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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남편들아, 아내들아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0. 28.

 

 

남편들아, 아내들아

 

(김성수 목사)

 

 

(엡 5:21-33)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 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우리는 계속해서 세월을 허비하며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세월을 아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이 예배자의 삶이 되어야 하며 피차 서로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논증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들의 삶 속에서 피차 복종하는, 다른 말로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그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삶”의 구체적인 실례(實例)중, 부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피차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복종이 어디에서 먼저 나타나야 하는가?” 바로 가정에서 먼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이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가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부터 확인을 하고 자세한 내용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천국에는 가정이 있을까요? 천국에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자녀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한 피를 나누고 한 영을 소유한 형제들이 있습니다. 천국은 그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가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가정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더러 천국의 삶은 어떤 삶인지를 미리 훈련하고 연습하고 맛보고 오라고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인류학에서는 “가정은 진화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가정이라는 것은 사회발전의 소산이며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짐승과 방불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인간이 발전하고 진화하기 시작함에 따라 어떤 협정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고 난혼(亂婚)이 혼란과 난행과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킨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경험과 시련과 오류와 발전의 긴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결혼“과 “가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시작 지점”인 “결혼”이 정말 진화의 산물이고 사회발전의 소산인 인간의 창조물인가요? “결혼”은,“가정”은 “진짜 영원한 가정”인 저 천국의 가정, 교회가 어떻게 탄생이 될 것이며, 그 교회는 어떠한 삶의 원리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오늘 본문 31절과 32절을 보세요.

 

(엡 5:31-32)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결혼이 뭐라고요? 바로 천국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그 분이 신부이자 천국의 백성인 교회의 관계에 대한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엡 6:1-3)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면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게 된다.“ 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사람은 모두 장수하나요?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에 나오는 십계명의 말씀을 인용한 부분입니다.

 

(출 20:12)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몇 번째 계명입니까? 다섯 번째 계명이지요? 여러분 십계명을 다 알긴 아세요? 저는 십계명을 이렇게 외웁니다. 하나, 한 분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둘, 두 마음을 품어 우상을 섬기지 마라. 삼, 삼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 사, 사사로이 안식일을 범하지 말고 거룩하게 지켜라. 오, 오래 살려거든 부모님을 공경하라. 육, 육신을 살인하지 말라. 칠, 칠흑 같은 마음을 품고 간음하지 마라. 팔, 팔목을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도둑질하지 마라. 구, 구차하게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마라. 열, 열심히 일해서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마라.

 

그런데 다섯 번째 계명에만 유독 그 계명을 지켰을 때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조금 전에 읽은 에베소서 6장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하는가? 저야 외우기 쉽게 “오래 살려거든 네 부모를 공경 하라”라고 외웠지만 그게 정말 이 땅에서의 장수일까요? 출애굽기 20장12절을 다시 보시면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장수를 하긴 하는데 어디서 장수를 한다고 합니까? 여호와가 네게 주신 땅에서 장수한다고 합니다. 거기가 어디죠? “가나안 땅”입니다. 그 가나안 땅은 어디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어디서 장수한다는 것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이 땅에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을 살면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인가? 부모님 살아 계셨을 때 불효했던 사람들은 그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는 예수도 못 믿게 되나요? 공경하려고 해도 공경할 부모님이 안 계시잖아요?

 

