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차 복종하는 성령 충만한 자들
(김성수 목사)
(엡 5:15-33) “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16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20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21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2 아내 된 이 여러분, 남편에게 하기를 주님께 순종하듯 하십시오. 23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몸의 구주이십니다.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5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27 티나 주름이나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기 앞에 내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8 이와 같이, 남편도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자기 육신을 미워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육신을 먹여 살리고 돌보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그렇게 하시듯이 합니다. 30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31 2)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창 2:24) 32 이 비밀은 큽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33 그러므로 여러분도 각각 자기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와야 하는 “예배자의 삶”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한 주간동안 여러분의 삶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을 살아보셨습니까?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화목제에 담겨 있는 예배의 정신과 원리를 기억하시면서 순간순간을 진지하게 보내셨나요? 이번 주에도 역시 그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에 종속되어 있는 21절 이후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공부하고 계신 5장 후반부의 구조를 잘 기억하시고 계셔야 5장 전체의 이해가 용이합니다. 지금 우리가 몇 주간에 걸쳐서 공부하고 있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은 전부 18절의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에 종속되어 있는 분사 구들입니다. 거기에 종속되어 있는 분사는 전부 5개입니다. ”서로 화답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집중적으로 공부할 “복종하라” 이렇게 다섯 개입니다. 그러니까 21절에 나오는 “피차 복종하는 삶“도 역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살아내야 하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피차 복종하는 삶을, 술 취함과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을까요? “너희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리고 그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의 삶의 내용에 이 피차 복종하는 삶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피차 복종하라”는 명령은 술 취함과 대조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왜 이 둘이 대조가 되어 있을까요? 술을 마셔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사람이 술이 취하게 되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복종”입니다. 사람은 술이 취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자신 있는 사람이 됩니다. 만용이 생깁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하고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게 술 취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술 취함이 “복종”과 대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술 취함은 단순히 “술을 많이 마신 상태”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여전히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사는 허망한 세상사람 일반“을 상징하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서든 강한 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정 반대인 ”복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극명한 대조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우리 개인으로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이 땅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머리가 지시하는 것만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복종”이다, “순종”이다 하는 단어로 정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군대에 가면 사실상 그 사람은 그 군대에 있는 동안 자신의 생활과 행동을 결정할 자기의 권리를 국가에 양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국가가 시키는 대로 삼 년을 살아야 합니다. 만일 그 기간 동안에 명령을 어기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면 그는 명령 불복종, 탈영 등의 죄목으로 처벌을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런 책임과 의무 속으로 들어가게 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시키시는 것을 예수 안에서 피차 행해야 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피차 복종하라”는 말은 “무조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어라“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뜻을 따라 한 목표 지점을 향해 그 목표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서로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살라는 말입니다. 부대 연병장에 연대장을 필두로 연대 병력이 집결해 있는 것을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그 연대 병력은 그 연대장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 연대 병력 전체가 안전하게 전쟁을 수행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각자가 개별적으로 행동을 하게 되면 그 병력은 오합지졸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오합지졸은 어떤 목표도 달성할 수 없게 되며 그 개개(箇箇)인 병사들도 대적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강한 부대는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피차 서로를 위해 헌신하게 될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술 취한 사람들처럼 자기 자랑을 위해서 이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나를 복종시키는 삶을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힘을 사용하지 않고 자랑할 것이 있음에도 다른 이들의 사기를 위해 조용히 감추는 보다 큰 인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렇게 살다 가셨습니다.
(빌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듬어져 가는 그 신앙의 여정을 통해 다른 이들이 함께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창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우리는 이렇게 나를 통해 남이 유익을 얻게끔 존재하게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까지 자랑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하셔서 예수님을 알아내신 것입니까? 우리의 두뇌, 재능 이런 것들을 전부 우리가 갈고 닦아서 만들어 놓은 것인가요? 믿음은 누가 주시는 겁니까?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바로 그 믿음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도대체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고전 4:7) “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우리는 나를 자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를 죽여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로 결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자기를 비우는 “복종”의 삶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인 것입니다.
(벧전 5:1-3)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권고하는 말입니다만 이 권고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양 무리들을 섬기되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라
둘째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섬기는 자가 되라
셋째 주장하고 다스리려 하지 말고 본이 되어라 입니다. 그러니까 술 취함이 자기주장, 자기 과시, 자기 우월감의 증명이 그 핵심이라면 성령 충만은 그와 꼭 반대로 자기를 낮추며 양보하며 기다리며 섬기는 삶인 것입니다.
