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내 백성아,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9. 2.

 

 

내 백성아,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김성수 목사)

 

 

(창 17:1-27) “1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2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4 "나는 너와 언약을 세우고 약속한다. 너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5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6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7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8 네가 지금 나그네로 사는 이 가나안 땅을, 너와 네 뒤에 오는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모두 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와 세운 언약을 잘 지켜야 하고, 네 뒤에 오는 네 자손도 대대로 이 언약을 잘 지켜야 한다. 10 너희 가운데서,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너와 네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 세우는 나의 언약, 곧 너희가 모두 지켜야 할 언약이다.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게 하여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이다. 12 대대로 너희 가운데서, 남자는 모두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너희의 집에서 태어난 종들과 너희가 외국인에게 돈을 주고서 사온 종도, 비록 너희의 자손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 13 집에서 태어난 종과 외국인에게 돈을 주고서 사온 종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만, 나의 언약이 너희 몸에 영원한 언약으로 새겨질 것이다. 14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곧 양피를 베지 않은 남자는 나의 언약을 깨뜨린 자이니, 그는 나의 백성에게서 끊어진다." 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여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18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뢰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19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그의 뒤에 오는 자손에게도,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20 내가 너의 말을 들었으니, 내가 반드시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어서, 그가 자식을 많이 낳게 하고, 그 자손이 크게 불어나게 할 것이다. 그에게서 열두 명의 영도자가 나오게 하고, 그가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 21 그러나 나는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너에게 낳아 줄 아들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 2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다 하시고, 그를 떠나서 올라가셨다. 23 ○바로 그 날에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종과, 돈을 주고 사온 모든 종, 곧 자기 집안의 모든 남자와 함께,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양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았다. 24 아브라함이 양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은 것은, 그의 나이 아흔아홉 살 때이고, 25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양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은 것은, 이스마엘의 나이 열세 살 때이다. 26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은 같은 날, 할례를 받았다. 27 집에서 태어난 종과, 외국인에게서 돈을 주고 사온 종과, 아브라함 집안의 모든 남자가 아브라함과 함께 할례를 받았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창세기 17장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할례 언약이 담긴 장입니다. 우리가 15장을 공부할 때 이 17장의 할례 언약에 대해 이미 공부를 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쉽게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15장에서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시는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보았습니다. 그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열심만으로 완성이 될 것임을 담지하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쪼개짐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 산 사건에서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힌트가 되었고 야곱의 얍복강 사건에서도 반복하여 설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쪼개짐은 구약을 관통하여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완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려 하는 죄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지혜와 힘을 하나님의 은혜에 보태려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의 여정을 눈으로 좇으면서 그러한 죄인들의 속성을 여실히 보고 있습니다. 그게 왜 그렇게 큰 잘못이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불경한 죄의 본질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도울 수 없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야 할, 아버지 앞의 아기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기가 자꾸 아버지의 일을 돕겠다고 나서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행복에 기여를 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히려 아버지의 일에 방해만 될 뿐입니다. 더군다나 그 아버지가 전능한 분이실 때는 더하겠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인생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시고 그 시간 속에서 인간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 역사와 시간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이며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를 하고 자발적으로 당신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완성되어 영원동안, 영원한 곳에서 한량없는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만 행복해 하며 살 수 있도록 작정하시고 그 작정에 따라 역사를 경륜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가 목표하고 있는 것이요, 성도의 인생이 목표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세상의 것들로 하나님의 일에 무언가 보태려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이르려는 행위가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욕(利慾)적인 자아의 육적 소망이요, 불순종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렇게 나의 뜻과 계획으로 행복에 도달하려 하는 이욕(利慾)적인 자아의 모든 육적 소망과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확정적인 반대의 말씀이 나옵니다.

 

