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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이야기

책 읽어주는 남자 (상처받고 지칠 때면 꼭 기억하라)

by IMmiji 2021. 12. 27.

시간이 우리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 자신이 그럴듯하게 라벨링 돼
진열대에 올려진 와인 같다는 생각이. 
 
오래되고 희귀할수록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제아무리 고급 케이스에 담겨
기쁜 날 선한 선물로 건네진다 하더라도
한 그루 포도나무였던 시절,
포도밭에서의 시간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지기 마련이다. 
 
짓밟고 망가뜨릴 심산으로
포도나무를 기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정성과 사랑으로,
기도로 길러진 존재들이다. 
 
포도밭의 태양,
포도밭의 평화를 떠올리면
삶에 찢기고 벌려진 상처가
소독되는 기분이다. 
 
슬픈 말이지만,
우리는 모두 그 시간으로부터 와
여기에 있다. 
 
‘빈야드(vineyard)’는 와인 용어로
포도밭, 포도원을 뜻한다. 
 
한 존재의 기원이자 시작점,
최초의 우물일 그곳. 
 
다시 돌아갈 방법은 전무하지만
그래도 이따금 그곳을 떠올리면
영혼이 지친 몸을 누이는 것 같다. 
 
언젠가 시에도 적은 것처럼
“눈을 감으면 오는 기차”를 타고
나는 자주 그곳으로 간다. 
 
달빛 환한 밤,
수만 평의 포도나무 사이를
천천히 거니는 상상만으로도
어깨가 가벼워지고 발이 살짝 떠오른다. 
 
눈을 뜨면 형체 없이 사라지겠지만
아쉬움만 남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 다녀오면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
절대로 추하게 늙어가고 싶지 않다’
굳은 결심을 하게 되니까. 
 
그곳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다.  
 
당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고 생각될 때에도
당신과 보이지 않는 실로 묶여
끝끝내 반짝이는 세계,
당신의 빈야드가. 
 
 
< 상처받고 지칠 때면 꼭 기억하라 >


'단어의 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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