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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13-1강.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1

by IMmiji 2015. 1. 31.

13-1강.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3:14-22)

 

계 3:14-22=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부=

 

(라오디게아 교회는 할 이야기가 많아서 1-2부로 나누어서 보겠습니다.)

 

신약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구약 교회는 종말을 맞이하고 신약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구약의 종말이 이스라엘의 역사로 끝이 났듯이 신약의 종말도 교회의 역사로 끝이 납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신약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걸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는 에베소 교회로 보여주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로 시작이 된 신약의 역사는 라오디게아 교회로 끝이 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직전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로부터 시작이 된 교회가 서머나 → 버가모 → 두아디라 → 사데 → 빌라델비아 교회를 거쳐서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 시대를 표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초림에서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교회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아픔들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금까지 일곱 교회를 지리적 특성과 그 사회상을 가지고서 예언적인 의미로 각 시대마다 나타난 교회사로 탐사(探査)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어느 시대이고 존재해 왔기 때문에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어느 시대이고 다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언적인 의미와 현재적인 의미 둘 다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타나는 사건을 육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또한 장차 일어날 예언적인 것으로 만 보고 현재적인 것을 간과하여도 안 되고, 반대로 현재적인 것만 보고 장차 일어날 예언적인 것을 간과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키워드는 “장차 될 일”이고 “속히 될 일”입니다.

 

이는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1절에서는 “속히 될 일”이라고 하셨고!

19절에서는 “장차 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속히 될 일이고 장차 될 일을 기록하여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 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될 일이란? 사건을 말합니다.

사건 속에 영적 의미를 담아 놓았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이는 성령이 인간의 언어를 빌려서 말씀 하셨다는 뜻입니다.

언어는 나타난 것이고 그 속에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의미를 영이라고 합니다.

육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언어 속에 담아놓은 영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육적으로도 보아야 하고 영적으로도 보아야 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의(眞意)를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가지고 하늘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도 보고 하늘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영적인 의미를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움직여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를 가지고 징조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시대의 징조를 보고 때를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시대에 주어진 말씀이면서도 온 시대에 주어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그 당시적인 의미로 해석을 하여야 하지만 이 시대의 모습으로도 해석하여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비록 예언적인 의미로서는 초대교회를 상징한다고 하여도 모든 성경은 온 시대에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에도 적용하여 교훈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을 가지고 영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가지고 하늘나라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냥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히 11: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 눈에 안 보일 뿐입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에겐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하여금 보이는 세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안 보여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인식론(認識論)은 자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아야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보지 못하고 만져보지 못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론 때문에 하나님도 자기가 눈으로 보아야 믿겠다고 합니다.

 

흔히들 그럽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믿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은 자기를 설득 좀 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서는 설득이 안 되니까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내가 믿을 수 있게 보여 달라고 합니다.

뭔가 화끈하게 보여 달라고 합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화끈하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만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지되고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역리(逆理)하지 않고 순리(順理)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계절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대로 창조 이래로 한번도 변하지 않고 순환하고 있습니다. 

이게 기적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쪽에서 뜨던 해가 서쪽에서 떠야 기적이라고 하고!

여름에 눈이 오고 겨울에 무더위가 와야 기적이라고 여깁니다.

 

이 세상이 한 번도 어김없이 순리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화끈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모를 뿐입니다.

우린 아는데 말이지요.

 

성도는 이 세상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동일한 것을 보고서도 신자는 알고 불신자를 모릅니다.

이는 신자(信者)는 눈을 떴고 불신자(不信者)는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믿음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보이는 이 세상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게 해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세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이걸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지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서도 세상 사람과는 다른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는 성령께서 영적으로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사는 성도들은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잠을 자야 할 때인지 아니면 깨어나야 할 때인지 때를 분별하게 됩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하는 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19편을 봅시다.

 

시 19:1-4=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만물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행함으로서 말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가지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밤이 말을 하고 낮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비 바람이 말을 하고, 시절이 말을 하고 각양의 사건들이 말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에 이 백성들이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곡식밭에 깜부기가 생기거나!

메뚜기가 뛰어도!

기근이 들고 온역이 생겨도!

적국이 쳐들어오거나!

무슨 재앙이나 질병이 생겨도!

 

이 백성들이 그냥 우연히 일어나는 것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고 듣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곧 예수님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세상을 통하여서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성도는 영적 세계관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세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있어집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갑니다.

그럼 땅에는 그 그림자가 따라 갑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는 영적인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시대상 속에는 영적 상황이 녹아져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회적인 현상을 통하여서 영적 징후들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회 현상은 때를 말해주고 있어요.

