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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사랑은 아무나 하나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11. 22.

 

 

사랑은 아무나 하나

 

(김성수 목사)

 

 

(요 15:7-19) “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1998년 경북 안동에서 택지 조성을 위해 분묘 이장을 하던 중에 조선 시대에 살던 이응택이라는 사람의 미이라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분묘에서는 그 사람의 아내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만든 짚신 모양의 미투리와 애절한 사연이 담긴 편지가 아주 보존이 잘 된 상태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미투리는 병든 남편이 어서 일어나 그 신발을 신고 쾌차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 아내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신처럼 만든 것을 말합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 아내가 죽은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발견된 편지를 보면 그 아내의 사랑이 정말 애틋합니다.

 

“원이 아버지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 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당신 나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 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나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 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 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 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병술(1586년)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아내 올림.“

 

어떠세요? 남편을 향한 아내의 사랑이 정말 애틋하지요? 우리가 지난주에도 살펴보았지만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 성도들에게 포도나무의 열매로서의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 성도는 모두 이러한 종류의 사랑을 열매로 요구받고 있는 것일까요? 세계 삼대 악처 중의 하나인 몰리라는 여자와 평생을 함께 살아야 했던 요한 웨슬레가 자기 아내가 죽은 뒤에 이런 종류의 편지를 썼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잖아요? 그렇다면 반드시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었어야 하는 것이고 이응택의 아내가 자기 남편의 시신의 손에 쥐어준 그런 애절한 편지 정도가 아닌 눈물의 사부곡을 불렀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요한 웨슬레의 아내는 죽는 날까지 그 모난 성격을 고치지 못했고 시시 때때로 남편의 머리카락을 뿌리가 뽑힐 정도로 한 주먹씩 뽑으며 남편을 모욕하고 괴롭혔던 사람입니다. 아일랜드 북쪽 어떤 마을에 이르렀을 때 감리교 순회 전도자들이 모두 보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녀는 남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남편을 질질 끌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게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라고 하니 그 후로 자기 아내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든 결혼 생활을 했을지는 불 보듯 뻔합니다. 어느 날 순회 전도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웨슬레는 아내의 주검을 보게 됩니다. 그 때 웨슬레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지요? ‘당신이 평생 내 가슴에 꽂은 비수를 하나하나 세어본다면 아마도 내 남은 인생을 모두 거기에 써야 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소. 많은 이들이 아내조차 변화시키지 못한 못난이라 손가락질을 해 대기도 했지만 만일 당신이 변하여 순종하는 아내가 되었더라면 아마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 즉시 사라졌을 것이오. 당신은 나의 거룩과 겸손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었소.’ 어째 좀 잔인하다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이건 연민이지요? 웨슬레의 아내는 죽는 날까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냥 평생을 웨슬레를 괴롭히는 역할만 하다가 어느 날 그 소임을 다하고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 때 웨슬레의 반응은 담담했습니다. 자기 아내는 자신을 훈련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훈련 교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자 그냥 그 하나님의 처사에 순종한 것 뿐 입니다. 이곳에 계신 여자분들, 남편에게 그런 대우 받고 싶으세요? 그건 사랑이 아닌 것 같지 않으세요?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웨슬레처럼 그러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의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응택의 아내처럼 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이 맺으시겠다고 하신 열매니까.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적 공감에 의해 만들어진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첫사랑이라는 것을 다 해 보셨지요? 그 때는 정말 가슴에 불이 붙어 활활 타는 것 같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게 담담하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그런 감정적인 격동이나 동정, 혹은 연민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성도의 삶에 열매로 맺으시는 사랑이라는 열매는 자기를 완전히 비워낸 자들에게서 나오는 항복과 겸손과 겸양에서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바로 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의 주권에 완전히 항복하여 그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이고 사람이라면 당연히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쓰이다가 가는 사람과 나라는 사람이 뭐 그리 대단한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나라는 이를 찾아와 구원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선택에서 제외된 다른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송구스러운 마음과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그 아내를 대했던 것입니다. 개괄하여 말하여 바로 그러한 자세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를 가리켜 사랑이라 합니다. 오늘은 그 사랑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다시 포도나무의 열매에서 출발하여 사랑까지 끌고 가서 사랑과 미움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내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주까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는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착한 삶이 아닌 것이라고 했지요? 아울러 열매의 본질로 거론이 된 사랑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종류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 열심이나 종교화된 삶도 열매의 본질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7장으로 가서 확인해 보지요.

