에 걸쳐 모두 다 타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측에서의 가능성은 전무 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당연하지요. 만일 인간 측에서 자신의 구원에 보탬이 될 만한 어떠한 행함의 여지가 남아있다면 예수님께서 왜 굳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합니까? 오래 오래 사시면서 잘 가르치시면 되지 않습니까? 왜 달랑 3년만 가르치시다가 그냥 죽어버리시냔 말입니다. 만일 인간 속에 가르침이나 경고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주님께서 수 십 년간 인간들 속에 사시면서 열심히 가르치다 가셨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복음을 가르치셨는데 이해를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전적 타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증거로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약도였습니다. 그대로 살아내면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율법이라는 약도를 보고 하나님께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직접 올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셨는데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죄인들은 그 십자가를 딛고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난주에 공부한 요한복음 1장 9절을 다시 한 번 보시지요.
(요 1:9-11)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그 위의 5절도 보세요.
(요 1:5)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여기 보시면 분명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사람들이 알아보지도 못 했고 깨닫지도 못했고 자기 백성도 영접하지 않았다고 나오지요? 그리고 바로 12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자들이 알아볼 수 없었고 영접할 수 없었는데 그 분을 알아보고 영접하는 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 거기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이 13절 14절인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영접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만 주님을 영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을 은혜라고 한다‘가 14절이고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셨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시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속의 방법을 마련해 놓으시고 ‘이 걸 믿는 사람은 구원해 주고 이걸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 안 해 준다’라고 우리에게 선택을 하라고 하신 것이 복음이라면, 만일 한 사람도 안 믿어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괜히 아들을 죽이신 꼴이 되지요?
하나님은 저자거리 장사치처럼 복음을 들고 ‘제발 하나만 사 주세요’ ‘제발 좀 믿어 주세요’라고 구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그 분의 백성들을 그 분의 계획 속에 선택하셨고 그들을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을 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백성으로 하여 영원히 타락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작정을 역사 속에 펼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묵시 속에서의 하나님의 작정이 가시화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개가 토해 놓은 것보다 더 더러운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죄의 추악함을 폭로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작용하게 되는 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엡 1:4-5)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2:1-9)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은 후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안 살아내면 중도에 탈락을 시키시는 일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 인간의 행위를 보태려고 한 펠라기우스나 알메니우스는 이미 이단으로 정죄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인간의 완전 성화를 주장했던 요한 웨슬레도 나중에 그 ‘완전 성화’의 부분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기를 원하는 성도의 분투’라고 정정을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땅에서 완전한 성화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합격 커트라인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년의 요한 웨슬레가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도의 완전함은 완벽하신 하나님의 수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마 5:27-30,38-45)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여러분이 정말 이렇게 다 지켜내실 수 있으세요? 그런데 누가 이렇게 살다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살다가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삶을 우리에게 전가 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 구원을 확인한 사람들이 너무나 감사해서, 그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열심히 살기로 결단하고 분투하는 것을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혁주의 교회의 구원의 서정은 ‘칭의, 성화, 영화’입니다. 그런데 예수 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구원의 서정을 ’성화, 칭의, 영화‘ 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먼저 우리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잘 살아내면 그 다음에 ’의롭다‘라는 ’칭의‘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도저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올라올 수 없음을 아시고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죄인이었던 우리에게 무작정 ’의롭다‘’not guilty'라고 판결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이 ‘칭의‘라는 용어는 법정 적 용어입니다. 판사가 판결문에서 ’죄 없음‘을 선포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최후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선택 속에 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미리 ’무죄‘를 선고해 버린 것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를 ‘말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미 마지막이 역사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서 마지막 심판 때 일어날 일들이 상징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해가 빛을 잃고, 땅이 흔들리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게 구원이며 그게 복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어떻게 우리의 행위와 선택이 들어갑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그 시점에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구원의 필요를 절감하게 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어떤 사람이 회심하게 되었다고 해도 그 것은 그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그의 영이 살아났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롬 5:8)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9:13-16)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보세요. 이렇게 구원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선택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두에 읽었던 계시록의 ‘볼 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도 구원의 문제를 다루시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이미 구원을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셨다시피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주 부자였고 세상 말로 크게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게 하나님의 복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부유하다 하나 실상은 가난한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진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 풍요와 부흥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풍요와 부흥을 추구하는 자들은 ‘예수를 문 밖으로 쫓아낸 자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볼 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입니다. 그 말씀은‘나의 백성들아 어서 내 말을 알아듣고 너희 마음의 문을 열어, 너희들 마음 가득 채워져 있는 세상의 힘을 향한 추구를 비워내고 예수를 그 안에 채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 간수에게 한 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도 우리 죄인들이 이 땅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길 밖에 없다는 구원에 있어서의 믿음의 필연성과 유일성을 가리키는 것이지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여 선택을 강요하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구절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 후에 그 눈을 뜬 자들에게서 나오게 되는 동의와 공감과 협조와 순종을 기술하는 것이지 어서 어서 예수를 믿어 너희의 영원한 생명을 쟁취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은 마치 죽어있는 시체들에게 어서 살아나라고 외치는 것과 똑같은 바보 같은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인 것 같으세요?
