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
(김성수 목사)
(살아있는 신앙을 하기 위해서는 바른 복음을 듣고 늘 그것을 기억하고 (므네모뉴오) 지키고(테레오) 회개하여(메타노에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그레고 류오) 것을 배웠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예수 잘 믿는 것 같다가 죽음이 닥쳤을 때 ‘하루 만 더 살려주세요, 더 좋은 약 없어요?’ 이렇게 애걸복걸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정말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고 영원한 천국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까?)
(계 3:1-3) “1 "사데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2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나는 네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사데교회에게 너희는 살았다하는 이름만 가졌지 실상은 죽은 자라고 책망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신앙을 하기 위해서는 바른 복음을 듣고 늘 그것을 기억하고(므네모뉴오) 지키고(테레오) 회개하여(메타노에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그레고 류오) 것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잊지 않으셨지요? 계시록의 일곱 편지는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교회들에게 사탄이 교회를 어떻게 미혹하고 시험할 것인지에 대한 친절한 안내문이며 견책의 편지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데 교회에게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은 자라고’ 경고를 하신 것은 오늘날에도 그러한 교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사데 교회에게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죽어있는 믿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define하고 있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하고 다음 시간에 빌라델비아 교회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나는 산 자’라고 철썩 같이 믿고 갔는데 나중에 주님 앞에 갔는데 ‘넌 죽은 자야’ 이런 소리 들으면 안 되니까요. 난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 꼭 확인해 보세요.
니체가 1902년에 19세기 이전까지 철학의 주류를 이루던 이성적 철학과 형이상학, 종교를 다 뒤집어버리는 새로운 니체의 실존주의 철학을 모색하면서 저술한 유명한 책이 바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입니다. 짜라투스트라라는 사람을 통해 니체의 사상과 그의 철학을 표출해 놓은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짜라투스트라라는 한 노인이 동굴에서 뱀, 독수리 등과 생활하면서 삶을 깨우칩니다. 그는 그의 깨달음을 세상에 전파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동부의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주로 (얼룩소)라는 도시에서‘신은 죽었다’라고 계속 외치고 다닙니다. 그 때 사람들이 ‘당신 말대로 신이 죽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짜라투스트라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초극(超克)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외부로부터의 다른 아무런 간섭도 받지 말고 너의 내면의 의지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그것이 가치이고 그것이 진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찾고 있는 ‘의미, 가치’ 그런 것은 실상은 우리 내면의 자유로운 의지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살 때 참 자유를 얻는 다는 것입니다. 즉, ‘신은 인간의 삶에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그 책은 나오자마자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배격하고, 싫어하는 인간들의 죄 성과 딱 맞아 떨어져서 선풍적인 반향을 가져왔고 세상을 움직인 위대한 책의 반열에 턱하니 올려 졌습니다.
얼마나 그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같은 제목으로 조곡을 작곡했을 정도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인 ‘뮤제오 로젠바’가 같은 이름의 록 음악을 히트시키기도 했지요? 왜 그렇게 인간들이 신의 죽음에 박수를 보냅니까? 타락한 인간은 신의 존재가 부담스럽습니다. 신이 시키는 대로 살기가 싫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신을 인식할 수 있는 ‘신 인식’이 있어서 자꾸 두려움이 일어나는데 누군가 일어나서 ‘신은 죽은 것’라고 크게 외쳐 주니까 너무 신이 나는 것입니다. 19세기 20세기에 니체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와 지식인들, 다수의 신학자들까지도 ‘death of God’ 이라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며 신의 죽음을 외쳤습니다.