 

(마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 보시면 예수님을 주라 부르며,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이 나오지요? 쉬운 말로 엄청난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매몰차게 내어 쫓으십니다. 심지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까지 말씀을 하십니다. 성도에게는 그러한 종교적 열심이나 종교화된 삶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2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천국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아래 구절을 보시면 왜 그들이 그러한 열심에도 불구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취급이 되었는지가 나옵니다.

 

(마 7:24-27)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잘 보시면 지금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행위에 국한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참 열매는 주님의 말을 들었느냐 아니냐에서 결판이 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행한 것과 ‘내 말을 듣지 않고’ 행한 것, 즉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는 마음에서 행한 일과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행한 일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둘 다 집은 지었습니다. 열심 있는 행동이 둘 다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그 집을 지었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나온 행위와 자신의 열심을 근거로 내어 놓은 행위와는 천지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 속에서 맺혀야 하는 열매는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 속에서 맺으시고자 하는 열매는 자기 부인이라는 기독교의 핵심가치에서 격발된 순종의 열매입니다.

 

(고후 10:5-6)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보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역사와 우주를 경륜하고 계신 유일한 이유는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며, 훗날 하나님께 복종치 않은 것들을 벌하시기 위해 지금도 이 역사와 우주를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다른 것 할 것이 없습니다. 착한 일, 선한 일, 종교적인 일에 힘쓰기 전에 우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 그 분의 사랑과 은혜의 크기를 알며, 우리의 보잘것없음을 깨달아 하나님의 말을 듣는 자로, 그 분에게 완전히 항복하고 복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렘 11:4) "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 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자격 조건을 명확히 밝히시지요? 뭡니까? ‘착하게 살아라? 제사 열심히 드려라? 좋은 일 많이 해라?’ 아닙니다. ‘내 말을 들어라’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이 하시는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라는 것입니다.

 

(마 17:5)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을 인간들에게 내어주시면서 그들에게 주시는 당부의 요점이 뭡니까? ‘너희는 내 아들의 말을 들으라’입니다. ‘내 아들한테 좀 잘 해 주어라’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자기 부인과 순종만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당신의 명령을 어기는 자가 없도록 철저하게 당신의 나라를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 성도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자신의 소원을 곧추세워 하나님을 이겨 먹으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의 환도 뼈를 언제든지 내리칠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얍복강 가에서의 야곱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아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하나님마저도 이겨 먹으려고 하는 그러한 불순종의 모습을 하나님은 가차 없이 부수어 버리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복을 받은 야곱의 모습이,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평생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는 자로 이 세상에서 드러났다는 것을 꼭 기억 하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옛 사람의 잔재와 우리 안에 오염으로 남아있는 불순종의 죄 성과 이기심을 난타 당하며 조금씩 자신을 허물어 가는 과정에 서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믿으면 자신이 원하는 자아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까? 누가 예수를 믿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 꼭대기에 올라앉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까?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성도가 예수를 믿으면 끝없이 자신의 본연의 자리인 티끌의 자리로 추락을 하게 되어 있지 절대 육욕과 정욕과 탐심의 고지에 올라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확인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로 이미 결정이 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친구인 예수를 닮아 가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친구는 닮음과 동질을 전제하는 관계니까요. 우리의 친구 예수가 어떻게 사셨지요?

 

