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3:7-13)
계 3:7-13=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또 한 해가 지나가네요.
며칠이 지나면 새로운 한 해가 시작이 됩니다.
주 안에서는 항상 오늘날이지만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는 어제이고 오늘이고 내일입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한 해 한 해가 지난다는 것은 정한 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정한 끝은 어디일까요?
예수님께서 승천 하실 때 제자들에게 다시 오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비밀을 교회에다 허락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을 맞은 곳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속에는 역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담겨져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로 시작이 된 교회 시대가 여섯째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까지 왔습니다.
이제 해가 저물어 가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이 되면 바다에 친 그물을 끌어 올려서 그물 속에 들어 온 고기를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선별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좋은 고기이고 어떤 것이 나쁜 고기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어린 양의 생명책입니다.
창세전에 기록이 된 어린 양의 생명책을 가지고 선별하십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이 녹명이 된 고기는 좋은 고기이고 녹명되지 않은 고기는 나쁜 고기입니다.
아침에 아이가 학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하교 할 때가 되어서 비바람이 붑니다.
아침엔 청명한 날이라서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우산을 들고 학교에 갑니다.
누굴 찾으러 갔나요?
자기 자식입니다.
수 많은 아이 중에서 자기 지식만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이 오십니다.
누굴 데리러 옵니까?
자기 백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하여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교회를 통하여 말씀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 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 시대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건 마치 씨를 밭에 뿌린 것과 같습니다.
씨가 자라 열매를 맺고 추수하기까지 햇빛과 비와 바람이라는 변화 무쌍한 날씨를 겪게 됩니다.
좋은 날도 있고 궂은 날도 맞이합니다.
좋은 날과 궂은 날을 겪으면서 열매는 쓴 맛은 제거하고 단 맛이 들어가면서 익어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성도도 열매의 자람과 같이 수많은 부침을 겪으면서 익어가고 맛이 들어갑니다.
우리의 신앙이 롤러코스트와 같은 과정을 겪어 가듯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역사 역시 그러합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를 보면 롤러코스트 역사에요.
때론 부흥기를 맞이하고 때론 쇠퇴기를 맞이하였어요.
마치 사시기의 역사와 같이 걸어 왔습니다.
제국의 흥망성쇠와 같이 교회의 역사도 흥망성쇠를 거쳐 온 역사입니다.
이건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과 같아요.
아이가 갖가지 병치레를 하면서 자라가는 것과 같이 기독교의 역사도 흥함 패함의 아픔 가운데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아사아의 일곱 교회는 신약의 전 역사를 아무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교회로 시작한 교회가 서머나와 버가모와 사데와 두아디라를 거쳐서 오늘 빌라델비아까지 왔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숱한 아픔과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사데 교회를 교회사적으로 예언적인 의미로 보면 종교개혁 시대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오늘 살펴볼 빌라델비아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시대를 말하겠지요.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 역사는 개혁교회의 부흥의 역사입니다.
루터로부터 시작이 된 종교개혁이 온 세계로 확산이 되면서 교회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말씀을 되찾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은혜와 믿음을 회복하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이제 새로운 교회가 세계만방에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이건 제 2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모습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신 모습이 그 시대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세움을 입은 도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나서 완전히 타락하였습니다.
이는 빌라델비아가 지진으로 망가진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으로 다시 기독교가 개신교로 일으켜 세움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진으로 폐허가 된 빌라델비아가 다시 세움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빌라델비아를 가지고 개혁교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 교회 모습 속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봅시다.
그럼 빌라델비아 교히를 통해서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입니다.
계 3:7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거룩하고 진실하다” 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사용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거룩하신 분이고!
하나님만이 진실하신 분입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거룩하고 진실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창조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새로운 창조를 하시겠다는 싸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창조가 뭔가요?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거룩이란? 죄 아래 가두어진 세상에서는 사용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룩은 역사 바깥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역사 바깥에 계신 분이 역사 속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창조를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를 성도의 구원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는 자들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거룩하고 진실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서 새롭게 창조하는 일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새롭게 교회를 세우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를 통해서 천년 묵은 고목을 잘라내는 종교개혁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종교 개혁의 기치 아래 새로운 개혁 교회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카토릭이 무너지고 개신교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제 낡은 집을 헐어버리고 새 집을 짓는 일을 시작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핏값으로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을 가지고 1200년 묵은 로마 카토릭이라는 고목을 무너뜨렸습니다.
잃어버렸던 말씀을 찾아 주셨습니다.
잃어버렸던 믿음을 찾아 주셨습니다.
잃어버렸던 은혜를 찾아 주셨습니다.
