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6. 13.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김성수 목사)

 

 

(엡 1:4)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가 지난 시간에 거룩에 대해서 장시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참 중요한 개념이고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인데 참 많이 간과되어져 왔던 부분이지요? 무 율법주의자들과 율법 폐기론 자들이 주장하는 엉터리 교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은혜’와 함께 이 ‘거룩’을 잘 챙겨서 이해해 두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거룩하게 만들어서 그 영원한 안식에 집어넣으시려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그럼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의 인생에서 만들어 가야 할 것은 바로 ‘거룩’이이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의 목적은 거룩이지 행복이 아닙니다. 잘 이해하셔야 해요. 그런데 모두들 거룩은 안중에도 없고 획득과 성취에서 오는 행복만 얻어내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오류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을 배우고 복음을 공부하여 자발적인, 거룩을 향한 열심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우리가 장시간 공부한 내용의 핵심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부분을 상당 부분 반복하여 설명을 드릴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교리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여러분의 마음속에 각인시켜 드리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시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가 목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롬 8:28-29)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건짐을 받은 것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을 향해 달려야 합니다. 유월절 날 죽음에서 건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떠나기 전에 유월절 음식을 어떻게 먹었다고요? 서서, 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급히 먹었다고 하지요? 그건 죽음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은 그게 끝이 아니라 40년 광야로 상징된 인생을 통하여 달려가야 할 목적지가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지요?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한 감격에만 젖어있고 자신의 인생에서 거룩을 만들어 가는 것에는 아주 소홀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은혜’를 강조하는 곳에서 이런 겁 없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진짜 은혜가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에는 분명히 세 가지 시제가 있다고 했고, 칭의에만 머물러 있느라 구원의 현재 시제인 성화와 영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홍해 가의 주막에서 ‘구원 받았네’ 하면서 젓가락을 두들기고 있느라 지나야 할 광야가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은혜를 아직 알고 있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 중에도 어차피 하나님께서 다 이루실텐데 왜 내가 기도해야 하며, 왜 내가 거룩을 향한 싸움을 해야 하며, 왜 내가 그 믿음의 길을 경주해야 하는지 해결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그 해답을 우리에게 어떻게 주고 있는 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분명 우리는 거룩하게 ‘하나님같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암 3:3) “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하나님과 동행을 했던 에녹은 우리 성도의 대표로 기록이 된 사람이라 했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에녹의 삶처럼 종말론 적 삶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 한다 했습니다. 그 동행의 삶을 아모스가 하나님과 우리 성도가 의합 하는 삶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말 뜻은 하나님의 뜻이 곧 우리의 뜻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이나 야망을 이루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어 그 뜻을 이루어 내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순종의 삶이고, 그 삶이 바로 거룩을 추구하는 삶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네 이웃을 목숨 걸고 사랑해 주라 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확실한 경고를 보여 드리지요.

 

(히 12:14)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거룩을 덧입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설명해 드렸던 것을 다시 한 번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기에 자주 반복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들어서 천국, 즉 요한 계시록의 21장22장으로 데리고 들어가고 싶으셔서 그 방법으로 ‘선악과’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그 ‘선악과’ 만 지나면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다가와 하나님의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분명 그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어야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엉터리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인간은 거기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데 뭐 하러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느냐’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죄의 시작이며 성경이 말하고 있는 유일한 죄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죄 속에서 나게 되고 전 인류가 가지고 있는 이 죄, 즉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해고시키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책임 질 수 있다고 믿고 그러한 능력이 자기 안에 있다고 믿는’ 그 죄 성을 따라 수많은 이단과 종교가 탄생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과 같이’ 만들어서, 다른 말로 거룩하게 만들어서 천국에 데리고 들어가서 살고 싶으셨는데 사탄과 인간이 그 방법을 틀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이용해서 인간을 이렇게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계 14:4-5) “4 그들은 여자들로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정절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드리는 첫 열매로 속량을 받았습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말을 찾을 수 없고, 그들에게는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수준에 흡족한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과 인간은 그 길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그 맹렬하신 고집과 사랑으로 천국에 데리고 들어가시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가 이 땅에 내려 왔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십자가 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지은 죄를 그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이셨고 예수의 삶이 우리의 삶으로 전가되어 우리는 거룩한 자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우리 안에 예수가 계시기에 우리는 거룩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지었던 죄 우리가 지금 짓고 있는 죄, 우리가 앞으로 지을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모두 도말 되어 버렸고, 의인이 행해야 할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되어 그야 말로 우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내면을 이야기하고 흠이 없다는 것은 외양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안과 밖이 모두 완전하게 변한 자로 여겨짐을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시도,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엡 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롬 11:5-6)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러면 이제 그 구원이 은혜만으로 완성되었다면, 우리의 행위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부터 아무렇게나 죄를 짓고 살아도 되는가?’ 또 다시 이런 질문이 제기 되지요? 맞습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다. 그런데 상기한 복음의 내용을, 그 은혜의 사랑을 진짜 계시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정답이라 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복음을 진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사가 그런 저급한 질문을 밟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고급한 수준으로 올라가야 하기에 아무렇게나 살게 놔두시지 않습니다.

