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종들아 상전들아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0. 29.

 

 

종들아 상전들아

 

(김성수 목사)

 

 

(엡 6:5-9)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 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표준새번역] “5 종으로 있는 이 여러분, 두려움과 떨림과 성실한 마음으로 육신의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리스도께 하듯이 해야 합니다. 6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답게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십시오. 7 사람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섬기십시오. 8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각각 그 갚음을 주님께로부터 받게 됨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9 주인 된 이 여러분, 종들에게 이와 같이 대하고, 위협을 그만두십시오. 그들의 주님이시요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과, 주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시오.”

 

 

우리는 계속해서 에베소서 5장 18절의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의 세부적인 실천사항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18절에서 “성도들아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라.“라고 한 뒤에 21절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게서 꼭 나타나야 할 것을 “그리스도를 두려워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언급을 한 후 22절부터 그 “피차 복종함”에 관해 구체적인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첫 번째 피차 복종해야 하는 관계는 “부부”였습니다.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주께 하듯 복종하고 남편들은 아내들을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양육하라“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나와야 하는 것들의 첫 번째 실례(實例)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였지요. “자식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공경하고 부모는 자식을 노엽게 하지 않으며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삶 속에서 나와야 하는 두 번째 실례(實例)였습니다. 세 번째가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종과 상전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날, 특정한 곳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서 그려내야 하는 일상의 그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은 교회에서, 혹은 기도원에서, 혹은 선교 지에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경주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 힘을 충전하는 시간이지 그 자체가 신앙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마치 여러분이 생활을 하기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은 생활을 하기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행위이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살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렇게 먹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을 우리는 사람이라고 안 그러고 “돼지”라고 부르지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교회에서 힘을 얻어 일상의 삶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그 진짜 신앙생활, 성령 충만한 신앙인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긴장과 분열과 오해”가 많이 일어나는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해 피차 복종함으로 분열을 막고 오해를 막고 다툼을 막는 삶을 살아냄으로써 성령 충만의 증거를 보일 수 있는 것이지 무슨 대단한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럼 오늘 이 시리즈의 마지막인 종과 상전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성령 충만한 삶은 어떤 것인지에 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5절을 보시면

 

(엡 6:5)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종들아 상전들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종“이라고 번역이 된 ”둘로스“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servant가 아니라 slave입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는 주인이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짐승처럼 다루던 ”노예“가 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노예들아 노예제도는 잘 못된 것이니 모두 일어나서 궐기해라“하고 권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예들아 너희 상전께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노예들의 철저한 순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치 사도는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해방신학이나 민중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구절들이 많지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빌레몬서 전체가 바로 노예인 오네시모를 상전인 빌레몬에게 다시 돌려 보내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당시 로마의 최고의 폭군이었던 네로의 권세에도 “복종하라”라고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자기 뒤뜰의 불을 밝히는 기름으로 짜서 썼을 정도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인물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권세에 복종하라고 강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롬 13:1-7)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게다가 바울은 그 네로에게 세금도 꼬박 꼬박 내라고 합니다.) 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여기에 왜 그리스도인들이 네로 같은 폭군에게도 복종해야 하며 그들에게 세금도 꼬박 꼬박 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나오지요? 국가나, 상위 권세는 우리의 죄가 너무 급속히 팽창하거나 죄가 너무 거세게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울타리로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국가나 위정자들을 포함한 모든 상위 권위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룩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 직접 연출해 놓으신 상황이요 조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 권세가 악한 권세이든 선한 권세이든 너희는 그 권세에 일단 복종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버나움에서 그 타락한 성전의 성전 세를 받는 자들에게 성전 세의 한 종류인 속전을 지불하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마 17:24-27)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여기서 반 세겔이라는 것은 “디 드라크마” 즉 “두 드라크마”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반 세겔”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에 시내 산에서 인구 조사를 한 직후에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내었던 생명의 속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건져주신 생명의 대가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여호와께 바쳤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 ‘반 세겔’은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되어서 매년 봄 유월절 전에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성전에 와서 환전상들에게 돈을 바꾸어 반 세겔을 바쳤습니다. 지금 성전 세를 받는 자가 베드로에게 바로 그 것을 묻는 것입니다. ‘너희 스승은 모든 이스라엘이 내는 성전 세를 안 내느냐?’라고 물어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 스승님도 내신다.’하고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베드로야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세금을 받느냐? 아들에게 받느냐, 아니면 타인에게 받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지요. “아들에게 무슨 세금을 받겠습니까, 타인에게 받지요”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맞다, 난 이 성전의 주인이시며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내가 성전 세를 내야 한단 말이냐? 나는 안 내도 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가서 낚시를 해서 고기를 잡아오너라. 그 고기 입안에 한 세겔이 들어 있을 것이니 그 한 세겔을 가져다가 너와 나의 성전 세로 그들에게 갖다 주어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아무리 불합리한 일이라 할지라도 지금 그들이 세를 받을 위치에서 세를 요구하고 있으면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비슷한 이야기를 산상 수훈에서도 하셨습니다.