이제 개혁교회는 오직 말씀과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의 바탕 위에 새로운 집을 짓습니다.
이 일을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하여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서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천국 복음이 세계만방에 증거 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니까 빌라델비아 교회를 교회사적으로 말하면 종교 개혁 이후에 나타난 선교 시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선교 시대를 상징하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왜? 다윗의 열쇠를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이는 이사야 선지자의 증거를 보아야 이해가 됩니다.
이사야 22장을 봅시다.
사 22:20-24=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21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될 것이며 22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23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24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리라”
이 때는 히스기야가 유다 왕으로 있을 때입니다.
국운이 기울어 갈 때입니다.
곧 있으면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이러한 때에 국고를 맡아서 관리하던 셉나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놈이 사리사욕을 채운 겁니다.
그래서 왕이 셉나를 좇아내고 그 자리를 엘리야김에게 맡깁니다.
엘리야김이 새로운 국고 지기가 된 것입니다.
국고 지기란? 나라의 살림살이를 다 맡은 자입니다.
실질적으로 나라 살림을 하는 자입니다.
이걸 이사야 선지자는 다윗의 집의 열쇠를 가졌다고 합니다.
엘리야김이 다윗의 집에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이 모든 양식을 엘리야김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엘리야김에 의하여 다윗의 곡간이 열리고 닫히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김이 곡간의 문을 열어주면 백성들이 양식을 얻고 곡간의 문을 닫으면 백성들이 굶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열쇠를 가진 자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엘리야김에게 하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엘리야김에서 옷을 입히고 띠를 띠게 합니다.
그리고 정권을 그 손에 맡깁니다.
그러면서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된다고 합니다.
이건 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열쇠를 가진 엘리야김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다윗의 집안에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난 예수님이 엘리야김처럼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늘나라 열쇠를 가지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복음(구원)의 문이 열리고 닫힌다는 말입니다.
즉 성도를 구원하는 일을 예수님이 직접 행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걸 빌라델비아 교회 당시의 모습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당시 빌라델비아 지역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어요.
이들은 스스로를 선민이라고 했어요.
자신들만이 다윗의 유업을 이어받은 적통자들이라고 자랑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셔서 아니다 내가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고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유대인들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놈들은 자칭 유대인이지 진짜 유대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진짜 유대인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예수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나 예수가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다고 합니다.
내가 넣어 주는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열쇠를 신약적인 의미로 이해해 봅시다.
다윗의 열쇠란? 다윗 왕국의 회복을 말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난 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이 말을 하였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증거 하였어요.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회복한다는 것은 다윗 왕국의 회복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다윗 왕국의 회복을 꿈꾸어 왔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면 다윗 왕 때와 같은 시절이 도래 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메시야가 오면 이스라엘이 세계를 지배하는 그런 때가 온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나라의 회복을 바란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갖가지 기적을 행하자 백성들이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이 분이 오시리라 약속하신 그 메시야인가 라고 하면서 기대감이 한창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열렬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호 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를 몰아내고 강성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정치적인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에요.
분명히 예수님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러 오셨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회복하고자 하는 다윗의 장막은 육적인 이스라엘의 나라의 회복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을 부국강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몰고 온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나라에요.
예수님은 영적 이스라엘을 회복하고자 오셨어요.
무너진 다윗의 장막도 영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럼 영적으로 회복되는 다윗의 장막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성경이 말하는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는 나라에요.
다윗이 누구입니까?
목동이었어요.
그런 목동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어요.
다윗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어요.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서 이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 은혜로 왕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백성들도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 사실을 알리고자 하나님은 왕의 자격도 없는 자를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풍습을 보고서 자기들에게도 왕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왕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 백성이 나를 왕에서 밀어낸다고 탄식하면서 왕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하신 것은 왕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등극을 합니다.
사울은 크고 잘 생기고 출중한 사람이었어요.
힘도 넘쳤습니다.
인간들이 바라는 왕 감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주저 없이 사울을 왕으로 섬깁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합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왜? 순종하지 않았나요?
이는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 순종이란? 자기 생각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자기 생각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에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은 하나님이에요.
이스라엘의 왕은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왕이에요.
그런데 사울은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세웁니다.
이건 참고적으로 살펴보고 갑시다.
사울과 다윗은 언약적으로 말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
옛 언약인 율법 신앙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합니다.
자기 행위로 나아갔어요.
그러나 새 언약인 믿음 신앙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갑니다.
사울과 다윗은 스펙 자체가 달라요.
사울을 스펙이 화려한데 다윗은 아무 것도 없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사울은 일류 대학을 나오고 외국 유학도 다녀오고 박사 학위도 받았어요.
