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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방주와 무지개 그리고 덮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28.

 

 

방주와 무지개 그리고 덮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창 9:1-29)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2 땅에 사는 모든 짐승과, 공중에 나는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에 사는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할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다 너희 손에 맡긴다. 3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채소를 너희에게 먹을거리로 준 것 같이, 내가 이것들도 다 너희에게 준다. 4 그러나 고기를 먹을 때에, 피가 있는 채로 먹지는 말아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 5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그것이 짐승이면, 어떤 짐승이든지, 그것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겠다. 6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거기에서 번성하여라."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에게 직접 언약을 세운다. 10 너희와 함께 있는 살아 숨쉬는 모든 생물, 곧 너와 함께 방주에서 나온 새와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에게도, 내가 언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다.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및 너희와 함께 있는 숨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13 바로 무지개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가 될 것이다. 14 내가 구름을 일으켜서 땅을 덮을 때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나면, 15 나는, 너희와 숨쉬는 모든 짐승, 곧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날 때마다, 내가 그것을 보고, 나 하나님이,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 곧 땅 위에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세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땅 위의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언약의 표다."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 되었다. 19 이 세 사람이 노아의 아들인데, 이들에게서 인류가 나와서, 온 땅 위에 퍼져 나갔다. 20 ○노아는, 처음으로 밭을 가는 사람이 되어서, 포도나무를 심었다. 21 한 번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22 가나안의 조상 함이 그만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았다. 그는 바깥으로 나가서, 두 형들에게 알렸다. 23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지고 가서, 둘이서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다. 그들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 24 노아는 술에서 깨어난 뒤에,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고서, 25 이렇게 말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장 천한 종이 되어서, 저의 형제들을 섬길 것이다." 26 ○그는 또 말하였다. "셈의 주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셈은 가나안을 종으로 부릴 것이다. 27 하나님이 야벳을 크게 일으키셔서, 셈의 장막에서 살게 하시고, 가나안은 종으로 삼아서, 셈을 섬기게 하실 것이다." 28 ○홍수가 있은 뒤에도, 노아는 삼백오십 년을 더 살았다. 29 노아는 모두 구백오십 년을 살고 죽었다.”

 

 

우리는 이제 노아의 홍수 사건 중에서 결론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수차례에 걸쳐 설명해 드린 바대로 노아의 홍수 사건은 심판 속에서 꽃 피는 하나님의 은혜, ‘그러나’의 은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제를 한마디로 정리를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의 참된 안식을 위해 더러운 죄들과 그 죄의 세력들을 모두 깨끗이 청소를 하시고 오직 당신의 은혜로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선물하실 것임을 우리는 노아의 홍수 사건 속에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청소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올리시는 그 은혜의 수여(授與)방법이 하나님 자신의 투신(投身), 즉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의 익사(溺死)라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 노아의 홍수 심판의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막무가내의 혼인’을 한 것으로 제시를 한 것은 성경에서 혼인 관계가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기 때문에 그 언약의 왜곡은 곧 은혜에서의 유기(遺棄)가 되는 것이므로 홍수 심판의 근거로 혼인 관계의 왜곡이 심판 전에 전제(前提) 되었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성경에서의 혼인 관계나 혼인 언약이 담고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독수리가 날개로 자신의 새끼를 덮어 인도하는 것 같은, 신랑이 신부를 옷자락으로 덮어 자신의 신부를 정결케 하여 혼인 관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셔서, 다른 말로 삼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으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누리시는 하늘의 모든 것들을 함께 누리게 되는 은혜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해 그 하나님의 덮으시는 은혜, 불가항력(不可抗力)적 은혜가 무엇인지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홍수는 혼인관계의 왜곡으로 시작해서 은혜로 완성이 되는 참 혼인 잔치로 결론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었던 본문의 내용이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신랑이신 하나님과 더러운 세상과 함께 죽어야 마땅했으나 은혜로 정결함을 입게 된 노아와의 혼인잔치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방주에 넣어 심판에서 건져내신 노아와 그의 식구들에게 축복을 하십니다. 그리고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당신의 언약을 주십니다. 다시는 홍수로 인간들을 멸하시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혼인언약이 체결이 되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노아의 만취(滿醉)사건입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채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중 ‘함’이 노아의 벗은 모습을 보고 자기의 두 형제에게 고함으로 아비에게 저주를 받는 것으로 노아의 홍수 사건이 끝이 납니다. 도대체 이 이야기가 왜 노아의 홍수 사건의 결론 부분에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냥 하나님과 노아와의 혼인언약으로 끝이 나는 것이 더 깔끔할 것 같지 않으세요?

