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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나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27.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나

 

(김성수 목사)

 

 

(엡 2:11-16)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 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2장 후반부 전체를 교회론 적으로 접근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11절부터 22절까지를 몇 부분으로 끊어서 구절구절 조금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오늘 공부할 부분을 잘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생겼으며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택하셨는가에 대해서 아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 창세기 12장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 곳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만들어 팔던 그 아비 데라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우상을 만들어 팔던 데라는 아브라함과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나섰습니다. 그리고 하란에서 머물다가 데라는 205세에 죽었고 그 때 아브라함이 나이가 75세였습니다. 이건 사족입니다만 혹시 여러분이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 드리고 넘어 가겠습니다. 11장26절에 보면 데라가 아브라함을 70에 낳았다고 나와 있거든요?

 

(창 11:26)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창 11:32) “32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 12:4)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계산이 안 맞지요? 70에 낳은 아들이 75세가 되었으면 아버지는 145세가 되어야 지요? 그런데 데라는 205세에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에서 나왔습니다.

 

(행 7:4)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계산이 안 맞습니다. 이 말씀은 26절을 잘 풀어야 합니다. 26절 말씀에 데라가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한 해에 세 명을 낳습니까? 그 표현은 데라가 아브라함을 70세에 낳았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의 표현 방법으로 데라가 70세부터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구절은 데라가 70세부터 아들을 낳기 시작해서 13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와 있습니다. 그게 또 걸리지요? 그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나이 순서대로 이름을 쓰지 않고 중요한 사람부터 이름을 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셈, 함, 야벳 도 원래 ‘함’이 막내인데 셈, 함, 야벳으로 기록하지요? 자, 사족은 거기까지 하고요. 아무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 12:2-3)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리고 실제로 이삭이 태어나고 야곱이 태어나고 야곱의 열두 아들이 태어나면서 12지파가 준비되고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가게 되고 거기서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아이를 낳아 200만이 넘는 하나의 민족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후손들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그 나라를 택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한 나라를 택하셨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를 설명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디스플레이 모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boundary를 만드시고 그들을 모델로 써서 “하나님의 백성, 교회는 조건 없이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완성해 가신다.“”그리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이스라엘, 교회라는 울타리에 속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즉, ”창세전에 택해져서 교회라는 boundary안에 들어 있지 않은 자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표식으로 할례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고, 그렇게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품인 율법을 잘 지켜 행복하고 기쁘게 하늘의 풍요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며 그 법을 지키지 못하면 심판과 저주에 던져지게 된다.”는 구속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구속사의 모델로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복음을 주시고 그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복음을 받은 자들의 모델로 그 복음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해 줘야 하는 대 제사장 나라로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2-3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너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되고 너를 인해 다른 이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15장에서 “하나님을 믿었다“고 나오고 하나님은 믿은 그를 의롭다 칭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칭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내용이 뭔지 한번 보자고요.

 

(갈 3:6-9)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내용에 “아브라함이 복을 받아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내용과 아울러“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까지 들어 있습니다. 복음에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복이 나로부터 다른 이에게 전파된다는 것”까지가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이 나오지 않아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욕이나 먹는 삶을 살고 있거나 여러분 안에서 그 구원에 대한 감격이 솟구쳐 올라 그것이 전도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복음과 하등의 상관이 없는 분일지도 모릅니다. 분명 복음은 우리로 이방이 복을 받게 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이 무엇인지 히브리서로 가서 한번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히 11:8-16)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자기의 본향을 나와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을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살다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사모했다는 것은 처음 불림을 받은 자기로부터 정말 수많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말미암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까지가 믿음입니다. 여러분도 정말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죽어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믿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면 정말 다른 사람들이 예수 믿고 싶어 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거나,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는 것은 구원받은 이후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option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서 나와야 하는 필연적인 것들입니다.