엘리트 중에 엘리트에요.
그런데 다윗은 알바 한다고 학교도 못 다녔어요.
거기다가 생긴 것도 못 생겼어요.
사울은 외모가 출중한데 다윗은 초라해요.
사울은 언변도 좋고 조직의 장악력도 탁월했어요.
그러나 다윗은 언변도 부족하고 조직의 장악력도 없었어요.
다윗은 내 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내 세울 것이 없으니까 자기 생각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에요.
다윗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것은 배운 것도 없고 내 세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다윗이 사울처럼 잘난 사람이었으면 자기 생각으로 나라를 통치하였을 것입니다..
순종은 자기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순종하지 않아요.
자기 뜻을 피력해요.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어요.
다윗은 나라를 통치하면서 늘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것은 자신은 왕이 아니고 하나님이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백성들에게 이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는 나라라고 알려 주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 치세 할 때 부국강성한 나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게 다윗의 장막이에요.
이스라엘이 부국강성 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죽고 나자 그 아들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 이스라엘은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어요.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사울 왕처럼 자기 생각으로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좇아내고 말았어요.
그리하여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고 맙니다.
결국 다윗의 장막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앗수르에게 망한 북쪽 이스라엘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이방인과 혼합이 되어서 혈통이 사라졌어요.
혈통적으로 남은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남쪽 유다입니다.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남쪽 유다는 제국의 흥망성쇠에 따라서 바벨론에 종노릇하다가 메데 바사의 종살이를 합니다.
메대 바사의 고레스가 통치하던 시절에 포로로 잡혀갔던 남쪽 유다는 고레스의 해방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메데 바사도 영원하지 못하고 헬라에게 망합니다.
헬라 또한 로마에게 망하였어요.
메데 바사 시절 고레스의 해방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긴 하였지만 여전히 남쪽 유다는 독자적인 나라를 가지지 못하고 로마의 종살이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침을 통하여서 유대인들은 메시야 대망 사상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게 됩니다.
메시야만 오면 이방 나라에게 종살이하는 이 지긋 지긋한 치욕의 역사를 마감하고 과거 다윗 시절과 같이 부국 강성한 나라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바라던 메시야가 왔다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제 이 예수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회복 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에 부응치 못하고 힘없이 십자가에 죽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서 유대인들이 헛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고 고발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는 것은 너희들이 바라는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회복 시켜주는 다윗의 장막은 인간의 힘으로 다스려지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셔서 다스리는 그런 나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는 나라란 말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오심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려지는 나라가 생겼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이 생긴 겁니다.
비로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회복이 된 것입니다.
회복이 된 다윗의 장막이 바로 교회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이에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세워진 교회는 다윗의 치세 때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 되어서 다스리기 시작하였어요.
예수님이 왕이 되어서 성도들을 다스렸습니다.
초대 교회는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다스려졌어요.
그러던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인간의 힘의 지배 논리에 빠지고 맙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교황의 힘이 난무하기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고 교황의 말이 하나님 말씀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왕에서 밀려나고 교황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급기야는 예수님이 회복한 다윗의 장막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교회가 또 다시 세상의 힘에 굴복당하고 종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세월이 중세 암흑시대를 거쳐 왔습니다.
그러다가 사데의 남아 있는 그 몇 명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개혁 교회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건 마치 구약 교회가 무너지고 신약의 교회가 세워진 것과 같아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다스려지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으로 다스려지는 그러한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시고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그런 교회를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교회사적으로 예언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선교 시대를 의미해요.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어요.
그동안 로마 카토릭에게 빼앗겼던 성경을 종교 개혁으로 되찾게 된 것입니다.
신부들에게 빼앗겼던 성경이 성도들에게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잃어버린 말씀을 되찾자 곳곳에서 회개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어요.
이는 말씀이 성도들 안에서 일을 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말씀이 일을 하기 시작 하자 어찌 할꼬 하는 통회자복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마다 제 2의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신흥국가인 미국이 앞장을 선 겁니다.
알다시피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로마 카토릭 신앙에 반대하고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떠난 사람들이 세운 나라에요.
그런 그들이 종교 개혁을 맞이하자 온 세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어요.
전 세계적으로 개혁교회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로마 카토릭이 지배하던 그 자리로 개혁교회가 들어가기 시작을 하였어요.
이건 마치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이방나라로 팔려간 요셉이 나중에 자기를 쫓아낸 형제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해주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청교도들을 미국으로 보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미국이 온 세계에 선교사들을 파송한 것은 오로지 하나 형제 사랑 때문이었어요.