(요 8:29)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습니다. 자기의 기쁨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다 보니 그것이 바로 자신의 기쁨임이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죽음 앞에서도 ‘내 안에 기쁨이 있으니 이 기쁨을 너희에게 주고 싶다’라고 말씀을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기의 뜻과 자기의 소원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뜻이 그 분의 삶의 목적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바뀌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 6:38-39)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 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 즉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셔서 예수님께 주신 당신의 백성들을 모두 살려서 건져 올리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건 십자가라는 독배를 마시는 것이었고, 음부의 고통을 몸소 겪어야 하는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친구의 삶을 닮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빌 2:5-9)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 대목을 잘 보시면 7절에 있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것은 능동태로 되어 있고 8절에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씀은 수동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문제에 있어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는 능동적 순종이 앞서 있고, 그 능동적 순종에 하나님의 뜻이 덮여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동의 내용이 참으로 기가 막힌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자신이 창조한 이 땅으로 내려와 피조물들에게 온갖 수난을 다 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워진 예수라는 존재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행해내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일단 자신의 뜻을 비우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상태가 되어 그 빈 자아에 하나님 아버지가 무엇을 담아도 순종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뜻이 최고의 선으로 결론이 났지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를 비워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빈 그릇에 어떤 뜻을 담으시던지 간에 오롯이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 때 완전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과 목적이 다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한 분만이 완전하시며, 하나님 한 분만이 최고의 행복과 선에 이르는 방법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뜻은 자꾸 버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나 우리 교회 성도들의 삶 속에서 자주 우리들의 뜻을 꺾으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능력이 없고, 믿음이 없고, 열심이 부족해서 그런 일을 겪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압도하여 당신의 계획 속에서 여러분을 만들어 가시고 계신다는 훌륭한 증거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일에 매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하나님께서 맺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길에 가난이나 질병이나 사고나 이별 등이 우리에게 도구와 방법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고집스럽게 자기만을 사랑하던 자아를 해체시키게 되는 것이고, 자신의 소원과 뜻을 밀어내고 하나님의 소원과 뜻을 조금씩 자아 안에 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힘입니다. 그게 성도의 잘됨이며, 그것이 성도의 강함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힘이 되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 했지요? 하나님은 ‘하나님, 저를 좀 강한 자, 센 자로 만들어 주세요.’라는 요구에 ‘아니, 난 너를 강한 자로 만들어 주지 않을 거야, 내가 너의 강함이 될 거야’라고 대답을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것을 온전히 자신의 기쁨으로 삼아 사셨지요? 그 기쁨이 예수님에게 힘이 되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이루는 것만이 자신의 기쁨이며, 그게 바로 자신의 힘이며, 그게 바로 자신의 행복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명확히 아셨습니다.

 

(요 4:30-34)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 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 이니라"

 

예수님의 양식이 뭡니까? 당신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었습니다. 양식이라는 것은 힘의 원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양식과 음식은 다릅니다. 음식은 생명과 힘의 원천으로서의 개념보다는 기호와 관계있는 단어입니다. 음식이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기호에 더 관계되는 단어임과는 달리 양식은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식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고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과 힘의 원천을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도 우리의 잘됨이나 우리의 부유함이나 우리가 가진 명예 등으로 우리를 자랑하는 것을 힘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이 처하게 하신 상황과 환경과 정황 속에서 그 분을 여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의존하는 자로 서는 것을 우리의 힘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상황 속에서도 저렇게 담대할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사람을 용서할까? 어떻게 저 사람은 저런 일을 겪고도 자기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가?’하는 놀람의 탄성을 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며 그게 바로 진정한 성도의 힘이며 강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그렇게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내시기 위해 우리에게 작은 고난들을 반복하여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극복이 되면 좀 더 큰 것으로, 그 다음에는 조금 더 큰 것으로 훈련을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목숨까지도 하나님 앞에 기꺼이 던질 수 있는 절대 의존적 존재로 완성이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 17:18)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조금 전에 주님은 당신을 보내신 자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이 하라고 주신 일을 성취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고 사셨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똑같이 그 분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의 일을 성취하는 것이지요? 그게 우리의 힘이며 우리의 자랑이며 우리의 기쁨과 행복의 근거여야 합니다. 그게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의 뜻과 소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그 분의 일을 성취해 내는 것,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서 그 분의 말을 온전히 지켜내는 것, 선악과 먹지 말라고 하면 안 먹는 것, 그것이 바로 열매인 것이며 그러한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삶이 영생의 상태인 것입니다.

 

(요 6:33)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 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세상의 양식을 찾으러 온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먹으라고 하시지요? 그렇게 하늘의 떡으로, 하늘의 양식으로 이 땅에 오신 당신을 먹으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생명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곧 영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양식이라는 것은 무었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그 분의 일을 성취하는 것이라 했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말은 곧 예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동일한 말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생명이라고 말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워내고 자신을 부인해 내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리로 열심히 끌고 가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증거를 대 드리지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명이 지향하고 수렴되는 곳이 어디입니까? 사랑이지요? 오늘 본문 12절과 17절을 보세요.