여기 “여호와가 네게 주신 땅“에서 ”주시다“”나탄“이라는 동사는 분사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한 번역은 “여호와가 지금 네게 주고 계시는 땅“이라는 말이지요. 이 말씀은 지금 이 땅에서도 그 천국의 땅이, 천국의 삶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그 삶을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어디라는 말입니까? 바로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면서 하나님만을 공경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게 된다는 것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고 있는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구절의 진의인 것입니다. 잠언에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잠 3:1-2,9) "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2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여기 9절에 있는 “여호와를 공경하라“에 쓰인 단어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에서 쓰인 ”카바드“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자식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부모에 대한 공경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복종과 공경의 연장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은 단순히 인간들이 진화의 산물로, 사회 발전의 산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의 모형으로, 그리고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를 연습하는 장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훈련장인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들은 바로 이 “가정”에서 출발한 것들입니다. 자녀가 태어나게 되면 부모는 그 자녀에게 “밥 먹는 법, 걷는 법, 말하는 법, 일하는 법” 등을 가르쳐 줍니다. 거기서 ”교육 제도와 교육 기관“이 탄생 된 것입니다. 자녀가 병들었을 때 부모는 밤잠을 설쳐가며 그 자녀의 회복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거기서 “의료 기관과 의료 제도“가 출발한 것입니다. 가정을 다스리는 아버지의 엄한 규율에서부터 족장 정치, 부족 정치, 군주제, 공화제, 민주주의 같은 “정치“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은 모든 사회 제도와 정치, 사상의 근본 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그 존재의 목적과 가치를 잃고 타락을 하게 되면 모든 제도를 포함한 사회 전체가 타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정”은 소중히 지켜내야 할 하나님의 창조물인 것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 “가정”이기 때문에 사탄은 그 “가정”을 제 일의 공격 목표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시누이와 올케 사이“ 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 가정을 개별적으로 공격해서 흔들어 버리면 “전체 교회”는 손대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정의 의미와 목적을 정확히 깨닫고, 목숨을 걸고 그 가정을 지켜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긴 부분을 할애해서 그 소중한 가정에 대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정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모습이며, 하나님 아버지와 그 분의 자녀들의 관계를 구현하고 그 하늘나라의 삶을 배우고 훈련하는 곳이라면 그 가정을 이루는 부부와 자녀는 당연히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 가정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고 그 나라의 삶의 원리를 훈련하고 연습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결혼관과 가족관은 이렇게 영적인 것을 훈련하고 구현하는 데 있지만, 불신자의 결혼관은 육적인 쾌락의 충족과 상대방을 통한 나의 필요의 충족, 나의 등에 짊어진 짐의 분배입니다. 그 둘이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 서로 바라보는 지점이 다르게 되어 충돌을 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긴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결혼관과 가족관이 불신자들하고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런 시대에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이 정말 소용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별로 심기가 좋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그래서 성경은 “믿는 자들이여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결혼은, 가정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장 좋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창조를 하시고 그 창조물들을 보며 “참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각 창조의 사건마다 항상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구절이 들어 있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어떤 것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이 있었습니다.

 

(창 2:18) "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 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 중에 오직 한 가지 “홀로 지내는 남자”는 좋지 않다고 판단을 하셨습니다. 그 좋지 않은 것에 여자가 끼워지니까 그 창조물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발휘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애초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창조물”을 만들어 내지 않으시고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에 어떤 것을 보태서 비로소 “좋은 것”으로 만들어 내셨을까요? 하나님은 창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질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으셨던” 독처 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여자를 만들어 주시는지 한번 보세요.

 

(창 2:21-24)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께서 홀로 불완전한 아담에게 여자를 만들어 주시는데, 먼저 그 아담을 잠들게 하십니다. 성경에서 “잠을 자다“라는 것은 대부분 ”죽음“을 상징합니다. 남자에게 아내가 주어지기 위해 남자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자의 갈비뼈가 떼어집니다. 갈비뼈는 심장과 폐를 감싸서 보호하는 뼈입니다. 바로 히브리 사람들이 ”생명이 담겨 있는 그릇”이라고 불렀던 심장을 보호하는 뼈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처음 창조 될 때부터 남자를 도와 그의 생명을 유지케 하는 없어서는 안 될 “돕는 자”로 탄생 된 것입니다. 그 돕는 배필인 아내가 없으면 남자의 생명은 온전한 생명이 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탄생합니다. 여자는 그렇게 남자의 죽음을 통해, 그리고 그 남자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갈비뼈를 뽑아내기 위해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음으로 탄생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남자는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되어 연합하게 됨으로 영원히 하나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부부이며 이게 그리스도와 교회입니다. 보자고요. 예수께서 교회를 탄생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 분은 옆구리를 통해 그 분의 생명인 피와 물을 전부 뽑아 내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의 신부인 교회가 탄생이 된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교회와 하나로 연합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7:20-21)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아담에게 있어서 하와의 존재처럼 교회가 없이는 홀로 완전하지 않으시기로 하셨습니다.