 

(마 5:41)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If someone forces you to go one mile, go with him two miles.

 

당시 로마는 식민지 원주민들을 부역에 동원할 때 억지로 오리까지만 끌고 가서 부역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그나마 신사적으로 식민지를 통치했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오리 이상은 법으로 금지를 해 놓았기 때문에 그 이상은 합법적으로 안 가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로마가 억지로 오리를 데려가서 부역을 시킬 때 십리까지 가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너희는 그러한 불합리한 복종을 통해서도 무언가 할 일이 있고 배울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분명 노예제도는 잘 못된 제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없애 버리신 것이지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노예제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 너희가 노예로 태어났거든 일단 그 직분에 충실 하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권고의 내용인 것입니다. 베드로도 똑같은 권고를 교회에게 했습니다.

 

(벧전 2:13-21)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 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종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그 까다로운 주인들에게 순종하는 역할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 사도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의 권세에 순복하라고 권고하면서 노예들에게(18절, 사환들아, slaves) 오늘 본문에서의 사도 바울의 권고와 똑같이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관용하는 자들(착한 주인)에게 뿐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순복하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은 이렇게 불합리한 것들을 인정하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닌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를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불합리한 관계입니다만 “노예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주인과 하나님과의 관계“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수직적 관계의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진다면 왜 성경이 이 노예 제도에 관해서 이렇게 관대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잘 보시면 오늘 본문은 종들에게 권고하기를 너희가 너희 상전에게 복종하는 것을 “주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상전들에게도 “너희가 종들을 대할 때 하늘 위에 너희 상전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들을 대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종들이나 상전들 모두에게, 너희들은 각자가 너희들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라”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피 지배자와 노예의 자리는 억울한 자리이고 지배자와 상전의 자리는 복 받은 자리라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고전 7:20-24) “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2 주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사도 바울은 종들에게 “너희가 종으로 부름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너희가 세상에서는 종이지만 주안에서는 자유자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세상에서의 신분과 계급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잠정적이며 예비적이며 비 영구적인 이 땅에서의 인간관계나 상황이나 조건을 개선하거나 혁신하는 데에 관심을 두지 말고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훈련하고 연습하는 데에 열심히 매진함으로 해서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우리가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 갈 조건과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에게 허락하신 그 상황과 조건은 그 자녀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성숙하고 양육되어지는 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일 것입니다. 그 자리가 노예의 자리일 수도 있고, 식민지 원주민의 자리일 수도 있고, 고위 관리의 자리일 수도 있고, 황제의 자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점은 우리에게 주어진 그러한 이 땅에서의 신분과 지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맡겨진 그 자리에서 열심히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주께 충성하다보면 우리는 우리의 목표지점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노예는 노예의 자리에서, 상전은 상전의 자리에서, 황제는 황제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그 직무에 충실 하라는 것이 성경의 관점인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이왕이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황제의 자리, 상전의 자리에 앉혀서 데리고 가면 더 좋지 않겠는가? 왜 대부분의 성도들을 굳이 노예의 자리, 포로의 자리, 피 지배자의 자리로 보내셔서 어렵게 데리고 가시는가?“하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포로로, 전쟁터로, 광야로 몰고 가시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몰고 가십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강력한 대 제국을 건설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모두다 고지에 올라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비록 포로의 신세로, 전쟁의 참상에 던져져 눈물을 뿌리는 자들로, 광야에서 처량하게 천막을 치고 사는 신세로 가더라도 그 상황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알며 우리가 소망하는 저 하늘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그게 더 유익이기 때문에 성도들을 전부 황제로 만드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고난이라는 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더 할 수 없는 유익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난 속으로 그의 백성들을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시 119:67,71)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84:6-7) “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7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표준새번역]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도, 그들은 그 곳을 샘들이 터져 나오는 곳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른 비가 내려 줄 것입니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뵐 것입니다.”

