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옷을 입게 된 자들의 삶
(김성수 목사)
(창 2:25‐3:21) “25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3:1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4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5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8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9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11 하나님이 물으시기를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시니, 12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13 주 하나님이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14 ○주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네가 저주를 받아, 사는 동안 평생토록 배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16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17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18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20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21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운 자들이 되어버린 인간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그 부끄러움을 가리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내시는지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점진적으로 기록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살펴봄으로 해서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그 작업을 통해 성경뿐만 아니라 이 인류의 역사까지도 모두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의 상호 관계에서 도출되는 십자가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한 절 한 절 주해를 하면서 어떻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십자가를 담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2장25절을 보시면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몰랐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한 몸이었기 때문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말은 타락을 하기 전의 인간은 비록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는 있었지만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의’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제가 전에 성경이 말하는 ‘의’라는 개념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나세요? 이 땅에 존재하는 네페쉬는 반드시 관계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데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상태를 ‘의’라 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의인’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과 의뢰와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잘 살아내는 자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질서에 의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도 자연을 잘 다스리고 정복하는 자이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네가 나이고 내가 너’라는 일체의 관계를 유지하는 자이며,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질서를 벗어나서 해(害)를 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영화로운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생기(생명의 기운)’ ‘니스마트 하임’에 의해 ‘의’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의로운 모습은 비록 타락의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었지만 ‘온전한 의’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래서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 한시적이지만 의로운 관계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이 없었던 것이고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어 가시자 그 모든 관계들이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 상태를 ‘불의(不義)’라고 합니다. 그렇게 불의 한 상태가 되자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 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연합의 상태가 깨어져 버리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갖게 되었고 서로를 향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부끄러움을 가리는 작업에 착수를 했습니다.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치부를 가린 것입니다. 본문 7절로 가보겠습니다.
(창3:7‐10)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무화과나무 잎은 인간이 자신들의 공허를 메우고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역사 속에서 토해 낸 ‘과학, 문명, 철학, 종교, 학문, 교육 등등’의 인간 쪽에서의 행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잎의 특징은 잠깐이면 말라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자신들의 공허함을 메우고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 낸 그런 모든 것들은 한시적으로는 만족감과 안전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절대로 인간의 공허함을 온전히 메워 주거나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는 그보다 더 무서운 불의의 결과가 또 한 가지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게 불의 하게 되어버린 자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방법으로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들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그 공격 대상에는 창조주이신 하나님도 포함이 됩니다. 본문 11절로 가보겠습니다.
(창 3:11‐12)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죄를 지은 아담이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누구를 공격합니까? 하나님과 여자를 공격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티끌인 인간은 자신이 왕이 되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하나님을 포함한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공격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기, 질투, 분열, 전쟁, 험담 이런 것들이 바로 타락의 결과물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타락한 죄인들의 속성이 백일하에 폭로된 곳이 바로 십자가이고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걸핏하면 남을 욕하고 비난하고 시기하고 험담하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 스스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주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궁정 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르가 모차르트가 혜성같이 나타나서 자신보다 더 각광을 받자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질투를 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자기 자신이 여전히 우주의 중심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타락의 본능은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언제든지 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험담하고 분열을 획책하는 사람들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마음속으로 살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긴 역사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며 인간들의 열심과 노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공허함과 부끄러움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힘으로 채워지거나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워지고 가려 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오성과 인격에 새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본문 말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중을 깨달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3:21)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만들어 입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걷어 버리시고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가죽옷을 입히심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셨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행위 언약 하에서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버린 당신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의 옷을 지어 입히시는 모습입니다.