 

왜 심판 속에 꽃피는 은혜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노아의 홍수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일까요? 이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 전체를 요약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보시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 ‘포도주’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하’가 붙어 있습니다. 그 전에도 계속 마셔왔던 포도주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노아가 이미 포도주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노아는 홍수 이전의 패역한 세대와 방불한 상태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종종 술 취함을 패역한 세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기록을 합니다.

 

(엡 5:8)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눅 17:27‐28) “27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성경은 이렇게 패역한 세대의 특징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노아는 그 무시무시한 홍수를 경험하고도 다시 이전의 패역한 세대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만취(滿醉)사건은 홍수 이전 세대와 홍수 이후 세대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었다는 한 예시(例示)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떠한 협박이나 경고에도 절대 스스로 변화될 수 없이 완전한 타락을 해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노아의 아들 함이 본 것입니다. 그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노아는 함과 함의 자식 가나안을 저주했을까요? 아비가 자기 자식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다고 그 사랑하는 아들과 손자에게 종의 종이 될 것이라는 무서운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 결과 함의 후손인 가나안 사람들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시 노예로 살았고 역사적으로도 마케도니아, 로마 등의 노예로 살았으며 그 후손인 아프리카 흑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종의 종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잘못은 자기가 저지른 것이잖아요? 그런데 왜 자기 자식을 저주합니까?

 

그 구절에서 함이 노아의 벗은 몸, 즉 아담의 벌거벗은 부끄러움과 같은 그 노아의 벌거벗은 죄를 보았다는 데에 쓰인 단어가 ‘라아’입니다. 그 히브리어 ‘라아’는 단순히 쳐다보는 것을 넘어서 즐기며 조롱하며 보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어 ‘고하매’라는 단어는 와우 계속 형으로 노아의 아들 함이 노아의 벌거벗은 수치를 즐기며 보고 바로 이어서 형제들에게 그 아비의 부끄러움을 누설하고 설명해 준 것입니다. 그 ‘고하다’ ‘와약게드’라는 히브리어는 ‘배반하다, 재미로 해설하다, 누설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여기에 이 에피소드의 해석의 키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이 담고 있는 중심 메시지가 뭐라고 했지요? 심판 속에 꽃 피는 은혜의 구원입니다. 모두가 다 심판의 홍수에 빠져 죽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 몇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방주 속으로 들어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뭔가 다른 사람들보다 착하고 성실하고 열심을 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그들의 더러움을 덮어주신 것입니다. 그게 6장 8절의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구절이 가진 메시지였잖아요?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그러한 덮어줌의 은혜라는 것을 노아와 세 아들이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통해 재차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함과는 반대로 노아의 축복을 받은 셈과 야벳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비의 부끄러운 죄를 뒷걸음질 쳐 들어가 덮어준 것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함과 같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 이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담고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23절의 ‘덮다’라는 단어 ‘캇싸’는 단순히 ‘덮어서 가리다’라는 뜻도 있지만 ‘죄를 가리워서 용서하다’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시 32:1) “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표준새번역] “1 복되어라! 지은 죄 용서받고 허물을 벗은 그 사람!”