 

(고후 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가 이제 다 외우는 로마서 5장 3절은 뭐라고 합니까?

 

(롬 5:3-4) “3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Not only so, but we also rejoice in our sufferings, because we know that suffering produces perseverance; perseverance, character; and character, hope.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 받고, 핍박받고, 멸시 당하고, 눈물 흘리고 하는 것이 이렇게만 정리가 된다면 왜 예수님께서 식민 통치나 노예 제도에 그렇게 관대하셨는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는 사회 개혁이나 사회 정화를 외치며 세력을 구축하고 투쟁을 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그 사회의 체제와 이념 아래 순복하며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연마하면 되는 것입니다. 80년대 90년대를 지나오면서 많은 목사님들이 독재 타도와 민주화 투쟁에 앞장 서셨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것 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만일 공산주의 체제하에 태어나셨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공산주의를 뒤집어엎는 일에 뛰어드시면 안 됩니다. “아니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공공연히 금하는 이념인데 그 것을 타파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의 의무 아닙니까?” 혹 이런 질문을 마음 속에 품고 계신 분 안 계셔요? 그럼 한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 보자고요.

 

여러분, 공산주의가 예수 믿는 것을 더 방해를 합니까? 자본주의가 예수 믿는 것을 더 방해 합니까? 한번 마음속으로 손을 들어보세요. “공산주의?” 자신 있으세요? 제가 보기에는 물질주의와 향락주의, 성과 주의에 물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수 믿기가 더 힘든 것 같습니다. 사람은 너무 편하고 너무 좋은 게 많고 너무 자유로우면 그 쾌락을 좇느라 하나님을 건성으로, 형식 적으로 찾게 되는 법입니다. 절박함이 없어요. 믿긴 믿는 것 같은데 엉터리 무당종교를 만들어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체제”가 아닙니다. “상황”이 아닙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어떠한 체제나 이념, 상황,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한 사람도 낙오 없이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면 어떻고 자본주의면 어떻고 전제 군주제면 어떻고 과두정치면 어떻습니까? 교회는 그러한 체제나 이념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한국에서 “좌파” 정치에 대한 반발로 “우파” 견제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그 “우파” 견제 세력의 수장이 “목사”입니다. 분명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목사는 그 일에 뛰어 들어서는 안 됩니다. 정 하고 싶으면 그 사람은 목사 이름 반납하고 정치인으로 나서서 그 일을 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교회가 우파 운동을 하게 되면 좌파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를 버리게 됩니다. 만일 교회가 좌파 운동을 하게 되면 우파에 속한 사람들이 교회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좌파를 몰아내고, 혹은 우파를 몰아내는 일을 하는 집단이 아닌 것입니다. 나라가 우경화 된다고 해서 태평천하가 됩니까? 아니면 좌경화가 된다고 해서 태평천하가 되나요?

 

교회는 죄 아래 있는 죄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서 그들이 죄를 자각하고 그 죄에서 빠져 나오도록 권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 그 죄 자체를 몰아내려고 시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회는 절대 인간의 힘으로 정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속한 체제 속에서 그 속에 들어 있는 죄인들에게 열심히 복음만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도 자본주의자들도 모두다 죄인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떤 이념이나 체제에 속한 사람들로 보기 이 전에 “멸망할 죄인”들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에 사는 성도가 거듭나기 전에는 몰랐는데 거듭나고 나니까 이 공산주의가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체제라서 그 체제가 마음에 안 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체제 자체와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거듭나기 전에 결혼한 사람이 자기가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이교도에 머물고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헤어져 버리는 일이 비일 비재 했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배우자가 자신의 신앙생활을 방해한다는 허울 좋은 변명 아래 자신의 배우자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게 된 자녀들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부모에게 더 이상 복종하지 않고 부모조차 이교도 취급을 했었습니다. 바울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고전 7:12-16) “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체제나 제도가 비합리 적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서 그들의 삶으로 죄인들을 건져내는 것이지 그 체제나 제도를 뒤집어엎어 버리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을 보시면 예수를 믿고 나서 일하기를 중단한 사람들에 대한 권고가 나옵니다.

