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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정말 평안하세요? (14) /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9. 2.

 

 

정말 평안하세요? (14)

 

(김성수 목사)

 

 

(롬 1:7)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얼마 전 뉴저지에 계신 어떤 인터넷 성도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 분은 이미 저희 교회 설교를 6년 전부터 듣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4대 째 예수를 믿고 있는,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쟁이라고 하셨는데, 말씀을 듣다보니 자신이 알고 있던 예수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저희 교회 설교 CD를 나누어 주기 시작하셨는데, 어떤 분이 몹시 반가워하시면서 자기도 서머나 교회 설교를 듣고 있다고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그리고 출간된 책도 모두 다 구입을 해서 열심히 읽고 있다고, 이렇게 동지를 만나니 너무 반갑다고 하시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도 너무 반가운 마음에 ‘어느 교회에 출석을 하시느냐’고 물었더니 교회 이름을 대시면서 자기가 그 교회 담임 목사라고 하시더랍니다. 이 분이 올바른 복음이 전해지는 교회를 오매불망 찾고 있던 터라 너무 반가운 마음에 교회 주소를 달라고 하셨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께서 대뜸 교회에는 오지 말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그 목사님 왈, 자기도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너무 소중한 것임을 알지만 교회에서 그렇게 설교하면 교인들이 하나도 버티지 못하고 다 나갈 것이기 때문에 설교는 그렇게 못한다고 하시더랍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자기 교회에 와도 실망만 할 테니까 CD나 열심히 들으시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럼 그런 설교를 듣고 예배당에 앉아있는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들은 다 변태’라고 하시더랍니다. 여러분은 졸지에 변태가 되셨네요.

 

그런데 며칠 전에 텍사스에 계신 인터넷 성도분이 이 메일을 보내주셨는데 그와 비슷한 상황이 거기에도 있었습니다. 그 분은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가게에서 하루 종일 저희 교회 설교를 틀어놓고 일을 하신다고 하는데, 어느 날 손님 한 분이 아주 반갑게 ‘댁도 서머나 교회 설교를 들으시냐고, 나도 열심히 듣고 있다고’말씀을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그 분이 목사님이셨다고 해요. 그 성도분이 너무 반가워서 CD도 드리고 책도 선물해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똑같은 말씀을 하시더래요. 자기도 목사지만 자기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그런 설교를 못하고 있다고, 그렇게 설교하면 교인들이 다 나갈 거라고, 그럼에도 매주 모여서 그런 말씀을 듣고 있는 서머나 교회 교인들이 별종이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러시면서 십자가 복음, 자기부인의 진리를 마음껏 설교할 수 있는 서머나 교회가 올바른 설교를 하고 싶어 하는 목사들의 로망이라고 하셨답니다.

 

그 메일을 받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진짜 변태들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좀 특이하긴 하더군요. 매일같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야단을 치고, 애써 내어놓은 선행도 죄일지 모르니까 다시 돌아보라고 쏘아 붙이고, 매일 죽어야 한다고 협박을 하고, 망하는 게 잘 가는 거라고 재수 없는 소리나 하고, 우리는 거름더미에 불과한 존재들이니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 같은 거 챙기지 말라고 자존심 상하는 말만 하고, 보지도 못한 예수의 십자가와 그 분의 보혈만을 의지하라고 뜬 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나와 앉아 있는 여러분들이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복음적 설교라는 것이 하나같이 다 마음을 후벼 파고, 면목 없게 만들고, 희망마저 차압하는 그런 소리잖아요? 평안한 마음으로 왔다가도 불편한 마음이 되어서 돌아 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은혜 충만하여 왔다가 분기탱천하여 돌아갈 때는 또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은 정말 왜 여기에 나와 앉아 계십니까? 제가 대신 답을 해 드릴게요. 여러분은 진짜 평강이 무엇이고 진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분들이라서 그래요.