마치 겨울이 다가오면 나뭇잎들이 다 떨어지듯이 세상이 끝이 날 때가 되면 세상의 모습이 끝이 나는 모습으로 치닫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종말에는 이러 저러한 여러 가지 징조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시대는 예수님이 말씀 하셨던 종말의 징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어요.

천재지변으로도 보여주고 있고!

세상의 모습으로도 보여주고 있고!

특히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 속에 세기말적인 것들이 나타나고 있어요.

만물이 종말의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 시대의 교회를 말해주고 있어요.

그럼 라오디게아 교회 속에 종말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겠지요.

이는 하나님은 종말 때 교회상을 라오디게아 교회 속에 담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한 종말의 시대상과 종말의 교회들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라오디게아” 라는 말은 “라오스” 라는 말과 “디케” 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라오스”“백성”을 뜻하고, “디케”“옳은, 공의, 심판”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백성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백성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심판 한다는 것은 곧 교인들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재판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의 사사 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사기 21장을 봅시다.

 

사 21: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입니다.

이건 이스라엘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언약의 후손입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후손이 나중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인하여 생겨났어요.

 

그러니까 언약이 이스라엘의 머리인 셈인 것입니다.

이는 곧 언약이 이스라엘을 존재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몸뚱이이고 그 몸뚱이를 움직이게 하는 생명은 언약인 것입니다.

 

식당 입구에 가면 커다란 춤추는 인형이 있지요.

이 인형이 어떻게 춤을 춥니까?

그 속에 바람을 집어넣으니까 춤을 추는 겁니다.

인형은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어요.

바람이 존재케 만들어 주어요.

 

이스라엘이 그러해요.

이스라엘은 춤추는 인형과 같은 겁니다.

이는 언약이 이스라엘을 존재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도 언약이 빠지면 바람 빠진 인형처럼 죽은 것이 되고 맙니다.

언약을 의인화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러합니다.

 

사사기에서 뭐라고 합니까?

왕(하나님)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왕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좇아냈다는 뜻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한마디로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어서 산 역사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교회와 교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그러한 겁니다.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은 감추어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또한 교인들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서 인간적인 방식으로 세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문 밖으로 좇아낸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부터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나타나신 모습 자체가 그 교회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또한 영적 상태를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님의 모습 속에 그 교회를 향한 말씀이 들어가 있기도 해요.

 

14절을 봅니다.

 

계 3:14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멘이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고!

창조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먼저 “아멘”부터 살펴봅시다.

왜?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아멘으로 나타나셨을까요?

이는 아멘이 의미하는 그 뜻을 알면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아멘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아멘이라는 단어적 의미와 이것이 인칭 명사로 나타날 때는 그 뜻이 달라져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아멘이시오” 라고 하지요.

“아멘이시오” 라는 말은 “아멘 이신 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아멘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뜻이 되어요.

그러니까 아멘의 두 가지 의미를 알아야 해요.

 

그럼 먼저 아멘의 단어적인 의미부터 살펴봅시다.

어떤 때 아멘이 주어졌는지를 봅시다.

성경을 보면 아멘이라는 말이 제일 먼저 등장한 곳이 민수기 5장입니다.

 

민수기 5장을 봅시다.

 

민 5:11-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의 아내가 실행하여 남편에게 범죄하여 13 타인과 정교를 하였으나 그 남편의 눈에 숨겨 드러나지 아니하였고 그 여자의 더러워진 일에 증인도 없고 그가 잡히지도 아니하였어도 14 그 더러워짐을 인하여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그 아내를 의심하든지 또는 아내가 더럽히지 아니하였어도 그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그 아내를 의심하거든 15 그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를 위하여 보리 가루 에바 십분지 일을 예물로 드리되 그것에 기름도 붓지 말고 유향도 두지 말라 이는 의심의 소제요 생각하게 하는 소제니 곧 죄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니라 16 제사장은 그 여인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 여호와 앞에 세우고 17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고 성막 바닥의 티끌을 취하여 물에 넣고 8 여인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그 머리를 풀게하고 생각하게 하는 소제물 곧 의심의 소제물을 그 두 손에 두고 제사장은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을 자기 손에 들고 19 여인에게 맹세시켜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사람과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쓴 물의 해독을 면하리라 20 그러나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더럽혀서 네 남편 아닌 사람과 동침하였으면 21 (제사장이 그 여인으로 저주의 맹세를 하게 하고 그 여인에게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고 네 배로 부어서 너로 네 백성 중에 저줏거리, 맹셋거리가 되게 하실지라 22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 하십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를 의심을 합니다.

혹시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간통을 하였다는 의심이 들거나!