 

(엡 1:23)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예수)의 충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충만하시지 않기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예수를 머리로 한 지체로 그 예수라는 머리에 붙여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몸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가정이며, 부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가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해야 하며, 아내는 가정에서 교회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나라의 삶을 맛보며, 우리에게 그 행복한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는 복된 창조물로 빚어져 가는 곳이 바로 가정인 것입니다. 이 내용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어떻게 가정을 올바로 꾸려 가겠으며 어떻게 가정의 소중함을 알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서 여자를 만드셨으면 남자의 갈비뼈가 여자보다 하나 적어야 하는데 왜 똑같이 12쌍 씩 이냐고 시비를 겁니다. 그런 사고는 진화론의 한 줄기인 용불용설을 아직까지 믿고 있는 우매한 사람들의 우매한 질문인 것입니다.

 

19세기에 프랑스의 라마르크라는 사람이 용불용설을 주장해서 전 세계 생물학 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용불용설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많이 사용하는 것은 진화하고 쓰지 않는 것은 퇴화한다는 그런 학설입니다. 예를 들어 기린이 원래는 목이 짧았었는데 큰 나무의 잎을 따먹기 위해 자주 목을 길게 뻗침으로 해서 기린의 목이 길어졌고 그 획득 형질은 후손에게 유전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 용불용설과 “획득형질 유전의 법칙”에 따르면 당연히 아담의 후손 중에 남자들의 갈비뼈는 23개만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유전학적 지식이 늘어나고 발전함에 따라 그 학설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고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정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고로 팔을 하나 잃었다고 해서 그 자녀가 팔이 없는 상태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갈비뼈가 23개였다고 해서 그 아들들이 갈비뼈가 23개로 나와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기초적인 생물학 적 지식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억지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갈비뼈는 “골막”이라는 섬유성 조직에 의해서 덮여 있습니다. 이 골막은 그 골막 안에서 뼈를 만들어 내고 뼈에 영양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하는 조직입니다. 그래서 사고로 갈비뼈를 들어내야 하는 경우에도 그 골막만 다치지 않게 들어내면 다시 갈비뼈는 재생이 됩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원래대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아담은 아마 얼마 후에 다시 골막에 의해 멋지게 재생이 된 갈비뼈를 가지고 아무런 불편함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가정이 무엇이며 우리는 그 가정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것을 연습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았으니까 그 정의에 근거해서 구체적으로 아내와 남편의 역할과 의무와 책임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2절로 갑니다.

 

(엡 5:22-24)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성경은 아내들에게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하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당시 여자들은 남자의 가재도구처럼 여겨졌던 때였습니다. 여자는 물건처럼 취급되어졌고 아무런 법적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유대인들이 매일 아침 의무적으로 드렸던 기도문에 “하나님 저를 이방인이나 종이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이 제일 처음 기도를 여는 문구였습니다. 심지어 로마인들은 여성의 지위를 가리키는 말로 “임베실리타스”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단어에서 영어의 “imbecile"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imbecile이 무슨 뜻입니까? "저능한 사람, 바보” 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여자들은 그렇게 학대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사도 바울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 많은 이들이 아내를 장악하고 억압하고 그 위에 폭군으로 군림하는 것의 핑계 구절로 삼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쓰인 “복종하다“”휘포탓소“는 단순히 굴종의 뜻이 아닙니다. 이 ”휘포탓소“라는 단어 안에 들어 있는 ”탁시스“는 ”질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아내들이여, 질서를 위해 남편을 머리의 자리에 놓아두라“는 것입니다. 막무가내의 굴종이나 예속, 종속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갈 3:28)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분명 바울은 이렇게 갈라디아서에서 여자는 남자의 가재도구가 아니라 남자와 하나인 동등한 존재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자들에게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라고 말씀을 했을 때는 사도 바울은 여기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1:3,8-9)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보세요, 여기 어떻게 위계질서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그리스도-남자-여자 의 순 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는 것입니다.