 

(요 15:12,17)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 이니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 이로라"

 

잘 보세요. 포도나무의 열매는 주님 안에 거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이어지지요? 계명을 지키는 것이 결국 무엇으로 수렴이 됩니까? 사랑으로 수렴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타락을 하여 이제는 자기만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버린 죄인들이 원래의 창조의 목적 아래로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자기 자신만이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순종이며, 그게 자기 부인이며, 그게 계명지킴이며, 그것이 예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롬 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것이 율법의 정체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그런데 이게 잘되나요? 잘 안 되지요? 애써서 사랑을 해 보려고 해도 어느 순간 무너지고 말지요? 그래서 율법의 완성이 사랑인 것입니다. 율법이 정죄의 잣대나 심판의 도구로 쓰였다면 우리는 모두 큰 일 날 뻔 한 사람들입니다. 다행히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제대로 지켜내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뻔뻔스럽게 계명을 지킨 자가 된 것입니다.

 

(고전 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보세요. 이렇게 오래 참고, 믿어주며, 바라고, 견디는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의 이 부족함을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즉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임과 동시에 그 성취의 방법 또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아는 자들만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로 성숙이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에게만 요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자들에게만 적용이 되는 아주 신성하고 구별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요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여기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라는 어절에서 ‘너희’가 제한하는 무리가 어떤 무리일까요? 너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간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굳이 가룟 유다가 나가는 것을 기다리셨다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가자마자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가룟 유다는 그 ‘사랑하라’는 명령에서 제외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먼저 ‘소속’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 할 수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이 우리 성도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주님에게 넘겨진 자들이며, 그로 인해 믿음을 통하여 주님을 알게 된 자들이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은 자주 실수하고 자주 넘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명을 지키는 자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이 비록 지금은 옛 사람의 방해로 너무나 자주 넘어지고 쓰러지기는 하지만 순종이라는 고지를 향하여 열심히, 넘어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그 모습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살게 결정된 자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명을 지킨 자라 불리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불리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선언적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불쌍한 이를 감싸주며, 매력 있는 이에게 호감을 던지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그 분의 은혜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깨달은 자들이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랑과 은혜와 완성된 언약의 결론 안에서 그 복음의 내용을 몸으로 체감하고 체득하며 경험하는 그 모든 삶 자체를 사랑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아내의 불편함을 나 몰라라 하고 자신의 요구만을 주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괴로워하면서 ‘난 왜 여전히 이 모양일까? 왜 나는 예수를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여전히 나만을 사랑하는 것이지? 정말 괴롭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될 뻔했는가?’하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셨을 때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부인에서 격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행위를 했는가 안 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자기가 부인 되었는가, 얼마만큼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게 되었는가가 사랑 있음의 가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부인 속에서 한 발 더,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성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때로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고, 다투고, 미워하는 가운데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미움 속에서도, 다툼 속에서도 사랑한 자라고 칭함을 받는 그 은혜의 역설을 여러분은 바로 이해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이 세상에서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작품은 이미 영적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는 그 순간 그는 이미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어떻게 사랑한 자가 되었는지를 그가 깨닫게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실패와 절망의 경험이 소용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아마 요한 웨슬레도 아내에게 머리채를 잡힐 때마다 그녀를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많이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 속에서 은혜의 복음이 그에게 덮쳐 왔을 때 그는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보았을 것이고 그 때 그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죄인 중의 괴수’라는 자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상태에서 자신의 아내를 겸손하게 인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이응택의 아내처럼 구구절절한 사랑의 편지를 쓰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아내보다 자신을 더 낮은 곳에 내려놓고 자신은 그렇게 당해도 마땅한 십자가에 달려 죽을 죄인임을 고백하는 그 삶이 바로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티끌 됨을 폭로 당하는 가운데 우리가 사랑한 자가 되었다는 그 복음의 현실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릎 꿇음이 반복이 되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나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참 가치임을 알게 되는 것이고 그 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진짜 행복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시편 기자가 입만 열면 노래하는 ‘여호와의 율법이 어찌 그리 즐거운지요’라는 고백의 진의인 것입니다.