아니면 실제로 자기 아내가 간통을 하였는데 물증이 없는 것입니다.

 

남편이 의심이 들어서 영 찜찜한 겁니다.

속된 말로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겁니다.

그럴 때 제사장에게 소제물을 가지고 가서 고소를 하는 겁니다.

분명히 자기 아내가 외간 남자와 간통을 한 것 같은데 본인은 아니라고 하니까 하나님 앞에서 확인을 좀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럼 제사장은 여자를 불러서 여호와 앞에 세우고 사실 여부를 묻습니다.

여호와 앞에 세운다는 말은 하나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것과 같아요.

즉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할 수가 있느냐? 묻는 겁니다.

 

만약에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질 것이라고 하면서 아멘 아멘 하라고 합니다.

제사장은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너에게 떨이질 것인데!

그래도 좋으냐 라고 물으면 여자는 “예! 그래도 좋습니다!” 라는 의미로 아멘 아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수기에서 아멘은 제사장의 말에 동의하는 것으로 하였어요.

 

이게 신명기로 오면 다르게 나타납니다.

율법을 지키겠다는 맹세의 의미로 나타납니다.

 

신명기 27장을 봅시다.

 

신 27:9-26= “모세가 레위 제사장들로 더불어 온 이스라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으라 오늘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11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8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0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1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2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3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4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5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모세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둘로 나누어서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세우고는 율법을 낭독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율법을 하나라도 어길 시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면 모든 백성들은 아멘으로 대답을 하라는 하십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그 말에 동의하고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에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실로 인정합니다” 라는 말이에요.

아멘은 일종의 서약과 같은 것입니다.

예~ 약속하겠습니다! 라는 뜻으로 아멘 하였어요.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에 대한 맹세를 아멘으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아멘이라고 하지요.

이는 그 말씀에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예! 맞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 예수님이 “아멘이시오” 라면서 인격화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속에는 엄청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어요.

“아멘이시오” 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 아멘”이라고 하는데 이는 인칭(人稱) 명사(名詞)에요.

 

인칭 명사란? 아멘을 의인화(擬人化)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아멘이시오” 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아멘이신 분” 이라는 뜻입니다.

 

아멘이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에 다짐을 할 때 약속한다는 뜻으로 한다고 하였잖아요.

“예~ 그 약속 지키겠습니다!” 라는 뜻으로 아멘 한다고 하였어요.

특히 신명기 27장에서는 모세가 율법을 낭독하고서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겠다고 약속하는 뜻으로 백성들이 아멘이라고 하였어요.

 

이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한 것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가요?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어요.

그럼 자기들이 아멘이라고 약속을 했으니까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어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한 아멘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걸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이스라엘의 저주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율법 아래서 대속 제물의 제사가 이루어지는 성전을 헐어버리신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속죄 재사를 드렸어요.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서 저주 받아야 하는 것을 흠 없는 제물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 용서 받는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에서 일어나는 제사를 자기 몸으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짐승의 제사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지내온 짐승의 제사는 예수님께서 자기 몸으로 하실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10=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장차 오는 일의 그림자라고 하지요.

장차 오는 일이 뭔가요?

한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약속하신 제사는 짐승의 제사가 아니라 한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였어요.

 

그 한 몸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짐승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폐하시고 자기 몸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 것을 폐하시고 둘 째 것을 세우셨다고 하지요.

첫째 것은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입니다.

둘째 것은 예수님의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첫째 것은 폐하셨다고 하지요.

즉 성전에서 짐승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는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으로 짐승의 제사를 지내던 성전을 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성전에서 짐승을 잡아서 드리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율법 신앙의 총화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어요.

이는 성전의 기능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이젠 새로운 성전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어떤 곳입니까?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 속에 성전을 함께 주신 것은 율법으로 정죄 받고 심판 받아야 할 자들을 흠 없는 대속 제물의 희생으로 죄사함을 주고자 하심입니다.

 

이는 장차 흠 없는 제물과 같은 분이 오셔서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할 것을 예표하고 있어요.

흠 없는 대속 제물이란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사함이 주어지고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예수님이 곧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참 성전이 왔으니까 가짜 성전은 허물어 져야 해요.

진짜가 왔음에도 가짜가 있으면 이것이 미혹에 되어요.

가짜가 진짜를 가리는 일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진짜 성전이니까 이젠 가짜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나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고자 오셨어요.

어떻게 죄에서 구원을 합니까?

이는 자기 백성들이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심으로서 하십니다.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겠다고 아멘으로 약속을 하였는데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어요.

그럼 약속대로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실제로 죽어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약속하신 그 아멘을 대신 지키신 것입니다.