 

내가 부인되고 십자가의 삶을 실제 화하여 사는 삶이 이 현실 속에서는 내 자존심이 상하고 고통스러운 삶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진정한 평강이 있고 그 속에 진정한 사랑과 용서가 있음을 알기에 이렇게 ‘나’라는 존재의 실체가 낱낱이 까 발려지는 현장에 기를 쓰고 나오시는 겁니다. 그렇죠? 그게 복음의 위력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성도들을 세상 속의 변태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도가 로마 교회의 평강을 빌어주고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모든 초대 교회가 다 그러했듯이 말할 수 없는 핍박 속에 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러한 이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평강이라는 단어는, 평화, 평안, 화평이라는 단어로도 번역이 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평강은 그러한 핍박의 현실, 고난의 현실, 내 마음에 안 드는 현실이 다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그런 종류의 평강이지요? 그렇다면 사도가 핍박 속의 로마교회에게 은혜와 평강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상황을 편한 상황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애써 편지까지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평강을 누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는 그러한 로마교회의 현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사도는 그러한 현실과 무관한 천상의 은혜와 천상의 평강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7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기원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사도는 그냥 은혜와 평강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폭풍속의 고요라 할까요. 폭풍이라는 외적 조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고요한 어떤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은혜와 평강이라는 인사말은 사도의 편지에 매번 등장하는 단골 인사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혜와 평강이 다른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볼까요.

 

(롬 1:7) “7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헬라어 원어로 보면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 뒤에 ‘아포’라는 전치사가 붙어 있습니다. ‘from’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니 여기 뿐 아니라 신약의 서신 서에 나오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인사말 뒤에는 모두 ‘아포’라는 전치사가 붙어 있고 그 뒤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은혜, 평강이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절대로 평강을 누릴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평강이라는 것은 자신의 현실이나 상황, 특정한 사건들에 의해 주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이 순교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느껴질 수 있는 그런 평강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인사말은 구약 성경 민수기 6장 말미에서 인용이 된 것입니다.

 

(민 6:25-26)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을 비롯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여 성도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제사장이 나실 인의 희생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빌어주는 장면입니다. 그 복의 내용이 은혜와 평강인 것입니다. 나실 인은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자들이었습니다. 그 나실 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예표 적 실물예시로 역사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수요예배 때 공부하고 있는 사사기에 삼손이라는 인물이 나오지요? 그때 가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지만 그 삼손이라는 인물이 바로 나실 인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예수의 모형으로 살았던 사람이고 죽는 순간에도 예수의 모형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마 2:23)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 이러라”

 

여기에서 나사렛 사람이 바로 나실 인이라고 했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번 설명해 드렸으니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은혜와 평강은 진정한 나실 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공짜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평강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는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강의 상태란 상황이나 현실이 변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 속에서도 변치 않는, 일관되고 완료된 어떤 것을 굳게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마 11:28~29)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바로 요 상태를 평강이라고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상황이나 현실이 변화되어서 얻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외적 현실은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완료하신 어떤 일이 믿어짐으로 말미암아 똑같은 상황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는 것을 평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으로 가면 그 평강이 어떻게 주어지게 되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요 20:19-21)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내가 너희들에게 평강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약속대로 십자가를 지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통과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평강을 주십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강조해서 평강을 주십니다. 그렇게 십자가와 부활을 근거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인 것입니다. 이사야 서로 가면 좀 더 분명해집니다.

 

(사 9:6)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예수는 바로 그 평강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그 평강이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는지도 분명하게 밝힙니다.

 

(사 53:5)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평강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외적 상황이나 외적 현실이 변해서 주어지는 평강이 아니라 예수님 쪽에 어떤 일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되어진 어떤 것이 평강입니다.