(롬 15:5-7) “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7절에 있는 “너희도 서로 받으라.”에서 “받으라” “프로스 람바노”는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우정과 친절과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좋은 일을 할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빌 2:1-4)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뭐할 때? 좋은 일 할 때)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우리는 좋은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술 취한 사람처럼 자기 과시, 자기 우월감의 증명으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복종”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늘 자기를 감추고 겸손하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모든 언행을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아볼로입니다. 여러분, 아볼로를 아세요? 아볼로는 어떤 면에 있어서 바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사람입니다. 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는 알렉산더가 직접 세운 도시입니다. 이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로마와 그리스, 소아시아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북부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을 연결하는 대 로마 제국의 두 번째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는 문화와 문명이 다른 도시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해 있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을 이어받은 네오 플라토니즘이 꽃을 피웠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현대 과학과 수학의 중요한 뿌리들이 이 도시에서 탄생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열심히 사용하고 있는 유클리트 기하학의 유클리트가 바로 이 알렉산드리아 출신이고 유명한 초대 교부 오리겐이라든가 아타나시우스가 여기 출신입니다. 그렇게 알렉산드리아는 세계문화와 문명과 사상과 철학과 정신에 있어서 가장 앞선 도시였습니다. 아볼로가 바로 그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 아볼로가 학문에 능한 자라고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똑똑한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도움으로 복음을 확실하게 정립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 파, 예수 파, 게바 파와 더불어 아볼로 파가 생겼을 정도입니다. 바울도 당시 아볼로가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고전 3:6)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리고 자기가 세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아볼로 파와 바울 파로 갈라져서 서로 시기하고 다툴 정도로 아볼로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고전 3:3-5)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이만하면 질투가 날 만도 하지요? 게다가 바울은 언변과 학식이 뛰어났던 아볼로에 비해 참 설교를 못하던 사람 아니었습니까?
(고후 11:6) “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고린도 교회 신자들도 바울이 설교는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고후 10:10) “10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별것이 아니다"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설교를 듣던 유두고가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졌겠습니까? 그런데 아볼로와 바울은 성령 충만한 분들이었습니다. 아볼로는 그런 뛰어난 학식과 언변과 성경 지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늘 바울 뒤로 숨습니다.
(고전 16:12)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바울에게 아볼로를 보내달라고 청했습니다. 바울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아볼로에게 그들에게 가라고 많이 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교인들이 혼선을 빚거나 바울의 이름에 어떤 누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거절을 합니다. “갈 뜻이 일절 없다”고 했답니다. 이게 바로 피차 복종하는 삶인 것입니다. 나의 자랑과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나를 숨기는 사람들, 정말 멋진 모습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 4:6-7)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우리에게 배우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와 아볼로를 보고 배워서 서로 교만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고 섬기는 삶을 살아라.“ 이게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 21절 말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피차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동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엡 5:21)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우리가 피차 복종하는 겸손의 삶을 살 수 있는 동기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외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경외“라는 말 ”프호보스“는 ”두려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 분이 시키신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5:9-10)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두려운 말씀입니다.
(고후 7:1)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하고 가셨는지 몇 군데만 보고 가지요.
(마 20:20-28)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뭘 해달라는 것입니까? 자기 아들들을 과시하고 싶은 거지요? 이게 바로 술 취함으로 대표되는 행위입니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 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분히 여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기들도 그걸 원했는데 누가 먼저 선수를 쳐서 화가 났다는 말입니다)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너희들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어라“ 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우리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자기를 증명하고 자기 과시를 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르는 것입니다.
(요 13:1-17)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 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너희가 진짜 복을 받고 싶으냐? 그럼 피차 발을 닦아주어라“ 당시에는 노예만이 주인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천한 일이었는가 하면 노예 중에서도 히브리 노예는 발 닦는 것을 시키지 않고 개 취급도 안 했던 이방 노예들에게만 시켰을 정도입니다. 우리 더러 그 아래까지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을 하셨기에 우리는 피차 복종하는 자리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 분은 경외의 대상이시거든요.
(요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복종하라 그래야 너희가 내 제자다“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기에 우리는 주님이 자기 몸을 원수를 위해 주시면서 본을 보여 주신 그 사랑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40일 금식 기도하고 매주 철야 기도하고 집 팔아서 헌금하고 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를 숨기고 겸손하게 피차 복종하는 삶”입니다. 성경에 40일 금식하라는 명령은 없어도 “피차 복종하라”는 명령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절대 종교 행위로 여러분을 자랑하려고 하지 마세요.
(갈 6:12-14)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는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참아 주면서 서로 복종하며 다른 이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 그 삶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21절에서 “복종의 기본 정신”에 대해 논한 후에 22절부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내용을 다룹니다. 바울은 6장 9절까지 긴 부분을 할애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피차 복종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아내와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두 번째로 “자녀들아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세 번째로 “종들아 상전들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상전들아 종들을 의롭게 대하라”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성령 충만‘과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성령 충만이 얼마나 다릅니까?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한 삶이 뭡니까? 거품 물고 쓰러지는 것입니까? 이빨이 금니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성령 충만 입니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 충만한 삶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주님의 뜻에 맞게, 세월을 아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의 삶은 가정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 아래 쪽에 있는 큰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강사로 오신 분이 특기가 은 이빨을 금이빨로 변하게 하는 신통력입니다. 그 일련의 집회를 보고 어떤 교인 하나가 지난 주에 일간지에다가 하단 전면을 사서 담임 목사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내용인 즉은 “이게 정말 기독교인가?” “담임 목사님도 그 집회에 묵인 내지는 동의하시는 것인가?”를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용기 있는 분이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여러분 눈앞에서 정말 은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 보자고요. 그게 오늘 날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성령 충만의 현상이 맞습니까?