(창 17:18‐19)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 하나이다 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반복해서 듣고도 계속해서 육의 소산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아브라함은 육욕의 몸종 하갈에게서 육욕의 열매인 이스마엘을 낳아 놓고는 13년이 지났는데도 그에게 여전히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3년간의 하나님의 침묵에도 아브라함은 정신을 못 차린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분명이 말씀해 주십니다. ‘아니라’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통해 내어놓는 친척 롯, 종 엘리에셀, 몸종의 자식 이스마엘 등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 측에서의 어떤 시도와 방법으로도 결코 참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내가’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2,4,7,8,16,16,21) 구원은 하나님 홀로 완성해 내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어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므로 너희들은 자꾸 너희의 꾀와 너희의 힘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쌓아 행복에 이르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3년 만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엘샤다이’입니다. 그 말은 ‘엘’(하나님, 강한 자) ‘샤다이’(기르는 자, 능력 주시는 자, 충만케 하는 자)의 합성어로 ‘모든 것을 기르시고 충만케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엘샤다이라는 단어를 통해 또 다시 자신의 육신의 열매를 내어놓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손은 내 능력으로 내가 탄생케 한다, 그러니 너는 나의 능력에 의지하라’는 믿음의 촉구를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을 보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힘을 과시하여 행복을 쟁취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시인할 때, 다른 말로 약해 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드러나게 됨을 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하게 되는 길은 우리의 무장을 해제하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후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완전이라는 말을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며 사회법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완전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자꾸 너의 것 내 놓지 말고 내 앞에서 약한 자, 티끌, 하벨(nothingness)로 서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약할 때 나의 능력이 온전히 네게 임하여 네가 온전해 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완전’이라는 단어는 여기에 처음 나온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가 창세기 6장을 공부할 때 하나님께서 노아를 가리켜 ‘완전한 자’라 부르셨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창 6:9) “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홍수 후에도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자는 추태를 부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완전한 자라 부르십니다. 노아는 산 위에 커다란 배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의견이나 꾀를 내 놓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다른 이들의 비난과 조롱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앞에서 약한 자로 섰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완전한 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함은 우리의 힘으로 생산해 내는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약한 자로 자기를 부인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 하라는 명령 앞에 ‘내 앞에서 행하여’라는 수식어를 붙이십니다. NIV성경에는 그 부분이 ‘walk before me' 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내 앞에서 걸으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사실 고대 바벨론 지방의 아카드어에 나오는 관용구입니다. 그 어구는 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요구할 때 쓰는 관용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왕이신 당신을 인정하고 당신께 완전히 순종하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충성을 당신의 지키심으로 끌어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충성을 당신이 뒤에 서심으로 아버지가 아기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모습으로 끌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기에게 걸음마를 가르칠 때 아기를 뒤에 세우고 아기가 오든지 말든지 앞서가는 아비가 있나요? 아버지는 항상 아기를 뒤에서 좇아갑니다. 그건 아기를 지키려는 아비의 열심과 투신인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열심과 투신은 자녀의 충성과 순종을 끌어냅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 자녀에게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무나 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한없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게 바로 ‘내 앞에서 행하여’라는 어구가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홀로 이루시고 완성해 내시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뒷짐 지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는 반드시 그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의 반응이 수반됩니다. 여러분이 15장을 공부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15장에서는 언약의 흐름이 하나님에게서 아브라함에게로 내려오는 형국으로 나타납니다. 거기서는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언약의 흐름은 하나님에게서 아브라함에게로 내려와 다시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본문 9절을 보세요.

 