 

(딤전 2:11-14)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 질서를 깨 버린 것을 우리가 “죄”라고 부릅니다. 여자는 창조 질서 상 남자에게 복종하여 뱀이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유혹을 했을 때 남자에게 상의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고 혼자 결정을 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남자에게 “당신도 먹으라.”고 남자의 권위를 타고 넘어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를 저주하실 때 “남자는 너를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해 주십니다.

 

(창 3:16)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남편은 너를 다스리고 너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질서를 깨 버렸기 때문에 너는 남편을 장악하려고 하고 남편은 너를 계속해서 다스리려고 하는 그 죄의 양상이 계속해서 너희 가정에 있게 될 것이라”는 엄청난 저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정들이 그렇게 혼란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그 “죄”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태초의 질서를 회복한 모습으로 세상 속에, 서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은 창조의 질서 상 먼저 창조 된 남자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남편들은 그 아내를 잘 다스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려 하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해부학적으로도 남자가 여자보다 강하고 힘이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생리학 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라고 그렇게 해부학적으로나 생리학 적으로도 창조를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를 “남자보다 연약한 그릇”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벧전 3:7) "7 남편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아내가 여성으로서 자기보다 약한 그릇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해하시면 좀 더 쉬우실 겁니다. 여자와 남자는 구원이라는 커다란 목적지를 향해 가면서 하나님으로부터 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어 줄 수 있도록 권위와 힘과 포용력을 받았고 아내는 남편을 도와 이 가정이라는 열차가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순종과 섬세함과 지혜를 받은 것입니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그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하면 그 열차는 탈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남편과 아내가 함께 몸을 싫은 구원의 열차가 목적지까지 잘 도착하기 위해 남편은 선장이 되고 아내는 항해사가 되어서 함께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가정이며 결혼인 것입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맡은 역할은 국회에 국회 의장을 뽑아서 그에게 권한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국회 의장은 그 권한으로 국회의 원활한 운영을 도모하는 것이지 그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다른 의원들을 강압 적으로 누르는 데 쓰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원들도 그 국회의장이 자기들보다 더 똑똑하고 잘나서 그의 의사봉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의장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의장이 일어서라면 일어서는 것이고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라면 경례를 하는 것이고 선서를 하라면 선서를 하는 것이고 발언을 하라는 명령이 없을 때는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복종이라면 한번 해 볼만 하지 않습니까? 전혀 꿀릴 것 없는 복종이잖아요.

 

신학에서는 이러한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을 “경륜 적 삼위 일체” “economic trinity"에 견주어서 설명을 합니다. 삼위 하나님은 우열이 있으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이라는 커다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자발적인 복종을 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도 그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성자하나님과 성부 하나님께 자발적인 복종을 하신 것을 우리가 경륜 적 삼위일체라고 부르는데 남편과 아내의 역할 중에서 아내의 역할인 복종의 역할이 바로 그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복종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이해가 가시죠? 그러니까 아내들의 복종은 단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역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바울은 본문 23절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 5:23)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와 몸은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몸은 정상적인 발육을 할 수도 없고 정상적인 생활도 불가능합니다. 예전에 월드컵에서 페널티 킥을 실패한 멕시코 축구 선수가 어떤 광적인 축구 팬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공은 다리가 잘 못 찼는데 화가 나면 그 다리만 때려주던지 아니면 그 다리만 잘라 버리지 않고 왜 그 선수를 죽여 버립니까? 다리와 나는 따로 분리해서 존재할 수도 없고 생각되어질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내리는 명령을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뇌성마비라고 합니다. 아내가 머리인 남편의 뜻에 복종하지 않게 되면 그 가정은 뇌성마비 걸린 사람처럼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우리가 전에 자세하게 공부를 했으니까 성경 구절만 몇 구절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골 1:18)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엡 4:15-16)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 보세요. 우리 지체인 교회가 머리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나오지요? 왜 우리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 머리의 뜻에 순종함으로 “자라나게”되기 때문입니다. 몸은 머리에게 복종할 때 정상적인 발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성숙해 가기 위해서는 가정 속에서 머리인 남자의 권위에 복종하는 훈련 속에서 자라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 남아서 광야 인생을 살아야 하는 목적을 우리가 잘 define하고 있지 않으면 이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남아있는 유일한 목적은 “거룩”입니다.