 

(골 1:20)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확실하지요? 예수님의 피가 화평의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평강을 선물 받은 제자들의 삶이 그 후로 편안하기만 했냐는 것입니다. 아니지요? 오히려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되고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히 11:35-38)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 하였느니라”

 

지금 이 부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 받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기술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은혜로 말미암는 평강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인데 그들의 삶이 편안해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은 세상 적 관점에서의 편안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삶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완료시켜 성도에게 무상으로 선물해 주시는 평강은 현실 상황을 호전시켜 주시거나 바꾸어 주시는 평강이 아니라 영적인 소망에 근거한 평강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성도들에게 주신다고 하셨던 그 평강이 세상이 말하는 평강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확실하게 천명해 주셨습니다.

 

 

(요 14:27)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그렇지요? 세상이 말하는 평강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평강은 완전히 다른 거란 말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누리는 평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5: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성도가 누리는 평강은 이 세상에서의 편안함이나 안락한 삶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 즉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사람, 그리고 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지를 모르는 사람, 그리고 그 원수 된 자들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만드신 중보자가 누구이시며, 그 분의 중보사역을 성취해낸 십자가를 모르는 이들은 진짜 평강이 무엇인지를 절대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면 어떠한 결국으로 끝이 나게 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화평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이 주는 평강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하늘의 선물’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 힘이 줄 수 있는 편안함과 안락함과 성공과 번영만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한 죄인들의 죄 성을 잘 아는 거짓 선지자들은 죄인들이 원하는 가짜 평강을 전해주며 그들의 환심을 사는, 악마적 루틴이 멈춰지지 않는 것입니다.

 

(렘 14:13-14) “13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보세요. 가짜 선지자들은 회중들의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에 대해서도 함구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지적하면 회중들이 불편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아야 그 자리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되는데 인간의 죄와 그 죄인들이 생산해 놓은 이 욕망의 배설물 같은 역사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함구를 하고 거짓 평강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왜 너희에게 칼이 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율법이나 잘 지키고 제사나 잘 지내면서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세상 적 평강을 누리라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난 그런 자들을 보낸 적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예배당에 오셔서 여러분이 듣기 좋은 소리를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거짓 선지자를 양산하는 아주 못된 마중물이 된단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자의 머리수는 곧 돈이요, 세력으로 환산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여 앉은 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성경 이야기, 복음 이야기, 예수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가 아니라, 돈 이야기, 성공 이야기, 편안한 삶 이야기, 신비한 기적 이야기, 치유 이야기, 뭐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 이야기 안 해주면 삐져서 다 나갑니다. 어차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화목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이가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요? 회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멋들어지게 해주면서 서로 공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 줄 테니까 너희들은 나의 꿈과 야망을 성취하는 데에 돈과 힘을 보태라.’ 이거 아닙니까? 그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 위에 덮쳐진 사망이라는 놈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모르는 자들의 무식한 오만인 것입니다. 그건 사기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사기행위를 이렇게 고발하십니다.

 

(렘 6:14)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 백성들의 상처를 수술하고 파헤쳐서 고칠 생각을 안 하고 그저 어루만지면서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심판 같은 것은 없어, 그리고 골치 아프게 죄의 문제 같은 거에 너무 신경 쓰지 마’하면서 가짜 평강과 가짜 위로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심상히 고친다는 말입니다. 대충 얼버무린다는 말입니다. 수술을 해야 할 환자의 환부를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괜찮다, 괜찮다’하고 위로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환자는 결국 죽습니다. 당시에는 위로가 되는듯하고 치료가 되는 듯 하지만 결국은 그러한 한시적 위로와 일시적 치료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기의 잔치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거침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사람들의 머리수를 늘리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왜요? 그 머리 수 하나하나가 다 자기의 힘과 세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도 없고 그들의 가죽과 털과 고기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아니 본인들도 죄가 무엇인지,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하나님과의 화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어줍지 않은 세상 적 위로만 늘어놓고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가 필요한 것들을 빨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교회가 설교자의 밥벌이 장소가 아니라면 교인들이 많이 모이건 적게 모이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설교자가 회중의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리고 그가 교회라는 것이 인간의 지혜나 화술이나 설득이나 열심에 의해 유지되고 확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라면, 십자가와 보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은혜, 죄와 의와 심판과 부활, 이외에 무슨 말을 거기에 더 보탤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평강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의 여러분의 욕망과 욕구가 채워지는 것에서 더 평강을 느끼시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을 실체로 감지하십니까? 그리고 그것이 너무 기뻐서 여러분의 주변 환경이 배설물처럼 느껴지시나요? 그렇게 여전히 죄 덩어리인 내 안에 천지의 창조주가 들어와 연합이 되어 있다는 그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세요? 아니면 투자해 놓은 땅이나 건물이나 주식의 값이 오를 때 더 안도의 한숨이 쉬어 지십니까? 주님은 그런 종류의 평강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그러한 가짜 평강을 깨러 오신 분입니다.