(창 17:9)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내려주시고는 아브라함에게 ‘지키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15장의 언약은 믿음의 측면을 17장의 언약은 실천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 언약에 대한 반응을 요구 받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에 대한 실천적 반응 또한 하나님이 뒤에서 지키시고 밀어주시는 방법으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 구원은 절대 중도에 포기 되지 못합니다. 그걸 신학에서는 견인(perseverance)라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이들의 삶 속에서는 반드시 실천이 불가분 나와야 합니다. 그 믿음과 실천의 불가분의 관계를 사도 바울이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빌 3:15)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표준새번역]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를 가리켜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 부릅니다.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 진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 위의 구절들을 보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빌 3:12-14) “12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가 아직 온전하지 않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 성도는 아직 온전하지 않으므로 그 온전함을 향하여 열심히 좇아가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성도의 목적지인 ‘온전한 순종’의 자리에 이미 도달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 역사와 시간 속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우리에게 그 영적인 온전함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온전함을 믿음으로 보고 그 온전함을 향하여 열심히 좇아가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믿음과 실천이라는 양 날개에 의해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좇아가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디오코’는 강도나 도둑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추적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도둑놈을 좇아가는 열심으로 우리의 거룩을 향해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시면 성도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부르심’은 ‘소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무엇을 위한 부르심입니까? 영생, 구원을 위한 소명입니다. 우리는 영생, 구원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 구원을 위해 이 땅에서 열심히 피 흘리기까지 분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의 시제를 현재, 과거, 미래의 세 가지 시제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엡 2:8; 빌 2:12; 롬 5:10) 믿음과 실천은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 2:17)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서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행함은 구원의 원인으로서의 행함도 아니고, 구원이라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행함도 아닙니다. 성도의 행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라는 관계로 묶음으로서 발생하는 아버지와 자식 간의 사랑의 표현이고 독생 하신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대우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믿음과 신뢰와 애정과 은혜와 사랑의 관계에 대한 증거로서의 행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서 그 사랑의 반응, 감사의 행함을 이끌어 내십니다. 그러한 언약에 있어서의 믿음과 실천의 양 날개는 하나님의 이름 바꿔주심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 하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람(Abram)은 ab(father)와 ram(high) 의 합성어로서 ‘높으신 아버지’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Abraham '열국의 아버지‘라고 바꾸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바꾸어 주십니다. 사래는 ‘나의 왕비, 조롱’이라는 뜻이고 사라는 그냥 ‘왕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라는 이제 자식이 없어 조롱받던 일개 족장인 아브라함의 아내에서 열국의 어미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을 주는 것은 이름을 주는 자가 이름을 받는 자를 소유한다는 소유권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 이름에 담긴 약속과 능력을 상대방에게 선물한다는 의미가 있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새 이름을 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 소유의 백성이라는 것을 밝히심과 동시에 아직 가시적으로 일어나지 않은 당신의 약속의 성취를 그들의 삶 속에서 당신의 힘으로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야곱은 ‘속이는 자’입니다. 그 속이는 자가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왕자’로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의 모형이지요?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자신을 죽여(당신이 져서) 하늘의 왕자로 창조해 낸 영광스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을 때 그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을 자격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셨고 그 이스라엘이라는 목표지점을 향해 야곱을 채찍질해 나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애굽왕 바로 앞에서 ‘나그네 인생길 130년에 내 인생이 참으로 험악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도 그게 복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비록 험악한 인생을 살았지만 야곱은 그 험악한 인생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자로 양육되어지고 성숙되어져 간 것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시몬’(듣는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사람 말에 흔들리고 저 사람 말에 흔들렸던 베드로에게 주님이 반석(베드로)이라는 이름을 주심으로(요 1:42) 그를 진짜 반석으로 만들어 가셨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도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사 62:2) “2 이방 나라들이 네게서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뭇 왕이 네가 받은 영광을 볼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부를 때에, 주께서 네게 지어 주신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계 2:17) “1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흰 돌도 주겠다. 그 돌 위에는 새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돌을 받는 사람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 새 이름이 어떤 이름입니까?

 

(고전 1:2)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여기서 ‘부르심’이라 번역된 단어는 'called'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성도라는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새 이름으로 ‘성도’라는 이름을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고린도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근친상간이 있었고 은사의 문제나 율법의 문제, 사랑의 부족 등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그 고린도 교회를 서슴없이 ‘성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아무리 엉터리 같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주신 이름 ‘거룩한 자들’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자들로 만들어 내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언약 안에 들어있는 우리 성도는 반드시 스스로의 행함을 수반하여 완성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지키라고 하시고는 그 언약을 지키는 표시로 할례를 명하시는 것도 역시 믿음과 행함의 조화를 담지하고 있는 명령이었습니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 끝을 조금 자름으로써(전인 적 죽음) 나와 내 후손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생명, 즉 영생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말미암는다는 것을 우리는 할례의식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참 행복은 오직 영생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데 그 영생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할례의 행위 그 자체에는 아무런 효력이나 효험이 없는 것입니다.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할례가 우리의 할례가 되어 그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의 결과물이 우리에게 거저 전가되는 것을 믿는 마음의 할례를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조차 할례는 마음의 할례임을 여러 곳에서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신 10:6; 렘 4:4,9:26; 롬 2:29) 그런데 그렇게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 어떠한 행위를 낳는지가 성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신 30:6)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모세는 마음의 할례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열매를 필연적으로 산출하게 됨을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똑같은 말을 합니다.

 