 

약속은 이스라엘이 했는데!

그 약속은 예수님이 지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멘의 성취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예수님이 “아멘이시오” 라고 하면서 내가 바로 아멘을 지키는 분이라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종말의 교회도 구약의 교회와 같아졌다는 말입니다.

자기들이 아멘을 지키겠다고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니다 아멘은 너희들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킨다는 뜻으로 종말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아멘이시오 라면서 아멘을 지키는 분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예수님의 초림은 예수님의 재림의 모형이에요.

영적 상황이 같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종말에도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오셨고,

신약의 종말에도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오십니다.

 

이 편지가 쓰여질 당시는 초대교회에요.

초대교회의 교회에 구성원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어요.

유대인들은 아멘이시오 라고 하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대번이 알아먹었어요.

그건 자기 조상들이 수없이 행하여 왔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조상들의 약속을 대신 지키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이 대신 다 지켜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 들였어요.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아멘이시오 라는 것으로 출발을 하였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이루신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바탕 위에서 출발을 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 기독교가 로마 카토릭이 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시는 아멘이시오가 사라져 버렸어요.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로마 카토릭은 예수를 믿지 않아요.

예수를 본 받고 닮아야 할 분으로 여겨요.

그래서 로마 카토릭 교리는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에요.

착한 사람이 되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이걸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인 에베소 교회에서는 예수 믿음으로 시작을 하였는데!

서머나와 버가모를 지나 로마 카토릭 시대를 상징하는 두아디라 교회에 와서는 믿음이 사라지고 행위가 신앙의 근본으로 자리 잡고 말았어요.

인간의 행함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밀어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데 교회를 통해서 잃어버렸던 믿음을 찾아 주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고!

믿음으로 돌아가고!

은혜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인간들이 아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멘이시다 라는 것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서 그 동안 잃어버렸던 아멘이신 예수님을 온 세상에 다시 찾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찾은 예수님으로 개혁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개혁 교회 시대가 어간 500년이 흘렀습니다.

개혁 교회가 500년을 흘러오면서 마치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이 온 세계에 퍼져 나가면서 엄청난 부흥을 합니다.

 

기독교가 들어가면서 물질의 풍요도 함께 따라갑니다.

교회가 부흥하면서 교인들의 삶에 질도 향상이 됩니다.

이젠 등 따습고 배부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삶에 질이 개선이 되고 등 따습고 배가 부르자 인간들이 자기 가치 챙기기를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 인간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인본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의(義)는 사라지고 인간의 행위가 의(義)로 둔갑을 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다시 카토릭이 되고 만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에 행위가 차지하고!

은혜의 자리에 법이 차지하고!

말씀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과 상식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이 사리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종말 시대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예수님이 아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멘을 담당 하셨다는 것을 상기 시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아멘”을 신약에서는 “진실” 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은 아멘 아멘과 같아요.

오늘 본문에서 “아멘이시오” 라는 말은 “아멘이신 자”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멘이 신약에서는 진실이라고 하였어요.

이러면 “아멘이신 자”가 곧 “진실이신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진실하신 분으로 나타나셨을까요?

이는 인간들이 진실한 자로 행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행위를 의로운 것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아니다!

너희들의 행위가 의로운 것이 아니고 오직 내 행위만이 의로운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멘이신 자와 함께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란?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 된 증인으로 사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약 이스라엘이 아멘이라고 맹세한 그 맹세를 자기 몸으로 지켜내셨어요.

그들의 맹세를 자신의 죽음으로 지켜내신 것입니다.

 

아멘이란? 맹세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맹세는 인간들은 지켜내지 못해요.

오직 하나님만이 지켜 내실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율법을 낭독케 하고 아멘으로 맹세케 하신 것은 그들을 심판 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지키지도 못하는 것을 지키겠다고 맹세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게 하려고 여자의 서원을 남자가 대신 갚도록 하셨어요.

 

민수기 16장을 봅시다.