 

(눅 12:51-52)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5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 이로라”

 

보세요. 이 세상의 토지, 가옥, 재산, 가족, 관계 등으로 자신들의 평강을 추구하던 사람들에게 주님이 내려 오셔서 그것들과 분쟁을 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평강에로의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세상의 것들과 힘을 합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그런 종류의 세상 적 평강을 추구하는 자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런 것들이 왜 진짜 평강을 누리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의 철장으로 부수어 가시고 끊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고 의존하던 마음을 돌려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게 화목이란 말입니다. 호세아라는 남편만을 사랑해야 했던 창녀 고멜이 이 남자 저 남자 기웃거리다가 결국 남편에 의해 다시 찾아지게 되어 그 남편의 은혜 앞에 납작 엎드리게 되는 그 것이 구원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녀 고멜이 관심을 두고 추파를 던지던 대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들의 정체가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를 고멜 앞에 폭로시켜 버려야 합니다. 그 남자들의 정체가 어떻게 폭로가 되지요? 단물을 다 빨아 먹은 후에 노예 시장에 팔아버리는 자들로 폭로가 됩니다. 고멜이 다시 그 자들을 찾아 갈 마음을 먹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그러한 형국으로 흘러가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평강이 임한 자의 삶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상 것들과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내가 마음을 빼앗기던 모든 것들로부터 이별을 통보받게 되고 다 털려버린 탕자의 신세가 되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 전 사사기 강해 때 본 것처럼 기드온이 반석과 지팡이의 체험을 하고 난 뒤 그 자리에서 여호와 샬롬이라는 엄청난 선언을 하지 않습니까? 여호와로 말미암은 평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평강이 어떤 평강이었습니까? 하나님과 대면하고도 죽지 않는 평강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 안에 성령이 들어와 계시지요? 그런데 어떻게 죄인과 하나님이 그렇게 한 자리에 함께 있는데 죄인이 죽지 않고 살아 있지요? 그게 정말 기쁘시냐고요. 그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평강을 누리는 자란 말입니다. 거기에는 그 사람이 처한 현실이나 상황이나 소유의 많고 적음 같은 것들이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적 용어인 것이지 우리의 환경이나 소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기드온이 여호와 샬롬이라는 평강을 맛보고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고 그 단을 헐어버린 일입니다. 전쟁이 시작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평강은 이 세상 우상들과의 전쟁을 말하는 것이지 이 세상 힘들을 얻어내어 자기의 육적 자아의 욕망을 성취하고 그 육적 자아를 살찌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조금 가난하면 어떻고, 조금 못 배웠으면 어떻습니까? 조금 못 생기면 어떻고, 조금 덜 떨어지면 어떻습니까? 망하셨나요? 자식이 속을 썩입니까? 병에 걸리셨어요? 여러분의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취소가 되나요? 어쩌면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내 백성이 나와의 화평으로 이렇게 여전히 찬송을 그치지 않고 있다는 자랑을 하고 싶으셔서 여러분에게 그러한 현실들을 허락하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이 털린 것들은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가실 때 다 놓고 가야 할 것들 아닙니까? 여러분의 건강한 몸을 천국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나요? 그 몸은 썩어질 몸이라 절대 천국에 못 갖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몸에 병 좀 걸렸다고, 장애가 좀 있다고 뭐 그렇게 호들갑들을 떠십니까? 여러분의 재산과 소유, 집과 땅, 돈, 주식, 채권, 이런 것들이 천국에서 쓸모가 있나요? 쓸모없잖아요? 그래서 미리 털어 버리신다는데 왜 그렇게 불만이 많아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것들이 털려야 하나님에게만 집중 할 거 아닙니까? 