인간은 아주 우수한 존재이며, 점점 더 발전하고 있고, 신은 그러한 인간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진화론 적인 사상이 인류의 정신을 지배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세계 1,2차 대전이 발발하고 인간의 지식과 문명이 인간을 이롭게 하기도 하지만 인간을 파괴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산업사회를 거쳐 지식 정보사회로 치달으면서 다시 사람들은 윤택하고 풍요한 삶을 얻게 되었고 또 전처럼 신의 존재를 귀찮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풍요 속에서는 늘 신을 버려왔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해서 인간을 사로잡았던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인간은 조금만 살기 편해지고 조금만 자신들을 부추겨 주면 금방 자신이 신이 되어버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내 신의 보좌에 앉아 자기를 중심으로 우주를 운행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들의 공통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람들 안에도 그러한 death of God사상이 많이 침투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그냥 교리 속에 갇혀있는 화석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거나, 신은 멀리 있다가 자기가 필요하면 가끔씩 나타나서 자기의 필요나 채워주고 가는 하인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살아있는 하나님을 거의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의 결과 인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는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인간을 행복하고 안전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그 점을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신 8:11-20)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이렇게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힘, 가치’ 그런 것들은 ‘오늘 예수께서 다시 오실 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살아가는 종말적 신앙이라든지 우리는 저 하늘에서 다시 영광스러운 부활체로 부활하여 영원을 살 것이라는 부활신앙 즉, 살아있는 신앙을 오히려 방해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들의 삶을 완벽하게 행복하게 놔두시지 않으십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건강이나 자식의 문제로 , 너무 건강한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로 너무 머리가 똑똑한 사람은 훈련교관을 보내셔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안 그러면 인간은 금방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든요. 교회사를 보아도 교회시대 전체를 통하여 그러한 죽은 신앙의 흔적들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마다 하나님 백성들의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일들을 허락하셨고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영적 대 각성 운동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교회가 목숨 걸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잘 못 갈 수 있는 가를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중에 사두개파 사람들의 신앙을 짚어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그들처럼 죽은 믿음을 갖지 않을 수 있는가를 확실하게 공부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막 12:18-27)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세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제가 전에 신구약 중간 사 400년을 설명해 드리면서 사두개파가 어떻게 생겼는지 말씀드렸지요? 사두개파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특권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계급이었고 당시 삼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 제사장을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항상 그 들 중에서 대 제사장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후예들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부와 명예를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 계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 오경만 인정하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오경만이 유일하게 권위가 있는 성경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 오경에 나오지 않는 천사나, 내세(천국과 지옥), 부활 같은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들이요, 실존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적극 수용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이었고 로마의 정책을 지지하고 그들에게 정치자금을 갖다 바치고 온갖 특혜를 다 누렸던 자들입니다. 그 말은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을 하고 그 세상이 주는 풍요를 누리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굳이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았던 것은, 그들은 세상에서 누리고 살 것이 너무 많았고 그 것들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으며 그들은 거기에 만족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메시야고, 다윗 왕국이고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이 좋은데 왜 그런 걸 바라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현재 누리는 것들을 오래 오래 잘 지키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항상 논쟁을 벌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서 빨리 메시야가 와서 로마를 몰아내고 그 위대하고 화려한 다윗 왕국을 재건해 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사두개인들은 그 로마에 빌붙어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꼴 보기 싫었겠습니까? 게다가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매번 조롱하듯이 물어보는 게 바로 조금 전에 읽었던 일곱 형제와 아내 이야기였습니다. ‘일곱 형제가 있는데 첫째 형이 후사가 없이 죽었다. 그래서 둘째가 그 형수를 취했는데 그 둘째도 후사가 없이 죽었다. 그렇게 모두 죽고 일곱째까지 죽었다. 그러면 그 여자는 부활해서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인가?’ 바로 그 이야기를 가지고 사두개인들이 이번에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활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고 , 설명을 해서 납득이 가면 믿어보겠다는 그런 의도에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기 위해 작당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신봉했던 신명기의 율법을 들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신 25:5-6) “5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바로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께 당돌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형이 후사가 없이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를 취해서 아이를 낳아주는 제도입니다. 형사취수 제도지요.(levirate marriage)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형사취수 제도를 허락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후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 이 형사취수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왜요? 그 후사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 38:6-10)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유다의 후손으로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의 장남 ‘엘’이 죽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둘째 오난에게 후사를 이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 오난이 어차피 자기 아들이 못 될 것을 알고 땅에다 설정을 하자 죽여 버리십니다. 게다가 유다가 자기 며느리에게 셋째를 주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며느리 다말을 시아버지 유다에게 보내셔서 어떻게 해서든 후사를 이어가십니다. 유다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집념은 이렇게 대단하십니다. 그 집념이 바로 이런 그림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룻 4:9-10)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룻의 남편인 말론이 죽고 그 형제 기룐까지 죽었습니다. 이렇게 형제가 모두 죽으면 가까운 친족이 그 기업을 무를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보아스가 기업을 무릅니다. 그 보아스는 여리고의 기생 다말과 살몬의 아들이었고 그 보아스와 룻의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이고 그 아들이 이새입니다. 이 신명기 25장의 형사취수 제도는 이스라엘의 후사를 끊어지지 않게 해서 다윗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였던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그것을 통해 단지 이 땅의 기업을 이어 받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성경도 알지 못하는 자들아’하고 책망하십니다.
(막 12:24)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그들이 왜 성경을 모릅니까? 그들은 제사장들이요, 성경 선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도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더러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즉,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라고 질책을 하십니다.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그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땅에서 자기들이 이어가야 할 기업, 자기들의 소유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목표지점, 종점은 바로 이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성경을 바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자들아’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세요? 겉모양이 요란스럽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부실한 사람들은 늘 외양이 요란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종교행위에 극성이었느냐 하면 그 찬란한 헤롯 성전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이 주님께 ‘주님 저 성전을 좀 보세요, 얼마나 크고 웅장합니까?’했던 그 성전을 사두개인들이 일궈낸 작품입니다. 그들은 현세의 복을 위해서 열심히 종교행위를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신앙, 살아있는 신앙은 ‘얼마나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하느냐?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 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현실에만 눈을 두고 있는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 12:26) “26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떨기나무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너희는 생각을 크게 잘못 하고 있다."