 

여기서 ‘가리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캇싸’입니다. 셈과 야벳은 바로 인간의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모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덮어줌의 은혜는 창세기 초반부터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장 처음 나타난 곳이 하나님께서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를 무죄한 짐승의 가죽으로 덮어주신 치마 사건입니다. 벌거벗은 노아와 벌거벗은 아담, 이 둘은 모두 부끄러운 죄인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그 부끄러움을 그냥 덮어주시고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그 덮어줌의 은혜는 출애굽 당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다시 나타납니다. 죽음의 사자가 장자들을 모두 죽이며 행진을 하고 있는데 무죄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덮인 집은 그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유월(越逾)절인 것입니다. 그 모습은 출애굽기 33장에 또 다른 그림으로 나타납니다.

 

(출 33:18‐23) “18 그 때에, 모세가 "저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19 주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20 주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21 주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22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23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죄인은 절대 하나님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세도 죄인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면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를 당신의 손으로 덮으시고 지나가심으로 그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구절을 읽어 드렸느냐 하면 이렇게 죄인의 부끄러움을 덮는 덮개는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 덮개가 성막 안에서는 시은(施恩) 좌(座) 위의 제물의 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실수와 실패를 상징하는 십계명 돌 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 항아리를 법궤 뚜껑이 덮어 버리고 그 위에 무죄하고 무흠한 제물의 피가 부어져 그 전체를 가리는 것을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 ‘시은(施恩) 좌(座)’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심판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덮개는 다시 골고다 언덕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부어져서 우리가 가려지고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그 분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시고 노아의 방주를 한번 떠 올려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고 그들을 저주의 비로부터 덮어주는 방주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가려져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덮어줌의 은혜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 덮어줌의 은혜를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롬 4:6‐8) “6 그와 같이 다윗도, 한 일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의로움을 인정하여 주시는 사람이 받을 복을 찬양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7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8 주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게 바로 노아의 방주가 상징하고 있던 그림이며 노아와 세 아들의 에피소드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나 열심으로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참선(參禪)이나 고행(苦行)이나 수도(修道)로도 이를 수 없는 곳이 구원의 문입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내어 놓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열심과 노력도 성경은 ‘더러운 옷’이라 합니다.

 

(사 64:6)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가 ‘의(義)’라고 내놓는 것조차도 모두 다 ‘더러운 옷’이라 합니다.

 

(사 59:5‐6)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은 전부 거미줄 같은 옷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옷으로는 자기를 가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어주시는 당신의 살과 피로 지으신 의의 흰옷을 입어야만 우리를 가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져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덮어줌의 은혜에서 유기된 자들은 어떻게 되나요?

 

(계 6:15‐17)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 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하나님께서 덮어줌의 은혜로 덮지 않은 자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산과 바위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눈으로부터 우리를 좀 가려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자리에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덮으심으로 우리가 그 진노의 멸망에서 건져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이 전체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보여주신 구름 속의 무지개에 모두 다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무지개라는 단어 ‘케쉐트’는 원래 ‘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활이 하늘을 겨누고 있는 모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수 후에도 인간의 죄가 여전히 악하기에 다시는 홍수로 인간들을 멸하시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그 말은 다소 알레고리적 해석이긴 하지만 하나님 당신께서 화살을 맞으시고 그의 백성들을 살려 주시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해(自害)사건, 하나님 당신의 투신(投身) 사건인 십자가에 의해서만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연결이 될 수 있음을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무지개는 구름과 빛의 합작품입니다. 그래서 그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났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나타내는 것이라 했지요? 그 하나님은 죄를 절대 묵과하실 수 없는 순결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는 홍수 심판의 무서운 하나님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 광야에서 보여 졌던 것처럼 구름기둥은 항상 불기둥을 그 안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 구름과 빛의 합작품이 바로 무지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뜨는 것입니다. 심판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어떤 한 무리를 구원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무지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로 당신 백성의 더러움을 다 가리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그 구름 속의 무지개를 통해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 13절로 가볼까요?

 

(창 9:13‐16)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잘 보시면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이기도 하시지만 그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두시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무지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악한 세상을 보실 때에는 노아 때와 마찬가지로 저주와 심판의 구름으로 다 쓸어 버리셔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무지개를 보시고 어떤 무리들에게서 그 저주와 심판의 물을 거두시겠다는 언약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무지개는 하나님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가려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지개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과 함께 모두 다 멸망시켜 버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그를 믿는 우리를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아의 홍수 자체의 목적은 인간들의 개선(改善)이나 변화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의 목적은 하나님의 투신과 자해로 거저 가리움을 받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자신을 죽이고 비워 원수들을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투신(投身)이야말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며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 무지개가 하늘나라, 하나님 보좌에도 등장하는 것입니다.