 

(고후 5:18)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스라엘은 이렇게 자기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족속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 분의 율법을 전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다른 민족은 개 같은 이방인이라고 여겼습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모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율법도 제사도 할례도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하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 3:23-26)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율법은 우리에게 믿음이 오기까지 믿음의 때까지, 오히려 우리를 가둬 두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 율법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도저히 불가능한 자들이니 예수께로 가야한다”고 외치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몽학 선생이라 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만이 구원을 얻을 자격이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너희들은 죄의 종이다, 회개해라” 하고 말씀하시니까 그들이 내가 왜 “회개해야 하나?“ 하고 되레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 8:33)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참 의미를 오해했기 때문에 진짜 이스라엘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러 오신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말라기의 진술대로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나뭇잎만 무성한 외식을 만들어 냈고 십일조를 낸다고 하면서 저는 것, 병든 것, 못 쓸것들만 가져와서 눈먼 희생을 했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세 등등 했을 만큼 “이스라엘”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아무 유익이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종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19세기 아일랜드 정치가인 다니엘 오코넬이라는 사람이 영국의 대정치가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걸어서 하원에 탄핵안을 제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디즈레일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난 유대인이요. 바로 이 존경하는 신사 오코넬의 조상이 아일랜드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을 때 내 조상들은 솔로몬의 전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였고 세상을 향하여 율법과 종교를 주고 있었소.”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엉터리 우상 숭배에 빠져 있을 때에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의 성품인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롬 3:1-2)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 9:4-5) "4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5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면서,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그런데도 메시야를 못 박아 죽여 버렸지요? 결과야 어찌 되었든 그들은 유리한 고지에 올라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너희는 그렇게 실패한 유대인들한테 무 할례 당이라 조롱을 받던 자들이었고 구약 시대 내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이었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자들이었다. 너희들이 어떤 지경에서 구원을 받고 “교회”가 되었는지 잊지 말아라“ 하고 확인시키는 대목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1절,12절에서 이방인들의 구원받기 전의 처지에 대해 기술을 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그러나 이젠”의 부분을 기술하는 것입니다.

 

(엡 2:11)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러므로 생각하라“ 하고 시작이 됩니다. ”생각하라”는 “므네모뉴오” “기억하라“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러므로 너희는 기억하라”라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 10절까지 ”인간은 얼마나 죄인이었으며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크신 은혜와 능력으로 그 죄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이루셨음을 설명하고 11절에서 이방인들이었던 에베소 교회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기억하라” 라고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위의 내용들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기술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너희는 육체로 이방인이었고, 너희는 유대인들에게 “무 할례 당이라고 조롱을 받던 이방인 들이었다” 그리고 너희는 “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그리고 너희는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너희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도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 들이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러나 이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가까워졌으니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냐?“ 이런 말입니다. 그러면 육체로 이방인이었던 자들은 어떤 자들이었는가? 11절부터 기술된 내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무 할례 당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할례를 받은 자들이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할례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던 무지하고 가련한 자들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하고 있었지만 할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었지요? 비록 몰랐었지만 그들은 그래도 하나님으로부터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은 받았었다는 말입니다.

 

할례라는 것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육체에다가 할례를 받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이 바로 진짜 할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의 의미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육신에다가 행하는 자기들의 전통이나 형식을 신봉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표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무 할례 당이라고 조롱하듯 부른 것입니다. 11절에 “손으로 육체에 행한” 이라는 말은 “사륵스 케이로 포이에토스“입니다. ‘사륵스’는 “육신“”옛 몸“”죄 된 몸“라고 했지요? 케이로 포이에토스는 ”손으로 만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옛 몸에 인간의 전통이나 형식을 따라 인간의 손으로 행한” 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엉터리 할례를 행한 자들이 자기들은 “할례 당”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빌 3:3)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

 

예수를 믿는 자들이 참 할례 당이지 너희들은 진짜 할례 당이 아니라고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할례 당이라는 단어를 인용해서 풍자하는 것입니다.

 

(롬 2:28-29) “28 대저 표면적 유대 인이 유대 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표준새번역] “28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29 오히려 속이 유대 사람인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육신의 껍데기에다가 형식적으로 전통에 따라서 하는 행위가 할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 구약의 예레미야서에 하나님께서 마음에 받은 할례가 진짜라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셨는데도 유대인들은 그 선민사상에서 못 벗어났습니다.