 

(롬 7:4-6) 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다른 분, 곧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분에게 속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5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에 따른 죄의 정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6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우리를 얽어매던 것에서 죽어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전에는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여 우리에게 죄과가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한다 해도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이제 징벌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조금도 보탤 것이 없는 완전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럼 순교자의 죽음은 뭐고, 고통을 감수하는 헌신적인 삶은 뭔가요?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거룩을 향해 달리라고 하고, 구원받은 너희들은 뭔가를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일견 모순이 되는 것 같은 주장입니다. 성경은 은혜로 구원 얻은 우리더러 거룩에 이르기를 힘쓰라고 강력히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벧전 1:15-16)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히 12:4)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우리는 죄와 피 흘릴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합니다.

 

(벧후 3:14)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분명 성경은 우리의 거룩을 향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이 있나요? 성경에는 이렇게 ‘은혜와 복종’이 양립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또 다시 반복하지만 은혜를 받은 사람, 진정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은혜를 베푸신 분을 사랑하게 되며, 그 은혜를 베푸신 분의 뜻을 따라 행동하게 되어있다는 것이 성경의 논리입니다. 억지로 그 은혜 베푸신 분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기 싫은 것을 힘겹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기쁘게 자연스럽게 우리는 우리의 거룩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나오지 않으면 혹시 너희들 잘 못 믿고 있는 것 아닌가 돌아보라는 의미에서 우리에게 그 많은 ‘하라’의 명령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 14:15)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일3:3)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즉 우리가 복종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기에 그 복종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제 성도는 새로운 본성이 생겼기 때문에 그 본성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기뻐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했을 때 가슴이 아픕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거센 바람이 마파람으로 불어오는 거룩을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감사하게도 그러한 성화의 과정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끌어 가신다고 합니다.

 

(딛 2:11-13)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렇게 우리 구원의 여정은 시작부터 끝까지가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나타나는 행동과 자기의 행위로 하나님께 뭔가 보답을 해야 한다는 발상에서 나온 행위와 잘 구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신앙의 업적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것이 구원은 은혜로 받고, 그렇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후에는 우리가 뭔가 선을 행해서 하나님께 보답을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받은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끝없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마치 구원은 은혜로 얻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해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삶 속에서 조금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지으면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지는 않으실까? 이만큼 크게 내 삶 속에 부어졌던 하나님의 사랑이 요만큼으로 줄어들지는 않았을까’하고 걱정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성공에 상관없이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행위를 손톱만큼이라도 근거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대가’라고 불러야 옳겠지요.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보상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가 아닙니다. 갚을 수 있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차용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에 보상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해야 그 선물에 대한 보답이 될까요? 우리 안에 그러한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합니까?

 