(요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바로 ‘보니’라는 단어입니다. ‘헤떼아사메따’ 빛이 왔는데도 그 빛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육신이 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 장면에서도 우리는 은혜의 교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행 9:3-7)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보세요. 빛이 나타났는데 같이 가던 사람들 중에 아무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도 바울만 그 빛을 보았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구원은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제시해 주고 ‘이 빛을 선택 할래 말래‘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처음부터 보이지가 않습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지요? 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죄인의 구원은 바로 이렇게 주어지게 될 것이다‘를 보여주신 최초의 모델이기 때문에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시는 그 길에서도 아브라함은 실수투성이 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100세에 낳은 아들을 하나님께 척 바치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며 그게 구원이며 그게 복음이며 그 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겔 37:11-14)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에스겔의 마른 뼈 사건입니다.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먼지가 풀풀 나는 마른 뼈들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더러 마른 뼈들에게 ‘너희가 살 것‘이라는 이야기를 대언 하라고 시키십니다. 에스겔이 하도 기가 차서 마른 뼈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시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뼈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보니 마른 뼈들이 맞춰지고 심줄이 생기고 살이 붙어서 살아 있는 군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즉 교회는 그렇게 마른 뼈처럼 죽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믿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13절을 보세요.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죽은 자들이 살아서 무덤을 열고 거기서 나오면 그 때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5절 6절에도 똑같은 말이 나옵니다.
(겔 37:5-6)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그렇게 마른 뼈들이 이스라엘이 되는 똑같은 사건이 창세기에 이미 예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마른 뼈, 사기꾼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사건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사기꾼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는 것이 구원이지 야곱이 스스로 하나님을 믿어주어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롬 9:10-13)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야곱이 어떤 행위를 하기 전인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을 이미 택하십니다. 그리고 그 택하신 자의 삶에 깊이 개입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쫓아다니시면서 그를 이스라엘로 만들어 가십니다.
(창 28:10-15)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고 있는데 뭘 잘한 것이 있다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복을 선언하십니다. 15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를 우리가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다 이루시기까지 절대 그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고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정말 그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시고 지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 31:1-9,22-24) “1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4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5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6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7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8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9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22 삼일 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23 라반이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미쳤더니 2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창 32:1-2) “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길을 가다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그 군대가 그 곳에 우연히 나타났을까요? 거기서 ‘만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파가’는 ‘의도적으로’ ‘끈덕지게 부딪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의도적으로 끈덕지게 쫓아다니고 계신 것입니다.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던 그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가 그 때 잠깐 내려왔던 걸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군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곳까지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급기야 야곱이 이스라엘이 될 때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십니다.
(창 32:22-28)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 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 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야곱을 졸졸 쫓아다니시면서 결국 그의 환도뼈까지 치시면서 그를 끝내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시고 믿은 사건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쫓아다니시며 여러분의 환경과 상황과 여건에 개입하시고 마른 뼈 같은 여러분 속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여러분을 살리신 것을 여러분이 비로소 인식하게 된 날이지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어 준 날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온전한 구원의 십자가가 아닌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는 아주 불쌍한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은혜’ ‘karis'란 거저 주시는 선물을 말합니다.’율법‘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일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은혜‘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은혜’는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과 근거 없이 그 크신 사랑으로 의지할 데 없고 곤고한 죄인들을 위해 친히 당신께서 크신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은혜는 사람의 과거 죄과와 관계없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은혜는 사람의 공적과 관계없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셋째 은혜는 사람의 책임과 의무, 곧 ‘갚음’을 조건으로 붙여서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갚을 수 있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럼 하이퍼 칼비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무 것도 안 해야 맞는 겁니까?
(시 116:2) “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편 기자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갚음을 전제로 주어진 것이라면 거저 준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구원은 거저 주어진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엡 1:6)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은혜는 거저 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 형이상학적이며 추상적인 ‘은혜’를 직접 가시적으로 육신에 담고 내려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은혜’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의 삶인 것입니다. ‘자신을 거부하는 원수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거저 내어주는 것‘ 그게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우리가 그 예수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만이 진리이십니다. 우리 주님 이외의 다른 것들은 모두 거짓입니다. 주님의 삶, 십자가의 삶만이 진짜 승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주님 안에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하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도 바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 님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그 진리이신 주님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 주님 자신이 은혜입니다. 주님이 주는 어떤 다른 것이 은혜가 아니라 주님을 알고, 주님에 의해 살아나는 것, 바로 그것이 은혜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은혜가 충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 또 다른 은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 안에 ‘은혜가 충만 하더라’는 표현은 그 은혜는 한번 주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흐르는 경향성이요 영향력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음 시간에 아주 자세하게 다루어 볼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말 은혜를 입은 분들이라면 여러분은 진짜 수지맞으신 것입니다. 갚을 필요도 없고 다시 빼앗길까 걱정할 필요도 없는 완전 공짜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바로 이어지는 요한복음 1장 16절을 볼까요.