 

(렘 9:25-26) “25 "나 주의 말이다. 그 날이 이르면, 몸에만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내가 모두 벌을 내리겠다. 26 이집트와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관자놀이의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광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도 내가 벌을 내리겠다. 이 모든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던 이방인이던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 이외에는 모두 벌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받는 진짜 할례가 뭐길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롬 2:25-27) “25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은 것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받은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26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김받지 않겠습니까? 27 그리고 본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율법의 조문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은 사람이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정죄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손으로 양피를 많이 베었다고 해도 그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할례를 받는 것이다“라고 바울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로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 말씀하시는 마음의 할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내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 17:9-14)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 하였음이니라”

 

14절에 “내 언약을 배반하였기에 내가 저주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언약이 어떤 언약입니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창 15:11-17)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뭇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라고 언약을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 홀로 지나가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쪼개지실 지라도 언약은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저주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바로 다음 장인 16장에서 이스마엘을 낳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언약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쪼개지심으로 하늘의 뭇별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17장에 가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할례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홀로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 양피를 쪼개야 합니까? 왜 할례를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자신이 쪼개진 그 저주의 자리에 “너도 함께 있었다는 것”을 네 몸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쪼개지신 자리에 우리도 연합되어 함께 있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바로 할례인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나는 저주받아 죽은 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세례는 뭐겠습니까? 똑 같아요. “나는 저주의 물에 빠져 죽은 자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고전 10:1-2)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세례를 모세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으로 비유합니다. 그 장면은 출애굽기 14장에 나오지요?

 

(출 14:21)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

 

성경에서 “물, 바다“하면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저주“를 상징한다고 했지요? 왜 하나님은 많은 길을 놔두시고 굳이 홍해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을 까요? 모세는 한번 가봤던 길이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홍해를 굳이 건너게 하십니까? 바로 그 저주의 쪼개짐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 저주의 바다가 쪼개집니다. 그 쪼개짐 사이로 누가 지나갑니까? 모세가 지나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물에 빠져 죽은 모세 안에 들어가 다 같이 쪼개진 저주의 바다에 빠져 죽고 다시 살아 올라오는 것을 우리는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셨을 때 하나님은 그 품안에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어 안고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저주받아 죽은 자라는 표시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는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분과 연합되어 십자가에서 쪼개져서 죽고 다시 살아난 거듭난 자들의 믿음을 우리는 할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님 안에서 율법을 다 지킨 자들로 여겨지는 의의 옷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다 지킨 자들이 되는 것이고 아까 읽었던 로마서 2:25절 이하의 말씀처럼 할례를 받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롬 2:25-27) “25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은 것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받은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26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김 받지 않겠습니까?”

 