자신들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빌라델비아 라는 이름의 뜻에 잘 나타나 있어요.
“빌라델비아” 라는 말은 “사랑”을 의미하는 “필로스”와, “형제”를 의미하는 “아델포스”가 합쳐진 말로서 이는 “형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빌라델비아 교회로서 형제 사랑이라는 일념 하나로 온 세계에 개신교의 선교 시대를 주도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이 세계 각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오로지 하나 형제 사랑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미국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권케 하여서 온 세계에 형제 사랑의 씨앗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대 부분의 선교사들을 순교를 하였어요.
하나님께서 이들을 예수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사용 하신 것입니다.
미국은 신생국가에요.
세계에서 역사가 가장 짧은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되었어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날 선교 시대를 예비 하신 것입니다.
미국은 기독교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에요.
그런데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富)를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국에 거부(巨富)들을 일으켜서 선교 하는데 물질을 사용하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 미국의 부자들은 물질을 대 부분 선교 하는데 사용하였어요.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형제 나라를 위하여 순순히 내어 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흥국가인 미국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의 부(富)를 바탕으로 세계 각국으로 선교사를 파송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지키고자 모인 무리들을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날 선교 시대를 위한 씨앗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선교의 문을 활짝 열 것을 화폐 속에도 담아 놓았어요.
빌라델비아는 화폐의 도안이 “열린 문”이었습니다.
이건 선교 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폐의 도안 속에 빌라델비아 시대가 되면 복음에 문이 활짝 열릴 것을 미리 예언해 놓으신 것입니다.
8절을 봅시다.
8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볼지어다!
내가(예수님)이 네(우리)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하지요.
이는 예수님이 복음의 문을 열어주고 또한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열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언대로 빌라델비아 시대가 되자 복음의 문들이 온 세계에 열리기 시작을 하였어요.
이 때는 복음을 전하면 스폰지에 물이 스미듯이 스며들어 갔어요.
이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의 마음 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적이에요.
1866년에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좌초를 합니다.
이 때 조선 군사들이 불 화살을 쏘아서 배를 태워 버려요.
그러자 선원들이 불에 타 죽거나 강에 뛰어들어 죽었어요.
그 중에 토마스 선교사가 있었어요.
토마스 선교사가 물에 뛰어 들어서 겨우 목숨을 건집니다.
그런데 강가에서 기다리던 조선 군사가 있었어요.
박춘권이라는 사람입니다.
박춘권이가 강 위로 기어 올라온 토마스 선교사를 대동강 변에서 칼로 목을 베어서 죽였어요.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 선교사에요.
그런데 중국에서 조선에 대하여 듣고는 조선에 선교를 하여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조선 말을 3개월 정도 배울 때였습니다.
때 마침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면” 호가 한국으로 간다고 하기에 올라타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 땅을 밟자 말자 죽은 겁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죽어가는 자리에서 자기를 죽이는 박춘권씨이라는 사람에게 어눌한 말로 전도를 한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목숨이 끊어지는 중에도 성경을 품에 안고 전도 하였어요.
그런데 그 성경을 박춘권씨가 보고서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게 최초로 우리나라에 전해진 개신교 역사에요.
이 분이 나중에 영수가 되는데 지금식으로 말하면 장로님이에요.
그 후 대동강 주변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은 한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평양을 제 2의 예루살렘이라고 할 만큼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어요.
이 때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본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선교 보고를 하기를 한국의 평양에서 제 2의 오순절 성령의 불길이 일어났다고 했어요.
한국교회는 토마스 선교사의 피로 복음을 받아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오로지 하나 조선 땅에도 구원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온 것입니다.
이게 바로 빌라델비아의 형제 사랑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말을 3개월 배웠어요.
외국인에게는 한국말이 엄청 어렵다고 해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말이 한국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고작 3개월 배운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전했겠어요.
박춘권씨는 성경을 처음 접하였어요.
그런데 그 속에서 예수를 믿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성령이 그의 마음을 열어서 성경이 이해되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능력도 아니고 박춘권씨의 능력도 아니에요.
오직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여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그 복음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말도 어눌한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잘 전했겠어요.
그냥 국어책 읽듯이 전했어요.
그럼에도 말씀이 살아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어요.
선교사들이 설교를 잘해서가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초대교회 때 바울의 말을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서 청종하게 하였듯이 선교 시대에도 주께서 각인의 마음을 열어서 선교사들의 말씀을 청종케 하신 것입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다는 것은 주께서 그 믿음을 붙잡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이 낯선 곳에서 죽어 가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셨고 주의 종들을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적은 능력이란? 능력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는 그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로 보면 교인들의 모습이 볼품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일천한 사람들이 복음을 지켜냈다는 뜻입니다.