 

나의 더러운 육신이 죽고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되는 “거룩”으로의 경주가 우리 성도들의 존재 목적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훈련과 연습과 고난과 환난이 동원이 됩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 거룩으로의 경주를 힘써 달려야 하는데 성도들 중에 “아내들”의 거룩은 바로 “남편에게 복종함”에서 훈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여성분들에게 여쭤 보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이나 애인의 뜻에 말없이 순종하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죠? 하와처럼 남자가 내 말에 복종해 주었으면 좋겠지요? 그게 ”죄”의 잔재라니까요. 절대 아내는 남편의 권위를 타고 넘어 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절대 성숙할 수가 없어요.

 

왜 현대 사회를 “절대 권위가 상실된 시대”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얼마 전에는 어떤 중학생 녀석이 담임선생님이 종례를 너무 길게 한다고 선생님을 때리고 넘어져 있는 선생님을 수차례 발로 차서 입원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권위가 상실되고 있습니까? 몇 년 전에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에릭과 라일이라는 십대 형제가 부모를 권총으로 쏴 죽이고 강도로 위장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어린 녀석들이 부모를 죽인 이유는 단지 부모의 유산을 빨리 받아서 유흥비로 쓰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부모를 죽이고 강도로 위장해서 1,400만 불의 유산을 상속받아서 몇 달 만에 수백만 불을 라스베가스에서 탕진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이 심리학자에게 상담을 하다가 털어놓은 것이 빌미가 되어서 그들의 범죄가 들통이 나 버렸지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선임한 변호사는 죽은 아버지를 동성애자로 몰아서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온 자식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부모를 우발적으로 살해 한 것”이라는 변론을 했습니다. 결국 그 아이들은 배심원들을 설득해서 재판에서 이겼고 또 다시 라스베가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아버지를 죽여 버릴 수 있는 시대, 그리고 자기의 명예를 위해 언제든지 아버지를 동성애자로 몰아세울 수 있는 이 시대가 어떻게 초래된 것입니까?

 

가정에서 어머니들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 집안의 권위자인 아버지를 수시로 무시하고 멸시해 왔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권위로부터의 보호라든지, 권위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렇게 매일 엄마에게 당하기만 하는 권위가 어떻게 나를 보호하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는 급기야 ”나를 지키고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이구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힘을 얻는 것이 나의 유일한 보호막이구나.” 라고 판단을 내리고 폭력적이 되고 상위 권위자에 대한 예의를 상실하게 되고, 결국은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부모도 언제든지 죽여 버릴 수 있는 잔혹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남자들의 책임도 있습니다. 남자들은 그들의 게으름 때문에 마땅히 가정의 권위자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수행하지 않고 아내에게 떠맡기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아이들을 통솔하고 아내를 이끌고 하는 것을 아내에게 맡겨 버리고 술이나 마시고 밤늦게 들어온다든지 일찍 들어와도 TV나 열심히 보다가 자 버린다든지, 이렇게 가정의 권위자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사회 전반에 걸쳐 권위에 대한 기대나 경외가 상실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와 아버지가 성경이 요구하는 그 질서 속에 바로 서지 못하면 아이들이 절대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이건 어느 특정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입니다. 인류가 타락을 한 후 하나님의 저주로 여자는 남자를 장악하려 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기 위해 폭력적이고 이기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건져진 가정이 아니고는 이 악 순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들으시고 아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이 드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가?” “무조건인가?” 만일 남편이 마약을 사기 위해 돈을 빌려 오라고 했을 때 아내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남편이 어떤 사람을 살해하기 위해 청산가리를 사 오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일 남편이 도박을 하기 위해 도둑질을 해오라고 시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내는 남편을 “돕는 배필”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해서 남편을 도와서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게 어디입니까? “거룩“입니다. 만일 아내가 판단하기를 ”내가 지금 이 남편의 뜻에 복종을 하게 되면 우리 남편의 거룩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판단이 되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범사“에 복종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돕는 배필인 아내가 판단하기에 “내가 지금 남편의 요구를 들어줌으로 해서 남편이 죄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판단이 서게 되면 여러분은 범사에 거절하셔야 합니다. 그게 바로 돕는 배필의 복종입니다. 남편의 매가 무서워서 남편이 시키는 대로 청산가리 사다주는 것을 돕는 배필의 복종이라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남편이 자기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저해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침범하는 요구를 했을 때는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돕는 배필의 복종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믿지 않는 남편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그 남편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사셔야 합니다. 다른 데로 선교 갈 생각하지 마시고 그 남편의 구원에 총력을 기울이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다른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하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양보하시면 안 됩니다. 남편으로 하여금 “도대체 다른 모든 것에서는 나에게 저렇게 천사처럼 복종하는 내 아내가 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갑자기 유관순이 되는 이유가 뭘까?“ 이런 평가를 들어 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벧전 3:1) "1 아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비록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라 할지라도, 아내의 말없이 행하는 행실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들은 아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엡 5:25-30)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남편들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가 어땠을 때 자신을 주셨나요?