우리는 지난주에 누가복음17장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요구가 얼마나 높은지 배웠으며 그 모든 것을 다 지켰다 할지라도 그것은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이지 그것을 가지고 자랑삼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하인이 밭을 매고 들어와서 밥상을 차리고 주인이 다 먹은 다음 설거지 마치고 그제 서야 한술 뜬다고 해서 그가 그의 한 일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이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거듭 났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요구 수준을 이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해서 하나님께 보답을 할 수 있고 그분의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언어도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그 것은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뿐이지 절대 하나님께 생색을 낼만한 일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우리 눈에 엄청난 업적을 쌓았다고 해도 결코 자랑할 수 없습니다. 감사해서, 사랑해서, 기쁘게 자발적으로 나온 행위와 그 업적으로 뭔가 더 많은 사랑을 얻어 낼 수 있고, 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보이고 싶은 의도에서 한 행위는 하늘과 땅 만큼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거기에 보답하겠노라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한다 해도 그것은 보답도 될 수 없고 오히려 은혜를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나서 팬클럽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여고생들로 구성된 팬클럽이었는데 그 때 그 여고생 아이들이 가장 많이 선물로 준 것이 종이학이었습니다. 너무나 좋아서 며칠 밤을 피곤할 줄 모르고 만들어 온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그 종이학 천 마리를 받으면서 그 아이에게 주머니에 있는 돈을 주섬주섬 꺼내어 몇 백 원을 그 아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고 해 보자고요. 그러면 그 아이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모욕감에 시달리겠지요? 그 종이학 천 마리가 몇 백 원의 가치밖에 안 된다는 거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뭔가 보답하여 그 은혜를 놓치지 않으려는 시도는 하나님께 모욕을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은 선물일 뿐입니다. 구원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 가나안에 이르는 순간까지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게 다 선물이라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반복하고 반복해도 과하지 않은 아주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건을 연습하고 훈련하며 선행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며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고자 하는 노력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그렇게 살아냈을 때 여러분에게 오는 희열은 말도 못하지요? 마치 알콜 중독자가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고 술을 안마시고 잔날 그 다음 날에 일어나서 느끼는 성취 감 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행복함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기쁨과 행복을 우리에게 맛보게 해 주시기 위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자로 취급받고 있는 지 아시겠지요? 그러한 성취감과 거기서 오는 행복과 기쁨은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해 줍니다. 우리의 영혼을 참으로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중국 선교를 떠납니다. 아주 시골의 조선족 중학교에 가서 영어 캠프를 하며 그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입니다. 그 곳에 가면 잠자리, 식사, 공기가 영 미국과 다릅니다. 아주 불편해요. 그럼에도 우리 청년들이 여름만 되면 그 중국에 못 가서 안달인 것을 보시지요? 왜 그럴까요? 비록 힘은 들지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여 얻는 그 희열은 일주일간의 고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노력하게 하시어 우리에게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려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 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제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히 12:10)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딤전 4:7-8)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그렇지요? 중간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창세전에 그 분의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계획하신 대로 반드시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여정에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싸움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절대 강제로 기적적으로 그 일을 이루시지 않으신다는 것도 꼭 염두에 두십시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 안에는 타락한 본성과 거룩한 본성이 공존하게 됩니다. 우리의 영은 이미 거룩하게 되었으나 우리의 육신은 아직까지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와 계시기 때문에 거룩을 향한 욕구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그 욕구를 막지요. 처음에는 타락한 본성이 거룩한 본성 보다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실패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과는 다른 것이 이제는 죄를 멀리하는 데에 실패를 하면 괴롭습니다. 그리고 수치스럽습니다. 우리 안에서는 또 거룩을 향한 달음질에 대한 욕구가 일어납니다. 타락한 본성은 계속해서 우리의 그 거룩한 본성의 외침을 차단합니다. 또 실패하지요.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1) 우리에게는 거룩할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과

(2) 우리가 실패한다고 해서 우리의 신분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무기를 너무나도 모릅니다. 우리는 핵폭탄 같은 능력을 하나님께 부여 받았음에도 우리 주머니에 있는 사과 깎는 칼을 들고 적과 대항하는 꼴입니다.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고, 나에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not able not to sin의 상태에서 able not to sin의 상태가 된 것이다.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니까요? 그냥 해보지도 않고 기가 죽어 ‘난 못해, 난 절대 그렇게 살 수 없을 거야’하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하지 마세요.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그러한 믿음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첫 번째 요인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자신감이 부족합니다. 우리에게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겪는 고난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지요. 옆에 있는 사람이 태산을 짊어지고 있어도 자기 손톱 끝에 조그만 가시가 박히면 그게 더 큰 고통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삶에 자신이 원치 않는 삶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겪는 고난과 시험은 누구나 다 겪는, 즉 옆에 사람도 다 겪는 것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고전 10:13)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말고는, 여러분에게 덮친 시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시련과 함께 벗어날 길도 마련하여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십니다."[표준 새 번역]

 