 

(계 4:2‐3) “2 나는 곧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보좌가 하나 놓여 있고, 그 보좌에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3 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모습이 벽옥이나 홍옥과 같았습니다. 그 보좌의 둘레에는 비취옥과 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겔 1:28) “28 그를 둘러싼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나타나는 무지개 같이 보였는데, 그것은 주의 영광이 나타난 모양과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 때에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내가 들었다.”

 

하나님의 현현이나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이렇게 무지개가 등장하는 것은 노아 홍수 사건에서의 하나님의 무지개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더욱 확고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며, 오래 참으시며,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시면서까지 원수들을 사랑해 주시는 온유한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나라에서는 모든 존재가 바로 그 십자가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삼아 살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지개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무지개,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 가시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게 될 것인지에 관해 좀 더 구체적인 암시가 본문 4절부터 6절까지에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창 9:4‐6) “4 그러나 고기를 먹을 때에, 피가 있는 채로 먹지는 말아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 5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그것이 짐승이면, 어떤 짐승이든지, 그것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겠다. 6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피를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피는 반드시 피로 갚아야 한다고 천명(闡明)하십니다. 이 말은 복수(復讎)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 백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생명에 상응하는 피가 흘려져야 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12장에도 똑같은 구절이 있지요?

 

(신 12:23) “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이러한 구절들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반드시 흘려져야 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담아 제사 제도가 주어졌던 것이고 그 제사는 참 제사인 십자가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히 9:12,22)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정확하지요? 노아의 홍수 사건에 왜 갑자기 피가 생명이라는 말씀이 나오는지 잘 아시겠지요? 심판 속에 꽃피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이 무지개로 나타난 것이며, 노아와 노아의 세 아들의 에피소드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이 덮여지는 것입니다.

 

(눅 22:20) “20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 잔을 그와 같이 하시고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갈라디아서에도 이 노아의 방주와 무지개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갈 1:4)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한 세대에서, 다른 말로 홍수에서 건지시기 위해 자기 몸에다가 화살을 쏜 것입니다. 좀 더 확실하게 로마서로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롬 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홍수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어 안고 자기가 대신 익사함으로 그 품어 안은 백성들을 살려내는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 보세요. 방주는 정확하게 우리를 품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자, 방주로 덮여있는 자들은 절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king james version으로 창세기를 다시 꼼꼼히 읽다가 참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 7:1)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한글 개역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령을 하시는 것으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king james version에는 ‘들어오라’로 번역이 되어 있지요? 사실 거기서 쓰인 히브리어 동사 ‘보’는 ‘들어가다’라는 뜻보다는 ‘들어오다’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일 뿐 아니라 문맥상으로 보더라도 ‘들어오다’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king james version에는 ‘come into the ark’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왜 중요한가하면 하나님께서 방주로 ‘들어오라’고 명령을 하셨다는 것은 그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직접 방주가 되셔서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을 품으시고 저주의 비를 대신 맞아 주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권고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보’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70인 역에서 헬라어 ‘엘코마이’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단어가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옵니다.

 

(계 22:17)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 단어는 주님께서도 즐겨 쓰시던 단어였습니다.