아울러 이 구절 속에는 하나님께서 티끌에 불과한 인간들을 어떻게 영화로운 당신의 백성들로 만드실 것인가에 대한 방법도 힌트 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그 분을 거역한 티끌인 인간이 부끄러움이 가려진 영화로운 그 분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무죄한 제물이 대신 죽고 그 제물의 공로로 옷을 입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 21절에서 이미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져서 죽으신 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대신 안고 죽으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우리의 부끄러움이 죽고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우리는 짐승의 가죽옷 정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의의 흰옷을 입고 당신의 백성으로 새롭게 탄생되는 것입니다. 누드스트들이 이 창세기를 증거로 대면서 모든 인간이 옷을 벗고 사는 것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사는 삶이라고 주장을 합니다만 그들의 주장은 창세기만 알고 요한계시록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옷을 벗고 사는 아담과 하와를 최종 목적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옷을 벗고 사는 아담과 하와를 통해, 생기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의 '한시적 의‘를 설명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한시적인 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원한 의의 흰옷을 입은 당신의 백성을 탄생시키시는 것을 목적으로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한테 전해 주세요. 얼른 옷 사서 입으라고. 이렇게 오늘 본문 안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구속사가 모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오늘 본문의 내용 전체는 3장 15절에 완벽하게 요약되어 담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 15절을 이해하시면 오늘 본문 전체의 이해가 아주 용이할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창 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를 하십니다.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도 원수가 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저주입니다. 왜 이 구절이 원시(原始)복음, 최초복음이라 불리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 번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간단하게 복습을 하고 넘어가지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뱀은 사단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뱀을 ‘사단‘이라고 부릅니다.
(계 12:9)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기니라”
(계 20:2)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옛 뱀이라고 번역이 된 ‘오핀’이라는 단어 앞에 ‘톤’이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그 옛 뱀‘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창세기의 그 뱀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뱀이 사단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증명이 되었지요? 그런데 그 사단은 하나님의 저주로 여자와 원수가 됩니다. 여자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요한계시록 공부할 때 배웠지요?
(계 12:5‐6)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 천 이 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여자가 낳은 아이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이입니다. 그 철장으로 다스릴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편 2편에 나오지요?
(시 2:6‐9)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러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여자가 누구입니까? 그 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원인을 규명하면 되겠지요? 그 분을 이 땅에 오시게 한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게 된 동인이 될 테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왜 이 땅에 오셨나요?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들의 필요에 의해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예수를 낳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창세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총칭하는 상징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들을 낳은 여자가 광야에서 1260일 동안 하나님께 양육을 받는다는 부연 설명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 1260일이 어떠한 기간인지는 요한 계시록을 공부할 때 다니엘서 9장을 해석하면서 여러 번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한때 두 때 반 때, 3년 반, 마흔 두 달, 천 이 백 육십 일은 모두 같은 기간입니다. 그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로 말미암아 이제 더 이상 성전제사와 제물이 없어지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로마의 타이터스를 들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신 후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이 세상 끝 날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천 이 백 육십일은 교회가 탄생하여 그들이 신앙의 여정 동안 겪어야 할 광야 인생길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숫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일 천 이 백 육십일 동안 하나님께 양육을 받는 여자는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는 단순히 하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여자로 지칭되는 교회에 의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실제로도 여자(마리아)의 아들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될 것이라 말씀하심으로 사단과 교회가 원수가 될 것임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한 패거리가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버린 사단과 여자에게 그들이 서로 원수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심으로 둘 중 하나는 하나님 편으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당신의 편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일까요?
(계 20:10) “10 그들을 미혹하던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로 던져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뱀의 운명은 영원한 불 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은 누구를 당신의 편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까? ‘여자’지요? 여자는 누구라고요?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티끌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그 티끌의 자리에서 끌어올리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표본인 뱀과 그의 후손들의 삶은 하나님과 원수로 사는 삶이며 패망의 삶이라는 것을 경고하시고 주지시키시기 위해 뱀의 후손들도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와 원수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이 누구입니까?
(요 8:44) “44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인 악마에게서 났고, 또 그 아버지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또 그는 진리 편에 서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여기 보시면 마귀의 후손이 누구예요? 사단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마저도 타고 넘는 모든 자들을 마귀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절대 상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어 사는 자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라 부르심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반드시 그 원수의 자리에서 건져내시겠다는 의지를 창세기 3장 15절에서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어떠한 방법으로 그렇게 하시지요? 본문에 나오지요? 뱀은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인의 후손은 그 뱀의 머리를 밟아 버리시는 방법으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뱀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사건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면 자신이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그 것은 비단 마귀의 생각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고 싶어 하는 모든 죄인들의 어리석음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이미 인류는 그 곳에서 하나님을 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을 죄인이라 몰아 부치는 그 빛이신 예수만 죽여 버리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책망하고 지옥을 설교하는 목사는 교인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그저 잘 한다 잘 한다 해주면 좋아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구약의 여러 선지자를 통해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외치는 자들은 전부 가짜라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성도는 죽는 날까지 죄에 대해 책망을 받고 지옥에 대한 경고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과 자기 자신의 불가능함을 잊어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그렇게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었지만 주님은 그 십자가에서 마귀의 머리를 깨 버리셨습니다. 마귀는 십자가에서 이미 패배를 한 것입니다.