‘사람이 감당할 시험’이라고 번역된 부분을 원어로 보면 ‘such as is common to man’입니다. ‘누구나 다 겪는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시험과 고난은 우리만 특별하게 하나님 앞에서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의 고난과 시험은 누구나 다 겪는 다는 것입니다. 모든 평범한 사람은 다 흔히 겪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도 나만큼 힘든 사람은 없을 걸‘하고 생각하세요? 여러분, 왜 재벌 그룹 회장이 투신자살을 합니까? 여러분은 적어도 투신자살 할 만큼의 고통은 아직 오지 않지 않았습니까? 왜 인기 연예인들이 목을 매달지요? 여러분은 아직 목을 매달만큼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으셨잖아요? 그런데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그들이 목을 매달고 빌딩에서 뛰어 내려 자신의 생을 접습니다. 고난은 누구나 다 겪고 있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으세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참기 힘든 고난을 이기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길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제 이야기를 좀 할까요? 사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반에서 그저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별로 뛰어난 것도 없고, 그저 한 가지 노래를 잘하고 하모니카를 잘 불어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조금 인기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5학년이 되어서 처음 교실에 들어갔을 때 새로운 저희 반 담임선생님께서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녀석 참 공부 잘하게 생겼다. 참 똘똘하게 생겼네.’라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즉시 화장실로 가서 제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떠 올리며 그 선생님께 실망을 끼쳐 드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선생님은 항상 저에게 관심을 가져 주셨고 신경을 써 주셨습니다. 상황은 변한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자신감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제가 그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계속 전교 일등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생긴 자신감이 저를 서울 대학교에 들여 보내준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감이라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나에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자신감은 그토록 우리를 힘나게 만듭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가 가진 능력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바로 성경입니다. 거기에는 우리 성도들이 가진 핵폭탄 같은 힘이 명기 되어 있습니다. 아는 만큼 우리의 무기를 써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냉동차에 갇혔는데 그 냉동차는 실내 기온이 영상 15도였다고 합니다. 청명한 가을 날씨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이 냉동차에 갇혔기 때문에 얼어 죽을 것이라고 자포자기했다고 하지요. 그는 영상 15도에서 실제로 얼어 죽었습니다. 여러분, 자포자기(自暴自棄) 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힘을 내어 싸울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계속 실패한다고 해서 우리의 신분이 바뀌지 않음을 확인하고, 인생을 통해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그 죄와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롬 7:14-8:2) "14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18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나에게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20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타락한 본성)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타락한 본성)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타락한 본성 때문에 자꾸 우리가 죄에게 지고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렇게 죄를 짓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짓는 죄는 같은 죄인데도 불구하고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요? 우리의 죄 된 습성을 고치기 위해 징계는 받지만 징벌은 우리에게서 떠나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실패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선물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 은혜를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한 치 두 치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앞에서 내가 어떻게 이렇게 안일하게 죄에 대처하겠는가?’ 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복음을 알고 있는 자는 죄를 짓고 실패했을 때 그 죄를 이기지 못한 수치심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주어진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기쁨이 샘솟게 되고 그 선물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 또 반복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 요리 문답의 제1번 질문이 뭐라 했습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지요? 답이 뭐예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 그리고 영원토록 그 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소 요리 문답을 우리 교회 표어로 삼을까 봐요. 너무나 중요한 진리거든요. 바로 그 것을 맛보게 하고 이루어 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와 복종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반드시 복종의 자리로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에 눈이 멀면 사랑하는 사람이 하늘의 별을 따다 달라고 하면 하늘에다 사다리를 놓는 법입니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연애할 때 정말 사랑하는 애인이 그렇게 무모한 것을 요구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 사랑하시지요? 그 자녀들이 어쩌다가 실수를 해서 사형언도를 받았다고 해 보자고요. 그런데 판사가 누가 대신해서 죽어주면 이 아이를 살려주겠다고 하면 그거 거부할 부모 있나요?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도 거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만드는 묘약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가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가 거룩을 향해 달리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바로 36계입니다. 중국 ‘제서’의 ‘왕경즉전’에 단공이 말한 전쟁을 하는 서른여섯 가지 책략 중에 맨 마지막이 ‘주위상’ 즉 승산이 없을 때는 도망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지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 백번을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탄은 천사 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웠다고 말할 만큼 능력이 뛰어난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어떻게 넘어뜨릴 것인지만 연구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 아무것도 안하고 기타만 30년 치면 그 사람은 에릭 크랩튼보다 뛰어난 기타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 안하고 인간을 어떻게 넘어지게 할 것인가만 연구한 마귀는 어떻겠습니까?