 

(마 11:28)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사야서에서도 ‘보’ ‘들어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사 1:18)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렇게 ‘내게로 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600번이 넘게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애절하게 죄인들에게 초청의 메시지를 띄우십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방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한 무리에게 은혜를 부어 당신의 은혜로 그들을 방주로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방주로 밀려들어가게 된 사람들은 반드시 그들의 순종의 행위가 동반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부으셨지만 노아를 반짝 들어서 방주에 억지로 밀어 넣으시지는 않으셨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자 노아에게서 순종의 몸짓이 나왔습니다. 노아가 자기 발로 자신의 식구들을 데리고 방주 속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어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아마 한순간에 노아가 지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멋진 방주를 지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노아를 위해서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정말 120년간 늘 기쁨과 행복 속에서 방주를 지었을까요? 여러분 신앙생활 하시는데 정말 늘 기쁨과 행복만 있던가요?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수많은 의심과 원망과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왜 비도 안 오는 세상에 이런 커다란 배를 지어야 할까? 이 배를 짓느라 나의 인생은 완전히 고단한 인생이 되어 버렸다. 왜 꼭 내가 이것을 지어야 하나? 사람들의 저 손가락질을 하나님은 왜 안 막아주실까?’등등 노아는 수많은 의심과 불평과 원망 속에서 방주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약한 노아를 통해 하나님은 방주를 완성해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그 분의 사랑과 은혜를 직접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자 노아는 서슴없이 방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자기 식구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방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의 집이나 전답이나 가구들이나 그가 자신을 위해 이 세상에서 아끼고 가꾸었을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걸 다 가지고 방주로 들어갈 수는 없었으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방주로 들어와 있는 자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쌓아두었던 모든 세상의 힘들을 놓아버리는 행위가 반드시 우리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러한 세상 정욕이나 그 정욕을 채워줄 세상의 힘이 아니라 의로움이나 경건함이나 거룩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온전한 순종이 우리에게서 나오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인생의 시간동안에 열심히 방주를 짓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불평과 원망과 한탄이 쏟아지기도 하지만 끝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아니 끝까지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끌고 가시니까요.

 

(딛 2:11‐13) “11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12 그 은총은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건함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13 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된 소망을 갖게 합니다.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합니다.”

 

방주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바로 이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방주 속에서 절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수가 없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자들, 다른 말로 예수 안에 들어간 자들은 그 예수가 사신 삶을 추구하며 그리로 향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주에는 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향키라든지 운전대라든지 돛이라든지 닻이 없습니다. 그냥 예수라는 방주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의 운명인 것입니다. 방주가 나중에 아라랏산에 도착했지요? 노아가 그 아라랏산을 목표로 삼아 방주를 운전했습니까? 아닙니다. 방주가 움직이는 대로 자신은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만일 노아가 방주가 가는 방향을 바꾸기 위해 이런 저런 꾀를 부렸다면 그 방주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었을까요? 아니요. 시간만 지체될 뿐 방주는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 성도는 예수가 움직이는 대로 좇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우리가 갖고 싶은 것, 우리가 먹고 싶은 것, 우리가 좇고 싶은 꿈, 그러한 세상의 비전과 야망을 모두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가 이끄는 곳으로 끌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자신의 야망을 좇아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시간만 지체되고 매만 많이 맞을 뿐 하나님은 절대 양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목적지까지 이끌고 가십니다.

 

(고후 5:17-19)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을 밟고 죽이는 그런 삶에서 돌이켜 자신을 비워 화평과 화목을 전하는 화목케 하는 직책을 부여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방주 안으로 초청이 되어 그 방주 속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 주는 은혜와 복의 통로로 사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분명 노아 한 사람에게 은혜를 부으셨고 그 만을 의로운 자, 완전한 자라 칭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방주 속으로는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가 들어갑니다.

 

(창 7:1)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그렇지요? 이 구절은 혹자(或者)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집안의 가장이 예수를 잘 믿으면 온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은 가족 단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의인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함께 방주에 오르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을까요? 분명 1절 말미에 보면 노아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런데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모두 구원을 받지요? 그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의인으로 말미암아 다수에게로 전파되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작은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의 온전한 의인에 의해 많은 의인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확장 또한 그러한 원리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받은 은혜와 복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 보내주는 삶을 살아서 그 은혜와 복이 다른 이들에게로 전파되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롬 5:18~19) “18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아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른 여러 이웃이 득을 보는 삶 말입니다. 의인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들이 함께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의인들의 화평케 하는 삶, 자기희생의 삶, 은혜와 복의 통로로서의 삶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고 그 삶을 가리켜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분명 우리 성도는 ‘영생을 얻었다’라고 과거완료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영생을 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지요? 그런데 영생은 단순히 긴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했지요? 영생이 뭡니까? 신적 생명을 영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신적 생명은 어떤 삶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삶이 어떤 삶인지 가르쳐 주시지도 않고 그저 우리에게 살아내라고 강요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럼 이 땅에서 완벽하게 그 하나님 나라의 삶, 신적 생명, 영생을 살다가 가신 분이 있다는 말인데 그 분이 누구일까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종국에 살게 될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삶을 완벽하게 살다가 가셨지요?