(골 2:11)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마음의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육적 몸을 벗는 삶을 사는 삶을 목적지로 하여 그들의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반드시 실천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언약을 지키라’고 하시고는 그 언약을 지키는 표시로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할례는 육적 몸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자로 재탄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무리라는 새 이름을 받은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은 할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가 생산에 의한 육의 서자들을 모두 몰아내고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 분이 사신 십자가의 삶을 우리의 삶 속에서 우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지키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렇게 할례를 지키는 실천적 삶의 내용은 아브라함이 나중에 그 육의 서자인 이스마엘을 내어 쫓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식하나 없었던 노인 아브라함이 86세에 얻은 자식입니다. 얼마나 정이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게 바로 할례입니다. 그건 고통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 내가 나의 인생 속에 낳아놓은 습관, 성품, 집착, 중독 이러한 것들을 끊어내는 것은 살을 베어내고 뼈를 깎는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쫓아내야 합니다. 그게 자기의 육욕의 서자를 끊어내는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아니라’ 할례 받은 이후의 자식만 진짜 언약의 자식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후에 나오는 열매들과 여전히 우리의 힘을 의지하고 우리의 지혜를 의지하여 내어놓는 열매들은 그렇게 다른 것입니다. 어떤 것이 성경이 경고하는 행위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인지 구별이 가시지요?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후에 화장실 갈 때마다 그 할례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나의 육적 서자로는 절대 언약의 후손을 만들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 뒤로 숨을 때에만이 약속의 자녀는 탄생될 수 있음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성도들은 어떠해야 합니까? 적어도 화장실 가는 횟수만큼은 하나님의 은혜를 반추해 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 세상의 행복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행복을 쉽게 잊고 심지어 이러저러한 동기와 이유를 대고 서로를 맞바꾸어 버립니다. 그건 육의 서자인 이스마엘을 끌어안고 ‘약속의 자녀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이 아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 원한다’ (창 17:18)고 무례를 범했던 아브라함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할례 받은 이후의 자식만 진짜 언약의 자식입니다. 그 전 것들은 다 쫓아내셔야 합니다. 이제 어떤 것이 성경이 경고하는 행위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인지 구별이 가시지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나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하늘의 삶인 영생입니다. 자꾸 나의 지혜와 힘을 이용하여 육적 서자들을 배태하지 마십시오.

 

(창 17:20‐21) “20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 지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표준새번역 “21 그러나 나는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너에게 낳아 줄 아들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

 

하나님은 할례 전에 태어난 이스마엘을 크게 복을 주어 번성케 하며 큰 나라가 되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의 복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21절을 ‘그러나’로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내 언약은 그렇게 크게 번성하고 큰 나라가 된 이스마엘이 아닌 명년에 태어날 이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죄인들이 이 세상의 것들로 번성하고 크게 되고 유명한 자되는 것 부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이 복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복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진짜 복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창 17:14)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 하였음이니라”

 

보세요. 세상에서 아무리 번성하고 큰 인물이 된다 하더라도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목표지점은 거룩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기 때문에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는 것이 우리 성도의 목적지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지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들이 영원히 하나님처럼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창 17:8)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보세요. 언약의 목적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즉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영원한 안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성취는 이렇게 완성이 됩니다.

 

(계 21:6~8) “6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7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고,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8 그러나 비겁한 자와 신실하지 못한 자와 가증한 자와 살인자와 음행하는 자와 마술쟁이와 우상 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바로 여기가 창세기 17장의 언약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자기를 부인하고 약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나의 삶 속에서 자유롭게 나를 지어가실 수 있도록 결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이미 확정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 확정된 자리로 함께 가자고 뒤에서 재촉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욕심을 따라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행복만을 좇아 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가 가자는 곳으로 가십시다. 순종의 자리, 거룩의 자리, 사랑의 자리로 가십시다. 안 될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아버지가 뒤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키시며 좇아오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절대 탈락할 수 없어요. 반드시 완성의 자리로 가실 것입니다.

 

최근에 미전역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두 부자가 있습니다. 65세의 아버지 Dick과 39세의 아들 Rick 부자입니다. 아들 Rick은 태어나면서 탯줄을 목에 감고 나와 그 때부터 뇌성마비 환자로 살고 있습니다. 아들이 컴퓨터를 사용하여 처음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아들은 ‘Run, I want to run'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아버지는 그 길로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마라톤 경주에 나가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보스톤 마라톤을 64번이나 완주했습니다. 아들은 철인 삼종 경기에도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수영조차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 때부터 수영을 배우고 자전거를 익혀 아들을 보트에 태우고 끈으로 자기 허리에 묶은 뒤 철인 삼종 경기에 참여했습니다. 그 뇌성마비 환자인 아들의 뒤에는 언제나 아버지가 있었기에 그가 마라톤과 철인 삼종 경기를 완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봐도 그것은 그 아버지의 공로입니다. 그러나 그 경기의 승자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가 내 뒤에서 달리지 않았다면 난 절대 이 일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내 아들이 내 앞에 없었다면 난 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달리시고 우리는 뒤에서 미시는 아버지가 계시기에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아버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그 분이 지키시고 그 분이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목표지점만 또렷이 바라보며 나의 무장을 해제하고 뒤에서 미시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하라 하면 사랑합시다. 용서하라 하시면 용서합시다. 그 아들 Rick이 철인 삼종 경기를 마치고 수상 소감을 이렇게 썼습니다.

 

(빌 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노라”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