 

(골 1:21-22)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롬 5:10)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 주님은 우리가 자신의 원수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셨습니다. 남편들에게 그 사랑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아내가 나를 사랑해 주면 나도 사랑해 주고 아내가 나를 업신여기면 나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그런 사랑이지요.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랑이라는 헬라어가 “아가파오”로 쓰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특히 남편들에게는 그 아가파오의 사랑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들은 아내가 조금 마음에 안 든다고 구박하거나 패거나 그러면 안 됩니다. 아내가 원수처럼 행한다 할지라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 그러한 사랑을 함으로써 남편은 자신의 거룩을 빚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골 3:19)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여기서도 역시 남편들에게 “아가파오” “하나님의 사랑“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들에게 주어진 “권세, 권위”는 아내를 억압하고 제압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아내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능력이요 권세인 것입니다. 그 “남편의 사랑”“아가파오”의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이 26, 27, 28절입니다.

 

(엡 5:26-28)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우리 주님께서 원수 되었던 우리와 결혼을 하셨습니다. 결혼만 하면 끝인가요? 결혼을 하신 후 신부를 위해 무엇을 하셨다고 나옵니까? 그 신부를 물로 씻어서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아름다운 신부로 만드시는 일을 지금 계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딛 2:14)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이것이 가정 속에서의 남편의 임무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도록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아내들에게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엡 4:13-15)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교회는 이렇게 구원받은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야 합니다. 그 일을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고 계십니다. 남편들은 아내에게 바로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에 남편들을 “아내의 구주“라고까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엡 5:23)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여기서 “구주”라는 말은 “구세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구주라는 말이 좀더 광의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딤전 4:10)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이것을 잘 못 해석하면 보편 구원 론 자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신다.“라고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의 ”구주“는 ”보호자“”Preserver"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에서의 “구주”입니다.

 

(마 5:45)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이렇게 남편은 아내를 보호하고 지키며 길러주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남편은 아내의 구주”라는 말이 등장한 것입니다. 28절과 29절을 보시면 그 부분이 조금 더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엡 5:28-29)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사람들이 자기 몸을 얼마나 아낍니까? 아내는 그렇게 자기 몸을 아끼듯이 아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몸처럼“이라는 번역은 조금 부족한 번역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자기 몸처럼”이 아니라 “자기 몸이니”라고 번역을 해야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러니까 28절은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아내가 남편 자신의 몸이기 때문이다”가 더 제대로 된 번역입니다. 여기서 “자기 아내“”헤 아우톤 구나이카스“는 ”자기 자신인 아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한테 ”자기“라고 부르는 가봅니다. 그 상대방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자기 자신“처럼 느껴진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가정이라는 것은 그저 외로운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자기의 필요를 상대방에게서 찾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남편들의 역할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예배당 안에 남자들은 없고 전부 여자들만 앉아서 한숨만 쉬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더 열심히 기도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게으를 틈이 없어요.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과 의무로 떠맡은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든 것입니다. 그렇게 힘이 드신 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읽어 드리고 싶습니다.