 

(요 12:49)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그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만 했고 시키시는 말씀만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환언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며 바로 그 삶이 영생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좇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도가 좇아 살아야 할 그 하나님의 말씀, 율법의 마침을 사랑이라 합니다.

 

(롬 13:8‐10) “8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9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럼 이제 영생의 정의가 조금 더 좁혀졌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영생을 사는 길은 예수께서 그렇게 사신 것처럼 아버지가 내 안에서 나에게 시키시는 것을 모두 행하는 것인데 성경은 그러한 삶을 한 마디로 ‘나가 아닌 남을 사랑하는 삶’이라 합니다.

 

(요일 4:7‐8)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보시다시피 성경은 하나님께 속한 자,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자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고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런 십자가의 사랑을 속성으로 가지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을 좇아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아는 자, 영생을 소유한 자, 영생을 사는 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가리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도 정의를 하는 것입니다.

 

(요 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방주 속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흘려보내어 그들을 방주로 초청하는 자들로서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삶은 나가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며, 그 삶이 바로 영생이고, 그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인 것입니다.

 

(요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런데 그러한 십자가의 삶은 이 세상의 힘의 원리와 정 반대되는 삶이기에 이 세상에서는 고난의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세요. 예수님은 죄인들과 약한 자들, 병든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인도 약한 자리, 낮은 자리로 열심히 내려가 다른 이들을 섬기고, 사랑해 주며, 참아주고, 용서해 주는 사람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렇게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결국 그 분을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십자가의 삶에서 쏟아 부어진 은혜와 복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지게 되었고 이렇게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원수들의 생명으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게 영생입니다. 그 영생의 삶은, 다른 말로 원수를 사랑하는 삶은 이 땅에서는 고난의 모습으로 고통의 모습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정말 그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 속에는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무엇을 주셨지요? 내게 있는 평안과 기쁨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곧 잡히셔서 원수들에 의해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 평안과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요 15:8-14)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나의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나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나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

 

천국에서는 우리 주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전부 그렇게 나가 아닌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섬기고 사랑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움직여지는 나라. 천국(天國) 여러분,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노아의 아들 함처럼 다른 이들의 부족함이나 실수나 실패를 즐기며 조롱하듯 바라보아서도 안 되고 그러한 실수나 실패나 부족함을 남들에게 재미삼아 설명하고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주 받을 죄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우리가 남들보다 뭐가 특별하게 잘 나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덮으심에 의해 우리는 정결하다 여김을 받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신부가 된 것이라는 것을 진정 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의 실수나 실패를 절대 조롱할 수 없고 고소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를 아직 깊이 이해하지를 못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은혜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향하여 정죄를 화살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덮어주고 용서해 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잠 17:9) “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그리고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언젠가 우리 성도들이 모두 방주에 들어가게 되는 날 그 방주의 문이 밖에서 닫히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누구도 그 문을 열고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문이 닫힌 뒤에 아무리 두드려도 그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오직 그 문의 열쇠는 주님만이 갖고 계십니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 분만이 그 문을 열고 닫으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지금 말씀하십니다. ‘방주로 들어오라’ ‘come into the ark' 지금이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지금 방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방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도 당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방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힘을 초개처럼 버리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렇게 진짜 방주로 한발 한발 들어가십시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그 덮으심의 은혜와 무지개의 의미와 방주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지금부터 우리 예수님이 살다 가신 그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살아내십시다. 거기에만 진정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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