 

마귀는 우리의 어디를 치면 넘어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땐 36계 중 주위상‘을 써 먹는 것입니다. 대적이 유혹할 만한 것에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피하라는 것이지요. 술만 먹으면 사람이 변해서 가정에서 폭력을 일삼는 사람 있지요? 평소에는 술을 즐겨하지 않는데 꼭 어떤 친구만 만나면 술을 먹고 개차반이 됩니다. 그 사람은 그 친구를 피하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담배를 끊을 때 일입니다. 저는 의지가 강한 편이에요. 그래서 오늘부터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이 든 그 날부터 지금까지 전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 자장면만 먹으면 그렇게 담배가 피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려 4년 동안 그 좋아하는 자장면을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적어도 우리가 그 정도의 소소한 노력들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피하세요. 더러운 것, 지저분한 것, 자신이 이길 수 없으면 피해 버리세요. 그게 거룩을 향한 우리의 첩경이 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피할 길을 제공하십니다. 도망갈 길을 제공하신다는 것이지요.

 

(고전 10:13)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공식을 C S Lewis가 이렇게 요약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그 분의 사랑에 압도된다. 그 순간부터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우러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곧 우리 자신의 생각이 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면 자연히 그분의 영광을 구하게 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알게 된다. 참된 은혜는 기쁨을 갖게 하고 경건한 삶을 살게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져 가는 공식입니다. 결국 우리가 거룩하게 만들어져 가는 것도 은혜에 기대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만큼 은혜를 경험한 만큼 우리는 거룩을 향해 달릴 수 있게 되고 그 분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 은혜와 사랑을 경험 할 수 있습니까?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이 무엇입니까? ‘말씀, 기도, 성례’ 바로 이 세 가지 이외에는 은혜를 경험하고 그 충만한 사랑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례를 행함으로 우리가 은혜를 더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충만하게 부어져 있는 그 산소 같은 은혜를 말씀 기도 성례를 통해서 우리는 만지고 체험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례를 통해서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부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어떻게 은혜를 받고 싶다는 사람들이 예배를 빠지고 기도에 힘쓰지 않고 성경 읽는 것에 게으르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수단을 통해 영적 생활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여전히 그들의 인생인 광야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인 만나를 공급받았던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는 그렇게 이 인생의 여정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가나안까지 못 가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결국에는 가나안으로 집어넣으실 것입니다. 이 인생의 기간 동안 잘 못된 것들 다 고치시고 깨끗하게 만드셔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셔서 우리를 가나안에 집어넣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실패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스스로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가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그 분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그 쾌락에 몸을 맡기면 드디어 하나님의 징계가 우리에게 오게 됩니다. 징계는 징벌과는 다른 것이라 했지요? 징계는 바르게 가르쳐서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징계이고 징벌은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심으로 우리의 거룩을 만들어 가십니다. 징계는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앞날을 대비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크게 사용하시기 위해 혹은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려고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삼하 7:14)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히 12:5-11)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징계 역시 우리의 거룩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거룩을 방해하는 것이 우리의 타락한 본성 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대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성을 내세워서 마귀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마귀는 무슨 마귀냐 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거듭남 후에 무공해 살균 진공 팩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와 그의 세력들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마귀는 천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천사였습니다. 피조물 중 가장 능력 있는 자가 마귀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과 겨뤄 보겠다고 나섰겠습니까? 천사 하나가 앗수르 군대 18만5천명을 몰살시킨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 천사들의 최고 우두머리가 바로 마귀입니다. 그 마귀가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문 앞에서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안일합니다. 적이 있다는 것조차 인식을 못하고 있는데 싸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그 대적의 존재를 명확하게 이야기하며 그 대적들과의 전쟁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엡 6:10-13)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마귀와의 싸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라고 하고 13절에 모든 일을 행한 후에 굳게 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일을 행한 후’라는 말을 보더라도 우리가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노력이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훈련을 잘 받고 노련한 군인이라 할지라도 만일 무장을 하지 않으면 전투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 갑옷과 무장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을 합니다. 이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 뒤에 의의 흉배를 붙이고 진리의 띠를 두르고 같은 동사가 모두 과거 분사입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완료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 모든 무장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 무장의 능력을 알지 못하면 계속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에게 부어진 그 무장을 우리는 어떻게 확인하고 경험할 수 있지요? 역시 은혜의 수단입니다. ‘말씀, 기도, 성례’ 말씀, 성례, 기도로 우리는 우리에게 부어진 그 완벽한 무장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전신 갑주의 능력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멋지게 싸워 낼 수 있습니다. 007이 가지고 다니는 만년필은 레이저 폭탄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기의 위력을 모르면 그것은 나오지도 않는 쓸모없는 만년필일 뿐입니다. 그 무기의 위력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말씀 , 기도, 성례입니다.