(골 2:11-12)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갈 6:15) “15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표준새번역] “15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할례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오해하여 이방인들을 가리켜 “무 할례 당” “할례도 못 받은 놈들“이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 할례가 뭔지 조차 몰랐던 사람들입니다. 더 한심한 거죠?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는 그러한 육체에 손으로 행하는 할례조차도 몰랐던 자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오해하고 있었지만 할례를 행하던 자들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너희는 그나마도 모르고 있었던 자들 아니냐? 두 번째로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과 밖에 있는 자들의 차이가 뭡니까? 천국과 지옥이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롬 16:7) “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자기의 동역 자들을 소개하면서 전부 “그리스도 안에 있는”이라고 시작합니다. 먼저 들어갈 수도 있고 나중에 들어 갈 수도 있는 “차이”는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갈 3:26)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고후 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전 15:22)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했지요? 이방인들은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들(제사, 율법, 할례)을 알지도 못했고 접하지도 못했던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 안에서 받아야 하는 구원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 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신교 선교사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이 100년 전입니다. 그 전에는 어땠나요? 우리 조상들이 예수를 알았나요? 우리 조상들이 율법을 알았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예배를 알았나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예수를 알 수 있는 여러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인 너희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것이냐“ 하고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외인이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야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택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되기 전인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나야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물음에 “오직 구원은 유대인에게서만 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4:20-22)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구원이 유대인에게서만 난다는 것은 단순히 민족적 차별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비록 오해하고 실패하기는 했지만 예수를 가리키는 여러 가지 율법이나 제사 할례 등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구원자 예수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BC722년에 앗수르에 잡혀갔다 온 뒤 남 유대에게 홀대를 받자 그리심 산에다가 자기들 마음대로 율법에 근거하지 않은 성전을 지어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 주신 그 율법과 제사 즉, 예수 그리스도로만 오는 것이지 너희들 마음대로 하는 열심에 근거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어느 종교 , 인간의 이상을 기초한 어느 종교도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이 뭐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택하셔서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놓으셨기 때문에 구원은 유대인에게서만 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그러한 예를 세 가지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나오미가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어 모압에 갔다가 아들들이 다 죽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려 할 때 며느리 룻이 좇아가려 했습니다. 나오미는 룻더러 모압에 남아 있으라고 했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가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룻 1:16)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은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가서 하나님을 진실로 경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말 전에 무슨 말을 합니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 여인인 룻이 유대인이 되기로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은 문둥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유대인 소녀가 노예로 잡혀와 있었습니다. 그 소녀로부터 엘리사를 소개받고 나아만이 유대 땅으로 갑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온 후 문둥병이 낫자 노새 두 마리에 유대 땅의 흙을 실어 갑니다.

 

(왕하 5:17) “17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왜냐하면)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히브리어 “키”가 생략(왜냐하면) 흙을 좀 주세요. “왜냐하면” 하고 이유를 밝힙니다. 왜 흙을 실어 갔습니까? 이제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결심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하여 유대의 흙을 실어 간 것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 그 흙을 바닥에 붓고 그 위에 앉아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해 유대의 흙에 앉아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에스더서에 보면 바사의 대신인 하만이 모르드개를 비롯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장대를 세웠는데 하만이 거기에 달려 죽습니다. 그 때 바사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합니다. 그것을 에스더서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에 8:17) “17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바사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로 한 것을 성경은 바사 사람들이 “유다인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구약의 배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야 너희는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라“ 고 사도 바울은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이방인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음을 기억하라“ 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수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그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전부 약속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히 11:31-33)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롬 9:4)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하나님은 맹세하여 그 약속을 지켜 나가십니다.

 

(히 6:13-18)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에베소 사람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그 약속이 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지금 그 유대인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어 있느냐? “감사하지 않니?” 하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가끔 만일 제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을 해 봅니다. 생각하기도 싫지요.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나를 그토록 사랑해 주시는 그 하나님이 제 안에 계시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어느덧 그 문제는 사라지고 하나님과 저만 남습니다.

 

우리 청년 중에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에 계신 어머님께서 더 어려우시지요. 그런데 그 어머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목사님, 제가 우리 딸하고 전화만 하면 너무 힘이 납니다.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우리 딸이 “엄마, 하나님이 계신데 왜 걱정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는 분이시니까, 이 어려움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 일거야, 엄마 걱정하지 마.“ 하고 굳건한 반석 같은 신앙 위에서 어머니를 격려 해주더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라고 왜 안 힘들겠어요?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이 계신 겁니다. 그래서 그 폭풍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자들의 삶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당장 목매달지요. 아파트에서 뛰어내리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있는 자들은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거든요. 맹세하여 약속해 주셨거든요.

 

(딤후 1:12) “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그러니까 여러분, 힘을 내세요. 우리가 아까 부른 찬양을 기억하십니까?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왜 견디다 못 해 쓰러질 때까지 놔두십니까? 필요하니까요. 그렇지만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이 여러분을 멸망의 자리로 끌고 가시겠어요? 결론을 짓겠습니다.

 

(엡 2:11-12) “11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 2:13) “13 (그러나)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But now in Christ Jesus you who once were far away have been brought near through the blood of Christ.

 

“누니 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우리가 지성소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면 여러분의 오늘도 그 하나님께 맡겨 볼 만 하지 않으세요?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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