 

(살후 3:10-12)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예수를 믿게 된 어떤 사람들이 일도 하지 않고 주의 재림만을 기다리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일하지 않는 자들은 먹지도 말라”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열심히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를 알기 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예전에 다미 선교회 사람들이 모든 재산 다 팔아서 교회에 갖다 내고 아무 일도 안하고 교회에 모여 앉아 예수 님 재림만 기다렸던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16세기 재세례파 사람들도 역시 똑같이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세상과 격리 된 곳에서 자신들만의 삶을 살기를 시도했었습니다. 그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은 세상 속에서 세상과 부대끼며 빚어지는 것이지 어디 수도원에 숨어서 산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종의 자리에, 어떤 회사의 직원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세상 속,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의 역사를 잘 공부해 보시면 인류의 역사의 전환점에는 항상 revival, 부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영국이라는 나라는 불과 2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형편없이 타락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대 다수는 교육을 받지 못해 무식하고 불결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신사들이 가득 찬 신사의 나라로 바꾼 것은 혁명이나 캠페인이 아니었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요한 웨슬레에 의해 일어난 영적 대 각성 운동이 그 나라 전체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조지 휫필드나 요한 웨슬레가 그 가난했던 사람들에게 했던 설교는 “노예 제도나 노동자들의 임금 문제나 노동환경 혹은 체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에 손아래 놓여 있으며 그러한 죄인들에게 용서의 길이 있다는 것”을 설파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에 관해 설교를 했지 사람들의 육신에 대해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성령에 의해 거듭난 사람들이 제일 처음 하고 싶었던 것이 “성경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학교가 늘어나게 되었고 지성인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하버드나 예일, 프린스톤도 원래 성경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작은 신학교를 세웠던 것이 이렇게 커진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의 탄생에 의해 일어난 것이지 혁명이나 캠페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속한 곳에서 그 상위 권위에 순종하며 열심히 최선을 다해 복음을 삶으로 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위 권세에 의해 순교를 당한 사람들의 피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초대 교회 순교자들은 가이사를 주라 부르지 않아서 사자의 먹이가 되었고, 화형대에서 타 죽었습니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순교자들이나 17세기 계약 주의자들 그 분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잘 구별하셔야 합니다. 그 순교자들은 정치나 체제에 대한 항거를 하다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 정치나 체제 아래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 분들이 전제 군주제를 반대하다 돌아가셨나요? 그 분들이 노예 제도 폐지를 외치다가 돌아가셨습니까? 그 분들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다가 돌아가셨습니까? 그 분들은 자기가 속한 체제나 사회 속에서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해야 하는 상황이나 죄를 지어야 하는 상황”을 거부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건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비교를 해 보세요. 히틀러가 통치하던 시대에 많은 목회자들이 감옥에서 순교를 했습니다. 영웅주의 적 차원에서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목사님들의 삶을 보며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감옥에서 순교한 목사님들은 히틀러의 통치 아래에서 “정치 색”을 띠었기 때문에 갇혀서 죽은 것입니다. 그 분들 말고 더 많은 목사님들이 정치색을 띠지 않고 조용히 매 주일 강단에서 오로지 복음만을 전하다가 가셨습니다. 이 분들이 진짜 실력 있는 분들인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일제 식민 통치에 항거하다가 돌아가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통치 아래에서 조용히 순복하며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그 놈들이 예수님이 아닌 “신사”에다가 참배를 하라고 하니까, 그것은 못하겠다고 신앙을 지키시다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체제에 항거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설교할 때마다 열심당을 독려해서 로마를 몰아내고 자유 독립을 찾자고 외쳤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우리 조선의 만적의 난처럼 노예 제도를 폐지하자고 노예들을 선동한 일이 있었나요?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각자의 자리에서 순복하며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로 하자“ 이게 바울의 권고였습니다. 그러면 종들은 종들의 자리에서 어떻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종들은 단순히 노예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 5절을 보시면,