선교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화려한 언변으로 전해지지 않았어요.
복음은 항상 연약한 자들로부터 지켜져 왔고 전해져 왔어요.
이는 복음의 능력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위치한 도시 중에서 가장 역사가 짧은 도시입니다.
그럼에도 종교성이 가장 많은 도시였어요.
그 이유는 도시적 기반이 항상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주후 17년에 소 아시아 지역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빌라델비아는 완전히 무너졌어요.
그런데 도시의 위치가 사방으로 연결이 된 길목이라서 로마 정부가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다시 복구를 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기독교가 로마에게 무너졌다가 종교 개혁으로 다시 일으켜 세움을 입은 것과 같아요.
하지만 큰 지진 이후로부터는 계속하여 크고 작은 여진들이 일어났어요.
크고 작은 지진이 많이 일어나니까 불안 한 겁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를 모르니까 상대적으로 종교성이 강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사람들은 항상 여차하면 도시를 떠날 채비를 하고 살았어요.
즉 나그네와 행인 같이 살았던 것입니다.
빌라델비아는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누렸어요.
그러고 빌라델비아는 포도 농사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집집마다 포도주가 차고 넘쳤어요.
그 당시 빌라델비아 산 포도주를 최고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영적 의미가 있어요.
빌라델비아 도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의 영적 의미로 살펴봅시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선교 시대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종교 개혁 이후 일어난 제 2의 부흥 운동을 말합니다.
이 때 주역을 담당한 나라가 미국이에요.
미국은 역사가 가장 짧은 나라에요.
이건 마치 빌라델비아가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아요.
하지만 미국은 빌라델비아처럼 무역업이 발달하고 상업이 발달하여서 세계 최강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라델비아는 포도 농사가 잘 되어서 집집마다 포도주가 차고 넘쳐서 포도주 인심이 그렇게 좋았어요.
집집마다 차고 넘치니까 지나가는 길손에게도 물 주듯이 주었어요.
이건 청교도 이념으로 세워진 미국에 복음이 차고 넘친 것과 같아요.
복음을 나누어주는데 사랑이 넘쳤던 것입니다.
미국은 빌라델비아가 포도주가 차고 넘쳐서 길 가는 나그네들에게도 물 주듯이 나누어 준 것처럼 미국은 복음을 온 세계에 나누어주었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선교에 대한 열심이 특심하여서 온 세계로 복음을 포도주 나누어주듯이 나누어 준 것입니다.
미국의 선교 역사를 보면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요.
마치 선교에 미친 나라 같았어요.
18세기 미국에서는 각양의 선교 단체들이 만들어지는 붐이 일어났어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선교회가 조직이 되어서 선교사들을 파송하였어요.
하지만 미국이 주도 하였어요.
미국의 주도하에 온 세계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미국은 많은 교파와 교단들이 있었어요.
교단마다 자기 교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앞 다투어 경쟁하면서 선교사들을 파송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교단들도 미국으로부터 수입이 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교세 확장이라는 것을 가지고서 자기 백성 찾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빌라델비아 사람들이 잦은 여진으로 언제 집이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나그네 같이 살았듯이 미국의 선교 열풍으로 온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어떤 현상들이 일어났는가 하면 재림 신앙이에요.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간절했어요.
이 세상은 영원한 곳이 아니고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천국이 있다는 소망으로 세상의 아픔들을 이겨냈어요.
우리나라도 기독교가 처음 들어오고 나서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이 재림 신앙이에요.
제가 어렸을 때 천막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 때 가장 많이 부른 찬송가가 재림 찬송이에요.
비가 새는 곳에서도 “먼 하늘 조그만 구름만 떠도 행여나 우리 주님 오시는가봐” 라는 찬송을 엄청 불렀어요.
60-70년대 우리나라는 6.25 전쟁 후라서 극심한 가난 때문에 소망이라고 천국 밖에 없었어요.
자연히 예수님의 재림이 유일한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가난과 고난이 천국을 소망케 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는 진짜 초대교회 같이 사랑이 차고 넘쳤어요.
우리나라의 교회부흥사를 보면 유치하기 그지없어요.
유치하다는 말은 지금 식으로 복음을 깊이 있게 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당시에 목사님들은 다 배우지 못한 분들이에요.
학교 교육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분들이 대다수였어요.
그럼에도 말씀을 증거 하면 회개가 일어나고 은혜를 받았어요.
최권능 목사님 같은 분들은 예수 천당 하여도 지나가는 개가 듣고 회개 하였다는 말을 할 정도였어요.