 

(고전 7:10-16) “10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11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이렇게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성숙시켜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힘드시더라도 그 책임과 의무를 잘하세요. 우리는 순교를 각오한 사람들 아닙니까? 순교는 공산국가나 이슬람 국가에 가서 전도하다가 죽는 것만 순교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가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 내는 것이 떠 힘든 순교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혼은 안 되는 것입니다. 참고, 참고 또 참았는데도 상대방에 의해 버림을 받았다면 모르지만 자기가 앞장서서 이혼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어려움 겪지 않으려면 애초에 “결혼이 무엇이며 가정이 무엇이며 남편의 역할은 무엇이며 아내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서머나 교회 청년들”을 신랑 신부로 맞으시면 그런 어려움이 조금 줄어들겠지요? 이 자리에 청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결혼에 대해 막연한 상상을 하고 계시지요? 그거 다 깨버리세요. 그 기대를 깨지 않고 결혼을 했다가는 여러분은 처절한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결혼은 책임이며 의무이지 핑크 빛 환상 속의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 위에서 바른 목표지점을 향해 결혼 생활을 열심히 해 내다보면 그 혹독한 훈련과 연습과 투쟁과 열심 속에서 천국의 삶을 맛 볼 수 있도록 지어 놓으신 것이 바로 결혼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31절에 덧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엡 5:31)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말씀은 결혼을 하게 되면 무조건 부모를 떠나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를 떠나야 한다“는 말씀은 지금까지는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그 과거를 떨쳐 버리고 이제 본인이 머리가 되고, 권위를 가지고 한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능동적인 책임과 의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결혼이라는 의미에서 ”부모를 떠나“라는 구절이 동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 45:10) “10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딸들, 아내들, 교회도 역시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감을 갖고 능동적인 열심을 부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사업적이며 봉사 적인 것 이 전에 성품 적이며 존재론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증거를 고작 술 안마시고 담 배 안 피우고 제사 안 지내는 것으로만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런 것에는 정말 목숨을 겁니다. 초창기 기독교 순교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 제사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정 속에 부여해 놓으신 그 책임과 의무를 목숨 걸고 하는 사람들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신앙인지 무엇이 성령 충만한 삶인지 다시 한 번 확인 하십시오.

 

결론을 짓겠습니다. 가정이란 무엇이냐? 올바른 신앙 위에 서 있는 가정의 남편은 바른 목표 지점을 세우고 연약한 아내가 낙오하지 않도록 그 아내를 말씀으로 이끌며 그 아내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까지 인내하며 사랑으로 이끌어야 하며 아내는 그 남편을 도와 남편의 말에 복종하고 그 권위를 인정해 주며 함께 손을 잡고 그리스도 안에서 멋지게 자라나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인 것입니다. 그 가정을 회복하십시오. 결론으로 베드로전서 3장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벧전 3:1-8) “1 아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비록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라 할지라도, 아내의 말없이 행하는 행실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그들은 여러분의 경건하고 순결한 행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3 여러분은 머리를 치장하거나, 금붙이를 달거나 옷을 차려 입거나 하는 겉치장을 하지 말고, 4 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사람을 단장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입니다.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던 거룩한 여인들도 이와 같이 자기를 단장하고, 자기의 남편에게 순종하였습니다. 6 마치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순종한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도 선을 행하고, 아무리 놀랄 만한 일에도 무서워하지 않으면, 사라의 딸들이 될 것입니다. 7 남편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아내가 여성으로서 자기보다 약한 그릇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사람으로 알고 존중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8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사랑하며, 자비를 베풀며, 겸손하십시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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