그렇게 해서 정말 누군가가 그 기적을 보고 “정말 예수는 있는 거야”하고 예수를 믿었다고 쳐보자고요. 그 사람은 평생 어떤 예수를 믿을 것 같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든지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이루어 주시는 예수, 은을 금으로 만들어 주듯이 나에게 늘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주시는 예수” 그런 예수를 기대하며 신앙할 것입니다. 그게 정말 바른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까? 여러분,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서 기적을 구하는 것은 그 기적을 나에게 적용시켜서 나의 이 땅에서의 삶을 기적처럼 형통하게 바꾸어 주십사 하는 기복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비주의와 기복주의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의 삶을 나그네로 지나가면서 고난과 환난을 통과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훈련하며 연습하는 보다 역동 적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죄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이 그 구원을 선물한 어떤 신을 이용해서 그 신의 힘을 기적처럼 받아서 이 땅에서도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그런 무당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육체를 벗고 다른 새로운 육체를 입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는 사랑만이 넘쳐 나고 누구를 봐도 즐겁고 미움이 없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시기도 없고 질투도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그가 잘 되었으면 좋겠고 그의 유익을 위해 내가 기쁘게 수고를 마지않습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도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나의 뜻에 순종해 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그런 곳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너무 좋겠지요? 거기가 초가삼간인들 어떻습니까? 판자 집이면 어떻습니까? 바로 그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천국 시민의 성품을 연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조금씩 자기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되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천국을 미리 맛보게 되는 것이지요. 거기에 왜 기적이 필요합니까? 왜 은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신통 술이 필요합니까?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마술사 시몬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술사 시몬은 신통력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마술을 부려 사람들로부터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라고 칭송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행 8:9-11)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사람들이 그 신기한 마술사 시몬의 마술을 보고 어떻게 했다고 나오지요? 저희가 그 “마술을 청종했다“”프로세코“는 ”마음을 두다, 마음을 빼앗기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시몬의 마술을 보고는 그 시몬의 마술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8장에서 빌립도 역시 기적을 행합니다. 사람들이 그 빌립의 기적을 보고는 어떻게 했는지 보세요.
(행 8:5-6)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빌립의 기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좇게 만드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이나 전도자들에게 나타난 기적은 그 때 당시 정경이 완성되어 있지도 않았고 가짜 메시야와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오면 나타나게 되는 기적들이 그들과 함께 했던 것이었습니다. 정경이 완성되고 교회가 설립이 되면서 더 이상 기적은 필요 없게 되었고 이제 살아서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우리 골수를 쪼개며 우리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 주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오늘 날 기적이 있는 곳에 말씀이 함께 풍성하게 선포되는 곳 보셨나요? 오늘 날 일어나는 기적들은 대부분 마술사 시몬의 기적과 다를 바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절대 성령 충만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주님의 뜻에 맞게, 세월을 아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의 가장 중요한 시작이 바로 가정이고요. 엉터리 신앙에 시간 허비하지 마세요.
(고전 15:1-2)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분명 헛된 믿음이 있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그 헛된 믿음의 당사자라면 어떡하시겠습니까? 큰 일 나는 겁니다. 바로 믿고 천국 가자고요.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천국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렘 5:1-2) “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 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성을 사하리라 2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하나님께서 목숨 걸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던 유대 예루살렘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이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마.“ 예레미야 당시 그 유대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믿겨지십니까? 엘리야가 “하나님 왜 나만 남겨 놓으셨나요?”라고 한탄 한 것을 기억하세요? 마틴 루터가 전 세계에 만연해 있던 가짜 기독교와 홀로 맞섰던 것을 기억하세요? 예수 믿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좁고 협착해서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그 길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열심히 가는 것“ 그게 예수를 믿는 성령 충만한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엉뚱한 것 기대하지 마세요. 바로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여러분의 거룩을 챙기십시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피차 복종하세요. 섬기십시오. 겸손하세요. 그리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닌,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세요. 이런 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어떠세요? 여러분은 이러한 친구를 가지셨습니까? 아니,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이러한 친구가 되어주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바로 이런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남을 위해 존재하는 분들입니다. 먼저 여러분 곁에 있는 분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그게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원수였던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저 인간하고는 죽어도 친구를 할 수 없어“라고 마음에 새겨 놓은 사람들이 있으세요?
(요 15:15)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 더러 친구랍니다. 이 천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 분이 우리 더러 친구랍니다. 우리도 그렇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 것은 그 예수님의 친구들에게 요구되는 삶이기도 합니다.
(요 15:9-14)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오늘 본문에는 분명 “피차 복종하라”라고 되어 있지, “너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잘하면 된다.“라고 적혀있지 않습니다. 그게 복음의 핵심을 흔드는 일이 아니면 무조건 져 주세요. 그러나 복음 앞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세요.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돌에 맞고 했습니다. 져 준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율법에 묶여 있던 베드로에게는 그의 잘못을 서슬이 퍼렇게 지적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이 10-11)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니면 그냥 져 주세요. 섬겨 주세요. 어떠세요. 예수 믿는 거 쉽지 않죠?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갈 5:13-15)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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