(요 1:16-17)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거보세요.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지요? 은혜는 그렇게 갚을 수도 없고 갚을 필요도 없는 성질의 것인데 성경에 나오는 ‘하라’의 명령은 모두 무엇일까요? 은혜를 주었으니 갚으라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 것은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 구원을 취소시키겠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들은 이제 은혜의 사람, 사랑의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었으므로 그 본성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우리의 신분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경의 권고가 선포되어질 때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를 지배하게 된 사람들은 그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때로 실패하고 실수를 할지언정 그렇게 성경에서 요구되어지고 있는 자신의 신분에 맞는 삶을 경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가 주연을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거기에 보면 남부의 신사와 숙녀들이 자기들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잘 나오지요?
성질도 죽이고,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참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정말 확인 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 신분에 맞는, 그 체면에 맞는 삶을 추구하겠지요? 그 삶은 하나님께 무엇을 갚아드리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나의 노력이나 조건을 근거하지 않고 이미 바뀌어 버린 내 신분이 너무 감사해서,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어떤 신분인지 알기에 스스로 그 삶을 경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받은 그 성도의 안에 여전히 죄의 오염과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충돌과 갈등이 생기게 되고 성도는 피 흘리기까지 그의 속에 남아있는 죄의 세력과 싸우면서 그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는, 은혜를 입은 성도의 삶이 세상의 관점이나 가치관으로 볼 때에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창 47:9) “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 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은혜로 점철된 삶을 산 야곱의 삶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리고 자신이 평가하기에 험악한 삶이었습니다. 끝으로 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험악한 삶이 되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벧전 3:14-22, 4:1-6)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 전서는 1장 처음부터 5장 마지막까지 성도가 신앙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것들, 즉 성도의 거룩한 삶과 교회 생활, 그리고 성도의 가정생활과 장로 등 직분 자들의 자세, 그리고 성도들의 삶 속에 닥칠 고난과 시련의 이유, 그리고 그 본보기로 고난의 삶을 살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니까 그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누면 ‘성도다운 삶’과 ‘그 삶에 약이 되는 성도의 고난과 시련’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3장 14절부터 4장 6절까지를 그 관점에서 해석을 해보자고요.
베드로 사도가 ‘성도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18절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는 죽으시고 영으로 사셨다‘는 말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많은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로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는 죽으시고 영으로 사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육체로 죽으시는 것이 성령 안에서 사는 부활의 삶이었음을 명시하면서 ‘성도의 고난과 그 고난의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을 얻어 성령으로 살게 되면 그 성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처럼 육체가 죽는, 다른 말로 육신의 욕심과 육신에 남아 있는 죄의 오염, 부패성 등이 죽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은 그냥 고통만 당하는 삶이 아니라, 그 성도의 십자가의 삶이 세상에 심판과 구원을 알리는, 다른 말로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는 죽으시고 성령으로 부활하신 그 삶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한 삶’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지옥에 내려가셔서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거기에 지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의 시대에 노아의 경고를 듣지 않았던 사람들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들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여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죄인들을 총칭하여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그리고 부활하신 이 후에도 계속해서 그 분의 십자가를 근거로 복음과 심판을 전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들을 살리는 복음으로,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경고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죄인들에게 심판의 선포가 된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고난의 삶, 즉 죄를 죽이고 세상과 결별하는 십자가의 삶이 여전히 이 지옥의 땅에 갇혀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죄인들에게는 심판을 선포하는 삶이됨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비교해서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4장 1절부터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 성도들의 고난을 비교해서 또 한 번 반복해서 그 고난의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육체를 죽이고 성령으로 살게 하는데 쓰이는 것이 바로 고난이다‘를 설명해 주는 것이 베드로 전서 3장 14절부터 4장 6절까지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 내용을 머릿속에 잘 그리시면서 베드로 전서 4장 1절부터 다시 한 번 볼까요.
(벧전 4:1-6)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 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보세요. 예수님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령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성령에 의해 거듭난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통과해서 이 육신의 죄를 죽이고 사람의 뜻을 좇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게 하기 위해 고난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세상의 죄를 폭로하는 삶이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 사람들, 다른 말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험악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은 평강과 기쁨 속의 험악한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견디시고 잘 참아 내십시오.
은혜와 행위가 어떻게 조화가 되는 것인지 이제 아시겠지요? 우리가 다음 주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 은혜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가게 되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 은혜의 지배를 마귀의 세력들이 어떻게 방해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진단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the words of tru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김성수 목사) (0) | 2013.06.20 |
---|---|
[스크랩] 더함과 제함의 저주 (김성수 목사) (0) | 2013.06.19 |
[스크랩]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알려진 비밀 (김성수 목사) (0) | 2013.06.16 |
[스크랩] 이미 완성된 천상의 교회(II) (김성수 목사) (0) | 2013.06.15 |
[스크랩] 개와 돼지 그리고그들에게 던져진 거룩한 진주 (마 7:6) (0) | 2013.06.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