 

민기 16:1-16절=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두령들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3 또 여자가 만일 어려서 그 아비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 서원한 일이나 스스로 제어하려 한 일이 있다 하자 4 그 아비가 그의 서원이나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듣고도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모든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5 그러나 그 아비가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던 서약이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께서 사하시리라 6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마음을 제어 하려는 서약을 경솔히 그 입에서 발하였다 하자 7 그 남편이 그것을 듣고 그 듣는 날에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8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고 경솔히 입술에서 발한 서약이 무효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 9 과부나 이혼당한 여자의 서원이나 무릇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은 지킬 것이니라 10 부녀가 혹시 그 남편의 집에 있어 서원을 하였다든지 마음을 제어하려고 서약하였다 하자 11 그 남편이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고 금함이 없으면 그 서원은 무릇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은 무릇 지킬 것이니라 12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무효케 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던 일에 대하여 입술에서 낸 것을 무엇이든지 이루지 못하나니 그 남편이 그것을 무효케 하였은즉 여호와께서 그 부녀를 사하시느니라 13 무릇 서원과 무릇 마음을 괴롭게 하려는 서약은 그 남편이 그것을 지키게도 할 수 있고 무효케도 할 수 있나니 14 그 남편이 일향 말이 없으면 아내의 서원과 스스로 제어하려는 일을 지키게 하는 것이니 이는 그가 그것을 들을 때에 그 아내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으므로 지키게 됨이니라 15 그러나 그 남편이 들은 지 얼마 후에 그것을 무효케 하면 그가 아내의 죄를 담당할 것이니라 16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율례니 남편이 아내에게 아비가 자기 집에 있는 유년 여자에게 대한 것이니라”

 

어떤 여자가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여자가 한 서원을 남자가 대신 갚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여자와 상종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서원을 그 남편이 대신 담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여자는 독자적으로 나오지 말라는 거에요.

남편을 앞세우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를 남편 안으로 복속시키는 것입니다.

여자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남편에게 복속된 자로 나오라는 겁니다.

그 남편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신앙의 근본을 예수 안에서 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외쳤던 “그리스도 안”이에요.

“예수 안”이에요.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들이에요.

 

우린 모두가 여자에요.

남자는 예수님 혼자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책임지세요.

성도는 독자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에요.

예수 안에서 사는 자에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이란? 주인이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내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하고만 상대를 하세요.

우리의 서원도 예수님이 대신 지켜내세요.

서원이란? 맹세에요.

맹세를 다른 말로 아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겠다고 아멘 아멘 한 것은 하나님 앞에 맹세한 것과 같아요.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그 맹세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대신 지켜내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을 바탕으로 신약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터 위에 세워졌어요.

예수님의 의로 세워졌어요.

그런데 마귀가 교회 안에 인간의 의를 슬며시 섞어 놓은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인간들의 의가 큰 소리치기 시작 한 것입니다.

자기 의로 교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을 하였어요.

급기야 인간들의 의가 예수님의 의를 밀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문 밖으로 쫓겨나고 만 것입니다.

 

교회의 타락이란? 인간의 행위가 의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교회가 왜? 망했는가요?

인간의 행위를 의로운 것이라고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 지킴을 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말 때 교회가 또 그 짓을 하고 있어요.

자기들이 아멘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아니다 내가 아멘이다 라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의 아멘을 대신 담당하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나타나셨지요.

이건 하나로 연결이 된 말씀이에요.

모두가 종속 구절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아멘이신 분이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분이 곧 창조의 근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나신 것은 새롭게 시작을 하신 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이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겠다는 뜻이에요.

 

“근본(根本)”이라는 말은 “아르케” 라고 하는데 이는 “시작, 우두머리, 모퉁이, 첫, 방백, 권세, 기원, 처음”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이는 새로운 예수님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우두머리인 나라!

예수를 모퉁이 돌로 하여서 세워지는 나라!

예수의 권세로 다스려지는 나라!

 

이름하여 천국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에요.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아멘이신 하나님이 그런 나라를 만드신다고 예언을 하셨어요.

 

이사야 65장을 봅시다.

 

사 65:16-20=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에게 구하고!

맹세하는 자도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라고 하지요.

여기서 “진리의 하나님”이 바로 “아멘이신 하나님”이라는 뜻이에요.

 

아멘이나 진리나 같은 의미에요.

그런데 그 진리의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한다고 합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고 하지요.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세상 바깥에 있는 나라입니다.

역사가 끝이 나면 도래하는 나라에요.

이름하여 천국입니다.

이는 곧 아멘이신 예수님이 천국을 몰고 오신다는 말입니다.

이건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해요.

 

이러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예수님이 창조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이유를 알겠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신다는 말씀이에요.

새로운 세상이 바로 예수님이 재림으로 몰고 오실 새 하늘과 새 땅이에요.

 

라오디게아 교회를 끝으로 교회가 없어요.

교회가 없다는 것은 이 세상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이 끝이 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와요.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예수님이 창조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면 이 세상은 끝이 납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려요.

이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몰고 오세요.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봅시다.

 

계 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사도 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어요.

그리고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진 것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려온다는 말은 우리에게 덮쳐 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몰고 온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천국에 간다고 하지 않고 천국이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는 거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세요.

구원은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해요.

 

2부에서 계속합니다.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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