 

(엡 6:5)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먼저 종들은 “두려워하고 떨며” 상전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종들에게 무엇을 “두려워하고 떨라“고 하는 것일까요? 상전들의 매를 두려워하라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두려워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프호보스”와 “떨리다“라고 번역이 된 ”트로모스“가 똑같이 쓰인 곳을 몇 군데 찾아보면 그 의미가 명확하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고전 2:3)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후 7:15) “15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빌 2:12)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렇게 “프호보스, 트로모스”라는 단어는 바울이 그의 서신 서에서 즐겨 쓰는 단어들입니다. 그가 두렵고 떨었던 것과 다른 성도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어떤 것을 하라고 권고했던 내용은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즉 “종들이 일을 할 때 그 상전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눈가림으로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해야 한다“ 는 의미에서 ”프호보스, 트로모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장에서 일을 할 때 여러분은 직장 상사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 일을 하셔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대사로 세상 앞에 서신 분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삶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주인이 보든 말든 상사가 있건 없건 간에 자기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 해 내는 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상전에게 순종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종들이 가져야 할 마음은 “성실한 마음”입니다. 본문 5절을 다시 보시면 “두렵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라고 나오지요. 여기서 “성실함”“하폴로테스”는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상대방을 위해 행하는 진지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들은 자기의 편안함을 위해서 주인이 안 보는 자리라고 해서 마땅히 자기가 할 일을 안 하고 꾀를 내어 딴전을 부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들은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일단 자기가 임금을 받고 자신의 시간을 주인에게 팔았으면 최선을 다해 그 주인의 이익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 할지라도 자신의 고용주의 시간을 사용할 권리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주인에게 판 시간을 도둑질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시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은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한 일이었습니다.’라고 항변한다면 저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당신은 이 직장에 복음 전도자로 고용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주인의 시간을 도둑질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실 것 같습니까? 당신은 오히려 그러한 일을 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복음 전파에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어떤 사람이 주인의 시간을 도둑질하며 불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일할 시간에는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당신이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게 오히려 삶으로 보여주는 복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과 시간 이후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그 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도록 하십시오. 그 때 당신은 삶과 말이 일치하는 진정한 복음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해 내는 것이 진짜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도가 종에게 요구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입니다.

 

(엡 6:6)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사실 정확한 번역은 “목숨을 다하여”가 맞습니다. 종들은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들이 상전에게 복종하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게 바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어디 다른 선교지에 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불평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을 하십시오. 그게 바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을 마지못해서,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 하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런 소득도 보장되지 않는 노예들에게도 목숨을 걸고 순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은 더 열심히 일하셔야 합니다.

 

(전 9:10) “10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여러분은 열심히 일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종들은 “단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상전을 섬기라”고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 보세요.

 

(엡 6:7)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종들은 사람들의 시선과 사람들의 평가를 위해서가 아닌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주의 평가를 목표로 삼아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상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9절을 보시면,

 

(엡 6:9)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종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바울은 상전들에게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합니다. 종들이 두렵고 떨림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단 마음으로, 주께 하듯, 상전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그와 똑같이 상전들도 두렵고 떨림으로 그리고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고 단 마음으로 종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과 재물과 권세를 가지고 종들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고 사도는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공갈을 그치라”입니다. 상전들은 자기가 부리고 있는 사람들이 상전으로 말미암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공포에 떨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빌레몬서에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노예인 오네시모를 노예로 뿐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서 대하라고 권고합니다.

 

(몬 1:16-17)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휘페르,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이것이 상전과 종과의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관계인 것입니다. 여기에도 종업원을 부리시는 사장님들 계시지요? 그 종업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형제처럼 대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게 본문 9절 후반부입니다.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 이니라‘ 너희 종들의 상전과 너희의 상전이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 종들을 형제 대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계신 상전이신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너희가 인간 세상에서 주종 관계로 엮여있는 그러한 인간관계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간관계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몇 주간에 걸쳐서 공부한 성령 충만한 사람의 내용의 포인트입니다.