그러한 하나님에로의 집중이 평강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그러한 식으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이라는 것의 가치를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이 아니라 세상 힘과의 화평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힘들과 사이좋게 사귀어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아담적 욕망을 이 땅 안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 날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이들의 진짜 모습 아닌가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복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자기는 다른 종류의 평안을 추구하고 있는데,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평강을 이야기하는 설교자가 못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사는 데에 별 불편함이 없는데, 그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서 이 세상 것들을 차압당하는 삶이 복된 삶이라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는 목사가 미워 죽겠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뺨을 맞고, 수염을 뽑히고, 돌로 맞고, 수모를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한 것입니다. 바울도 그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부 그 수모의 길을 통과했습니다. 아니, 참 복음을 전했던 이 땅의 수많은 설교자들이 다 그러한 수모와 모멸의 길을 통과했습니다.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들고 이 땅에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전부 사망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천국을 소개하시면서 ‘회개하라’고 외치셨습니다. 회개라는 말은 가던 길을 완전히 바꾸어 반대 방향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추구하고 열망하고 있는 그 길은 멸망의 길이니까 그 세상 힘을 향한 잘못된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피조물의 자리로 복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이 못내 불편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로, 자기들의 소유로, 얼마든지 평강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자기들의 행위를 가치 있게 여겼는지, 하나님 나라의 은혜 성을 설교하시던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 죽이려고 하다가, 안식일에 걸어야 할 걸음을 다 걸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못가고 예수님을 놓쳐버린 어이없는 장면을 연출할 정도였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주의에 묶여있던 유대인들에게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와 문둥병자였던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어 버리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마치 그림이 정지가 되고 예수님만 살아 움직이는 만화 같은 장면이 연출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손을 못 대고 예수님은 유유히 그들을 헤치고 도망을 가신다구요. 그것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못 끌고 간 겁니다. 몇 발짝만 더 가면 낭떠러지인데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안식일 날 걸을 수 있는 양을 다 걸어버린 거예요. 보세요.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의 가치를 얼마나 챙깁니까? 나같이 훌륭한 신앙인이 어떻게 안식일 날 일을 하냐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겨 평강을 찾는 겁니다. 그게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짜 평강의 실체인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편한 데로 자기의 행위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늘의 평강은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겨 버리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건 그 분과의 화목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불의의 관계에 있는 자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지 못하니까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나의 인생을 선으로 완성시키실 것인가’하는 안전함, 그것이 바로 평강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으로 가면 그것이 좀 더 확실하게 이해가 됩니다.