그만큼 복음이 단순했어요.
그럼에도 먹혔어요.
복음이 살아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든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복음 전도자들은 대부분 부족한 사람들이었어요.
미국의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무디를 보세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그가 말씀을 전하면 모든 무리들이 은혜를 입었어요.
어떤 이들은 무디의 설교를 가지고 문법도 맞지 않고 어휘도 맞지 않는 설교라고 하면서 폄훼하고 조롱했어요.
무식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수많은 성도들이 꼬꾸라지는 회개운동이 일어났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주께서 열린 문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무디의 설교와 지금 이 시대 목사님들의 설교를 비교해 보세요.
지금은 신학적으로 엄청 논리적이고 세련되어 있어요.
그럼에도 안 들어요.
왜? 그런가요?
지금은 주께서 문을 닫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어지간해서 꿈쩍도 하지 않아요.
배운 게 많은 사람일수록 복음을 받지 않아요.
이성적으로 판단만 하였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애통하지 않아요.
그만큼 마음이 강퍅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추수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요나서를 보세요.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건성으로 전했어요.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짐승까지 회개하였어요.
이건 요나가 바란 것이 아니에요.
요나가 놀란 겁니다.
이럴 순 없다는 거에요.
아니 어떻게 건성 건성으로 한 소리를 듣고서 온 나라 백성들이 회개를 하느냐에요.
이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이 마음을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난 후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서는 하나 같이 폭발적인 회개 운동이 일어났어요.
이는 성령이 각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교회사 적으로 선교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복음은 항상 약하고 못난 자들을 통하여서 증거가 되어져 왔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생각에는 많이 배우고 잘난 자들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 되면 잘 먹히고 효율적이고 좋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역설적이에요.
많이 배울수록 복음을 전하지 않아요.
성경은 학문으로 배운 것을 가지고 도리어 복음을 훼손해요.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인본주의로 빠지고 말아요.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을 학문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학문은 이성을 동반하여서 이해가 되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사람을 설득키 위하여 상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본주의로 빠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복음은 설득하는 것이 아니애요.
억지로 사람들에게 들어 달라고 읍소하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하늘나라 이야기에요.
하늘나라 사람이 아니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은 하늘로부터 난 사람들만 알아 듣게 하고자 함이에요.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상식과 이성적 해석을 금지해요.
복음을 전하면 너희와 저희로 갈라져요.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은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으나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였어요.
너희는 택함을 입은 자들이고, 저희는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을 말해요.
이는 너희는 들려지게 되어 있고 저희에게는 안 들려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귀를 받아야지만 들려져요.
그 귀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세요.
자기 백성은 반드시 복음을 듣게 되어 있어요.
이는 예수님이 열쇠를 가지고 열고 닫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는 들려지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듣게 해 주세요.
그러나 생명책에 녹명 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귀를 막아 버려요.
들려지지 않게 하세요.
복음은 스스로 심판성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열린 문서이고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닫힌 문서에요.
이처럼 복음은 스스로가 너희와 저희로 갈라내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신학으로는 복음을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학문으로 배운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 해석을 하게 되고 결국 인본주의 신앙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보편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많이 공부한 사람들 중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나 찾아보기 힘이 들 정도로 미미해요.
설령 복음을 전하여도 교단의 눈치를 살피고 교인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커지면서 교인들 말이 하나님 말씀을 앞서기 시작합니다.
큰 교회들이 복음 전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교회가 클수록 복음을 전하지 않아요.
복음을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는 구조 속으로 빠지고 말아요.
왜냐하면! 교인들이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서 이 땅에서의 천국 생활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못 살고 어려울 때는 천국이 소망이었지만 배에 기름끼가 끼면서 이 땅이 그만 천국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 싫어해요.
죄에 대하여 말하면 얼굴을 찡그려요.
지금은 노골적으로 마음에 위로가 되는 부담 없는 설교를 해 달라고 해요.
그러다 보니 목사들이 성경을 인본주의 입장에서 해석하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 귀에 듣기 좋은 말로 각색을 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교회가 커지면 복음은 감추어져 버려요.
지금은 복음의 문이 닫힌 시대가 되었어요.
9절을 봅시다.
9절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교회 안에 사단의 회가 있다고 하지요.
사단의 회란? 사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누구인가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사단은 항상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고 변질을 시켰어요.
하나님 말씀에다가 인간의 생각을 섞는 일을 하였어요.
이를 일컬어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언제 혼합주의가 일어나는가 하면 부요할 때에요.
신명기 32장을 봅시다.
신 32:15-18=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지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18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
신명기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으로 들어가고자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언서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라고 하신 말씀이에요.