(히 2:14) “14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예수님의 죽으심인 십자가가 마귀를 없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뱀의 머리를 밟으신 것이지요. 그건 정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사들도 그 십자가의 비밀을 몰라서 알고 싶어 안달을 했다고 기술을 합니다.
(벧전 1:2) “2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미리 아심을 따라 여러분을 택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주셨으므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으며, 그의 피로 정결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에 그 천사도 알고 싶어 하던 비밀이 이미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말씀을 들으시면서 자꾸 이 역사를 마귀와 하나님의 전쟁으로 오해를 하실 까봐 걱정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전쟁 상대가 안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마귀의 머리를 밟으셨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느냐?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 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마귀라는 이름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귀 적 발상과 시도들을 하나님의 죽으심으로, 즉 은혜로 소멸시키시고 그들을 당신만을 바라보며 당신만을 사랑하며 당신만을 의뢰하는 당신의 자녀로 만들어 내실 것임을 역사 속에서 그림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마귀나 그의 세력들을 소품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희생으로 그 원수의 자리에서 건져진 자들의 삶은 어떠한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까? 마귀와 마귀의 후손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리에서 떠나 열심히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며 자신의 욕심을 구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라면 거기서 건져져 가죽옷을 입은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지요? 그와 반대의 삶을 살아야지요. 하나님께서 내 위에 절대 상위자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행 2:36) “36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 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은 그저 ‘그리스도’라고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이시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라고 번역이 된 ‘큐리오스’라는 단어는 ‘주인’ ‘최고권위를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분을 우리의 구세주로서만이 아니라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군데만 보고 갈까요?
(골 2:6‐7)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사도 바울은 너희가 예수를 주로 받은 자들이 맞는다면 그 안에서 교훈을 받은 대로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주인이 시키신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 일을 행할 것 아닙니까? 또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라고 주신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을 하면 무엇입니까?
(마 22:35‐40) “35 그런데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36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40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뜻이 달려 있다."
주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딱 두 가지로 요약을 해서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내 가족입니까? 일가친척인가요? 교회 식구입니까?
(눅 10:25‐28)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27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2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어떤 율법사가 주님께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 묻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가를 물으십니다. 율법사는 율법이 가리키는 바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고 아주 똑똑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럼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그렇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 때 그 율법사가 다시 묻지요? ‘그러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 때 주님께서 대답으로 주신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강도에게 맞아서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때 제사장과 레위 인이 차례로 그 곁을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정한 것을 만지거나 보면 안 되었습니다. 아마 그러한 이유에서 그들은 그냥 그 곁을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 현장에 유대인들과는 원수지간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주님은 그 비유에서 의도적으로 원수를 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원수이자 그들에 의해 개처럼 여김을 받았던 사마리아인이 그 곁을 지나다가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그 상처를 치료해 줍니다. 그리고는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에 누이고 자기의 소유를 털어 여관 주인에게 주고는 그 사람을 부탁하고 갔습니다. 그렇게 비유를 마치신 주님께서 율법사에게 물으십니다. ‘누가 선한 이웃이냐? ‘ 율법사가 대답합니다.’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어떻게 결론을 맺으십니까?