이 구절을 어디에서 인용하신 것이지요? ‘모세의 책에 떨기나무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이라고 하셨는데 거기가 어디지요?
(출 3:4-6)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하나님께서 80이 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제를 보시면 현재형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미 모세가 나기 4-500년 전에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있을 때부터 지켜주시던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있는 그들의 하나님으로 그들을 지키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구절을 인용하셔서 부활을 믿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들에게 ’너희들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 땅의 것들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이기에 성경을 그렇게 오해하는 것이다, 천국은 존재하며 이미 이 땅에서 죽은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미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다, 너희들 그래도 이 땅을 목적지로 삼고 살겠느냐?’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에게는 경천동지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지금 살아있고 하나님은 바로 그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찔렸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정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자신들이 이 땅을 살아갈 때 친밀하게 그들을 이끄시던 산 자의 하나님과 함께 지금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을 살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정말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과 함께 우리가 감히 상상 할 수도 없는 찬란한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이 지금 살아 계셔서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 것을 믿으시는 분들이 ‘death of God’‘죽은 하나님’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두개 인들처럼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와 명예와 벼슬에 안달 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은 하나님께서 다음 세상을 준비하라고 허락하신 곳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이 땅을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히 11:13)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천국에서 산자의 하나님과 함께 살아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우리 믿음의 선진들을 열거한 후에 그들은 모두 이 땅을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타향사람으로 살다가 갔다고 진술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현세만을 바라보는, 죽어있는 믿음을 가진 분이 아니시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항상 인식하면서 사셔야 합니다. 가끔씩 여러분에게 천국의 흉내를 내며 다가오는 세상의 가치들에게 현혹되어 살아 계신 하나님과 영원한 나라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살아 계신 성령께서 지금 이 순간 시퍼렇게 두 눈을 뜨시고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죽어있는, 이미 오래 전에 박재가 되어버린’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벌써 ‘산 자의 하나님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세요. 우리는 갓 잡아 올린 참치처럼 살아서 펄떡 펄떡 뛰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시고 조금씩이라도 매일 매일 자라 가셔야 합니다. 우리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서 날 선 검처럼 우리를 해부하십니다. 그 말씀 앞에 서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적나라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매일 매일 회개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히 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살아있는 자는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게 되고 회개하는 자들은 자라게 되어있습니다. 죽은 자는 자라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자라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요? 자라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성년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훈방을 합니다. 책임을 질 수 없는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은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자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변해서 책임을 감수하기보다는 다른 이들과 상황이 변해 주기를 원합니다. 아닙니다. 살아있는 자들은 자기가 자라야 합니다. 다른 이들과 상황이 변하지 않아도 그 것들을 이겨 낼 수 있는 성숙과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살아있는 자들입니다. 자라지 않는 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약 2:21-26)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죽은 믿음은 어떤 믿음이라고요?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위해 노심초사 수고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 어찌 행함에 게으르겠습니까? 행하다가 실패하고 실수하셔도 괜찮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자원하여 행하려 하는 마음이 있는 가 확인하세요. 그리고 살아있는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영생과 부활을 믿고 사모해야 합니다.
(고전 15:16-19)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처럼 불쌍한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 무슨 시간 낭비며 돈 낭비며 체력의 낭비입니까? 만일 나중에 가 봤더니 부활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저를 돌로 찍으세요. 그렇게 해서라도 여러분의 화를 풀어 드릴게요. ‘네 말 듣고 왔더니 이게 뭐냐?’하고 분풀이를 하십시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이렇게 참고 인내하며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두려움은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히 2:15)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모든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망 권세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죽음은 종말도 끝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영생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중요한 관문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빌 1:21)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셨음을 입으로 삶으로 선포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평소에는 예수 잘 믿는 것 같다가 죽음이 닥쳤을 때 ‘하루 만 더 살려주세요, 더 좋은 약 없어요?’ 이렇게 애걸복걸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정말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고 영원한 천국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사망을 이기신 우리 주님을 가장 확실하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죽을 때 소망을 품고 있는 자답게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의 삶에 코페르니쿠스 적 변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오기 전까지는 지구가 중심이고 태양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중심이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돈다.’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세계는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었듯이 이제 우리가 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임을 확실하게 자각하셔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만드셨고 우리는 그 곳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수많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시퍼렇게 살아서 우리의 신앙의 경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깨어나십시오. 정신을 차리세요.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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