 

우리는 실로 완벽한, 절대로 질 수 없는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자는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 영화의 끝까지 이미 다 보고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고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것을 안 다음 전쟁에 임하면 얼마나 자신감이 생기겠습니까? 자신감을 가지세요. 우리는 이겼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자신감을 잃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영상 15도에서 얼어 죽는 것입니다. 자신감을 얻으면 1980년 올림픽에서 소련의 역도 감독이 결승에서 트릭을 썼습니다. 선수에게는 ‘연습 때 자주 들어 올렸던 499파운드를 요청할 테니 가볍게 들어다오.’라고 이야기를 하고 진행부에다가는 500.5파운드를 끼워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선수는 평소에 늘 들던 무게이기에 자신감을 갖고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우리가 받은 능력과 의가 어떤 것인지 아는 만큼 자신감이 생기게 되고 우리는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고 이겨내어 우리가 우리의 의를 쌓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노력해서 구원이 더 값어치가 있어지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우리의 노력을 칭찬하시고 기뻐하십니다.

 

(고전 15:58)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4:5)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마치 어버이날 엉망으로 만들어 온 카네이션을 자랑스럽게 그 비싼 양복에 핀으로 꼽아 며칠 동안 달고 다니시는 우리 아버지처럼 우리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의 노력을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요구하십니다. 그 거룩한 삶이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능력도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는 결국에는 완전한 거룩에 도달 할 것도 압니다. 그러한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선물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거룩하게 살며 선을 행하며 살며 죄를 이기며 살라고 요구하시기에 우리는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힘써 노력하는 것입니다.

 

안되면 연습이라도 하세요. 연습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열정이 왜 없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습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성숙의 도구로 쓰시기도 하십니다. 여러분 막 타오라는 것 아세요? 군대에 가면 막 타오라는 훈련이 있습니다. 낙하산을 타기 위해 지상에서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막 타오 훈련은 10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이지만 그 연습이 수천피트 상공에서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인 사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살전 2:9-10) "9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습니다. 10 또 신도 여러분을 대할 때에,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올바르고 흠 잡힐 데가 없이 처신하였는지는, 여러분이 증언하고, 또 하나님께서도 증언하십니다."

 

상실한 인간의 마음속에도 선이 남아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선은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선이 아니라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어떤 것을 국어사전의 개념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토브‘는 다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상실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선이 남아있기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 중에 착한 사람이 더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하고 완전히 타락했습니다. Total depravity 그것은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범위의 이야기입니다. 전 범위에 걸쳐서 타락을 했다는 것이지 전혀 선을 행할 수 없게 0점으로 타락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 조금 남은 선을 개발해서 해탈을 꿈꾸고 그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기도 합니다. ‘아니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는 죄에 대해 감각이 없다면서요?’ 맞습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죄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하는 게 죄라 했잖아요? 그게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죄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감각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도 ‘이거 다른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하는 뉘우침은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뉘우침도 자기 자신이 남들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죄 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들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선행을 하고 뉘우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살아난 자들 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먼저 상대방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잘못을 저질렀다’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게 다른 것입니다.

 

(시 51:4) "4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의 눈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주님의 유죄 선고가 마땅할 뿐입니다. 주님의 유죄 선고는 옳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여 놓고 우리아에게 미안하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만 잘못했다고 합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 살아나 하나님이 정말 커다란 분이심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업적을 남기라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지어져서 돌아오라고 보내신 것이라고 말하면 허탈해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선에 조금도 보탤 수 없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 완전하심에 눈곱만큼도 보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죄인 된 몸뚱이로 그 분의 일을 방해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을 이제 아시겠지요? 그리고 어떻게, 어떤 무기로 싸워야하는 지도 아시겠지요? 우리 오늘부터 한 번 당당하게 세상과 죄와 맞서 보자고요. 우리 안에는 이미 ‘able not to sin'의 능력이 있으니까요.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