 

(엡 1:15-16)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잘 보세요. 사도 바울이 지금 에베소 교회를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그들이 이미 주 예수 안에 있고 그들 안에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그들이 서로 서로 열심히 사랑하고 있었다는 그 상태를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교회의 정체성을 들어 에베소 교회를 호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주 예수 안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고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있는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에베소 교회다’하고 그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건 교회의 존재론적 본질이니까요.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똑같은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어떻게 권면을 하는지 보세요.

 

(엡 3:17-19)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장에서는 에베소 교회가 이미 믿음과 사랑을 발휘하고 있는 자요, 예수 안에 있는 자로 소개가 되고 있는데 3장에서는 여전히 진행형이지요?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기를 기도한다고도 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도 합니다. 전형적인 이미와 아직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포도나무가 맺어야 할 열매인 사랑은 예수의 사랑을 받아, 예수의 사랑을 알게 된 자들이 예수 앞에서 전혀 면목 없는 자신들의 실체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사랑을 소속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 나라 백성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아니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하고 추악하며 무력한 자임을 알고 낮아지고 낮아질 때 그 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진짜 존경과 배려와 이해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소속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다른 소속에 있는 이들은 절대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와 정 반대로 미움을 내어 놓습니다. 본문 18절 이하로 가보지요.

 

(요 15:18-19)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은 세상끼리 사랑합니다. 세상은 절대 하나님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백성들은 자기들을 미워하는 세상 원수들을 사랑해야 한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했다면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런 세상으로 남겨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이 세상 그 누구 앞에서도 자신의 잘남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세상과 소속이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기 때문이고 예수의 소유인 우리도 함께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세상에게 멸시를 당하고 미움을 당하며 억지스러운 일로 모욕을 당할 때 여러분은 오히려 기뻐하셔야 합니다. ‘내가 진짜 하나님 나라 소속이 맞구나’하고 박수를 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소속이 다른 우리가 세상과 너무 잘 어울려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함께 추구하며, 그들의 욕심과 그들의 탐욕과 그들의 야망을 한 모습으로 흉내 내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게 어떻게 가당하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원리는 달라야 합니다.

 

(요일 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 하느니라"

 

이렇게 우리는 소속이 다른, 하나님 나라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힘의 원리가 추구하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 세상 것들을 너무나 근사하게 포장을 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포기가 안 됩니다. 이 세상의 힘들이 하나님보다 더 매력 있어 보이고 하나님보다 더 힘이 세어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셔서 그러한 세상의 힘들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이고 심지어 그러한 세상의 힘들을 빼앗아 버리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소속의 문제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에서 격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을 한 문장으로 정의 하라고 하면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이다’라고 정의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사랑을 영화나 TV에서 본 그런 저급한 삼류 멜로드라마 식으로 폄훼하시면 안 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열심에서 비롯된 우리의 항복과 순종과 자기 부인에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동정도 아니고, 억지도 아닙니다.

 

원래 피조물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살아져야 하는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나’가 아닌 하나님과 타자를 중심으로 한 그 세상, 거기가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모두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류의 가짜 사랑처럼, 나의 감정의 만족이나 충족이 전제되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이 정의 하는 사랑은 자기만족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조차도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내 사랑을 받은 자식이 나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이렇게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며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다’라는 자족, ‘내 사랑을 받은 상대방이 얼마나 행복해 할까? 그리고 얼마나 나에게 고마워할까?’라는 희열 이 모든 것들이 언뜻 보기에는 아주 지고지순한 사랑 같지요? 그러나 그 중심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나’ 중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구제나 선행을 하나도 인정해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외려 그들의 선행 앞에서 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욕을 하셨지요? 이렇게 성도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자기가 부인된 상태에서 격발되는 겸손하고 면목 없는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열매를 맺고 계신 것입니다. 어떠세요? 사랑하지 못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괴로우시지요? 여러분은 지금 사랑하고 계신 것이 맞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발각되어질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으시지요? 이러고도 내가 예수 믿는 자가 맞는가 하고 자괴감에 치를 떠시지요? 여러분은 지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우리의 친구이신 예수에 의해 오늘로 주렁주렁 열매로 맺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십시오. 그러므로 기뻐하세요. 그 감사와 기쁨이 여러분을 바꿔 내는 힘인 것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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