 

사도는 부부도 서로 복종하고 사랑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부모와 자녀도 “주 안에서” 공경하며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종들도 주님께 하듯 상전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상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일상의 삶을 주님께 하듯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을 상대방 사람에게서 요구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노조파업을 하겠습니까? 임금 착취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가신 첫째 되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마 22:36-38)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우리가 우리의 일상,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관계, 종과 상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복 하는 삶을 살아내면 그 삶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인 것이고 그 삶은 곧 두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아무리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할지라도 공산당 혁명 때처럼 “왜 나는 이렇게 늘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걸까? 저 부르조아들은 나보다 훨씬 덜 일을 하는데도 저렇게 기름기가 끼는데 왜 나는 죽어라고 일을 하는 데도 늘 이 모양인가? 이 세상은 프롤레타리아에가 주인이 되는 새 세상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고 반역을 꿈꾸어서는 안 되는 분들입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제 친구 중에 고려대학교 총학생회 간부를 하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머니가 도시락 장사를 해서 겨우 겨우 생계를 꾸려 가는 아주 가난한 친구였는데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소리가 “빨리 전쟁이 일어나서 이 모든 상황이 뒤집어져야 한다.”는 소리였습니다. 결국 학생운동 주동 혐의로 감옥에 가서 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다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 친구는 항상 모든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서 보는 사람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여기 이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순응하며 그 속에서 최대한 열심히 삶을 살아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그 수많은 노예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 더 열심히 주인들을 섬기면서도 그 안에 서 뿜어져 나오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즐거워했듯이 여러분도 그렇게 여러분의 자리에서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즐거워 하셔야 합니다. 그 때 세상은 여러분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들을 저 노예의 자리, 억압의 자리, 저 처절한 가난의 자리에서 저렇게 기쁘고 성실하게 만드는 힘이 뭘까?” 여러분은 세상으로부터 그러한 평가를 얻어내야 하는 분들입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이방 나라의 노예가 되었지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때 이방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실함에 감동하여 그를 총리에까지 추대를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노예의 자리에서 포로의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1차 대전 동안에 러시아를 다스리고 있던 스탈린이 1차 대전 중에 러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법을 완화하는 성명을 발표한 유명한 일화가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눈엣가시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탈린도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을 아주 혹독하게 핍박했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자리에서 너무나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을 스탈린이 보았습니다. 나중에는 스탈린이 “믿을 사람은 기독교인들밖에 없다”고 까지 말을 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스탈린의 공산주의에 항거해서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핍박과 억압 속에서 조용히 주님만을 두려워하며 최선을 다해 일상을 지켜낸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순종하는 삶이 수백 대의 탱크와 수 천대의 전투기보다 더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직접 역사 속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교회 안에서 “평등”을 외칩니다. “평등” 좋지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평등은 누구도 “구원의 가능성”에서 차별이 없다는 것에서의 평등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계급으로 살아야 한다는 평등이 아닌 것입니다. 상전과 노예가 사람과 벌레처럼 구분이 되던 고대 시대에 상전과 노예가 손에 손을 잡고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상전은 벌레만도 못한 노예를 형제로 깍듯이 예우해 주고 노예는 상전을 부모님 모시듯 충심으로 모시는 그런 그림을 한번 그려 보세요.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상전이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모두가 종이 되어서도 안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잠시 잠깐 이 세상에서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저 영원한 세상으로 옮겨가는 나그네들일 뿐입니다. 여러분 몸속에 있는 세포 중에 7전 년에 있었던 세포가 한 개라도 있으신 분 손 들어보세요. 없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한하며, 변하며 후패합니다. 그 땅에 있는 것들의 화려함과 초라함에 너무 흔들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영원히 변치 않는 저 천국을 준비하는 분들입니다. 비록 초라한 종의 자리일지라도 그게 여러분의 천국을 준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자리를 지키십시오.

 

히브리서 11장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항상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만을 바라보며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하나님은 성도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터는 없습니다. 우리는 저 견고한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걷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그 상황과 환경에 불평하지 마시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해 해 나가십시오. 그게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