(눅 10:36‐37)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그가 대답하였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주님은 ‘네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를 묻지 말고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자가 되어라’라고 결론을 맺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에 유대인의 원수인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하나님과 이웃을 공격하는 자가 되어 버린 모든 인간은 그러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러한 타락의 상태에 빠져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죽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 백성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키셔서 그들에게 의로운 흰옷을 입히심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러한 자신들의 회복된 신분에 대해 배워가면서 자주 실패하고 넘어지지만 그 신분에 맞는 회복된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분을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마귀의 후손(뱀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 신분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되어 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들어 입은 인위적인 옷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가죽옷에 의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큐리오스), 우리 주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겠다는 의지도 함께 포함된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헤르만 바빙크 교수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만, 구세주로만 받아들이고 그 분을 ‘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신앙을 반쪽짜리 신앙이라고 했고 그 것은 가짜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열심히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그 은혜의 복음을 정말 알아들은 사람이 맞는다면 그 노력은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를 밟거나 다른 이의 아픔을 모른 척하며 지나가는 자가 아니라 자기의 소유를 털어 원수를 도와주는 선한 이웃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사랑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요 책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성도가 되신 분들이 맞으시다 면 여러분은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분들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가시적인 증거가 바로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을 밟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성경의 모든 계명을 ‘이웃 사랑하기‘라고 한 마디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그 소중한 계명을 빼고 그냥 ’이웃을 사랑하라‘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계명을 정의했을까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그냥 ’이웃 사랑하기‘라고 말한 것입니다.
(약 2:8‐9) “8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그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똑같은 의미로 온 율법을 한 마디로 ‘이웃 사랑하기’라고 정의를 합니다.
(갈 5:13‐15) “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15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고 먹으면, 양쪽 다 멸망하고 말 것이니, 조심하십시오.”
서로 물고 먹는 삶을 사는 사람은 멸망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 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람이 만일 형제 사랑하기를 하지 않는 다면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요일 4:7‐12)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10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이 세상에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게 되면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확고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증인으로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사랑을 합니까? 그런 분들 많으시지요? 사랑하고 싶고 용서하고 싶은데 감정이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어떤 분들은 자기의 감정이 움직일 때까지 사랑하기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성경이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 이전에 의지이며 선택입니다.
감정에 의해 나오는 것은 ‘like''좋아함’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사랑의 한 요소로 감정이 들어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는 감정과 함께 의지와 선택이라는 요소도 들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예로 들어볼까요?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미워하십니다. 성경은 분명 그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모두 다 죄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시는 상태에서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에 의해, 미워해야 할 자들을 사랑하시기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제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개를 좋아합니다. 그 사람이 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집을 잘 지켜줘서, 맛있어서,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개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병이 걸려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개가 자기에게 주는 어떠한 유익 때문에 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개의 시중을 드는 것이 귀찮아서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럼 또 다른 사람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수의사는 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개를 보면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오히려 어렸을 적에 개에게 심하게 물린 기억 때문에 개를 보면 혐오감이 듭니다. 그러나 수의사는 개를 정성스럽게 돌보아야 합니다. 그게 자신의 의무이며 책임이고 자신이 수의사가 될 때 ‘짐승을 사랑하겠노라‘는 선서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밥을 주고 약도 먹이고 최선을 다해 그 개의 질병을 고치려 노력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 수의사의 행위는 위선이며 의무이며 책임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그 것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예를 들어 드리지요. 우리 교회 지영 이는 개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리고 개를 아주 사랑합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 자식처럼 개를 키웁니다. 지영 이는 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사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랑입니다. 물론 그렇게 감정까지도 포함된 사랑을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땅에 있는 오염된 육체를 갖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일차적으로 요구하는 사랑은 감정까지 포함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서 나오게 될 사랑은 감정까지 포함된 사랑이 맞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죄에 오염된 육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감정까지 포함한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실력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요구하는 사랑은 선택적이며 의지적 부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원수를 좋아하라‘고 하셨으면 우리는 큰일 날 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네 감정이 지금은 그 상대방을 좋아하지 못하더라도 너는 네 의지를 발동하여 사랑의 선택을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남편이 혹은 아내가 혹은 이웃이 죽이고 싶도록 미울 때 그를 향해 도끼눈을 뜨는 대신 커피를 한 잔 타서 은근한 미소와 함께 전해주는 것을 의지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미운 감정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내 의지를 발동하여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감정을 좇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게 된, 의로운 흰옷을 입고 있는 자라는 신분의 확인이 그러한 선택적이며 의지적인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이해하는 그 깊이만큼 인간들은 그 분량만큼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숙해 지다보면 정말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결국 나의 감정까지 동원된 그런 멋진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남을 해코지 하는 그런 티끌의 자리에서 벗어나 오히려 나의 옷을 벗어남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 사람들 아닙니까? 잘 참고 잘 견디시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의 사랑하는 모습으로 보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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