모세가 지금 앞날을 예언하는 거에요.
너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먹고 배부름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을 일컬어 젓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풍요롭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풍요로움이 하나님을 떠나는 단초가 되어요.
모세는 너희가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신을 섬기게 된다고 합니다.
다른 신이란? 마귀에요.
그 마귀는 너희 열조들도 두려워하지 않던 신이라고 하지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친근히 하였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어느 시대이고 마귀의 미혹에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왜?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는가요?
이는 마귀가 인간에게 떡을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떡에 있어요.
인간들에게 있어서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떡(돈)의 많고 적음이에요.
떡(돈)이 많으면 행복해 하고 떡이 없으면 불행해 해요.
이는 가치관이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떡을 마귀가 주어요.
인간들에게는 항상 먹고 사는 것이 제일 우선이었어요.
인간이 신을 찾는 이유도 배부름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배부름을 주는 신을 섬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을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그걸 지키고자 해요.
이걸 마귀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이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타협이 일어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선교 시대를 지나면서 교회가 부흥을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 할수록 하나님 말씀은 점점 감추어져 버렸어요.
교회에서 복음이 사라지기 시작을 하였어요.
하나님 말씀이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이 되어지고 말았어요.
이는 마귀가 교회 안에 인본주의를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앞서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적은 능력이란?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떤 힘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고 힘도 없는데 주께서 그들을 들어서 사용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데 교회의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그 종교개혁의 바톤을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제 빌라델비아 교회는 사데 교회가 되 찾아온 복음을 온 세상에 겨자씨처럼 뿌리기 시작을 합니다.
이에 겨자씨 같은 복음은 온 세계에 뿌려져서 큰 나무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자 각종 새 들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이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긍정적으로는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경제적 부흥이 일어나고 삶에 질이 개선이 되어서 번영과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가 있어요.
맞아요.
교회사를 보면 복음이 들어가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그 나라가 개화가 되어요.
즉 새로운 문명을 맞이하여서 깨어난단 말입니다.
국민들의 의식이 깨어나면서 삶에 질이 개선이 되고 경제적 부흥을 맞이하게 되어요.
이건 긍정적 요소에요.
그런데 교회가 부흥을 하고 사람들이 삶에 질이 개선이 되고 자유가 주어지고 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타락이에요.
교회가 인본주의로 흐르게 되어요.
인간들의 행복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복음이 변질이 되어요.
복음을 합리화하기 시작합니다.
혼합주의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슬슬 신앙이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을 합니다.
이게 선교 부흥과 함께 나타난 현상들이에요.
예전에 살기 어려울 때는 죽기 살기로 예수를 믿었는데,,
등 따습고 배가 부르다 보니까 이젠 그럴 필요성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교회)를 떠나자니 찝찝하고,,,
그렇다고 옛날처럼 그렇게 죽기 살기로 하기는 싫은 거에요.
이젠 모든 것을 가졌거든요.
그래서 나타난 것이 합리주의에요.
신앙을 합리화 하는 것입니다.
이건 빌라델비아 지역의 상황을 보면 잘 이해가 됩니다.
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는 나라들은 모두가 길드라는 조합을 형성하여서 움직여졌어요.
알다시피 길드는 “가이사 는 주(主)”라는 것을 심어주기 위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길드에 가입하자면 “가이사는 주이십니다” 라는 일종의 선서를 해야 했어요.
이 고백이 없으면 길드에 가입 할 수가 없었어요.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들은 모두가 길드 회원들이에요.
먹고 살자면 싫든 좋든 길드와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해요.
하지만 길드는 신전에서 행하여지는 각종 이방신들을 위한 예배 행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기독교 신자는 이방 신에게 예배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럼 당연히 불이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사단의 회인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 복음을 훼손하고자 혼합주의를 섞고 있었어요.
어느 시대이고 항상 유대인들은 혼합주의로 복음을 훼손하였어요.
유대인들은 이방 신전에서 행하여지는 의식을 그 사회의 문화적 관습으로 이해하였어요.
그러니까 신전에서 행하여지는 예배를 로마 시민으로서 당연히 행하는 하나의 국가적인 의식이라고 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교회 안에서 가르쳤어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사단의 화라고 하고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이들의 이설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나라가 과거 일제 강점기 때에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가 아니라 그냥 국가적인 의례라고 가르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교회 안에서 목사들이 가르쳤어요.
그러니 교인들은 부담감 없이 신사참배를 했어요.
어느 시대이고 육적 교인들은 목사의 말을 듣게 되어 있어요.