 

(계 1:4-5)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보시다시피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이라는 편지 서두에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오늘 본문의 은혜와 평강 앞에 ‘아포’라는 전치사가 붙어 있다는 것을 공부했지요? 여기에도 역시 ‘아포’라는 전치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모두 앞에 ‘아포’가 붙어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 즉 성부 하나님 앞에도 ‘아포’가 붙어 있고, 보좌 앞에 일곱 영, 즉 성령 앞에도 ‘아포’가 붙어있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도 ‘아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와 평강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합작품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중에서 평강이라는 단어의 이해에 아주 도움이 되는 어구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부터 평강이 주어졌다’는 대목입니다. 그 부분을 원어로 보면 ‘who is, who was, and who is to come’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을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로 모양만 바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요한의 편지가 일곱 교회들에 전해졌을 때, 구약에 능통했던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이 금방 출애굽기 속에 나타난 구원의 하나님을 떠올렸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 요한의 은혜와 평강의 기원을 대하면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어내셨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때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므로, 이러한 로마와 유대교의 공격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현실 초월적 사고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걸 평강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어구들은 사도가 구약의 선지 서를 인용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사 41:1-4) “1 섬들아 내 앞에 잠잠 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 하여 서로 변론하자 2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뇨 열국으로 그 앞에 굴복케 하며 그로 왕들을 치리하게 하되 그들로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같게 하매 3 그가 그들을 쫓아서 그 발로 가 보지 못한 길을 안전히 지났나니 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하나님께서 ‘누가 역사를 결정하였느냐’라고 물으심으로 당신이 바로 역사의 주인이시며 주체이심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러한 역사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어떠한 목적을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내시고 그 이스라엘의 자격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으신 채 그들을 애굽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면, 그리고 어떠한 목적 하에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보내셨다가 다시 꺼내 내시는 것임을 안다면, 성도들의 인생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 속에서 진행되어져 가는 것임을 왜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사 44:1-6) “1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 하리라 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궁극적인 참 복을 내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참 복을 주시기 위해 바벨론 유수나 애굽의 포로 생활 등을 허락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지고의 복을 선물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양육의 장으로 허락하신 인생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평강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 말미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난 처음이요 나중이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어제도 너희와 함께 있었고 지금도 너희와 관계하며, 나중에도 너희의 하늘 유업 상속을 위해 너희와 함께 있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신 언약을 한 번도 실패치 않으시고 이루신 분이시고, 이루고 계신 분이시고, 앞으로 이루실 분이시라는 것을 성경은 교회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그 어제의 하나님, 오늘의 하나님, 내일의 하나님에게서 나온 평강이 왜 너희들의 현실 상황에 따라 변개되고 소멸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그 마귀의 세력은 지금은 위풍당당해 보이지만 곧 지리멸렬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실을 보면서 실망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그 역사의 하나님을 보시라는 것입니다. 어제도 계셔서 그렇게 이스라엘을 보호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끌어 가시고 계시며 장차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확신하여 그 은혜로 말미암는 평강을 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아는 만큼 성도가 누릴 수 있는 평강도 크다는 것을 아십니까? 은혜를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은혜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에 그가 처한 모든 현실의 상황들을 그 은혜의 보자기 안으로 다 던져 넣어 버립니다. 사업이 좀 안 풀려도, 직장 문제가 좀 꼬여도, 다른 사람들처럼 근사한 명예나 재산이 없어도,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알기에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평강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마냥 기쁘기만 하고, 마냥 행복하기만 할 거라는 말이 아닙니다. 많이 아프고 많이 슬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타고 넘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안에 있을 때 성도는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음이고, 그것이 인내이며, 그것이 승리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 이 세상 것들을 자꾸 마음에서 빼앗기게 될 때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묵시 속에 완료된 평강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만 오롯하게 향해 있을 때 비로소 완성품으로 우리에게 감지되는 하늘의 평강,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바로 그 평강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정말 여러분이 이 평강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참 속상합니다. 예수님도 그런 심정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19:42)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자신들의 행위와 업적과 이 세상 힘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은 절대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강에 대해, 평화에 관한 일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의지하고 의존하던 이 세상 힘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면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도는 그러한 것들이 인생 속에서 치워져 갈 때 하나님과의 화목의 가치가 더욱 더 큰 것임을 알고 감사할 수 있는 자리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골 3:15)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여러분의 인생이 망하고, 지리멸렬해지고, 무장이 해제되고, 썩어지고, 병이 드는 것이 맞습니다. 그게 잘 가고 있는 성도의 삶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화목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평화롭게 하는 것이며, 안식과 기쁨을 주는 것임을 배우고 또 배우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이렇게 이 세상 누구도 듣기 싫어하는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도에 대해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멘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때 변태들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속 나그네들이 하늘의 주인들이 맞는 것처럼, 이 세상의 변태들이 하늘의 왕자와 공주라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다음 주에도 서머나의 변태들의 모임은 더욱 더 공고히 세워져 갈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의 말씀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겠습니다.

 

(엡 2:14-17)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15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16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17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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