육에 속한 자들은 육신의 아픔을 싫어하기 때문에 신앙적인 충돌이 일어나면 항상 신앙의 합리화를 추구하고 그럴싸한 명분으로 타협을 하여서 고난을 피해 갑니다.
이러한 사상이 교회가 부요해지면 반드시 나타나는 혼합주의 사상입니다.
마귀는 항상 인간의 이성에 합당한 논리로서 신앙을 무너뜨렸어요.
이 시대도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야 어차피 신앙생활은 동호회 모임처럼 취미 생활로 하니까 그렇다고 쳐요.
하지만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 중에서도 마귀적인 논리에 빠진 자들이 많아요.
이들은 마치 복음 알면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고 해요.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이방인과 동일한 가치로 살아가요.
복음을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면죄부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시대적인 상황만 다르지 어느 시대나 영적인 의미는 동일해요.
빌라델비아 교회 안에도 신앙을 자기 범죄에 합리화 하여서 이용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어요.
이들이 자칭 유대인이고!
이러한 자들의 모임을 사단의 회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지켜주셨어요.
그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신앙을 지킨 자들이 있었어요.
이들에게는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10-11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이들을 붙잡아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말씀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무엇과 같은고 하니 밥을 먹여 놓고 일을 시키는 것과 같아요.
일을 하자면 힘이 있어야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힘은 밥으로부터 나와요.
일은 밥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어요.
그 믿음이 언약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약을 믿은 것이 아니고 믿음이 언약을 믿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안 되어요.
뒤 바꿔지면 유대교가 되어요.
유대교는 자기들이 말씀을 지킨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자기들 의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리새인의 기도 속에 나타나 있어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전도하고 봉사했다고 하잖아요.
이러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들 힘으로 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게 불법이에요.
유대교는 감사는 없고 자랑만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놓치니까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도 받았고!
믿음도 받았고!
은혜도 받으면서 살고 있어요.
우리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깨달아지게 해 주셨어요.
믿어지게 해 주셨어요.
그러므로 복음 아는 것으로 자랑하지 말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아는 자들을 하나님은 붙잡아 주세요.
왜냐하면! 그들을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장차 온 땅에 시험의 때가 닥칩니다.
이는 역사적인 종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서 당하는 갖가지 시험들을 이겨내게 해 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린 이 세상을 살면서 수 많은 시험들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온 것은 주께서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제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을 봅시다.
12-13=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성전의 기둥이 되고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1차적으로 그 당시 상황을 이해하여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 빌라델비아는 잦은 지진으로 모든 건물이 붕괴가 되었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서 유독 붕괴 되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신전의 기둥들이었어요.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해 주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았아요.
아! 하나님께서 지진 같은 환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게 지켜 주시겠구나로 이해하였어요.
그 어떤 시험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당시 빌라델비아 사람들은 지진이 나면 밖으로 나갔다가 지진이 그치면 다시 돌아오곤 하였어요.
이건 마치 물 난리가 나면 저(底) 지대 있는 사람들이 고(高) 지대로 피하였다가 물이 다 빠지고 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 와서 산 것과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지진으로 인하여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바깥에 있는 하늘나라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여서 흔들림이 없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이기는 자들에게 기록하겠다고 약속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준다는 말입니다.
이름을 준다는 말은 하나님의 것이란 뜻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도장을 찍어준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구원 얻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시온산에 서 있습니다.
시온산이란? 하늘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자들의 이마에 이름이 하나 적혀 있어요.
누구 이름인가 하면 어린 양의 이름이에요.
이는 예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도장을 찍어 놓은 것입니다.
도장이 찍혔다는 것은 불변하다는 뜻입니다.
지진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은 기둥처럼 마지막 때 큰 환란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반드시 하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성도가 들어갈 궁극적인 성전은 하늘나라에 있어요.
거기에는 우리 힘으로 가는 곳이 아니에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가요.
하나님께서 그 이름들을 하늘나라 성전에 기록해 놓았어요.
요한계시록 21장을 봅시다.
계 21:10-14=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왜? 새 예루살렘 성에 성도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나요?
이는 참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피값으로 자기 백성들을 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 이름을 낙인으로 찍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낙인으로 찍힌 자들은 천국에서 영원한 예수님의 소유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신랑과 신부라고 합니다.
비로서 창세기에서 아담 안에서 하와가 나왔다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다시 아담과 한 몸이 되어서 둘이 하나가 되는 그림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하여 약속하신 하늘 예루살렘이 곧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가는 곳이 아니에요.
천국이 우리에게 와요.
그래서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계세요.
그러니 깨어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잘 때인지 깰 때인지!
때를 분별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곧 도착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때를 알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께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셔서 하루 하루가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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